69화 여왕개미의 방
이소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일대일 대결에서 최초로 승리한 희열이 온몸에 뜨겁게 열기로 남아 있었다.
“와, 내가 이기기도 하네.”
상대인 살인마 잭은 강적이었고 심지어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
“역시 방어 갑주가 좋구나.”
초레어 장비답게 성능이 탁월했다.
물리 대미지 면역이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훌륭했다.
“좋았어. 나는 이 길로 가자.”
지략은 유진하.
힘은 에어리스.
장비는 이소민.
이렇게 셋이서 팀을 이루면 완벽한 조합이 될 것 같았다.
“그럼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나.”
바닥에 쓰러진 살인마는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녀석을 나무 기둥에 곧바로 꽁꽁 묶어놓고 가지고 있던 장비를 전부 챙겼다.
쾌속의 사바톤 부츠와 검을 전부 차지했다.
“오, 쓸 만한데.”
부츠를 신으니 사용자의 발 사이즈에 자동으로 맞춰졌다.
확실히 초레어 물품은 남달랐다.
13번 베는 검도 들어봤는데 무겁지 않은 무게감이 있어서 적당했다.
방어구는 물리 면역.
진검은 13번 베기.
부츠는 쾌속.
훌륭한 장비들을 챙기고 있었다.
“이제는 뭘 할까?”
짧은 고민이 지나가자 곧바로 머릿속에서 하나의 결론을 떠올랐다.
알카트로스 소탕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장비빨의 힘으로 가는 거야.”
첫 승리의 의기양양한 기분을 이어가서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이제는 한 명의 당당한 원정대의 멤버가 되고 싶었다.
“해보자. 나도 할 수 있어.”
두 팔을 높이 들어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소민이 선 그곳으로 왠지 파도가 몰아치는 듯했다.
마치 얼굴에 시원한 물방울이 닿듯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 * *
개미굴에서 벌어지는 알카트로스 소탕전은 중반을 넘어 어느덧 후반으로 향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순조롭게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진하, 계속 내려가면 되는 거죠?”
동굴은 어두웠고 끝없이 길었다.
개미굴 본거지는 복잡한 미로처럼 설계되었으나 실제로는 어디를 가든 결국 하나의 방으로 연결된다.
“잘 가고 있어. 어차피 마지막 방에 가야 하거든.”
횃불을 손에 든 유진하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봤다.
동굴에는 박쥐도 있어서 푸드득 날아다녔다.
“와앗!”
박쥐 떼가 달려들자 에어리스는 깜짝 놀라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유진하는 횃불을 휘휘 흔들어서 박쥐들을 몰아냈다.
“에어리스, 괜찮아?”
“네, 네.”
혼비백산했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한 에어리스는 고개를 들어 눈만 빼꼼히 들었다.
“휴우, 너무 놀랐어요.”
박쥐가 사라진 사실을 확인한 에어리스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옷차림과 흩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그동안 유진하는 계속 횃불을 흔들어서 박쥐를 완전히 몰아냈다.
“괜찮아. 다 지나갔어.”
박쥐를 쫓아낸 유진하가 다가와 에어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줬다.
“이제 거의 다 왔거든.”
기나긴 동굴의 통로도 어느새 끝이 보였다.
알카트로스 소탕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유진하가 생각하던 계획대로 진행됐으나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조커를 놓쳤어.”
첫 번째 경계 대상은 조커였다.
정부 요원과 알카트로스 양측을 오가며 이중간첩을 했던 자였다.
“나는 녀석이 혼자서 움직일 줄 알았거든. 설마 동료가 있을 줄은 몰랐어.”
조커는 단독범이 아니었다.
이중간첩 같은 일을 맡으면 대부분 비밀스럽게 행동하느라 혼자서 움직이곤 한다.
녀석은 달랐다.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대담해. 단독으로 다녔으면 이번에 반드시 잡혔을 텐데…….”
알카트로스 내에서 하트와 동료 사이였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조커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녀석은 어떻게 나올까?”
조커는 작전의 향방을 바꿀 중대한 변수였다.
시간을 재촉해서 마지막 방에 가는 쪽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진하,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어느덧 기나긴 개미굴의 끝에 당도하자 거대한 철문 하나가 버티는 곳에 도착했다.
“아마 계획대로 됐으면 남은 알카트로스 멤버들은 많이 줄었을 거야.”
요원들과 이소민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어 알카트로스 멤버들을 잡아냈다.
이제 남은 적은 단 다섯 명이었다.
리더 에이스, 스페이드, 조커, 하트, 퀸이었다.
“여기가 개미굴의 마지막 방이야.”
최종방.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다.
개미굴에서 여왕개미의 방을 의미했다.
“…갈까요?”
에어리스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거대한 철문을 앞에 두고 유진하 역시 긴장한 낯빛으로 응시했다.
“…응.”
마지막 리더 에이스를 향한 발걸음이 이제 시작되었다.
“하압!”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어서 단숨에 철문을 향해 내리쳤다.
강력한 일격으로 문을 두 동강으로 베어버렸다.
쿠구궁.
철문이 쓰러지면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열린 최후의 관문 안에는 기묘한 장식이 설치된 방이 있었다.
“여긴?”
개미굴의 최종방은 분위기부터 미묘했다.
푸른 조명이 사방을 비추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낡고 지저분한 가구가 곳곳에 있었다.
자욱한 분위기의 안개까지 있었다.
“누가 있어.”
안개 속에 미묘한 그림자가 있었다.
유진하는 금세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알카트로스의 퀸?!”
리더 에이스가 아니었다.
이곳에는 퀸이 마치 여왕개미처럼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다.
커다란 소파에 옆으로 누워 담뱃대를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뇌쇄적인 자세로 다리를 꼬아 유혹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매력적이기보다는 퇴폐적이었다.
“부르지 않은 손님이 왔네?”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뿜어낸 퀸은 한껏 여유를 부리듯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유진하, 에어리스. 두 사람만 온 거야?”
“당신만 여기 있는 건가요?”
유진하의 예상과는 달랐다.
마지막 방에 리더 에이스가 있으리라 계산했는데, 실제로는 퀸 혼자 있었다.
“리더를 찾는 거라면 어려워. 여기 없거든.”
에어리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와 닮은 사람은요?”
알카트로스에게 잡혀간 쌍둥이 그녀의 행방도 중요했다.
마지막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달랐다.
“흐음, 둘 다 알고 싶은 게 하나씩 있는 모양인데 다 알려줄 수 없는 질문이라서 말이야.”
퀸은 미묘한 웃음을 짓더니 살포시 상체를 일으켰다.
담뱃대를 들어 슬쩍 앞을 가리키더니 이윽고 하나의 행동을 시작했다.
“이 방에서 너희들이 오기를 기다렸어. 개미굴의 여왕개미는 연기로 가득한 방이 어울리거든.”
퀸은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기는 그녀의 주특기였고 담뱃대에서 뿜어내어 여러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환각. 마비. 기절. 어떤 효과를 원해?”
퀸은 마치 자신만의 공간에 있다는 듯이 편하게 행동했다.
연기가 닿은 범위에 ‘지배력’을 가지게 된다.
그녀는 이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불가능이란 없었다.
“너희들에게 주는 선물이야. 안개 속에서 환각을 마음껏 즐겨.”
가장 원하는 꿈.
원하지 않는 미래.
퀸은 기분이 내키는 대로 환각을 주었다.
“아!”
아무리 강한 사람도 환영에 빠지면 벗어날 수 없다.
꿈을 꾸는 생명체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함정에 걸릴 수 있었다.
꿈과 현실을 혼동시켜서 서서히 정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거였다.
“지금 무엇이 보여?”
퀸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마치 마녀의 웃음소리를 듣는 듯했다.
“아아!”
에어리스는 귓가에 울리는 커다란 웃음소리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터질 듯한 고성을 들으며 너무나 괴로워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왜 그래?”
퀸의 다음 먹이는 유진하였다.
뛰어난 지략가 같은 사람은 항상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타입은 더 쉬웠다.
‘빈틈 하나만 찾으면 완전성이 무너지고 정신을 포기하지.’
작은 구멍 하나에 댐이 무너지는 효과와 같았다.
아주 작은 빈틈 하나로 완전히 무너뜨리면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퀸은 작은 기대감이 들었다.
“유진하, 너에게도 환각을 줄게. 특별히 네가 가장 원하는 내용으로 해줄게.”
유진하의 눈앞에 갑자기 환한 빛이 퍼졌다.
환상 속에서 광경이 펼쳐졌는데 그곳에는 형이 보였다.
“형?!”
처음으로 공략전에 들어가던 날이었다.
형의 희생으로 혼자서 살아오던 날이기도 했다.
그날의 아침.
형과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처음이지?”
건너편에 보이는 형은 한결 여유로웠다.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평소 모습이었다.
“아침 안 먹으면 저녁도 없다?”
형은 아침밥을 뺏어버리겠다는 듯이 밥그릇을 슬쩍 들었다.
“아아, 먹을 거라고.”
침착하면서 멋진 형이지만 장난도 잘 치곤 했다.
동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고 전장에서 가장 앞장서는 스타일이었다.
유진하가 가장 닮고 싶은 리더 모델이 형이었다.
‘완전체 같아.’
항상 느꼈던 마음이었다.
그런 형을 두고 나온 미안함이 가슴에 가시처럼 남았다.
“오늘은 안 갔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팀은 전멸하고 유진하만 겨우 살아서 돌아온다.
형은 물론 믿어주지 않겠지만.
“첫 참가라 겁먹었냐?”
크게 웃던 형은 유진하의 머리를 살포시 어루만져줬다.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형의 호언장담은 유진하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주었다.
그 약속은 지켜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형의 희생을 알고 있기에 눈가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야, 왜 우냐?”
어리둥절해진 형이 살짝 당황해서 유진하를 쳐다봤다.
“괜찮아, 형. 그냥 먼지가 눈에 들어간 거야.”
유진하는 팔꿈치로 눈가를 닦았다.
다시는 오지 않았던 형과의 재회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간절한 바람이었다.
“잘 쉬고 있어.”
퀸은 담배를 한 모금 내뱉으면서 환각에 빠진 두 사람을 바라봤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절망과 환희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환각은 꿈과 현실을 뒤섞어 버린다.
연기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마음을 놓으면 아주 쉽거든.”
두 사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부터 마음껏 가지고 놀려는 찰나였다.
낯선 감촉이 뒤에서 느껴졌다.
“잘 보고 있었어요?”
남자의 목소리였다.
유진하가 어느새 퀸의 뒤편에 또렷한 형태로 있었다.
“어?”
유진하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저기 환각 속에 허우적거리는 유진하가 있는데 뒤에서 어떻게 나타나겠는가.
“설마…….”
퀸은 혹시나 해서 다시 바라봤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짜악!
별안간 퀸은 얼굴에 큰 충격을 느꼈다.
“뭐지?”
뺨이 얼떨떨했다.
누군가 손으로 때린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아직도 못 빠져나온 건가요?”
또다시 유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기에 흐느적거렸던 퀸의 눈빛이 이번에는 선명해졌다.
“너희는?”
눈앞에는 유진하와 에어리스가 있었다.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까지 환상 속에 고통받던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네.”
유진하가 피식거리면서 웃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작전이었다.
모든 계략은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됐다.
“아까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봤어요. 철문 틈새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거든요.”
“미리 알았다고?”
“그래요. 퀸이 안개를 깔아놨다는 정도는 단번에 눈치챘죠.”
유진하의 관찰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최종방에 깔린 연기를 알아차리자마자 역습을 준비했다.
“퀸, 당신의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는 다른 물질을 차단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연기의 범위 내에 다른 건 절대 못 들어오죠. 그럼 이건 어떨까요?”
유진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같은 연기는 다른 물질이 아니지 않을까요?”
“아차!”
퀸은 비로소 깨달았다.
유진하는 퀸의 허를 완전히 찔러버렸다.
“저번에 우리 집을 습격했을 적에 당신의 안개를 보았어요. 그걸 보고 우리도 대응책을 마련했죠.”
유진하의 손에 병이 있었다.
“연기로 된 환각제를 따로 준비했습니다.”
유진하는 정부 요원에게서 하나의 병을 받았다.
환각제 연기였는데 퀸을 제압하기 위한 비장의 물건이었다.
안개는 안개로 제압한다.
방심한 퀸은 사방에 자신이 깔아놓은 안개 때문에 정작 유진하가 풀어놓은 안개를 놓쳤다.
안개 속에 안개가 몰래 스며든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방심은 패배로 이어지죠. 지금까지 당신이 봤던 모든 광경은 환각이었어요.”
철문을 가르며 들어오던 에어리스.
유진하와 같이 환각 안개에 휩싸여 괴로워하던 모습.
처음부터 퀸이 환각에 빠져 본 장면이었다.
“아차!”
퀸은 이미 손목이 묶인 터였다.
담뱃대 역시 유진하에게 빼앗겼다.
완패였다.
“이제 알겠죠?”
꽁꽁 밧줄에 묶인 퀸은 여전히 비몽사몽 환각 속에 빠진 표정을 지으며 해롱거렸다.
유진하는 정신을 차리라고 몇 차례 더 퀸의 뺨을 쳐주고는 냉정하게 쳐다봤다.
“이제 알카트로스의 본거지. 개미굴은 전부 장악했어요.”
담뱃대를 치우자 개미굴의 마지막 방은 연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쓰고 있던 방독면도 벗어버렸다.
온전히 드러난 이 방은 동굴의 무덤처럼 황폐할 따름이었다.
화려했던 환상이 사라지자 빈껍데기로 남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결판을 지을 순간이었다.
“알카트로스의 리더는 어디에 있나요? 에어리스와 쌍둥이처럼 닮은 그녀는 어디에 있죠?”
유진하의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
“이제 말해주세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