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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44화 (44/229)

44화 마지막 시련(8)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유진하를 비롯한 인간 팀이 사라졌고, 원래 이곳에 살던 몬스터들은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다가오는 운명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제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게 되었군.”

푸른 갑옷의 기사 시리안이 최상층에 올라왔다.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탑의 주인과 마주했다.

“여기에 남을 건가?”

“글쎄…….”

탑의 주인은 시리안을 바라봤다.

저 푸른 갑옷의 기사는 여전히 가슴에 불길이 남은 듯했다.

“결과는 정해졌고 받아들였다. 너는 미련이 남은 듯하지만 말이야.”

“…….”

“공간이 사라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은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되는 거지.”

“구차하게 혼자 달아나라는 건가?”

무너져 가는 공간은 비명을 내지르듯이 격렬하게 일그러졌다.

남은 시간도 죽어 가고 있었다.

시리안은 손을 내밀었다.

“저번 일을 기억하나? 내가 공간과 같이 소멸할 때에 네가 나타나서 날 구해 줬지. 그때와 지금은 똑같다.”

탑의 주인은 침묵했다.

시리안은 이 공간과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탑의 주인에게도 떠날 의사가 있는지 물어봤다.

그 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든 공간에 마지막까지 있겠어. 나의 오랜 결심이다.”

탑의 주인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 공간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자, 받아라.”

대신 카드 하나를 시리안에게 건네주었다.

공간 이동 카드.

레어 등급의 물건이었다.

“나는 미련이 없어. 너는 할 일이 남았으니 어서 가라.”

“…알겠다. 더는 권유하지 않지.”

시리안은 공간 이동 카드를 사용했다.

파아앗!

다른 차원문이 만들어졌다.

기운을 차린 빙룡도 날아왔다.

시리안은 빙룡을 타고 그곳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

다시 적막만이 남았다.

탑의 주인은 이제 혼자였다.

무너지는 공간은 침묵조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외로운 전사인가…….”

탑의 주인은 시리안을 고독한 기사로 여겼다.

어떤 운명이 그를 움직일지 궁금해졌다.

“내가 있던 곳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 그게 마지막 책임이다.”

탄생이 있으면 소멸이 있듯이.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사라지는 것과 함께한다.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 * *

한편, 멤버들은 차원문을 통해서 원래 세계로 되돌아왔다.

“다들 잘 해냈다.”

용병 대장 제이슨은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임에도 함께 싸운 동료들을 다독였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용병팀은 여전히 승부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전사한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도 존재했다.

“괜찮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제이슨은 용병들을 일일이 안아 주며 격려했다.

“희생은 헛되지 않을 거다.”

용병들이 기운을 잃지 않도록 등을 두드려 주며 계속 위로했다.

리더의 책임감이었다.

그 노력 덕분인지 한숨만 내쉬던 분위기는 조금씩 미소를 되찾아갔다. 승전은 중요했다.

“자, 한 잔씩 해라.”

다들 술도 마시면서 어느 정도 심신을 회복했다.

살아 있다는 기분.

그 하나의 감정이 온몸에 진하게 전해졌다.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승리의 쾌감도 서서히 느껴졌다.

“축배나 들지.”

승리의 건배를 함께했다.

총책임을 맡았던 J도 불안한 마음을 그제야 놓을 수 있었다.

M도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진하, 무슨 생각해요?”

다들 기뻐하는 와중에 유진하는 다른 생각에 잠긴 듯했다.

에어리스는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그냥 뭐. 이런 거, 저런 거.”

“그게 어떤 건가요?”

유진하가 슬쩍 넘기려는데 에어리스가 더 물어봤다.

궁금하다는 저 눈빛.

하는 수 없이 알려 줘야 했다.

“탑의 주인이 생각났어. 무너져가는 자기 공간에 남았잖아. 그 모습이 자꾸 떠올라.”

유진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커피 향이 입안에 감돌다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공간이 무너진다는 생각을 하니까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에어리스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유진하는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

지금은 밤.

밝게 빛나는 별이 보였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공간이 하루아침에 멸망하는 세상.

언제라도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

현실적인 걸까?

아니면 종말론적인 비관일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결말일까.

“세상에는 감춰진 무언가 있는 걸지도.”

유진하는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 속에 머물렀다.

에어리스도 유진하가 무슨 마음인지 이해했다.

지금까지의 공략전에서 겪었던 모든 것들이 새로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형이 살아 있어.”

“정말이요?”

중요했던 소식을 듣자, 에어리스와 이소민은 진심으로 기뻐해 줬다.

“아직 행방은 모르지만, 일단 살아서 빠져나갔다는 소식은 들었어.”

“와, 진하가 진짜 기다리던 소식이잖아. 한 잔 해야겠다.”

이소민이 맥주 한 잔을 원샷으로 마셨다.

벌써 취한 느낌이었다.

축배를 마음껏 마신 듯했다.

“이소민 누나, 적당히 마셔요.”

“아아, 그래. 너무 많이 술을 주더라. 좋은 소식도 많고 더 그러네. 너희를 찾는 사람이 저기에도 많다고.”

이소민이 가리킨 방향에는 제이슨과 M, 그리고 J가 있었다.

다들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면서 파티를 즐겼다.

“유진하, 에어리스. 둘 다 술을 못 마시면 음료수라도 줄게.”

“네.”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엉겁결에 떠밀려 일행한테 다시 합류했다.

다들 기뻐하고 만족한 얼굴이었다.

모두가 지금 살아 있다는 기분에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괜한 걱정에 사로잡혀 앞서 고민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진하, 앞으로도 같이 할게요.”

에어리스는 문득 유진하의 어깨를 잡아 주며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가 은은하게 번져 나갔다.

흥겨운 파티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네 번의 힘겨운 시련이 있었다.

모두가 성장을 거듭했고, 전우로서 신뢰하게 되었다.

탑의 주인과 벌였던 대결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 * *

“역시 집이 최고다.”

유진하, 에어리스, 이소민은 비행기 편으로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

기나긴 고생이었다.

거실 소파에 앉기만 했는데도 달콤한 기분마저 들었다.

“진짜 그리웠어.”

이소민은 소파에 푹 쓰러져서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으아아, 온몸이 다 쑤신다.”

여독이 심했는지 이소민이 시체처럼 누워 버렸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솔직히 그냥 한동안 계속 쉬고 싶었다.

에어리스도 바닥에 털썩 앉았다.

“저는 따뜻한 차부터 마시고 싶네요.”

“그건 내가 해 줄게.”

유진하가 부엌에 가서 차를 타왔다.

“진하, 고마워요.”

에어리스는 따뜻한 잔을 양손으로 잡은 채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격전을 벌일 때의 강인함.

평소에는 순수하고 천진함.

에어리스의 평상시 순진한 미소도 항상 좋았다.

“아, 그리고 탑의 주인에게 전리품으로 이걸 받았어.”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빛의 카드였다.

물론 정부에게는 가짜 항아리를 전리품이라 속여서 주었다.

진짜는 몰래 가져왔다.

“레어 카드니까 잘 쓰면 좋을 거 같아.”

“정말 좋은 물건이네요.”

에어리스는 빛의 카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범상치 않은 빛이 연하게 흘러나와서 신비하게 보였다.

“점점 우리 장비가 좋아지는데?”

이소민은 신이 난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간의 모험을 통해서 다들 많은 장비를 챙겼다.

주요 장비는 이랬다.

-유진하 장비.

빛의 카드.

몬스터 소환 카드.

그 외 100장.

-에어리스 장비.

목걸이. 건틀릿.

대검 버스터 슬레이어.

-이소민 장비.

빙룡의 가방.

그 외 잡다한 무기와 보조 장비.

제법 성공적인 활동이었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온 후였다.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다 다들 몸을 담갔다.

그렇게 하루를 쉬었다.

“다들 일어났나요?”

다음 날.

에어리스는 평소보다 더 의욕이 샘솟았는지 기운이 넘쳐흘렀다.

항상 빼먹지 않았던 아침 훈련부터 시작했다.

“하앗! 하압!”

마당에는 기합 소리가 들렸다.

정비까지 마친 대검은 날카롭고 단단한 위력을 자랑했다.

대검을 휘두르는 궤도에 따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검의 풍압에 따라 마당의 잡초가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후우.”

에어리스의 움직임은 나날이 발전했다.

공략전을 거치면서 전투법이 더 세련되고 강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상대는…….”

에어리스의 눈은 가상의 적을 겨냥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다.

가상의 강한 상대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시리안…….”

푸른 갑옷의 기사가 나타났다.

에어리스의 과거를 아는 자.

원한까지 품은 자.

그와의 재회는 에어리스에게 강한 동기 부여를 주었다.

“다시 만난다면 이겨야 해.”

시리안은 강한 상대였다.

예리한 검술은 감히 대적하기 힘들 만큼 막강했다.

비록 빙결의 장검과 푸른 갑옷을 잃었으나, 그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다시 에어리스의 앞에 나오리라.

그때까지 더 강해져야 했다.

“하압!”

에어리스는 기합을 내지르며 대검을 최대한 크게 휘둘렀다.

공기가 양옆으로 베어지며 갈라지더니 바람처럼 뻗어나갔다.

“아침부터 열심히네.”

은은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던 이소민이 마당으로 나왔다.

“에어리스도 한 잔 줄까?”

“아, 고마워요. 마침 아침 훈련도 끝난 참이었어요.”

에어리스의 몸에서 뜨거운 김이 나오고 있었다.

숨을 고르면서 대검을 벽에 기대어 세워 놨다.

“자, 여기.”

“고마워요.”

이소민이 건넨 커피를 받고 에어리스는 한 모금 마셨다.

이마의 땀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을 가다듬었다.

“하암. 오늘은 쉬는 날이잖아.”

이소민이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켰다.

아침부터 에어리스의 기합 소리가 자명종 소리처럼 잠을 깨웠던 탓이었다.

에어리스는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오늘은 조용히 하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연습하다가 자꾸만 몰입돼서 그러네요.”

미안한 표정이 된 에어리스는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서둘러 거실로 들어갔다.

허둥지둥.

아침 식사로 간단한 토스트를 준비하려고 했다.

“아침부터 먹을까요?”

얼른 빵을 꺼내고 프라이팬을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달걀도 꺼냈다.

“밖에서 사 먹자. 어차피 오늘은 놀러 가기로 했잖아.”

“아, 맞다.”

에어리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평소 쉬는 날에는 다들 함께 돌아다니면서 에어리스의 버킷 리스트 소원을 하나씩 해결했다.

“저번에는 바다를 보러 갔잖아요. 오늘도 기대가 되네요.”

금세 씩씩해진 에어리스가 식빵 하나만 입에 물고 다가왔다.

사실 이소민은 오늘 나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바다도 좋고 놀이동산도 좋고 영화도 좋은데 오늘은 왜…….”

이번에 에어리스가 원하는 소원이 별로 탐탁지 않아서였다.

말끝을 흐린 이소민이 물끄러미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네?”

식빵을 오물거리던 에어리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한 표정만 지었다.

“다들 잘 잤어요?”

막 잠에서 깨어난 유진하가 기지개를 펴면서 2층에서 내려왔다.

입이 딱 벌어지게 하품하면서 터덜터덜 걸어왔다.

두뇌 회전이 뛰어난 공략자.

마술사처럼 카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실력.

하지만

평소에는 매사를 귀찮아했다.

“진하, 마침 오늘 가려는 곳을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에어리스는 기대감이 가득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냉장고에는 에어리스가 적은 버킷 리스트가 붙여져 있었다.

벌써 많은 부분이 제거됐다.

“여기 봐요. 꽤 많이 이루었어.”

음식은 가장 쉬운 종류에 속했다.

짜장면, 떡볶이처럼 간단한 음식도 있었고, 해외 유명한 셰프의 특별한 메뉴도 있었다.

놀이동산과 바다 구경도 쉬운 리스트에 들어갔다.

“흐음. 오늘은 뭐지?”

유진하는 냉장고에 붙은 리스트 내용을 살펴보다가 오늘 할 거라고 표시된 내용을 봤다.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에어리스 꼭 이걸 해야 해? 번지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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