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마지막 시련(3)
다섯 개의 방에서 5판 3승의 승부가 벌어지는 게임.
1번 방은 제이슨과 용병팀의 맹활약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현재 스코어는 인간 팀이 앞서게 되었다.
“후우, 정말 아슬아슬했어.”
이소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치열했던 아까 그 대결은 오금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제 올라가요.”
유진하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여기는 탑이었고, 다음 2번 방은 위층에 있었다.
“다들 첫 승부는 좋았으니까 이대로 가요.”
총지휘를 맡은 J가 의욕을 돋우기 위해서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실 원정대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첫 승부는 이겼으나 희생이 컸던 탓이었다.
용병팀은 12명을 잃고 5명만 생환했다.
저력을 발휘했으나 거대 몬스터가 너무나 강했다.
저런 상대가 또 나온다면?
승산은커녕 목숨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다들 불안과 압박을 더 받아갔다.
마치 처형장의 계단을 올라가는 사형수처럼 불길하고 음울했다.
“아이, 다들 기운 좀 내라고.”
이소민도 맞장구를 쳐줬다.
일부러 사람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 주고 파이팅을 불어넣었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밝아지지 않는 것은 사실 다들 머릿속으로 불리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용병팀은 17명이 나섰고, 시련의 규칙에 따라 재참가는 불가능했다.
즉, 우리는 이제 남은 23명으로 4번의 대결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상대는 겨우 한 명이었어.”
유진하는 알고 있었다.
저런 괴물 같은 녀석들이 아직 39명이나 있다는 소리였다.
두려운 감정이 모두의 뇌리를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남은 경기는 4경기.
두 번을 더 이겨야 했다.
“자자, 다음 경기에 집중하자고요.”
J와 이소민이 최대한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아까 1경기를 본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후유증을 받고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했다.
시간은 흘러 다음 문에 다다랐다.
“다 왔군.”
M이 2층 문을 열어젖혔다.
평평한 바닥 수십 개가 징검다리처럼 나뉘어 있었다.
밑에는 뜨거운 용암이 질척였는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용암으로 빠지면 사망이었다.
바닥을 뛰어넘으며 전투를 벌이는 장소였다.
굉장히 난이도가 있는 장소였다.
“까딱하다가 떨어지면 끝이네.”
당당했던 J조차 이런 용암 지대의 환경은 예상하지 못한 탓에 표정이 굳어 버렸다.
발이라도 헛디디는 순간 그대로 저 용암 속에 삼켜지고 만다.
“여기가 2번 방이다.”
탑의 주인은 이번에도 반대편에서 일행을 맞이했다.
“저번엔 우리가 먼저 선수를 내보냈다. 이번에는 너희 쪽에서 먼저 결정할 차례지.”
다섯 번의 경기는 서로 번갈아서 선수를 먼저 내보내게 된다.
이 방식은 당연히 나중에 내보내는 쪽이 유리하다.
상대에서 나온 선수를 보고 이쪽 사정에 맞춰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경기도 호랑이 몬스터를 상대로 용병팀 17명을 내보내서 승리했다.
먼저 내보내는 쪽이 상당한 부담을 가지는 규칙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
M은 슬쩍 곁눈질로 바라봤다.
최종 지휘권이 J에게 있었기에 결정을 지켜봐야 했다.
총지휘관이 맡기에 어려운 결정이었다.
누구를 내보내야 하나.
붉은 용암이 넘실거리는 이곳에 누구를 내보내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정예 요원들마저 주저하고 있었다.
“제가 나가겠어요.”
자원자 한 명이 손을 들어 자청했다.
에어리스였다.
의외였다.
아니, 어쩌면 어울리는 결정이기도 했다.
전투에 강한 에어리스였으니까.
유진하는 깜짝 놀라서 에어리스를 말리려고 다가갔다.
“에어리스, 정말 나가겠다고?”
“괜찮아요. 저는 준비됐어요.”
이미 에어리스는 등에 멘 대검을 움켜쥐고, 마음의 준비를 마쳤는지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럼 같이 나갈까?”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옆을 나란히 따라 걸었다.
말리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나, 이미 결심을 굳힌 에어리스에게 설득은 무의미했다.
심지어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혼자 나가고 싶어요.”
에어리스는 굳게 마음먹은 눈빛을 간직했다.
발걸음은 의외로 사뿐사뿐하고 차분했다.
“그냥 놔둘 거야?”
이소민은 걱정이 많이 되어서 유진하에게 물어봤다.
홀로 걸어가는 에어리스의 뒷모습.
주저함이 없는 저 걸음걸이.
유진하는 가만히 바라보면서 에어리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에어리스는 현재 인간 팀 중에서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가졌다.
이른바 필승 카드였다.
J는 에어리스를 잠깐 불러 세웠다.
“에어리스, 잘 부탁할게요.”
살짝 어깨를 토닥여 주며 응원해주자 에어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최선을 다할게요.”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요원 중에서 같이 참가하겠다는 자원자도 나왔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감사하지만 이번에는 저 혼자 해볼게요.”
에어리스는 다른 지원자들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혼자 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유진하는 한 가지 물건을 맡기려고 근처에 다가왔다.
“대비는 해야지.”
카드 하나.
에어리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진하, 이건……?”
“위험하면 써도 돼. 이 경기의 규칙은 사람은 재참가가 안 되지만, 무기나 장비는 돌려가면서 써도 되잖아.”
유진하는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했다.
게임에는 반드시 빈틈이 있다.
무기와 카드는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었다.
유진하는 용병팀의 희생으로 얻은 몬스터 소환 카드를 건넸다.
1번 방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호랑이 몬스터가 카드 안에 있었다.
“무기를 빌려 줘도 된다면 내 것도 주지.”
제이슨은 자신의 도끼를 에어리스에게 건네주었다.
“무사히 살아와서 돌려주면 된다.”
“정말 고마워요.”
이소민은 빙룡의 가방을 주섬주섬 살피더니 장검을 꺼냈다.
“이것도 가져가. 얼음 속성이니 용암이 많은 여기선 더 좋을 수도 있어.”
푸른 갑옷의 남자, 시리안이 쓴 장검을 주었다.
에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챙겨 주는 장비를 고맙게 받았다.
“이렇게만 가져갈게요.”
필요한 물품만 챙긴 장비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에어리스 장비 상태〉
버스터 슬레이어 대검.
얼음 속성의 장검. (이소민 소유)
속성 부여 건틀릿 장갑.
목걸이.
몬스터 소환 카드.
완력의 도끼와 검은 안개의 도끼.
(제이슨 소유)
무기는 전부 등이나 옆구리에 채웠다.
꽤 짐이 많긴 했는데, 혼자 나선다면 그만한 대비를 해야 했다.
에어리스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갈게요.”
다들 건투를 기대하며 격려했다.
“힘내.”
이소민도 크게 소리치고 팔을 흔들며 응원했다.
옆에 있던 유진하는 조용히 에어리스가 걸어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진하, 꼭 돌아올게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살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유진하는 웃으면서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어 보내 주었다.
“기다릴게.”
2번 방에 나서는 인간 팀의 선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에어리스.
단 혼자였다.
“결정했나 보군.”
탑의 주인은 조용히 참가자를 바라봤다.
쌍 도끼와 장검, 대검으로 중무장한 에어리스가 혼자 당당하게 나섰다.
“자, 그쪽은 누가 나오죠?”
“…….”
탑의 주인은 가만히 있었다.
에어리스의 실력에 걸맞은 실력자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만큼 나간다.”
나오는 녀석들은 무려 열 명이었다.
장외에서 지켜보던 이소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많은데?”
스코어는 1:0
이번에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듯이 무려 열 명을 내보냈다.
이만큼의 숫자를 에어리스 혼자서 상대해야 했다.
“2경기를 시작하지.”
용암이 밑에 펄펄 끓었다.
군데군데 있는 발판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에어리스는 거듭 다짐했다.
등에 멘 대검을 서서히 꺼냈다.
“준비됐어요.”
익숙한 무기부터 먼저 선택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어서 움직임이 무거워질 염려는 없었다.
“후우.”
대검을 치켜든 에어리스의 자태는 흔들림 없이 가만히 앞을 응시했다.
마치 온몸에서 오오라가 발산되듯이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떤 상대가 다가와도 일격에 베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전신에 배어있었다.
“크르르르르.”
덤프트럭만큼 커다란 몬스터 세 마리 다가왔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매서운 눈매.
덩치는 에어리스의 3배에 달하는 괴물들이었다.
에어리스의 정면과 양옆을 포위하면서 녀석들은 다가왔다.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낸 채로 경계심을 가졌다.
“조심히.”
에어리스는 다시 숨을 내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 마리의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 한 녀석도 놓쳐선 안 되었다.
그동안의 전투를 거치면서 야성적인 괴물들의 행동이 얼마나 변수가 많은지 잘 알고 있었다.
“후우우.”
야생의 움직임은 치명적이었다.
한 번 놓치면 어느새 목덜미를 물린다. 한순간에 죽는다.
에어리스의 눈빛은 차분히 저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최대의 집중력을 유지했다.
에어리스와 세 명의 괴물.
먼저 움직인 쪽은 에어리스였다.
“하앗!”
정면의 몬스터가 움찔했다.
에어리스가 먼저 치고 들어올지는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양옆의 녀석들에게 맡기려는 듯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에어리스가 과감하게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순간적인 움직임이 재빨랐다.
단숨에 달려들어서 몬스터의 머리를 향해 대검을 내리쳤다.
카앙.
매서운 일격이 내리꽂혔다.
“크어어억!”
몬스터는 큰 충격을 받고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원래 녀석들은 셋이서 나름대로 작전을 짰다.
타이밍을 맞춰서 동시에 달려들려고 했는데, 먼저 에어리스가 덤비자 계획이 틀어지고 만 것이다.
“크으으윽!”
정면의 몬스터가 공격을 받자 다른 괴물들도 흠칫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
“하아압!”
에어리스는 단숨에 양옆의 몬스터에게도 대검을 휘둘러 정확히 몸을 베어 버렸다.
“크아아아아!”
세 마리의 몬스터는 아까의 기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기회였다.
버스터 슬레이어 대검이 부드럽게 회전했다.
물의 흐름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는 그 움직임은 춤을 추듯이 화려했다.
파아아아.
앞서 나온 세 마리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모조리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쿠웅.
육중한 진동이 느껴졌다.
“후우.”
살짝 숨을 고른 에어리스가 강렬한 눈빛으로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바라봤다.
“일단 셋.”
이제 남은 상대는 일곱이었다.
방금 화려한 검무를 보인 에어리스는 빈틈없이 강하고 아름다웠다.
버드나무처럼 유연한 그 움직임은 육중한 대검이라 연상되기 어려울 만큼 화사했다.
과연 원정대 최고의 무력답게 강인했다.
“대단하군. 저번보다 훨씬 나아졌어. 나날이 발전하는군.”
장외에서 지켜보던 M은 감탄을 금치 못하더니 수첩을 꺼내서 에어리스의 항목을 확인했다.
지력: C
전투력: SS
민첩: A
정신력: B
체력: SS
몬스터 세 마리를 순식간에 제압하는 모습을 보자 전투력 등급을 상향시켰다.
전투력: SS → SSS
에어리스는 대검을 다시 집중해서 쥐었다.
남은 상대는 일곱이었고, 아까보다 훨씬 큰 녀석도 존재했다.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크으으으으.”
더 큰 녀석들이 다섯 명이나 다가왔다.
이번에는 빈틈없이 에어리스의 사방을 포위했다.
아까와 다르다는 듯이 몬스터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에어리스는 건틀릿에 힘을 주었다.
“라이트닝.”
명령을 내리자 건틀릿에서 번개가 휘감겼다.
동시에 뻗어나간 번개가 대검에 감돌았다.
몬스터들은 대검에 속성이 부여될 거라고는 전혀 알지 못했다.
번개가 제대로 적중하면 추가 대미지가 크게 들어가는데 맷집이 좋은 괴물이라 해도 마비 정도는 충분히 일으킬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몬스터들은 번개를 보고 오히려 자극받았는지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아압!”
에어리스는 기합 소리와 함께 스텝을 움직였다.
사실 강인한 완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속도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민첩함 부족은 에어리스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극복하기 위해서 개인 훈련을 열심히 했다.
지금은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정답은 스텝 활용이었다.
‘최적의 움직임.’
불필요한 발걸음이 많으면 스피드가 떨어지곤 했다.
쉽게 말해, 두 걸음이면 충분한데 세 걸음을 걸었다면 그만큼 더 느려진다.
‘걸음과 스텝.’
에어리스는 정확하고 간결한 발걸음을 계속 연습했다.
매일 빠짐없이 연습했고 지금 그 결과가 드러났다.
‘속력.’
무려 다섯 마리가 사방에서 덤벼들었음에도 에어리스는 적절한 스텝으로 피할 루트를 찾아냈다.
‘하나. 둘. 셋.’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피하는 동시에 반격 기회가 왔다.
번개가 실린 대검을 휘둘러서 몬스터에게 타격과 동시에 마비 상태까지 주었다.
“하압!”
에어리스가 온 힘을 다해 대검을 내질러 몬스터 하나를 멀리 쳐냈다.
데굴데굴 튕긴 녀석은 무대에서 떨어져 용암 속으로 빠져 버렸다.
“캬아아아악!!!”
펄펄 끓는 용암의 아가리 속에 삼켜졌다.
에어리스는 빠르게 대검을 휘두르고 번개 속성이 사라지자 다시 불렀다.
“라이트닝.”
다시 번개가 대검에 서렸다.
나머지 몬스터 역시 마비 상태로 만들어 베어 버리거나 일부는 강하게 쳐내서 용암에 빠뜨렸다.
“대단해. 압도적이야.”
지켜보던 J와 이소민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똑똑히 지켜봤다.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를 제압하는, 저 강인하면서 아름다운 에어리스의 자태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모두가 이번 승부는 이겼다고 안심할 즈음이었다.
한 사람은 달랐다.
“아직이야.”
유진하는 끝나지 않았다고 여겼다.
에어리스가 여덟 마리의 몬스터를 제압했으나 아직 둘이 더 남았다.
작은 형체와 커다란 형체.
두 괴물은 가만히 에어리스의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후우. 후우.”
에어리스는 다섯 마리의 거대 몬스터를 마저 제압한 후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은 건 둘…….”
열 명으로 들어왔던 상대는 이제 둘로 줄어들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던 그 둘은 아직 망토를 쓰고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말하는 몬스터?
녀석은 서서히 망토를 벗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에어리스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당신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매.
냉철하고 무표정한 얼굴.
절대 잊을 수 없는 푸른 갑옷.
일전에 에어리스와 일대일 대결을 벌였고 패배 직전 극한까지 몰아넣었던 그자였다.
‘시리안.’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밝혔던 푸른 갑옷의 기사가 눈앞에 나타났다.
절체절명의 승부에서 강적이 나타났다.
믿을 수 없었다.
“크오오오오.”
시리안의 옆에서는 익숙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푸른 날개와 얼음 조각처럼 빚어진 육체와 서리. 장외에 있던 이소민은 몬스터를 보고 소리쳤다.
“설마 빙룡이라고?!”
마지막으로 있던 두 명의 정체는 푸른 갑옷의 기사 시리안과 냉기를 머금은 서리의 빙룡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인 지금.
재회의 순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