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백가면
세계 최대의 형무소.
이곳은 잔혹한 살인마나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최고의 보안 수준을 자랑한다.
수감자들은 전원 개인 독방에서 철저히 격리됐고 외부와의 소통은 단절됐다.
“전원 소등.”
전등불이 일제히 꺼졌다.
독방에는 작은 티비 하나가 있었는데, 오로지 형무소에서 제작한 교화용 자체 방송만 나왔다.
천장에는 감시 카메라까지 달려있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숨소리도 내지 마라.”
교도관들은 매일매일 이상한 문제가 있나 검열했다.
최악의 인간들만 철저히 가두는 철통 보안 시설이었다.
“…….”
살인마 나주신은 현재 이곳에 갇혀 있었다.
에어리스와 유진하에게 연이어 패배하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쾌속의 사바톤 부츠는 물론 모든 장비마저 압수됐다.
굴욕적인 신세였다.
“흥미로운 녀석들이야.”
유진하와 에어리스.
두 사람에게 한 번씩 당한 기억은 치욕스러운 감정과 강한 승부 욕구를 일으켰다.
“여기서 나가면 다시 봐야겠지.”
더욱더 탈옥에 대한 욕구가 들끓었다.
녀석들과 싸우고 싶다.
분노가 아드레날린처럼 분출되고 있었다.
독방에 갇힌 신세임에도 에너지는 더욱 강렬하게 치밀었다.
그때였다.
스르륵.
침대에 누운 그의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감돌았다.
희미한 빛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누군가 갑자기 나주신의 독방에 나타났다.
“뭐지?”
말끔한 양복을 입은 자였다.
나주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경계 태세를 갖췄다.
“쉿!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남자였다.
백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난 너에게 제안을 하려고 온 거니까.”
신원 불명의 남자는 백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스크의 볼 부분에는 클로버 문양이 있었다.
“누구지? 살인마에게 용건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나주신은 침착하게 중얼거린 후에 힐끗 천장 쪽을 응시했다.
벽과 창은 정상이었고 들어올 만한 곳은 없었다.
감시 카메라는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수들의 반응이 없었다.
“후후, 감시 카메라나 간수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쪽은 다 손을 써뒀으니까.”
클로버 가면의 남자는 여유를 부렸다.
녀석은 손에 카드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제야 나주신은 깨달았다.
“카드를 사용해서 들어왔나.”
“그래.”
카드는 인간 세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암거래 시장에서 성황리에 거래가 이뤄지는데, 귀한 능력이 있는 물건일수록 부르는 게 값이었다.
클로버 가면의 남자는 레어 등급 카드를 가진 게 분명했다.
“여기는 나 혼자 온 게 아니다.”
남자는 집단이었다.
어떤 조직의 짓임이 확실했다.
“백가면이라… 그 조직인가?”
나주신은 조용히 남자의 소속을 질문했다.
클로버 가면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도권은 그들이 쥐고 있었다.
“알카트로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 조직이었다.
공략전에서 가지고 나온 카드와 장비를 가지고 기상천외한 범죄를 일으키는 집단이었다.
“소수 정예로 알고 있는데…….”
클로버 가면은 조용했다.
자신의 용건만 전할 의도였다.
“나가고 싶은가?”
“…….”
갑자기 찾아온 신원 불명, 클로버 가면의 남자가 달콤한 제안을 던졌다.
형무소에서 탈옥시켜 준다?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이유는…….”
“질문은 받지 않는다. 너에게 단 한 번의 선택이 있을 뿐이지.”
불쾌한 말투였다.
“같이 나가거나. 여기서 평생 썩거나. 선택은 지금이다.”
나주신은 상대를 조용히 바라봤다.
클로버 가면 속에 감춰진 이면을 알아내고 싶었으나 만만치 않은 자였다.
그는 필요한 얘기만 전달했다.
감정이 없는 존재처럼.
“만약 나가겠다면 이 목걸이를 채워라.”
클로버 가면은 주머니에서 작은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수상한 냄새가 물씬 나는 물건이었다.
“이건 뭐지?”
“…….”
“쳇, 알려 주지 않는다는 건가.”
나주신은 그 찝찝한 목걸이를 보자 기분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제안을 거부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이 더럽고 비좁은 감방에 처박히게 된다.
그런 운명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정체불명의 조직과 함께하는 것도 괜찮다고 여겼다.
“…좋다.”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클로버 가면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목걸이를 던졌다.
나주신은 그 물건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본 후에 목에 채웠다.
찰칵.
자물쇠 소리가 들렸다.
“명심해라. 그 목걸이에는 폭약이 있다.”
이 자식. 그럴 거 같았지.
나주신은 냉소적인 미소를 짓더니 이내 냉정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몇 가지 경고를 더 했다.
“GPS가 있어서 정해진 지역을 벗어나면 폭발한다. 내 명령에 불복종해도 터지게 되지.”
“주의사항은 됐어. 그냥 강아지처럼 너희들 말만 잘 들으면 된다는 거잖아.”
나주신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남자를 노려봤다.
야생마와 같은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너 하기 나름이다. 그 목걸이가 계속 있을지 없을지는.”
클로버 가면의 남자는 제어하기 힘든 살인마를 통제하려 들었다.
철저하게 이용 가치로만 따진다.
‘알카트로스’ 조직은 그들의 뒤처리에 이용할 생각이다.
필요가 없으면 버려진다.
단지 그뿐이었다.
“이해력이 빨라서 좋군. 너도 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그럼 나가도록 하지.”
클로버 가면의 남자는 나주신의 팔을 잡았다.
“순간 이동.”
레어 카드의 힘이 발동되자 두 사람은 단숨에 감방에서 사라졌다.
주변에 어떠한 피해도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은밀하게 탈옥했다.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아침이 올 때까지 고요하게.
깔끔하고 완벽한 퇴장이었다.
* * *
다음 날.
유진하의 집에는 아침부터 손님이 찾아왔다.
띵동.
“처음 뵙겠습니다.”
대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터폰 화면에 양복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누구시죠?”
에어리스가 되물었다.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M과 J의 동료라고 할 수 있죠.”
마침 유진하가 거실에 나왔고, 아침부터 집을 찾아온 남자에 대해서 들었다.
“정부에서 왔다면…….”
뭔가 생각이 났는지 유진하는 순순히 대문을 열어 줬다.
“처음 뵙겠습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거실로 들어섰다.
정갈한 외모에 마른 체격이나 눈빛은 꽤 날카로웠다.
포마드를 발라서 정갈하게 넘긴 검은 머리칼에 은색 안경을 낀 사람이었다.
마치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이 냉철한 눈빛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누구신지?”
“아침부터 실례가 많았군요. 제 소개부터 해야겠습니다. 저는 정부에서 나왔습니다. 당연히 코드명으로 불리는 요원이죠.”
자기소개가 깔끔했다.
“E라고 합니다. M과 J의 상관이죠. 정부 요원 중에서는 간부급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부 E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정부 요원에서 최상위에 있는 신분이라고 밝혔다.
깔끔하게 넘긴 머릿결에다 안경을 쓴 눈빛은 지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
빈틈없이 깐깐한 스타일 같았다.
상관으로 있으면 숨이 막힐 듯이 실적을 압박하며 쪼아댈 듯한 느낌.
완벽을 추구하는 인상이 강했다.
“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유진하, 에어리스 씨라고요.”
E는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남을 관찰하거나 주의를 기울일 적에 계속 안경을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마침 이소민도 나오자 세 사람은 새로운 정부 요원 E를 맞이하게 되었다.
“M이나 J가 오지 않았네요.”
“아아, 제가 그들의 상급자라고 소개해 드렸죠. 평소 여러분에 대한 소식은 듣긴 했습니다. 오늘은 직접 와서 여러분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요.”
“상급자이고 간부라고요?”
유진하가 반문했다.
정부 요원들은 신분을 숨기고 암호명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기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비밀 엄수가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
두 요원의 상급자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놀라실 건 없습니다. 어느 기관이든 간부가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물론 M과 J는 훌륭한 요원들입니다. 요즘 활약이 좋아서 머지않아 간부로 승진할 수도 있겠더군요.”
E는 눈웃음을 지으며 여유롭게 대화를 진행했다.
“여러분에 대한 정보는 보고서로 읽었습니다. 물론 실력도 전부 알고 있죠.”
E가 고개를 돌려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에어리스 양이죠? 이번에 혼자서 대검을 가지고 열 마리의 거대 몬스터를 상대했다고요. 보고서에는 굉장한 전투력을 가졌다고 하는데 내용이 사실인지 직접 보고 싶군요.”
“아, 네. 고맙습니다.”
칭찬을 해 주자 에어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이소민 씨는 이번에 큰 활약은 없었으나 정신력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모두의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하더군요. 다음에는 진짜 멋진 모습을 기대해도 되겠더군요.”
“하하, 그런가요? 저는 잠깐 차를 하나 가져올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소민이 부엌으로 잠깐 빠졌다.
다음은 유진하 차례였다.
“유진하 씨는 탑의 주인과 마지막 승부에서 멋지게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유진하는 짧은 대답만 남기고 상대를 응시했다.
상관이자 간부라는 이 남자.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경계심일까?
아니면 평소 버릇일까?
무엇인지 모르나 보통 인물이라고는 안 보였다.
“공략전을 나름 100번을 넘게 해봤는데 간부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아, 그런 일은 일반 요원들이 담당합니다. 저희 같은 간부는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죠.”
더 중요한 일?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E는 곧바로 가방에서 제안서를 내밀었다.
“정부 요원으로 스카웃 제의는 어떤가요?”
“거절할래요.”
유진하는 딱 잘라 거부했다.
“바로 거부네요?”
“정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거라면 저는 그다지 매력이 없어서요.”
유진하는 정부 소속보다는 자유로운 프리랜서를 선호했다.
지시받기 싫은 성향도 한몫했다.
“역시 그렇군요. 보고서에 따르면 생존을 우선시한다고 적혀 있어서 스카웃이 어렵다고 되어 있긴 했거든요. 역시 M의 분석은 정확하군요.”
예정된 결과였는지 E는 딱히 실망한 기색은 아니었다.
내밀었던 서류를 툭툭 정돈하더니 도로 가방에 넣었다.
유진하는 다른 여지를 두었다.
“협력 정도는 지금처럼 해도 가능해요.”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의뢰를 받겠다고 알려 줬다.
E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죠. 저도 더는 권하지 않겠습니다.”
유진하는 화제를 돌려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까 탈옥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가 잡았던 살인마 나주신이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이죠.”
“…….”
E는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고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유진하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 형무소는 탈옥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녀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죠.”
“그렇습니다. 저희도 조사하고 있죠.”
E는 언급을 줄이려는 듯이 짧게만 대답했다.
유진하는 달랐다.
정보를 더 얻고 싶었다.
살인마 나주신과는 악연의 관계였다. 탈옥하면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탈옥에 대해 알고 싶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할 거예요. 웬만한 조직이 아니면 탈옥시키기도 어려울 테고요. 대단한 능력을 보유한 곳이어야 해요.”
“추측이 있나 보군요. 재밌네요.”
E는 표정에 변화를 두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유진하는 정확하게 상대의 심리를 찌르고 정확한 추론을 내리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E도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저희도 추적하고 있습니다. 탈옥범에 대해서는 정보를 받으면 알려드리죠. 제가 여기 찾아온 이유는 다른 의뢰 때문입니다.”
E는 가방에서 다른 서류를 꺼내서 내밀었다.
“여기 차 가져왔는데요.”
마침 이소민이 쟁반에 차를 담아서 나타났다.
무거웠던 분위기는 일순간 긴장이 풀렸다.
E는 한 모금 마셨다.
“명품이군요. 과연 입맛도 훌륭하네요.”
따뜻한 차에서 올라온 김이 그의 안경에 살짝 서려 시선을 감추었다.
E는 진짜 용건을 전달했다.
“의뢰는 방어전입니다.”
“방어전?”
유진하가 되물었다.
공략전은 그동안 많이 해 봤다.
다른 에어리어 공간으로 들어가서 주인을 물리친다든가 전리품을 챙기는 일이었다.
공략전이 아닌 방어전.
처음 들어본 개념이었다.
찻잔을 양손에 든 E가 차분하게 알려 줬다.
“우리가 사는 곳도 간혹 일이 벌어지곤 하죠. 공략전이 아니라 방어전을 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