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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47화 (47/229)
  • 47화 침입자(1)

    “방어전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정부 요원 E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생존이요?”

    이소민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E는 차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우리가 사는 곳도 공간의 일종입니다. 역으로 한 번 볼까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존재들이 공략전을 들어온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공격이 들어온다면요.”

    충격적인 소리였다.

    에어리스는 소름이 돋아서 양팔을 부여잡았다.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서…….

    우리가 사는 공간이 ‘공략전’을 당한다면…….

    공략전의 결말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멸망할 수도 있어요.”

    에어리스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E는 무표정하게 차를 마셨다.

    “맛있군요. 한 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가져올게요.”

    이소민은 찻잔을 받아서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유진하는 묻고 싶었던 부분을 짚어갔다.

    “우리가 공략전을 당하면 방어해야 한다. 그게 방어전이라는 거군요.”

    “물론이죠. 실제로 탑의 주인은 그 계획을 여러분에게 밝혔습니다. 우리 세계에 들어올 수 있다고요.”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저번 대결을 떠올렸다.

    탑의 주인이 했던 제안.

    우리 세계에 들어오겠다는 선언.

    그때부터 어렴풋이 방어전의 개념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E는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방어전은 결국 ‘주인’을 어떻게 지키느냐. 그리고 ‘주인의 전리품’을 잘 지키느냐의 싸움입니다.”

    유진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진짜 묻고 싶었던 질문이 곧이어 이어졌다.

    “우리 공간에도 주인이 있나요? 전리품은요? 대체 주인은 누구입니까?”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 대화를 주도했던 E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소민이 새로운 차를 가져올 때까지 침묵은 계속 흘렀다.

    “극비 사항이라서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E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위화감을 느낀 유진하가 더 캐물었다.

    “기밀이라면?”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E는 순간적으로 눈빛을 차갑게 변모했으나, 찻잔의 뜨거운 김이 나와 안경에 서리자 그대로 가려졌다.

    “그분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일 수도 있죠.”

    능구렁이처럼 대답을 회피했다.

    교묘한 언변이었다.

    최정상 간부 라인답게 여유가 넘쳤다.

    그래도 몇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우리가 사는 곳에도 공간의 주인이 존재한다.

    둘째, E는 그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거나 짐작하고 있다.

    셋째, 정부 최상부는 공간의 주인과 연관성이 있다.

    최정상 간부급 요원들은 공간의 주인과 접촉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듣고 있던 이소민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방어전도 있었나요? 한 번도 못 봤는데요.”

    “아아, 사람들이 모르도록 정보를 통제했거든요.”

    E는 태연하게 찻잔을 손에 든 채로 응답했다.

    유진하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폭발 사고나 지진. 그런 식으로 둘러대면서 발표했다는 소리죠?”

    “똑똑한 분이군요. 맞습니다.”

    E는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더니 곧 웃음기를 거두었다.

    “방어전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간부급 요원들이 직접 상대합니다. 전 세계에서 담당 지역을 정하고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는 거죠.”

    방어전은 간부 요원들의 담당이었다.

    사건의 처리부터 은폐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어느 누구도 모를 만큼 대단한 일솜씨였다.

    “방어전 전담이라…….”

    이소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E는 매일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당연히 자신이 할 일을 해 왔다는 듯이 침착했다.

    간부다운 품격이 있었다.

    “방어에 실패하면 우리 공간이 멸망합니다. 당연히 가장 핵심 전력이 나가서 상대하는 겁니다. 이왕이면 세계에 알려지지 않도록 말이죠. 혼란은 누구도 원하지 않으니까요.”

    E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설명했다.

    친절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강한 자신감도 있었다.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다른 공간에 들어가는 공략전은 일종의 선제적 방어입니다. 우리 공간에 쳐들어올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먼저 치는 거죠. 사실 공략전은 실패해도 리스크가 없잖아요. 거기 들어간 사람만 잃는 거죠.”

    계산적이고 냉소적인 판단이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나, 공략전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병사를 잃은 느낌?

    승리를 위해 다소의 병력 희생은 감수하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프리랜서, 용병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을 주로 보낸 것이죠.”

    유진하는 모든 개념을 이해했다.

    정부의 대응 체제는 간단했다.

    면허 심사를 둬서 통과한 사람만 공략전에 참가시킨다.

    실력이 있는 자는 따로 선별한다.

    엄선된 사람은 요원으로 스카웃한다.

    이게 공략전이다.

    방어전은 한 단계 위였다.

    요원 중에서 막강한 실력자들만 따로 추려서 간부급으로 승진시킨다.

    간부들이 방어전을 전담한다.

    간결하면서도 효율적인 체제였다.

    “프리랜서부터 간부 요원까지. 괜찮은 선발 과정이네요.”

    유진하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은폐해서 세상의 동요를 막는다.

    이 어려운 일을 이렇게 깔끔하고 완벽한 처리한다는 건 정말 대단했다.

    “방어전도 가끔 프리랜서 실력자에게 의뢰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기밀이니 발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요.”

    E는 마시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정확한 평가를 알려 줬다.

    “그동안 보여 준 평가로는 유진하 씨의 일행은 훌륭한 재목이라고 여겨집니다. 요원급 이상으로 평가받았던 거죠.”

    거기서 의문이 하나 들었다.

    “질문이 더 있어요.”

    “뭔가요?”

    E는 상체를 앞으로 끌어오더니 양손을 깍지로 꼈다.

    진지하게 경청하겠다는 자세였다

    유진하는 질문을 건넸다.

    “암호명이 E라고 하셨죠? 간부급이라고 하셨고요.”

    “네, 그렇죠.”

    “직속 부하가 J라면 당신은 더 강하다는 건가요?”

    “흐음. 직접적인 질문이네요. 예민하지만 답변은 해야겠죠?”

    조금 껄끄러운 물음이었는지 E가 말끝을 흐렸다.

    이내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솔직하게 답변했다.

    “상사로서 부하 직원에 대해서 얘기하기가 참 민감합니다. 자칫하면 험담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해가 되려나요?”

    그의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J는 좋은 부하입니다. 실력도 좋죠. 하지만 간부로 가기에는 아직 미흡합니다.”

    간부급에는 미치지 못한다.

    평가는 단호했다.

    유진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더니 이내 생각에 잠겼다.

    “간부는 급이 다르다…….”

    지금까지 J의 실력은 훌륭했다.

    카드와 검을 동시에 활용하는 재능도 대단했다.

    하지만 간부급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앞에 앉아 있는 간부 E는 대체 어느 정도 실력이란 말인가?

    “잠깐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나요?”

    E는 멈칫하더니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제 실력 말입니까?”

    “네.”

    유진하는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또렷했다.

    경솔할 수도 있었다.

    처음 찾아온 간부에게 실력 테스트를 권하다니.

    기분 나쁜 제안일 수 있는데도 E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간단한 대련으로 해 볼까요?”

    “우리는 에어리스가 해 볼게요.”

    옆에서 조용히 듣던 에어리스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진하, 제가요?”

    유진하는 놀란 에어리스를 진정시키며 다독였다.

    “괜찮을 거야. 그냥 대련만 해 보는 거니까 연습이라고 생각해.”

    “아, 네.”

    에어리스는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간질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먹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련 장소는 마당이었다.

    쏟아지는 햇볕 속에서 에어리스와 E는 서로를 마주 봤다.

    “그 대검, 정말 엄청나군요.”

    E는 에어리스의 대검의 크기와 위압감을 순순히 인정했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움켜쥔 채로 전투 자세를 갖췄다.

    “저는 준비가 되었는데 지금 시작해도 되는 건가요?”

    E는 아직 맨손이었다.

    무기를 준비하거나 카드를 꺼내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흔한 대련인걸요. 마음껏 전력으로 들어오셔도 됩니다. 먼저 들어오시죠.”

    대검의 에어리스와 맨손의 E.

    언뜻 봐도 무모한 대결처럼 보였다.

    에어리스는 안심하지 못했는지 선제공격을 하지 못했다.

    잠깐 시선을 돌렸는데 유진하는 어서 공격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마음을 먹은 에어리스가 대검을 굳게 움켜잡았다.

    순간적으로 박차며 빠르게 치고 나갔다.

    “하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휘둘렀다.

    평소처럼, 아니, 그 이상에 육박할 만큼 맹렬한 베기였다.

    일격의 승부.

    검이 가르는 바람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릴 듯한 기세였는데 대검은 공중에서 순간적으로 멈춰 버렸다.

    “아!”

    대검의 흐름이 멈췄다.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E는 맨손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가볍게 에어리스의 대검을 잡아냈다.

    한 걸음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제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조용하면서도 침착하게.

    거대한 폭풍이 마치 고요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대련은 단 한 번으로 끝났다.

    “와아.”

    지켜보던 이소민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상급 간부의 실력이 이렇다니.

    유진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페셜리스트…….”

    달인의 경지에 오른 자였다.

    압도적인 실력이었다.

    “좋은 실력이었습니다.”

    E는 조용히 대검을 놓았다.

    에어리스는 살짝 두세 걸음 물러나더니 대검을 살폈다.

    “아…….”

    방금 E가 잡았던 부분은 금이 가버렸다.

    엄청난 손아귀의 힘이었다.

    지금까지 빙룡을 비롯해 거대 몬스터를 베면서도 튼튼했던 검이 처음으로 강도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만큼 상대의 실력이 막강하다는 증거였다.

    “확실히 보고서에서 봤던 것보다 더 좋군요.”

    E는 손을 툭툭 털더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좋은 대련이 되었어요.”

    에어리스도 공손히 답례의 인사를 했다.

    “이제 용건은 끝난 것 같군요. 방어전 의뢰만 마저 더 하고 가야겠습니다.”

    E는 상황을 설명했다.

    “이틀 전, 우리 세상에 차원문이 열렸습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분명하죠.”

    “침입?”

    이소민이 무의식적으로 말을 따라 했다.

    E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서 맞장구를 쳐줬다.

    “정체는 불명이고 목적도 모릅니다. 다만, 이 부분은 이상하더군요.”

    서류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증거물처럼 보였다.

    “이건 CCTV에 찍힌 침입자의 유일한 사진입니다. 이것뿐이죠.”

    그 사진을 확인한 모두가 깜짝 놀랐다.

    평범한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은 사람이 보였는데 얼굴이 익숙했다.

    에어리스였다.

    “에어리스?”

    놀란 목소리가 너 나 할 것 없이 사방에서 나왔다.

    유진하와 이소민은 물론 당사자 에어리스조차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 여기에 간 적이 없어요.”

    “맞습니다. 이건 에어리스 양이 아니에요.”

    E도 수긍했다.

    이미 진짜 에어리스의 행방은 조사했다는 듯이 무심하게 안경만 만졌다.

    “에어리스 양은 이날 집에만 있었습니다. 알리바이라고 할까요? 그 정보는 저희도 알고 왔습니다.”

    유진하는 혼란스러웠다.

    에어리스는 분명 아닐 텐데, 사진 속에 완벽하게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었다.

    “왜 의뢰하는지 아시겠죠? 이 정체불명의 인물을 수색하는 겁니다.”

    E는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심플한 디자인으로 검은색 바탕에 암호명과 연락처 하나만 적혀 있었다.

    에어리스는 그 명함을 엉겁결에 받고 동그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자료는 기밀입니다. 도로 제가 가져가죠.”

    E는 가져온 서류를 도로 챙겨갔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이 보안에 철저했다.

    “어떤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명함의 번호로 연락하십시오. M이나 J에게 하셔도 됩니다.”

    할 말을 모두 마친 E가 천천히 몸을 돌리고 마당을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서 유진하는 끝으로 한마디를 더 던졌다.

    “이 사람을 찾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죠?”

    “…글쎄요.”

    E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약간의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침입자는 처단이 원칙입니다. 이유 불문하고 그게 규칙이죠.”

    최후의 답변을 마친 E가 다시 걸어 나갔다.

    유진하와 에어리스, 이소민은 그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묵묵히 지켜봤다.

    많은 이야기와 충격적인 정보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이 벌써 지나갔다.

    “정말 혼란스럽네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내려놓고 살짝 긴장감을 떨쳐냈다.

    오늘은 충격적인 소식이 연이어 이어졌다.

    살인마 나주신의 탈옥.

    간부 E와 그의 압도적인 실력.

    방어전의 개념.

    그리고…….

    에어리스를 완전히 빼닮은 정체불명의 존재까지.

    “에어리스를 닮은 사람이라…….”

    유진하는 의뢰를 가만히 떠올렸다.

    항상 과거를 알고 싶어 하던 에어리스였다.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면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 누굴까?”

    만약 정부 요원들이 먼저 발견한다면 에어리스를 닮은 존재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에어리스의 과거를 알아내려면 반드시 먼저 찾아내야 했다.

    에어리스 역시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랑 닮은 사람?’

    그 불길함은 어쩌면 운명적인 이끌림과도 같았다.

    에어리스를 닮은 존재의 등장.

    모두의 운명이 극한으로 이끌릴 거 같다는 느낌.

    그 예감은 적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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