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버킷 리스트
“오늘은 어디 갈까요?”
에어리스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아침부터 씩씩하게 거실에 나왔다.
“에어리스, 우리 돌아온 지 하루밖에 안 됐거든?”
반면에 이소민은 거실 침대에 널브러져 누워 있었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서 비몽사몽인 채로 잠결에 대답했다.
반면에 에어리스는 생생했다.
“아침이잖아요. 적응하려면 낮잠을 자면 안 된다고 들었어요.”
에어리스가 소파에 누운 이소민을 번쩍 들어서 일으켜 세웠다.
“아이, 그냥 놔둬.”
귀찮아서 다시 소파에 누우려 해도 막아서는 에어리스의 힘이 너무 셌다.
무적의 골키퍼가 골문을 지키는 기분이었다.
희망은 없었다.
결국 이소민은 강제로 기상 완료했는데, 자신의 팔뚝을 살펴보니 에어리스한테 잡힌 부분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세냐.”
“제가 너무 그랬나요? 죄송해요.”
어색해진 에어리스가 얼른 부엌에서 커피 하나를 냉큼 타왔다.
“고마워.”
커피까지 엉겁결에 받았으니 더는 잠투정을 부리기 어려워졌다.
홀짝홀짝.
에어리스와 둘이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문득 유진하가 생각났다.
‘혼자 빨리 일어나면 억울하잖아’라는 생각이 들자 이소민은 곧바로 벌떡 일어섰다.
“유진하, 너도 일어나!”
조용했다.
한 번 부르고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으리라.
이소민이 막 튀어가려는 순간, 멀리서 하품을 하며 유진하가 나왔다.
“아침부터 다들 팔팔하네요.”
기지개를 켜던 유진하가 문득 두 사람의 커피잔을 바라봤다.
“나도 하나 먹어야겠네.”
부엌에서 커피 하나를 가져온 유진하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셋은 나란히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홀짝거렸다.
따뜻한 커피에 아침 햇살이 비추니 따사로웠다.
아침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에어리스는 벌써 뭔가를 생각했는지 활기찼다.
“버킷 리스트라고 있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은 적어 두는 거라고.”
“그런 게 있지.”
이소민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봤어요.”
이때를 틈타서 에어리스가 얼른 종이를 가져왔다.
엉겁결에 그 종이를 받았는데 손에서 마치 두루마리가 풀어지듯이 종이가 줄줄 흘러내렸다.
종이에는 긴 리스트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본 이소민이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되물었다.
“이게 뭐야?”
“하고 싶은 목록이에요.”
너무 많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목구멍에 꾹 눌러 담았다.
어이가 없어진 이소민과 달리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살펴봤다.
“해외여행. 자전거 여행. 한강 구경. 남산 타워 전망대 올라가기.”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에베레스트 등반. 심해 탐험.”
대망의 끝은 여기였다.
“우주여행. 달 탐사. 화성 탐사…….”
여기서 자기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고, 더 이상의 목록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으음. 가능성이 있는 것만 골라야겠다.”
유진하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기억을 잃은 탓인지 에어리스는 유독 호기심이 많았고 체험하기를 좋아했다.
평소에는 차분했는데 의외로 활달한 면도 많았다.
“이건 오늘도 할 수 있겠다.”
여름 바다에 가기.
유진하가 목록에서 하나를 가리키자, 에어리스도 맘에 들었는지 활짝 웃었다.
“여름도 거의 끝나가잖아요. 오늘 하면 좋을 거 같아요.”
바다 구경은 이소민도 괜찮았는지 금세 기운을 냈다.
“그것도 괜찮겠다. 최근 계속 힘든 전투만 했는데 힐링도 중요하잖아.”
어느새 이소민과 에어리스는 같은 마음이 되어 화기애애했다.
당장 바다로 가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함께 기뻐하며 앙상블을 이뤘다.
“알았어. 당장 바다로 가자.”
“바다는 내일이야.”
이소민이 손가락을 들더니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네?”
유진하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동자만 말똥말똥 움직였다.
“진하야, 생각을 해봐. 바다를 그냥 가니? 옷이든 물건이든 준비하고 가야지. 제대로 즐기려면 말이야.”
아아.
이소민의 지적은 예리했다.
센스 부족.
유진하는 머릿속에서 그런 부족함이 문득 떠올랐다.
이미 에어리스와 이소민은 벌써 쇼핑 준비에 집중했다.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생각에 곧바로 백화점을 향하기로 했다.
“아하하…….”
갑자기 쇼핑이 시작됐다.
두 사람은 필요한 물품이 많아서 구매한 물건이 담긴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다녔다.
신발부터 의상까지.
가장 중요한 물건은 수영복이었다.
“이런 거 입어도 되나요?”
이소민은 작은 수영복 하나를 내밀었다.
비키니 수영복을 손에 든 에어리스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맘에 들면 입는 거야. 난 자신 있거든.”
어깨를 핀 이소민이 당당하게 비슷한 수영복을 집어갔다.
나름대로 자신감이 충만했다.
머뭇거리던 에어리스는 옆에 있던 유진하에게 물어봤다.
“진하, 내가 입어도 괜찮을까요?”
유진하는 움찔했다.
에어리스가 든 비키니 수영복을 보니 갑자기 어색해져서 시선을 회피했다.
“뭐, 좋은 것 같기도.”
대충 얼버무리고 매장에서 나왔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쇼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직도 끝은 아니었다.
이제는 어느 바다를 갈지 상의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격론이 벌어졌다.
“동해가 좋아. 얼마나 깨끗한데.”
“남해도 넓고 아름답다고 들었는데요.”
공략전에서는 유진하의 판단이 최우선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고 일상에서의 주도권은 에어리스와 이소민에게 있었다.
“동해로 가자.”
“아니야. 남해야.”
던전 안에서도 없었던 진지한 토론이 계속 벌어졌다.
어디로 가냐부터 무엇을 먹느냐 등등.
긴 논쟁 끝에 동해로 결정됐다.
다음 날 아침.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 속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에어리스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유리창에 빗물이 흘렀다.
별안간 불안한 기분이 느껴졌는데 예감은 적중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전국적으로 내리는 비였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에어리스는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어리스, 내일은 비가 그친다고 했어.”
유진하가 다가와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한 모금을 마신 에어리스는 풀이 죽은 얼굴이 되어 소파에 앉았다.
“저는 괜찮아요. 진하.”
전혀 괜찮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에어리스는 의외로 차분했다.
내일은 갈 수 있겠지.
하지만…….
불행은 연속해서 오는 걸까.
불청객이 다음 날 일찍부터 찾아왔다.
“다들 잘 있었나?”
M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M은 오랜만에 유진하 일행을 만나러 왔다.
정작 에어리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졌다.
“왜 그러지? 환영까지는 아니어도 실망할 이유는 없잖아.”
영문을 모르는 M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나름 유진하 일행과 친해진 줄 알았는데 거리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아아, 그게 아니라…….”
유진하가 슬쩍 귓속말을 전해 줬다.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어제 비가 와서 오늘을 기다렸는데…….”
“아하. 내가 방해한 거군.”
M은 무안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가면 되잖아.”
유진하가 깜짝 놀랐다.
“용건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요?”
“그거야 뭐. 내가 조금 늦게 온 거라고 치면 되지. 다른 일이 있어서 늦었다고 할게.”
M의 해결책은 명쾌했다.
침울해하던 에어리스가 단숨에 표정이 햇빛처럼 밝아졌다.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지.”
오케이 신호를 받자 에어리스는 서둘러 방에 돌아가서 싸놓은 짐을 한가득 가져왔다.
마음이 급했는지 벌써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진하, 빨리 가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방에서 쉬고 있던 이소민까지 불러서 빨리 짐을 챙기라고 재촉했다.
에어리스 덕분에 모두들 서둘러 집을 나오게 되었다.
“자, 출발이다.”
자동차 운전은 M이 맡았고, 일행은 동해로 출발했다.
중간에 들린 휴게소에서는 통감자 튀김과 핫도그까지 배불리 먹었다.
“빨리 가요.”
에어리스는 기쁜 표정으로 가장 앞장섰다.
버킷 리스트에 적을 만큼 갈망했던 소원을 정말 이뤄서 기쁜 모양이었다.
기뻐하는 에어리스를 보면서 유진하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것도 해 줘야겠구나.’
마침내 바다에 도착했다.
해안가에는 피서철을 맞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부부나 가족, 혹은 연인과 친구 사이로 온 사람들이었다.
촤아아아.
푸르고 날랜 바다가 백사장 너머 끝없이 펼쳐졌다.
시원한 파도 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모래알마저 반짝이는 해변.
이소민과 에어리스는 어느새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마음껏 바다의 품에 들어가 안겼다.
“너는 안 가냐?”
파라솔 밑에 돗자리 하나 깔고 M과 유진하는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바다와 하늘은 비슷하게 시원하고 광활했다.
“M은요?”
짙은 선글라스에 정장과 구두를 신은 M은 누가 봐도 일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일단은 갑자기 소집될 수도 있어. 방심하지 않아야 해. 그게 내 일이다.”
“네, 그러시겠죠.”
유진하는 파라솔 너머의 하늘과 바다를 함께 바라봤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
귀가를 간지럽히는 바다 소리.
옅게 흘러나오는 푸른 내음.
저절로 눈을 감고 몸을 맡겼다.
새근새근.
잠시 낮잠을 자려는데 갑자기 유진하의 몸이 번쩍 올라갔다.
“어? 뭐야?”
에어리스였다.
몰래 파라솔에 와서 잠든 유진하를 가볍게 들어 올린 거였다.
“에어리스? 내려 줘.”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유진하를 들쳐 멘 에어리스는 바다 쪽으로 달려갔다.
“바다랑 만나 봐요.”
에어리스는 그대로 유진하를 바다로 던졌다.
그런데 힘 조절이 실패해서 너무 멀리 던져 버렸다.
“아앗! 진하!”
심하게 내던진 탓에 짐덩이처럼 바다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결국 해상 구조대에 의해 간신히 나올 수 있었다.
바닷물은 실컷 먹고 말이다.
이소민은 에어리스를 잔뜩 혼냈다.
“무슨 투포환이라도 던지니? 유진하가 공이야?”
“죄송해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으나 이후에는 세 사람이 함께 어울렸다.
한 명이 더 추가됐다.
다른 옷을 준비하지 않았던 M은 아까와 달리 근처에서 여름 반바지와 티셔츠를 사서 갈아입었다.
양복을 입고 누워 있다가는.
아까 에어리스가 바다에 던져 버리듯이 똑같이 당할까 봐 얼른 생각을 고쳐먹은 거였다.
“야호.”
네 사람은 바나나 보트부터 윈드서핑까지 다양한 체험을 했다.
문제는 에어리스가 너무 체력이 넘친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도저히 무한에 가까운 행동력을 따라잡지 못했다.
결국 에어리스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완전히 방전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정말로 이제 바닥이다.”
유진하는 손가락을 들 힘조차 없이 부들거리면서 모래사장에 푹 쓰러졌다.
이소민과 M도 같은 신세였다.
바닥에 쓰러진 허수아비 같았다.
“너무 과했나요?”
에어리스만 팔팔하고 나머지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예약했던 펜션에 들어갔다.
“으갸갸.”
다들 근육통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어서 그날은 바비큐만 조용히 구워 먹고 마무리됐다.
다음 날 아침.
돌아오는 길에 M은 잔뜩 피곤한 기색으로 자동차 운전에 집중했다.
“다들 잘 놀았으면 이제 일 얘기를 해도 될까?”
옆 좌석에는 마찬가지로 퀭한 얼굴로 정면만 응시하는 유진하가 있었다.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기대했던 여름 바다가 아니라 체력 훈련에 가까웠다.
한계를 넘어선 에어리스의 왕성한 활동력을 주의해야 했는데 너무 방심한 탓에 다들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그러든가.”
M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말할 힘도 없는 듯했다.
어제만 해도 멋진 슈트 차림이었는데 하루 만에 후줄근해졌다.
“다 왔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소민은 그대로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제의 동료들도 다들 볼링핀처럼 픽픽 쓰러졌다.
“짐은 제가 정리할게요.”
에어리스는 힘이 넘치는지 모든 짐을 서둘러 옮겼다.
입가에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흘리며 즐겁게 움직였다.
반나절의 휴식이 지나자 그제야 다들 배고픔에 못 이겨 좀비처럼 일어났다.
다들 남은 밥을 찾다가 배달 음식을 시키기로 했다.
“식사가 오는 동안 하려던 얘기를 해야겠군.”
얼떨결에 바다로 따라갔다가 봉변을 당한 M이 마침내 용건을 꺼내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그래요?”
유진하는 머뭇거리더니 나쁜 소식부터 물어봤다.
“정부에서 너희에게 의뢰할 정도의 일이 생겼다.”
M은 조용히 자료를 건넸다.
유진하는 얼마 전에 탑의 최상층에서 벌어졌던 일을 정부 측 관계자에게 설명했다.
탑의 주인이 인류에게 도전하겠다는 내용도 전부 전했다.
‘인류에게 3개의 시련을 더 던지겠다. 그걸 이기지 못하면 인간 세계로 넘어오겠다.’
녀석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유진하 일행은 당연히 남은 과제에 합류하게 될 운명이었다.
“그 시련이 나왔나 보군요.”
“맞아.”
M은 덤덤하게 인정했다.
첫 번째 탑의 시련은 극복했다.
녀석이 장담한 대로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공간이 열렸다.”
“나쁜 소식이 이거였군요.”
나머지 좋은 소식도 궁금했다.
M은 간단한 매뉴얼을 건넸다.
“정부 지원이 더 늘어났다. 너희에게 제공하는 카드와 무기, 장비가 확 좋아졌지.”
모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대체 이게 무슨 좋은 소식이냐는 항의가 날아왔다.
“다들 흥분하지 말고. 혜택은 더 있어. 계약금이 전보다 10배야.”
“그러니까 좋은 장비도 주고 돈도 잘 줄 테니 가서 잘 싸우라는 거네요.”
딱 거기까지 듣자마자 이소민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완벽한 해석이었다.
다행히 이소민의 성향상 이런 제안은 아주 맘에 들었다.
“좋았어. 지원만 확실하다면 더 제대로 챙길 수 있을 거야.”
이소민은 분위기를 잘 이끄는 활력소 같은 존재였다.
항상 긍정적이고 의기양양했다.
그런 면이 팀원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M의 분석력에 따르면 이소민의 정신력은 무려 SS 등급이었다.
“그래. 나 역시 이번에도 함께할 거야. 잘 부탁한다. J는 부상이 있어서 이번에는 참가하지 못하지. 정부 요원들은 내가 이끌게 될 거다.”
모든 얘기가 마무리됐다.
탑의 주인이 던진 두 번째 도전.
유진하 일행은 새로운 도전에 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