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두 번째 시련(4)
“저는 세 번째 시련을 받았어요.”
유진하의 말은 놀라웠다.
마지막 방에 모인 모두가 숨을 죽이고 침묵을 지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소민은 당황한 나머지 손까지 살짝 떨리면서 유진하를 가리켰다.
“너 혼자 시련을 받았다고? 정말로?”
“그 녀석이 저한테 머릿속으로 전언을 보냈거든요. 몰래 조건을 제시했어요.”
탑의 주인과 유진하는 모종의 대화를 나누던 거였다.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두 번째 시련은 멤버들이 치른다.
세 번째 시련은 유진하가 단독으로 푼다.
이거였다.
의문의 존재는 두 군데로 팀을 나눠서 동시에 시험을 진행했다.
“저는 받아들였어요.”
유진하가 자신만만한 눈빛을 짓더니 어안이 벙벙한 에어리스를 쳐다봤다.
“뭐라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위험한 제안인데 왜 받아들였을까?
모두한테 왜 말하지 않았을까?
“내가 시련 하나를 줄이고, 다른 하나는 멤버들끼리 잘 풀 수 있을 거라고 여겼거든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식으로 유진하가 반문했다.
“그러니까 너는 혼자서 시련을 풀어 낼 자신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두가 머리를 맞대면 풀어 낼 거다. 이렇게 생각했다고?”
유진하의 계산은 그랬다.
자기는 혼자서 충분하고, 나머지는 모두가 머리를 굴려서 시련을 푼다?
더 쉽게 말하자면, 모두가 궁리해 봐야 유진하 하나만 못하다는 소리였다.
이소민은 너무 황당해서 입을 쩍 벌렸다.
‘저게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참 기분이 나쁘네.’
솔직히 유진하의 두뇌를 인정하기에 저 말이 옳다고는 생각했으나,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뭐지?”
제이슨이 의문을 던지자 M이 대신 대답했다.
“뻔하겠지. 그게 녀석의 조건이었을 테니까.”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독단적인 행동은 주의해야 했으나 녀석의 요구였다면 정상참작이 될 만은 했다.
“그렇군.”
M은 수첩을 꺼냈다.
유진하의 항목을 훑어보더니 기록된 능력치를 다시 수정했다.
지력: SS → SSS
전투력: 불명
민첩: B
정신력: A
체력: C
대신 주의사항도 하나 적었다.
- 독단적으로 개인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수첩을 덮은 뒤에 M은 다시 중요한 얘기를 건넸다.
“네가 받은 시련은 어떤 거였지?”
유진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쉽게 설명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저보고 밖에서 비상구를 찾으라고 했죠.”
그 말을 듣자마자 이소민은 실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참으려다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게 뭐야?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에어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비상구 찾기는 진하가 매번 하는 거잖아요.”
“뭐, 녀석은 몰랐을 테니까요. 잘 숨겨 놓긴 했는데 그래도 금방 찾았어요. 5분 정도 걸렸나?”
유진하도 빙그레 해맑은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5분 대 12시간.
양쪽에서 소모된 시간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심지어 유진하는 혼자서 시련을 통과했는데도.
지력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다른 사람들은 거의 12시간이 지나서야 이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게 좀 문제가 어려웠어.”
이소민이 흠흠거리면서 자신들이 겪은 시련의 문제를 알려 줬다.
“문의 시련이었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이소민 자신이 그 두 번째 시련을 풀었다는 소리를 꼭 곁들였다.
“아아, 다들 받은 물건이 있었군요. 이걸 합쳐서 문을 만들면 되는 거 같은데.”
유진하는 바로 핵심을 짚어냈다.
“와, 바로 아네?”
시련을 듣기만 하고도 곧바로 정답을 알아냈다.
다들 어이가 없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무려 40명에 가까운 일행이 있는 고생은 고생대로 해가며 12시간이나 걸린 문제.
유진하는 듣자마자 맞춰 버렸다.
“과연 다르군.”
M은 능력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력은 SSS급 독보적인 단계다.’
모두의 틈에서 유진하가 기지개를 켜더니 살짝 하품까지 했다.
‘평소에는 긴장감이 없어 한심해 보이기도 하는데, 던전만 오면 다른 녀석 같아지는군.’
처음 만날 때는 하이에나라고 업신여겼는데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다.
혼자서는 몰라도 주변에 에어리스와 이소민이라는 믿을 만한 동료가 생기자 대활약했다.
‘어쩌면 녀석에게는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군.’
이제는 유진하가 없는 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강해졌다.
정말로 마술사 같았다.
이제 유진하는 공략전에서 아주 뛰어난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에어리스는 하얀빛으로 휘감긴 방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모두가 있었으나 탑의 주인은 정작 보이지 않았다.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시련도 너희가 이겼다.”
그 음성은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련이 동시에 클리어되었는데도 녀석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덤덤했다.
“이제 남은 시련은 단 하나야.”
유진하가 소리쳤다.
녀석은 여러 개의 공간을 소유한 지배자였다.
그는 유진하에게 네 개의 시련을 제시했다.
이제는 마지막 시련만이 남았다.
“그렇다. 다음 하나만이 남았지.”
탑의 목소리는 말끝을 흐렸다.
불쾌한 기분을 억누르는 듯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전리품은 주겠다.”
그 말과 동시에 방을 환하게 밝힌 빛이 소용돌이처럼 하나의 점에 빨려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저기.”
빛이 사라지자 전리품 상자가 덩그러니 나타났다.
“누가 열까?”
용병 대장 제이슨이 손에 든 도끼를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저 전리품을 가져가면 공간은 사라진다.
이제 밖으로 나갈 준비만 하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영광의 자리는 누가 차지해야 어울리려나.”
제이슨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이윽고 한 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가라.”
영광의 주인으로 유진하가 선택됐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밖에 적임자가 없다. 혼자 멋대로긴 하지만 실력만큼은 최고야. 정말 마술사 같은 놈이다.”
제이슨은 솔직하게 유진하를 인정해 줬다.
처음에 업신여기던 자세와는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제이슨은 실력 지상주의자답게 오로지 그것만으로 대우했다.
“스카웃할 수 있다면 꼭 데려오고 싶은 정도야.”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프리랜서 쪽이 더 좋아서요.”
유진하는 그의 제안을 가볍게 넘겨 버리더니 전리품 상자에 다가갔다.
모두가 쥐 죽은 듯이 숨을 죽였다.
고요한 정적과 함께 전리품 상자를 여는 모습을 지켜봤다.
“나왔다…….”
유진하의 손에 전리품이 있었다.
“레어 카드.”
물건을 얻자마자 에어리어 공간에 진동이 시작됐다.
균형이 무너지고 뒤틀리는 소리가 비명처럼 느껴졌다.
옆에 차원문이 생겨났다.
“자, 나가자.”
M이 말하기 무섭게 모두가 빠르게 달려갔다.
전원이 나가자 공간은 텅 비어 버렸다.
버려지고 서서히 붕괴되는 곳.
완전히 소멸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가.”
탑의 주인은 자신의 두 번째 공간이 부서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두 번째지만 세 번째 공간과 합친 곳이었다.
그것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하나야.”
이제 그가 소유한 공간은 단 하나만 있었다.
거기서 물러설 수 없는 최종 시련을 벌이게 되었다.
“결판은 곧 내겠다. 준비하지.”
그는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무너지는 공간을 뒤로하고, 마지막 결전의 날을 고대했다.
* * *
원정대가 차원문에서 모두 빠져나왔을 때는 사막의 밤이 깊어진 시각이었다.
“성공이다.”
공략전에서 나온 멤버들은 안도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시원한 물을 마시거나 얼굴에 뿌리며 무사히 살아 돌아온 기쁨을 만끽했다.
“후우.”
유진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잠시 지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공략에 임하면 버릇처럼 주변을 살피는 경향이 있었는데, 굳이 돌아와서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본인도 그걸 깨닫고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전리품은 구했습니까?”
밖에서 대기하던 요원이 문득 유진하에게 다가왔다.
계약상 공간에서 얻은 물건은 정부의 차지였다.
그때였다.
“아아, 여기 이거야.”
제이슨이 유진하의 옆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가 손으로 내민 물건은 낡은 항아리였다.
또 항아리?
저번에도 평범한 항아리를 받았던 대기 요원은 이번에도 엉겁결에 건네받았다.
“저번에도 항아리였는데.”
“이거 참. 항상 역사는 반복되는 거지. 이번에도 그런 거야. 다 세상일이 그런 거라고.”
제이슨은 대기 요원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려보냈다.
전리품을 숨겨 주는 제이슨을 보면서 유진하는 잠깐 그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무언의 시선을 교환했다.
제이슨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진짜 전리품은 네가 가져라.’
진짜 주인에게 전리품이 가야 한다.
암묵적으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이네. 알고 있었지만…….”
유진하는 손에 든 카드를 슬쩍 뒷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레어 카드였다.
일반 카드는 그동안 전리품으로 받은 적이 있었으나, 레어 카드는 한 번도 없었다.
무슨 능력이 있고 어떤 가치가 있는지 얼른 숙소에 돌아가서 살펴보고 싶었다.
“자동차로 데려다주지.”
M이 손을 들어 유진하와 에어리스, 이소민 세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서 밤의 사막을 갈라 가까운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다들 정말 고생했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앞을 보면서도 M은 인사말을 빼먹지 않았다.
“덕분에 푹 쉴 수 있겠네요.”
뒷좌석에 앉은 이소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푹 늘어졌다.
에어리스는 약간 피곤한 기색이 있었으나 체력은 여전히 자신 있는 눈치였다.
“그런데 진하, 아까 얻은 카드는 뭐예요?”
카드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미 유진하는 조수석에 앉아서 카드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아직은 사용법을 모르겠어요.”
전리품으로 얻은 무기나 아이템은 사용 설명서가 없다.
덕분에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사용법을 몰라서 싸게 팔았는데, 훗날 레어급의 귀한 아이템으로 판명이 난 경우도 있었다.
“힌트는 없는데.”
카드에는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빈 곳은 있었으나 딱히 뭔가 적혀 있던 흔적은 없었다.
빈 카드였다.
“에어리스가 볼래? 이건 처음 보는 카드라서 나도 잘 모르겠거든.”
에어리스는 건네받은 레어 카드를 이모저모 살폈다.
“흐음. 글자가 보여요.”
어? 글자는 없었는데?
이소민이 곁눈질로 카드를 살펴봤는데 역시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글자 없는데?”
“아니에요. 있어요. 빛으로 옅게 발산되는 힘이에요.”
에어리스의 눈에는 정말 글자가 보이는 듯했다.
원래 탑의 시련에 들어갈 때도 던전의 문자를 정확히 읽었다.
평범한 사람과 에어리스는 확실히 달랐다.
“한번 읽어 볼게요.”
에어리스는 소리 내어 천천히 읽었다.
“몬스터 소환 카드.”
역시 레어 카드였다.
무려 몬스터를 소환하는 능력은 확실히 최상급에 가까운 가치가 있었다.
에어리스는 계속 읽어내려 갔다.
“제압한 몬스터 하나를 카드에 봉인할 수 있다. 봉인된 몬스터는 카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의 몬스터만 카드 안에 봉인할 수 있고, 대상은 바꿀 수 있다.”
능력 내용을 듣자 다들 조용하더니 결국 이소민이 먼저 소리쳤다.
“와, 대박이네. 몬스터를 소유할 수 있다니. 그런 카드는 처음 봐.”
카드를 탐내는 상인의 눈빛이 되었다.
물론 유진하가 눈치로 알아차리고 얼른 카드를 돌려받았다.
“이건 제 거라고요.”
유진하가 카드를 바지춤에 넣어 버렸다.
머쓱해진 이소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도 알고 있거든?”
몬스터를 잡아서 자신의 부하로 삼는 카드는 유진하도 처음 보았다.
확실히 레어 등급다웠다.
“소환 카드라…….”
M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졌다.
“이거 아까운데? 그 카드를 조금만 먼저 얻었으면 좋을걸.”
“네?”
“생각해 봐. 저번에 빙룡을 잡은 적이 있잖아. 그때 이 카드가 있었으면 잡았을 텐데.”
매서운 얼음의 힘을 발휘하던 빙룡은 지금껏 상대한 종류 중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에 속했다.
그런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공략전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다음에 좋은 몬스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유진하 역시 아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지금은 귀한 카드에 더 관심이 쏠렸다.
탐스럽게 반짝이는 카드에는 영롱한 빛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