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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42화 (42/229)
  • 42화 마지막 시련(6)

    기진맥진한 상태로 에어리스가 돌아왔다.

    “에어리스.”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격전의 여파가 그녀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에어리스는 힘겹게 한마디를 건넸다.

    “진하… 돌아왔어요.”

    마중 나온 유진하를 보자 에어리스는 배시시 웃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유진하가 에어리스를 부축해 주며 밝게 웃었다.

    “제이슨 씨의 도끼. 정말 잘 사용했어요.”

    쌍 도끼는 원래 주인 용병 대장 제이슨에게 돌아갔다.

    물건을 돌려받은 제이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도 필요하면 말해. 그쪽한테만 특별히 빌려 줄 테니.”

    “고마워요.”

    에어리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기력을 쇠진한 상태라 대화조차 힘겨워 보였다.

    이소민은 얼른 에어리스를 데리고 자리에 앉혔다.

    “수고했어.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둬.”

    예상과 달리 인간 팀은 1, 2번 방에서 연승했다.

    이제 남은 세 번의 승부 중에서 딱 한 번만 이기면 최종 승리를 가져간다.

    유진하도 그 점을 알았다.

    “압도적으로 유리하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아.”

    용병팀은 겨우 다섯 명만이 남았고

    에어리스는 모든 기력을 잃어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식이면 희생은 늘어나겠지.”

    남은 세 번의 승부에서 마지막으로 몰린 상대는 더 격렬하게 나올 게 분명했다.

    “여기가 3번 방.”

    한 층 더 올라가니 이번 경기장은 물가였다.

    물이 가득해서 호숫가처럼 보였다.

    “수중전을 각오해야겠어.”

    M은 사방을 살피면서 차분히 전략적 요소를 찾았다.

    지휘를 맡은 J도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호수의 환경을 주의 깊게 살폈다.

    “물에서 싸운다면 우리가 굉장히 불리하겠어. 저쪽 몬스터 중에는 수중에 강한 녀석이 있을 거니까.”

    옳은 분석이었다.

    수중전은 굉장히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유진하는 마침 생각한 전략이 있었다.

    이기는 것도 중요하나 더는 희생을 늘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였다.

    3번 방은 저쪽에서 먼저 선발을 내보내야 한다.

    현재 양측의 남은 참가 가능 인원은 다음과 같았다.

    인간 22명.

    탑의 주인 29명.

    세트 스코어는 2:0

    탑의 주인은 적임자를 먼저 골라서 3경기에 나설 몬스터를 선택했다.

    “열 명이 나간다.”

    출전하는 몬스터는 전부 수중전에 특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물갈퀴와 아가미가 있는데?”

    수중에서 재빠른 움직임과 잠수 능력을 겸비한 몬스터였다.

    “흐음.”

    다들 조용히 고민했다.

    물론 인간 팀도 대응할 방법은 있었다.

    카드가 있으니 잘 활용하면 전투가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정예 요원들은 수중 훈련도 당연히 해왔다.

    물론 상대는 물속이 삶의 터전인 괴물이었지만 말이다.

    “이쪽도 나갈 사람을 정했어요.”

    유진하가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이소민, 단독 출전입니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소민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괴력의 에어리스를 흉내라도 내듯이, 초보 탐험가인 이소민이 혼자서 열 마리의 몬스터를 상대하려고 나섰다.

    “혼자서인가…….”

    탑의 주인은 멈칫하다가, 이내 인간 팀의 진짜 의도를 금세 파악했다.

    “버리는 카드로군.”

    예상은 적중했다.

    3번 방의 승부가 시작되자마자 이소민은 손을 높이 들더니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경기 포기야! 내가 졌어.”

    몰려들던 수중형 거대 몬스터들은 단숨에 승부가 끝나자 갑자기 머쓱해졌다.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소민은 멍하니 있기 좀 그랬는지 천천히 걸어와서 몬스터들의 몸을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괜찮아, 괜찮아. 그쪽이 이긴 거잖아. 왜 울상이야?”

    처음부터 3경기는 포기할 작정이었다.

    다만, 규칙에 최소한 한 명은 출전해야 했기에 이소민만 단독으로 나간 거였다.

    “이소민 누나, 나이스 플레이.”

    가장 먼저 유진하가 맞아 줬다.

    “유진하! 나보고 시작하자마자 항복하라고 시켰으면서. 무슨 얼어 죽을 나이스 플레이냐?”

    활약할 기회 대신 이번에도 잡일 담당으로 처우를 받았다.

    이소민은 아쉽지만 자신의 역할에 어쨌든 충실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중요한 전략이었다고요.”

    유진하는 짐짓 뻔뻔한 얼굴로 상황을 다르게 해석했다.

    “누나의 활약으로 상대방 몬스터가 무려 10마리나 끝났잖아요. 덕분에 우리는 다음 승부에서 더 유리하게 올인할 수 있게 되었고요.”

    “뭐, 작전대로긴 해.”

    이소민은 볼을 간질거리면서 아쉬움을 삼켰다.

    3경기를 내주고 상대의 전력을 감소시켰다.

    그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현재 전력 상황도 훨씬 유리하게 바뀌었다.

    인간 팀 21명.

    상대팀 19명.

    이제 인원은 우리가 2명이 더 많았다.

    남은 경기는 두 번.

    저 중에 딱 한 번만 이기면 되었다.

    “내 역할은 매번 미끼네.”

    자질구레한 일은 이소민의 몫이었다.

    팀의 핵심적인 위치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궂은일을 맡아야 한다.

    이소민의 역할이 그랬다.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대활약할 날이 있으리라.

    ‘그런 날이 오겠지?’

    세트 스코어는 2:1이 되었다.

    * * *

    4번 방을 앞두고 전원의 긴장감은 최고조로 치솟았다.

    여기가 승부처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다들 마른 침을 삼켰다.

    남은 인원은 엇비슷했으나 전력은 상대도 막강했다.

    유진하는 알고 있었다.

    ‘몬스터 한 마리의 위력은 인간 몇 명을 넘어서지.’

    남은 인원은 20명이지만 승패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필이면 4경기는 이쪽에서 먼저 출전자를 내보내야 했다.

    총지휘를 맡은 J는 운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4경기에 승부를 걸까.

    아니면 5경기 최종전까지 갈까.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

    “여기는 빙판이군요.”

    4번 방은 추위와 한기로 가득했고 얼음 빙벽으로 덮여 있었다.

    눈보라가 불어와서 시야까지 방해했다.

    “좋은 환경은 아니군.”

    M은 옷깃을 여미며 유리한 지역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까는 수중.

    이번에는 빙하였다.

    살얼음에 발이 푹푹 빠지고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

    J의 생각도 같았다.

    “이런 곳에서는 오래 못 싸워.”

    최악의 환경만 연속해서 나왔다.

    유진하도 좋지 않은 상황임을 직감했다.

    “우리가 먼저 출전해야 돼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유진하는 이미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올인이었다.

    J와 M을 필두로 용병팀 20명 전원이 출전한다.

    유진하는 최후의 1인으로 남았다.

    “호오.”

    탑의 주인은 인간 팀이 예상과 다르게 전력으로 나서자 흥미를 가졌다.

    ‘유진하만 남기고 모두 나왔다?’

    어떤 몬스터를 투입할지 고심하다가 문득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탑의 주인.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너는?”

    유진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분한 눈빛으로 탑의 주인을 쳐다봤다.

    단호한 그 눈동자에서 탑의 주인은 무언가 말없이 전해지는 신호를 받았다.

    의도가 있었다.

    ‘어쩌면…….’

    탑의 주인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우리도 전부 보낸다.”

    탑의 주인은 본인만 제외하고 남은 몬스터를 모두 투입했다.

    이쪽도 올인이었다.

    남은 경기의 라인업이 결정됐다.

    4번 방.

    요원팀 20명 VS 몬스터 18마리.

    이어서 5번 방.

    유진하 VS 탑의 주인.

    세트 스코어는 2:1

    인간 팀은 한 번만 이기면 승리한다.

    4번 방의 대결은 곧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시작하자마자 의외의 선택이 나왔다.

    “이번에도 우리가 졌어.”

    J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방금 이소민의 행동과 완전히 똑같았다.

    “역시 그런가.”

    탑의 주인은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몬스터 18마리를 상대한다면 인간들의 승산은 확실히 떨어진다.

    기적적으로 이긴다 해도 전멸에 가깝게 대다수를 잃을 게 분명했다.

    “인간들은 불필요한 죽음을 싫어한다.”

    확실히 그랬다.

    탑의 주인은 인간들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인간 집단은 특이한 점이 많았다.

    서로 챙기며 함께 살아남으려고 들었다.

    몬스터는 달랐다.

    집단을 이루는 몬스터들은 약한 생명체를 그냥 버린다.

    약한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비정한 적자생존의 규칙을 따른다.

    ‘인간과 몬스터는 다르다는 건가?’

    탑의 주인은 요원들이 저렇게 나온 다음 이유도 바로 깨우쳤다.

    바로 유진하의 존재였다.

    마지막에 저 녀석이 나서면 반드시 이길 거라는 믿음이 인간들에게 있었다.

    ‘재미있군. 하긴 그럴 만하지.’

    앞선 시련에서 유진하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최고의 두뇌와 판단력을 겸비했고.

    인간 팀의 두뇌를 담당했다.

    아마도 유진하가 스스로 마지막에 배치되기를 자청했으리라.

    ‘나에게 일대일 도전을 걸겠다는 거지.’

    아까 탑의 주인을 계속 쳐다본 이유도 도발이었다.

    당신과 일대일로 5경기 마지막에 붙고 싶다.

    유진하는 암묵적으로 그런 메시지를 담아 던졌고, 탑의 주인은 바로 알아차렸다.

    둘 다 두뇌가 뛰어난 타입이다.

    서로의 의도는 쉽게 간파했다.

    ‘일대일로 끝을 내자는 건가. 그런 도전을 피할 순 없지.’

    유진하와 탑의 주인.

    대등한 일대일 대결.

    최후의 승부를 그렇게 선택했다.

    4번 방은 J의 선언에 따라 인간 팀이 또다시 기권패로 마감했다.

    “유진하, 네가 원한대로 했어.”

    J는 침착하게 모두를 다독이며 장외로 나오자마자 유진하에게 다가갔다.

    ‘더는 희생하지 않고 이기고 싶어요.’

    유진하의 그 말에 모두가 따랐다.

    “자신 있나?”

    M이 다가와서 유진하의 가슴에 주먹을 툭 대며 격려해 줬다.

    유진하는 미소를 지으면서 주머니에 넣어 둔 카드를 전부 꺼냈다.

    100장의 카드였다.

    마지막 승부에 나서는 무기는 이것이 전부였다.

    “너에게 다 맡기겠다.”

    용병 대장 제이슨은 몸을 추스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진하, 힘내요.”

    모든 힘을 짜내서 에어리스 역시 응원의 말을 건넸다.

    이소민은 말없이 유진하의 등만 토닥여 줬다.

    “다들 고마워요.”

    부담이 어마어마할 텐데도 유진하는 의연했다.

    어깨를 당당히 펴고 마지막 최종 장소로 향했다.

    멀리서 탑의 주인은 새로운 제안을 던졌다.

    “5경기는 우리 둘이서만 가는 게 어떤가?”

    최상층 5번 방에서 일대일 대결.

    단둘이서만 대결하자는 제안이었다.

    유진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지.”

    세트 스코어는 2:2.

    이제 마지막 승부만이 남았다.

    탑의 주인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공간이 열리더니 숨겨진 계단이 내려왔다.

    환한 빛으로 만들어진 최상층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제 가겠다.”

    탑의 주인이 먼저 올라가고 뒤이어 유진하가 따라갔다.

    남은 멤버들은 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하…….”

    심한 부상 탓에 호흡도 고르지 않았던 에어리스는 마지막까지 그 모습을 쳐다봤다.

    어쩌면…….

    아니,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이라는 인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에어리스는 처음으로 기도했다.

    ‘다시 저 계단으로 무사히 내려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여기로군.”

    최상층은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그곳이었다.

    첫 번째 왕좌의 시련에 있던 그 방과 동일했다.

    “같은 곳이었어.”

    유진하는 슬며시 운을 떼듯이 혼잣말을 했다.

    탑의 주인은 고개를 돌리며 방의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빛이란 생명과도 같지. 나는 여기서 항상 살아 있다고 느꼈다.”

    잠시 말끝을 줄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일대일 승부를 원했지?”

    “…….”

    유진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예상했다는 듯이 탑의 주인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몸은 하얀빛에 휘감겨 어떤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런 빛의 방에 들어오면 그 형체조차 가려져 실루엣만 겨우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빛의 보호색과 비슷했다.

    “그 제안을 왜 받아들였는지 아나? 자신감 넘치는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면 진정으로 이겼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

    유진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탑의 주인은 지금까지 네 번의 시련을 내렸다.

    왕좌의 시련.

    문의 시련.

    통로의 시련.

    힘의 시련.

    대결은 최상층.

    막바지에 있었다.

    “약속은 기억하겠지? 만약 너희가 지면 나는 몬스터들과 함께 인간들의 세계를 공격할 거다.”

    “내가 이기면?”

    유진하는 당돌하게 나왔다.

    상대가 위협조로 나오면 이쪽에서도 같은 대응으로 맞섰다.

    탑의 주인은 자신감을 표출하듯이 더 강한 빛을 발휘했다.

    “정말 이기면 그때 알려 주지.”

    가벼운 신경전이 오갔다.

    유진하는 100장의 카드를 양손에 나눠 들고 전투 자세에 들어갔다.

    하얀빛을 전신에 휘감은 탑의 주인도 변화가 일어났다.

    파아아.

    녀석의 온몸에 쌓였던 빛이 조금씩 손으로 모이면서 천천히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의 손, 카드로 모였다.

    빛의 카드.

    녀석은 레어 카드를 가졌다.

    유진하는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낸 상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탑의 주인이라 불리는 존재인가.’

    녀석은 몸을 감싸던 빛을 걷어내자 에메랄드 초록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인간 형태를 드러냈다.

    말쑥한 외모에 차분하면서도 여유로운 눈매를 지녔다.

    마치 미소년 같은 그 모습이 녀석의 진짜 정체였다.

    “정말 사람이랑 똑같은 모습이야.”

    지성을 가진 존재답게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형이었다.

    빛의 카드를 가진 탑의 주인.

    100장의 카드를 가진 유진하.

    마침내 마지막 경기에서 마주했다.

    5번 방.

    최종 승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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