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하늘에서 아래로
오늘 에어리스의 소망은 번지점프였다.
“네, 꼭 하고 싶었어요.”
에어리스는 밝은 목소리로 환하게 웃었다.
잔뜩 기대한 저 표정.
싫다고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놀이동산에도 이런 비슷한 것들 있었잖아.”
유진하는 사실 번지점프 같은 스릴 넘치는 종류를 싫어했다.
사실 공략전으로도 긴장감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에어리스는 달랐다.
항상 호기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자세가 있었다. 뭐든지 직접 해 보고 경험하기를 원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티비에서 빵을 굽는 방송을 보고 ‘저도 제빵이라는 걸 해 보고 싶어졌어요.’ 이렇게 반응했다.
에어리스는 드라마에 나온 장소도 가 보고 싶었고,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도 체험하고 싶었다.
끝없는 호기심.
“네, 정말 꼭 해 보고 싶었어요. 다리에 묶고 뛰어내리면 어떨까요?”
에어리스는 세상이 궁금했고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덕분에 인간 세계에 빠르게 적응하긴 했지만.
이제는 돈의 개념도 익숙해져서 혼자 시장에 나가 물건을 사는데 ‘이건 너무 비싸네요. 조금만 깎아주세요.’라고 흥정할 정도였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에어리스의 흥미는 무한에 가까웠다.
다 채워 주기에는 어쩌면 역부족이거나 무리는 아닐까.
‘저걸 언제 다 해?’
버킷 리스트는 냉장고의 앞문을 전부 가릴 만큼 방대한 길이가 되었다.
‘엄청나다.’
솔직히 부담되는 양이었다.
하나씩 해결해도 평생이 걸릴 것 같았다.
활기 넘치는 에어리스를 말릴 수도 없었다.
“번지점프. 재밌을 거 같아요.”
이미 두 손을 불끈 쥐며 기대감이 가득했다.
유진하와 이소민은 뚱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같은 마음이 되었다.
‘가기 싫어.’
본심은 그랬으나.
눈치만 보면서 말을 아꼈다.
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소민이 슬쩍 다른 방향으로 유도했다.
“에어리스, 오늘 같은 날은 공연이나 연극, 콘서트장도 있는데…….”
에어리스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제시했다.
솔직히 번지점프만 아니면 되니까.
유진하도 은근슬쩍 거들었다.
“번지점프보다는 공연도 좋지 않을까? 멀리 가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으음. 번지점프는 별로일까요?”
살짝 풀이 죽은 에어리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생각하더니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렸다.
“진하, 사실 원래는 스카이다이빙을 해 보고 싶었거든요.”
“뭐어?”
유진하와 이소민은 크게 당황했다.
“그런데 그건 싫어할까 봐 번지점프로 바꾼 거였는데요.”
말문이 탁 막혔다.
아!
번지점프가 아니면 스카이다이빙이 되는 거였구나.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번지점프가 나을 거 같아.”
“갑자기 번지점프가 너무 하고 싶어졌네.”
둘 다 머쓱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스카이다이빙만은 안 돼.
“아, 그런가요.”
고민에 빠졌던 에어리스가 이내 환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가요.”
“…그래.”
꼼짝없이 가게 되었다.
아침 식사는 식당에 가서 가볍게 먹은 세 사람은 호숫가에 있는 번지점프장에 도착했다.
“굉장히 높네요.”
에어리스는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꽤 높은 위치의 번지점프장을 바라봤다.
저 까마득히 높다란 곳에서 밧줄 하나만 묶고 뛰어내려야 했다.
“아, 직접 보니 좀 그러네.”
이소민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했다.
번지점프도 놀이기구였다.
그래도 왠지 무서웠다.
공포와 스릴은 달랐다.
몬스터와 마주쳐도 기죽지 않고 맞서던 때와는 분명 달랐다.
강한 적이 있으면 극복하려는 의지가 샘솟곤 했다.
하지만 놀이기구는 자신의 몸을 기구에 맡기면 끝이었다.
그래서 공포감이 더 드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네.”
유진하는 서둘러 재촉했다.
이왕 하는 거면 차라리 빨리하는 편이 후련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세 사람은 점프대 정상으로 올라갔다.
“진하, 정말 재밌을 거 같아요.”
“아, 그래…….”
에어리스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유진하와 이소민은 말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꼭 뛰어내려야 하나.
머릿속에서 고민과 번뇌가 밀려들었다.
“제가 먼저 할까요?”
에어리스는 당당하게 손을 들어 먼저 하겠다고 자청했다.
불안했는지 이소민은 덜덜거리면서 발걸음을 잘 내딛지 못했다.
고소공포증은 없는데?
높은 곳에 직접 서니 색다른 기분을 받았다.
“그냥 차라리 몬스터가 더 귀여운 맛이 있구나.”
“이소민 언니, 내려가려면 가도 괜찮아요. 저 때문에 미안해요.”
그 말이 오히려 이소민의 고요한 마음에 작은 돌멩이처럼 날아왔다.
호수에 기묘한 파동을 그리듯이 잔잔한 진동을 주었다.
포기한다?
“무섭기는 개뿔이. 내가 제일 먼저 할 거야.”
이소민이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바로 치고 나왔다.
“자, 내가 먼저 할게.”
당당하게 걸어 나오더니 먼저 뛰어내리겠다고 자청했다.
“그럼 먼저 맡길게요.”
에어리스는 순순히 양보했다.
어?
여기서 왜 양보를 하는 거지?
이소민이 깨닫기에는 늦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하…….”
원래는 마지막으로 뛸 생각이었다.
예상과 달리 에어리스가 양보하자 난처해졌다.
“그, 그럴게.”
하는 수 없이 첫 번째 주자가 되었다.
철컥.
결국 이소민이 가장 먼저 줄을 달고 점프장 끝에 서게 되었다.
밑에는 호수가 있었다.
“으음.”
괜히 밑을 한 번 봤더니 두려움이 더 밀려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을 하며 물러났다.
“다음에 하실 건가요?”
옆에서 진행 요원이 의사를 물어봤다.
포기할 거면 그러라는 소리였다.
뒤에서 에어리스와 유진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갈게요.”
순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이소민은 단숨에 발을 내디뎠다.
하늘을 나는 스릴.
공포와 용기가 교차하는 순간이 지나더니 허공에 몸이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이소민은 고함을 내지르며 번지점프를 뛰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투욱.
긴장감은 곧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밑에 내려와서 보트에 옮겨 타고 오늘의 도전을 마무리했다.
이소민은 약간 혼이 나간 듯했다.
“다음 사람.”
차례가 막상 다가오자 유진하는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
긴장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몬스터를 만나는 쪽이 나았다.
그랬으면 피해 가면 되니까.
그런데 번지점프는 달랐다.
피할 수 없는 외줄이었다.
정면으로 돌파해야 했다.
‘솔직히 내 스타일은 아니지.’
다가오는 운명의 밧줄을 받아들이며 유진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자꾸 체크하기 시작했다.
밧줄은 튼튼한지.
장비는 잘 관리가 되었는지.
구석구석 살폈다.
항상 탐색하던 버릇이 직업병처럼 발동했다.
‘모두 오케이.’
관리는 깔끔.
안전에 이상은 없었다.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해도 괜찮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때, 진행 요원이 유진하와 에어리스를 보더니 살며시 다른 제안을 했다.
“두 분이시죠? 커플로 뛸 수도 있습니다.”
“어……?”
유진하는 순간 멈칫했다.
에어리스와 함께 뛰어내린다?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더니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어리스는 커다란 눈동자로 유진하를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남겼다.
“진하, 같이 할래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만큼 고동이 뛰었다.
“어?”
유진하는 어떤 생각을 하다가 이내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다.
가만히 에어리스의 눈동자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에어리스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번지점프가 무엇인지…….
“그러자.”
진행 요원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하나의 줄에 함께하게 되었다.
덕분에 가장 밀착해서 점프대에 서게 되었다.
“준비되었으면 뛰겠습니다.”
진행 요원의 지시가 다가왔다.
잠시 서로를 안은 채로 대기했다.
짧은 시간이 흘렀는데 긴 흐름처럼 느껴졌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으나 모든 말이 전해지는 듯했다.
“됐습니다.”
서서히 공중에 몸을 맡겨놓았다.
두려움은 사라졌다.
오로지 서로의 앞에 있는 둘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후우욱.
떨어지는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
품 안에 들어온 에어리스는 원래 작은 상자 속에 전리품이 되어 갇혀 있던 때와 비슷했다.
기억을 잃은 그녀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희망 혹은 절망의 감정을 받고 있었다.
‘괜찮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어리스의 기억이 무엇이든.
어떤 것이든.
심지어 에어리스의 원래 모습이 어떻든.
항상 곁에 있겠다고 다짐했다.
“진하, 오늘 고마워요.”
에어리스는 수줍게 웃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진심이 서린 감사 인사를 받자 유진하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번지점프도 나름 괜찮네.”
처음에는 싫었던 번지점프였는데 지금은 다시 오고 싶어질 만큼 좋은 기분만 남았다.
“다들 한 잔씩 하고 가자고.”
이소민의 제안으로 번지점프장 근처의 카페에서 맛있는 빵과 음료수를 먹었다.
“하암, 벌써 하루가 끝났다.”
셋은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이 밀려올 무렵이 되었다.
다들 각자 휴식을 취했고, 유진하는 침대에 누워서 새로 얻은 빛의 카드를 바라봤다.
“탑의 주인…….”
그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다.
공간을 소유한다는 개념을 알려줬다.
그 의미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였다.
“우리 세상에도 공간의 주인이 있다고 그랬는데.”
에어리스의 과거가 이것과 연관된다면 훨씬 복잡한 사연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있다면 우리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는 걸까.
아니면…….
어려운 질문이었다.
세상에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이면이 존재했고, 지금 그것이 하나하나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변혁의 시대일까.
그날 밤에 뉴스 속보가 들려왔다.
“속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에어리어 공간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쾌속의 사바톤 부츠.
공략전에서 그 신발을 사용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던 살인마 나주신.
그 살인마가 탈옥했다는 뜻밖의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