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왕좌의 시련(5)
“이렇게 하면 되나?”
용병 대장 제이슨은 뭔가를 열심히 연습했다.
아까부터 마치 체조를 하듯이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이상한 행동이었다.
“딱 좋네.”
옆에 똑같은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더 있었다.
유진하, 에어리스, 그리고 응급 처치한 J와 용병 한 명이었다.
앉았다 일어나기.
유진하가 생각한 탑의 시련을 돌파하는 계책은 이 행동에서 시작된다.
“이소민 누나, 딴짓하지 마요.”
다들 바쁘게 할 일을 하는데 이소민은 혼자 아이템 수집에 열중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무기와 장비를 싹 쓸어서 빙룡의 가방에 가득 담았다.
“알았어. 다 끝났다고.”
가방에 가득 채운 뒤에 이소민이 일행에 합류했다.
모두 준비를 마쳤다.
“그럼 연습은 그만할게요.”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멤버들은 힘을 합쳐서 탑의 시련을 함께 극복하겠다는 결의했다.
“다들 계획대로. 위치로 가요.”
유진하가 지시를 내렸다.
말이 떨어지자 각자 정해진 장소로 흩어졌다.
목표는 각층의 왕좌였다.
1층부터 4층에는 리더들이 앉는 왕좌가 있었다.
3층에 설치된 봉쇄는 이미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해제해 둔 상태였다.
“정말 되려나?”
유진하의 계획은 들어서 알고 있으나, 정말 통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모두의 눈빛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탑의 시련은 잔혹했다.
리더를 죽이든.
왕좌의 자리를 빼앗든.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이었다.
악랄한 규칙이었다.
유진하는 이 시련에 도전해서 모두가 살아남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다들 준비됐죠?”
유진하는 전언 카드를 이용해서 리더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1층부터 4층의 왕좌 앞에는 한 명씩 있었다.
1층 왕좌에는 유진하.
2층은 용병 대장 제이슨.
3층은 부상에서 몸을 추스른 J.
그리고 4층.
여기는 에어리스가 얼음벽에 갇혔던 살인마를 꽁꽁 묶어서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각 층의 리더가 왕좌 앞에 있었다.
“전원 준비 완료다.”
그들은 모두 신호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며 약속된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준비한 타이밍은 정각.
‘10초 전.’
유진하의 전언이 네 사람에게 전달됐다.
그 순간. 정확한 행동이 중요했다.
“후우.”
네 사람은 아까부터 그 타이밍을 연습했다.
완벽에 가깝게 맞추려고 무수히 반복하며 노력했다.
거의 세 시간에 가까운 연습이었다.
“3. 2.”
정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1.”
마지막 순간.
“0.”
마침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유진하. 제이슨. J.
그리고 에어리스가 내려놓는 살인마까지.
쿵.
네 사람은 같은 시간, 같은 순간에 왕좌를 앉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탑의 시련은 왕좌에 앉으면 그 층을 차지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지금.
네 사람이 동시에 앉았다.
그런데 조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잠잠하게 숨죽이고 있었다.
유진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탑의 주인, 이건 어때?”
짧은 정적이 흘렀다.
깊은 침묵이 흐른 후에,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의 짓이로군.”
나직한 음성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유진하는 그 미세한 변동을 금세 눈치챘다.
기다렸던 기회였다.
“자, 우리는 모두가 동시에 왕좌에 앉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왕좌의 시련은 한 팀이 모든 층을 다 차지해야 끝난다.
다른 층을 차지하는 방식이 중요했는데, 해당 층의 리더를 죽이거나 왕좌에 앉는 방식이었다.
유진하는 거기에 주목했다.
“왕좌에 앉으면 층을 빼앗는다는 규칙이에요. 그렇다면… 모두가 동시에 앉으면 어떻게 될까요?”
규칙의 빈틈이었다.
“나는 2층의 리더지만 1층에 앉았어. 제이슨은 1층의 리더인데 2층에 앉았지. 자, 이걸 동시에 하면 어떨까?”
서로 앉은 타이밍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면?
승리 조건과 패배 조건이 동시에 이뤄진다.
왕좌를 잃으면 층을 잃는다.
그런데 다른 층의 왕좌를 얻는다.
이런 모순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어떤 판정을 내려야 할까?
“자, 탑의 주인에게서 듣고 싶어. 동시에 승리와 패배가 이뤄졌는데 어떻게 처리할 거지?”
유진하는 탑의 주인을 향해서 과감하게 외쳤다.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것은 둘 다 승리했다고 할 수도 패배했다고 할 수도 없다.”
마지못한 인정이었다.
모순.
게임이나 법칙이나 빈틈은 치명적이다.
그걸 지적당하면 게임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걸 노릴 줄이야. 제법이군.”
탑의 목소리는 대안을 제시했다.
“1층과 2층이 서로 상대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럼 서로 층을 맞바꿨다고 처리할 수 있지.”
“그건 성립이 안 되는 거야.”
유진하는 그 의견을 가로막았다.
논리적인 결함이 있었다.
“잘 생각해 봐. 규칙에 따르면 층을 전부 잃으면 탈락이라고 했어. 나는 1층을 차지하는 순간에 2층은 잃어버린 거야. 2층을 잃으면 나는 탈락이라고.”
모순이었다.
“탈락의 순간도 벌어진 거지. 동시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이야.”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
무엇이든 막을 수 있는 방패.
그 둘이 서로 부딪친다면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승리 조건과 패배 조건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어. 원래 있던 2층을 잃으면 나는 모든 층을 잃었으니 탈락 조건이 되는 거야. 패배는 곧 탈락이고.”
논리적 결함에 쐐기를 박았다.
“패배한 탈락자가 승리 조건을 얻을 수는 없어.”
빈틈을 계속 지적했다.
“이 룰에는 그걸 처리할 방법이 없어. 동시에 승리하고 패배할 수는 없지.”
유진하는 왕좌의 시련이라는 게임에서 맹점을 계속 공략했다.
탑의 목소리가 펼친 논리를 맹렬하게 반박했다.
“너는 모든 층을 잃는 순간 탈락이라고 했어. 탈락은 죽음이랬지.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날 수는 없잖아. 삶과 죽음이 동시에 성립될 수는 없듯이 게임도 마찬가지야.”
냉철한 비판이었다.
궤변.
모순이자 오류였다.
탑의 시련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했다.
“…그렇군.”
탑의 목소리는 딱히 반박할 거리가 사라졌다.
맞는 말이었다.
패배와 승리는 양립할 수 없다.
동시에 했을 경우 무효라고 돌릴 수도 없었다.
유진하는 규칙의 맹점을 공략해서 게임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리기로 계획했다.
이 전략이 그랬다.
1층과 2층이 서로 왕좌를 바꾼다.
3층과 4층도 왕좌를 바꾼다.
모두가 도박 같은 유진하의 작전에 참여했다.
“탑의 시련은 결함이 발견됐어.”
승리와 패배는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다.
모순의 상황을 발생시키자 처리할 방안이 없었다.
그럼…….
게임은 붕괴된다.
“…….”
탑의 목소리는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소민은 왕좌에 앉은 유진하를 웃으면서 바라봤다.
‘대단한 녀석이야.’
왕좌의 시련에 걸리면 참가자들은 패닉에 빠져 서로 죽고 죽이는 결과가 벌어졌으리라.
유진하는 달랐다.
시련의 맹점을 찾아냈고 공략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과 보는 시야가 달랐다.
‘규칙 자체를 붕괴시켜서 모두가 살아남는다.’
해커가 방화벽을 뚫고 시스템을 장악하는 행위와 비슷했다.
유진하는 탑의 시련 자체를 깨버리고 시스템을 장악하기로 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알겠다. 이 시련은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판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인정하지.”
탑의 주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전략은 성공이었다.
다들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다 이윽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시련을 돌파해 내어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받았다.
“대신 조건이 있다.”
탑의 주인은 마지막 제안을 내걸었다.
“분명 시련의 룰은 무너졌다. 하지만 오류를 이용한 녀석은 실제로 단 한 명이었지.”
유진하를 의식하는 걸까.
“탑의 시련을 끝내는 대신. 최상층에는 너 혼자만 오도록 하겠다. 그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모두의 목숨을 보장하겠다. 바깥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지.”
한 명만 오라.
간단한 조건이었으나 최상층에는 이 탑의 주인이 있었다.
유진하 혼자 최상층으로 올라오라.
그건 단독으로 탑의 주인을 상대하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건 좀…….”
이소민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위험했다.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와닿았다.
“왜 그래야 하는데?”
이소민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혼자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히 만류했다.
“됐어. 이런 조건은 무시해.”
“괜찮아요, 이소민 누나.”
왕좌에 앉은 유진하가 살짝 웃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마저 느껴졌다.
“먼저 돌아가서 기다려요. 반드시 나도 나올 테니까요.”
이소민은 당황했다.
유진하가 미처 말릴 틈도 주지 않았다.
“거래는 성립됐다.”
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유진하를 제외하고 모두의 몸이 파랗게 변했다.
“약속대로 너를 제외한 모두는 여기서 내보내겠다.”
이소민이 소리쳤다.
“유진하!”
왕좌에 앉은 유진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마지막 미소만을 남긴 채로…….
그리고…….
에어리스와 이소민을 비롯해 생존자 전원은 무사히 귀환했다.
파아앗!
순간이동으로 모두가 빠져나왔다.
“빠져나왔다.”
탑의 시련에 나오자마자 긴장감이 풀렸는지 다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전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비로소 안도했다.
“응급팀 이쪽으로!”
M은 의료진을 불러서 J의 상태부터 챙겨 줬다.
의사와 간호사가 서둘러 부상자들을 들것에 실어 데려갔다.
“이 녀석은 바로 체포해라.”
살인마는 완전히 묶인 채로 요원들에게 인계됐다.
사바톤 부츠도 벗겨지고 완전한 비무장 상태가 되어 끌려갔다.
살의에 찬 그의 눈빛은 오롯이 한쪽을 응시했다.
“…너희들.”
에어리스가 보였다.
‘아직 끝이 아니다. 반드시 내 손으로 너희들을 처리하겠어.’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호송차에 실려 떠났다.
한편, 용병 대장 제이슨은 팀원들을 다독였다.
살인마 때문에 용병이 무려 아홉 명이 당하고 말았다.
가장 큰 피해였다.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여기 이거 받아요.”
이소민이 제이슨에게 다가와 물건을 내밀었다.
“뭐지?”
“유품이에요.”
제이슨은 놀라서 멈칫했다.
아까 이소민은 죽은 용병들의 무기와 방어구를 챙기고 있었다.
‘전형적인 장물아비인가?’
제이슨은 이소민이 전장에 버려진 도구를 주워 가는 속물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유품을 챙겨 주려는 의도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고맙군요. 유족들에게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이소민과 제이슨은 서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우리도 정신이 없어서 유품을 챙기지 못했는데. 정말 답례라도 해드리고 싶군요.”
제이슨이 의사를 밝히자 이소민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아니에요. 탑에 오기 전에 내 물건은 두둑이 챙겨 뒀거든요.”
빙룡의 가방은 빵빵했다.
이미 알아서 본인 몫까지 두둑하게 챙긴 듯했다.
‘유진하는 정말 재밌는 일행을 두었군.’
유진하 자신은 물론, 이소민과 에어리스까지 전부 개성적인 멤버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돌렸다.
대검을 든 에어리스가 멀리 보였다. 에어리스는 혼자 남아 어두운 얼굴로 차원문을 바라봤다.
“유진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나?”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한 명.
그가 무사히 귀화할 때까지 에어리스는 한 발자국도 돌아가지 않으려는 듯이 남아 있었다.
짙은 기다림이 남았다.
해는 저물어 가고 밤이 되었다.
기다렸다.
‘돌아갈게. 먼저 가서 기다려.’
아까 전.
유진하는 전언으로 전했다.
에어리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였다.
진심이 담겼던 그 말이 에어리스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믿음을 갖고 기다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유진하가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서.
* * *
혼자 남은 유진하는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었다.
에어리스와 이소민,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안전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들은 돌아갔다.”
탑의 주인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너와 나만 이 탑에 남아있지.”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무사 귀환을 확인한 터였다.
탑의 주인은 약속을 지켰고 이제는 둘만의 약속만 남았다.
“최상층을 개방하겠다. 올라오라.”
거대한 탑에 요란한 진동이 발생했다.
지진이라도 발생한 듯이 강한 울림이 느껴지더니 이윽고 모든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이제 된 건가.”
유진하는 왕좌에서 일어섰다.
탑은 4층까지만 존재했고 최상층은 숨겨져 있었다.
아마 방금 커다란 진동이 감춰졌던 최상층을 드러냈으리라 추측했다.
계단으로 향했다.
유진하가 천천히 4층까지 올라오자 멀리서 빛을 발산하는 문을 발견했다.
탑의 목소리가 안내했다.
“그곳으로 들어와라.”
“…….”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그 빛나는 문으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장비는 100장에 달하는 카드가 전부였다.
무거운 무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라 원래 카드를 선호했다.
처음에는 던전의 방관자와도 같았으나 이제는 마술사처럼 점점 성장해 가고 있었다.
끼익.
“최상층으로 가는 길인가.”
빛의 문 안에는 계단이 있었다.
저기로 올라가면 비밀스러운 최상층으로 향할 수 있다.
생각보다 길은 멀었다.
많은 계단을 올라간 끝에 마침내 최상층의 문에 도달했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환한 빛을 발휘하는 문.
이 안에 탑의 주인이 있었다.
“후우.”
모두에게 괴이한 왕좌의 시련을 남겼던 악취미를 즐기는 존재.
몬스터와 달리 지성을 갖춘 녀석과 마침내 마주할 순간이 다가왔다.
“가자.”
마침내 결심하고 문을 열었다.
광활한 빛이 안에서 쏟아졌다.
마치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최상층.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저 멀리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였다.
유진하는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다가갈수록 서서히 그 존재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신이 탑의 주인?”
어느덧 녀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도달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자.
그 존재도 유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대감은 아니었다.
녀석은 차분한 눈빛으로 유진하를 조용히 응시했다.
유진하 역시 떨리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네가 여기 주인인가?”
“…그래.”
인간형의 존재는 빛에 휩싸인 채로 있었다.
마치 주변의 시간이 정지된 듯이 녀석은 어떤 반응도 없이 지긋한 눈빛을 지으며 응대했다.
여유로움을 넘어 경외마저 느껴질 만큼 하얀빛을 가득 품은 존재였다.
이 느낌.
녀석은 어쩌면 초월적인 존재일까.
“흥미롭게 지켜봤다. 너의 모습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