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반격 태세
“여긴 어디일까요?”
순간 이동으로 도착하자마자 에어리스는 주변을 돌아봤다.
푸른 바다만 보였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아른거리더니 지평선 너머까지 고요함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바다와 차가운 침묵.
세 사람은 잠시 세상과 단절된 곳에 도착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진짜 여기 어디냐.”
이소민은 아리송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특별한 수가 아니라 대책이 없어서였다.
“섬인가? 무인도 같네?”
순간 이동 카드는 랜덤으로 도착한다.
장소를 지정할 수 있는 순간 이동 카드는 초레어 등급이라 매우 귀중한 물품이었다.
“괜찮아요. 우리도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면 요원들도 못 찾아낼 테니까요.”
유진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재정비할 시간이 생긴 거였고, 반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해결하죠.”
미흡한 부분부터 확인했다.
“일단 카드가 부족하네요.”
유진하는 100장의 카드를 E의 사기적인 회피력에 의해 전부 소모했다.
빈손이었다.
“어떻게든 카드도 구해야겠어요.”
이소민은 빙룡의 가방과 여러 장비, 소수의 카드를 가졌다.
에어리스는 대검과 속성 부여 건틀릿, 충전식 목걸이까지 무사했다.
카드만 보충하면 괜찮았다.
“장비는 대부분 무사하니까 다시 잘해 보자.”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이소민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으쌰으쌰 기운을 불어넣었다.
쏴아아.
파도가 일렁이는 소리가 다가왔다.
아까의 격전은 잠시 잊을 수 있도록 편안한 마음을 안겨 주었다.
“이왕 온 김에 바다에 발이라도 담가 볼까나.”
이소민은 기운을 활활 태우면서 긍정의 힘을 발휘했다.
일부러 에어리스와 유진하의 손을 끌어서 바다로 데려갔다.
“아, 잠깐만요.”
에어리스는 엉겁결에 바닷가로 갔다가 마침 파도가 크게 일렁이는 바람에 상체까지 살짝 옷이 젖어 버렸다.
“아앗.”
에어리스는 물보라 속에서 잠시나마 생각했다.
자신을 닮은 사람.
쌍둥이 같은 여자.
‘나는… 당신이에요.’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긴 여운처럼 남은 그 말이 생생하게 귓가를 울렸다.
알 수 없는 의미였다.
‘나에게 무슨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열어 준 차원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지 못한 그곳.
어떤 장소인지 궁금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고민되는 일은 많았으나 지금은 현실이 중요했다.
파도에서 흩어지는 물보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물방울 하나하나 속에서 시원함이 느껴졌고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는 따스함을 받았다.
유진하, 이소민이 함께 있었다.
‘믿어 주는 동료가 있으니까.’
두 사람이 있으면 든든했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파도가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진하, 잠깐 쉬었다 가요.”
옷이 젖은 에어리스가 휴식을 권유했다.
이소민도 옆에서 거들었다.
“생각만 많이 해도 답이 없어. 잠깐이라도 쉬면서 체력이랑 정신력을 회복하는 편이 좋다고.”
세 사람의 발걸음은 한동안 파도의 곁을 서성거렸다.
“괜찮아요. 이제 거의 다 생각했으니까요.”
유진하는 답을 찾아갔다.
푸른 바다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고대 시대부터 사람들은 바다에 도전했고 지평선 너머를 미지의 세계로 여겼다.
모험이 가득한 항해는 극한의 도전이었다.
“바다 너머라…….”
바다는 지혜의 보고이고 파도는 파수꾼이었다.
고대에는 바다 너머에 기회가 있었다면, 지금은 차원문 너머에 기회가 있다.
신대륙 발견과 비슷하지 않을까.
“모험을 위한 도전.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동경의 시대.”
위대한 도전의 시대와도 같았다.
높은 파도의 너울은 장애물과 같았다.
도전을 막는 장벽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꿈을 앗아갔다.
바다에 대한 존경과 경외, 두려움은 항상 있었다.
“세상은 많은 것이 변했고 앞으로 더 크게 바뀔 거야.”
유진하도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고민 끝에 정부 요원과 맞설 결심을 굳혔다.
“해 보겠어.”
에어리스와 쌍둥이처럼 닮은 그녀.
요원 M과 J까지 모두 구해 내기로 마음먹었다.
감정이 서서히 끓어올랐다.
“다 좋은데 말이야. 배는 안 고프냐?”
이소민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무인도에서 당장 뭔가를 구해야 했다.
“순간 이동 카드는 한 장뿐이라서 재사용하려면 기다려야 해요.”
6시간이 더 필요했다.
물론 작전 계획도 더 구상해야 했다.
“며칠만 있다가 가요. 작전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래? 그러지 뭐.”
이소민이 반문하자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 요원들은 우리를 찾고 있을 거예요. 준비는 철저해야 해요.”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유진하가 작전을 만들 때까지 잠시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식량이랑 물이 없는데 여기서 어떻게 있지?”
이소민은 무인도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물과 음식은 필수였다.
“식량이 필요하면 제가 물고기를 잡을게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가져왔다.
저렇게 큰 검으로 베어 버릴 모양이었다.
“그 큰 검으로 베었다가는 물고기가 남아나려나?”
유진하는 미심쩍었는데 에어리스는 의외로 자신만만했다.
“괜찮아요. 반드시 구해 볼게요.”
의기양양한 에어리스가 대검을 들고 바다 쪽으로 갔다.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다가 물고기가 모인 포인트를 발견했다.
“한 번에 잡을 수 있어요.”
물고기가 모인 지점이 보이자 그곳에 냅다 일격을 내리쳤다.
콰앙!
호쾌한 한 방이 떨어지자 물벼락이 위로 높이 치솟았다.
잔잔한 바다에서 유영하던 물고기는 별안간 하늘로 치솟았다가 해안가로 후두둑 떨어졌다.
“싱싱한 물고기로 잡았어요.”
굳이 낚시로 힘쓰지 않아도 에어리스는 완력이 있었다.
식량으로 충분한 물고기가 바닥에 널렸다.
“와, 대박. 이건 낚시도 아니고 그냥 퍼내기네.”
이소민은 바닥에 떨어진 물고기를 냉큼 주워 담았다.
한 끼에 먹기에 너무 많아서, 남은 물고기는 도로 바다에 넣어 주었다.
“역시 힘이 좋아서 나쁠 건 없구나.”
유진하는 방금 본 광경에 놀라 황당했으나 물고기를 충분히 확보해서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나뭇가지 모아 오자.”
셋이서 바닥에 떨어진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았다.
이소민은 다행히 화염 카드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모닥불을 쉽게 만들었다.
“맛있겠다.”
손질한 물고기를 꼬치처럼 나뭇가지에 끼워서 불에 구웠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소리.
익어가는 냄새가 콧잔등을 간질였다.
“잘 먹겠습니다.”
무인도에서 첫날.
앞으로를 기약하기 어려웠지만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해는 저물어 갔다.
어느새 밤이 된 무인도에서 세 사람은 피곤한 하루를 정리했다.
“내일부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날이었다.
반격은 3일이 지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 * *
왜앵.
평소처럼 지루한 나날.
상점 가게는 손님 하나 없었다.
상점 주인은 손님 대신 파리만 귀찮게 날아다니는 카운터에 혼자 앉아 지루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이러다가 임대료도 못 내겠다.”
카드와 무기는 비싼 품목이었고 일반 소비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품목이었다.
돈 많은 손님이나 단골들이 주로 주문한다.
“세일도 안 먹히고. 이러다 폐업하겠다.”
세일 품목이 있긴 했다.
초보 탐험자는 카드보다 무기를 더 선호하곤 했다.
던전에서 몬스터를 상대한다면 일단 카드보다는 검 한 자루라도 들어야 더 안심되기 때문이다.
무기가 더 우선이었다.
검과 창은 항상 인기 품목이었다.
지금은 손님이 많이 줄어들었다.
“요즘 차원문이 덜 열려서 그런가. 손님이 없네.”
상점 주인은 한숨과 주름살만 늘어났다.
최근에 에어리어 공간이 잘 열리지 않자 불경기처럼 되었다.
더 많은 모험가들이 나타나려면 차원문이 많이 열려야 했다.
그저 한숨만 나올 따름이었다.
“업종을 변경해야 하나.”
상점 주인이 푸념을 늘어놓으며 점포 정리까지 고민하던 즈음이었다.
문이 열리며 오늘의 첫 손님이 등장했다.
“어서 오세요.”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범상치 않은 사람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얼굴을 감춘 손님? 혹시 도둑인가?’
상점 주인은 오른손을 카운터 밑에 두었다.
서랍 안에 몰래 놔둔 검을 쥐었다.
상점 주인도 왕년에 나름 한 가닥 날리던 실력이 있었다.
도둑이 덤빈다면 한 판 붙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저예요, 아저씨.”
손님은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그제야 누군지 알아봤다.
“아, 너였구나. 유진하.”
상점 주인은 손님의 정체를 알고서 경계심을 풀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있으셨죠?”
마스크를 살짝 벗었던 유진하는 주변을 살피면서 다시 마스크를 썼다.
상점 주인과는 오래 거래한 덕분에 잘 아는 사이였다.
“소식은 들었어. 너희 요즘 유명하더라.”
상점 주인이 슬쩍 농담을 걸었다.
유진하와 에어리스, 이소민은 지명 수배된 상태였다.
“어디 보자. 죄목이 많던데.”
공간 이용법 위반, 폭행, 공무집행 방해 등등.
10개가 넘는 누명이 붙었다.
단숨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일급 지명수배가 되었다.
“덕분에 찾는 사람이 많아졌네요.”
유진하는 슬쩍 곁눈질로 천장에 달린 CCTV를 가리켰다.
빨리 꺼 달라는 눈치였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아예 다 지워 줄 테니까.”
상점 주인은 가게 안에 설치한 CCTV를 잽싸게 꺼 버렸다.
물론 오늘 녹화분도 삭제했다.
“복구도 불가능하게 처리해 줄게.”
“고마워요, 아저씨.”
유진하는 그제야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겠지만 저희를 쫓는 사람이 많아서요.”
“아아, 걱정하지 마라. 나는 손님의 안위를 더 우선시하니까. 그리고 유진하, 너는 오랜 단골이잖냐.”
100번이 넘는 에어리어 공략전을 다녀오면서 주 거래처가 항상 여기였다.
다행히 상점 주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번에 카드도 여기서 구하려고 왔다.
“다른 사람들은 잘 있나? 에어리스, 그리고 이소민이라고 했던가.”
상점 주인은 두 사람의 안부도 물어봤다.
“그 대검도 다시 손 볼 때가 되었는데, 버스터 슬레이어 말이다. 우리 집 최고 역작인 무기잖아.”
“다음에 같이 올게요. 일이 정리되면요.”
유진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급한 일부터 서둘렀다.
오래 있다가는 이곳 단골집 사장에게도 폐가 될 수 있었다.
“카드 살 수 있나요?”
“물론이지.”
상점 주인은 잽싸게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유진하는 필요한 카드만 골라서 순식간에 100장을 골랐다.
“한 번에 살게요.”
“돈은 있어?”
정부 요원들한테 쫓기느라 유진하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울 거라고 신경 썼다.
“괜찮아요. 최근에 정부 일을 도우면서 지원을 많이 받았거든요. 돈은 따로 보관하던 곳이 있어서 거기 가서 구했어요.”
“다행이구나. 다들 밥걱정은 없겠어.”
가게 주인은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카드를 넉넉하게 보유했다.
“더 원하는 거 있어? 굳이 카드나 장비 말고도 개인적으로 도와줄 거라도 있다면 말해도 돼.”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정부 요원부터 용병까지 전부 유진하를 쫓는 중이었는데, 그래도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단골 가게의 주인은 든든한 지원군처럼 도와줬다.
“괜찮아요. 더 폐를 끼치기는 힘드니까요.”
“카드는 그거면 되겠어?”
“일단은요.”
“정말로 정부를 상대할 생각인 거냐? 요원들을 상대로?”
“…….”
유진하는 대답 대신 웃음을 가볍게 지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희미한 미소.
카드를 구할 생각이 있었지만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아저씨가 아는 루트. 암시장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죠?”
“암시장?”
상점 주인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는지 잠시 당황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암시장에 가려고?”
“거기서 팔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요.”
상점 주인은 눈빛을 찡그렸다.
“암시장은 익명의 사람들이 비밀리에 참가해. 비싸고 은밀한 물건이 경매장에서 거래되지. 아무나 갈 수 없어.”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카드를 파는 사람으로 가고 싶어요.”
유진하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빛의 카드’였다.
세상에서 유일한 한 장의 카드였다.
“흐음, 대단한데?”
상점 주인은 빛의 카드를 보더니 한눈에 가치를 알아차렸다.
“이건 정말 귀한 물건이야. 처음 보는데.”
카드에는 범상치 않은 오오라 기운이 서렸다.
빛의 카드라는 걸 알게 되자 상점 주인의 관심이 커졌다.
“이거면 많이들 주목하겠어. 정말 팔 생각이냐?”
“네.”
유진하는 비밀 경매장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판매자라면 달랐다.
초레어 카드를 판매한다면 암시장에 참가할 충분한 자격이 생긴다.
‘경매장에서 원하는 게 있어.’
빛의 카드는 미끼였다.
이것으로 경매장에 접근할 계획이었다.
유진하는 준비한 작전을 하나씩 실행하고 있었다.
암시장 비밀 경매장.
이곳이 반격의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