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왕좌의 시련(3)
에어리스와 제이슨의 일대일 대결이 마무리됐다.
에어리스의 실력과 유진하의 전략이 합쳐져서 완벽하게 승리했다.
“졌다. 인정하지.”
제이슨은 쌍도끼를 모두 놓쳐 버렸고 이제 대항할 수단이 사라졌다.
일대일 승부에 이긴 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약속한 대결이었다.
제이슨의 용병팀은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어 서로 눈치를 보내기 시작했다.
“…….”
암묵적인 눈빛이 오갔다.
용병들은 약속보다 자기 목숨이 더 소중했다.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며 냉랭한 눈치만이 오고 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제이슨이었다.
“깔끔한 완패였어. 이렇게 져 본 기억이 거의 없는데 정말 대단한 실력이다.”
제이슨이 먼저 양팔을 들어 익살스럽게 웃더니 항복 의사를 밝혔다.
“괴력이었어. 정말 깔끔하게 당했다.”
그는 경의에 찬 눈빛으로 에어리스를 지긋이 바라봤다.
“아, 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에어리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당황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색한 상황이 되면 당황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가.”
제이슨은 피식 웃었다.
엄청난 대검으로 몰아붙이며 진지했던 아까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풋풋함이 보였다.
‘종잡을 수가 없군.’
에어리스뿐만 아니라 저 일행도 제이슨의 눈에는 특이했다.
프리랜서와 정부 요원이 서로 믿고 신뢰한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까?
“패배는 패배다. 이제 약속대로 하겠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사안은 패배한 용병팀을 진정시키는 거였다.
다른 용병들이 약속을 어기고 섣불리 나서지 못하도록 주의시켰다.
“다들 무기를 내려.”
제이슨은 휘하의 용병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시가 내려왔으나 용병팀은 머뭇거리며 주저했다.
“말로 해서 안 되겠다면 실력으로 해 줄 수도 있다. 명령 거부는 즉결 처분이라고 알고 있겠지?”
제이슨은 바닥에 박힌 자신의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는 냉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부하였던 자들을 노려봤다.
“명령 불복종은 끝이다. 너희도 알 텐데?”
한 치의 자비도 없는 대장이었다.
매서운 눈매로 용병들 전원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제이슨은 카리스마가 강렬한 리더였다.
“확실하게 제압하네.”
유진하가 주도면밀한 지략으로 신임을 받는 리더라면, 제이슨은 압도적인 힘으로 강렬한 인상을 발휘하는 스타일이었다.
최정예 요원 J는 또 달랐다.
친밀한 사교력과 출중한 실력을 겸비한 리더였다.
세 사람은 각자 성격대로 다른 리더였고, 어떤 것이 더 낫다기보다는 개성에 가까웠다.
“대장…….”
용병팀 대원들은 항변하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장내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항명하느냐.
제이슨의 명령을 받아들이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래요. 모두 싸우지 말아요.”
에어리스가 먼저 어두운 분위기를 깨뜨렸다.
제이슨의 옆에 다가와서 싸움을 말리려고 했다.
에어리스의 등장은 용병팀에 충격을 안겨 줬다.
‘저 여자는…….’
에어리스의 실력은 방금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제이슨 하나만 상대해도 아홉 명의 용병팀은 승산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데 에어리스까지 같이 있다?
저 괴력의 여자까지?
‘승산이 없다.’
에어리스의 말보다는 실력이 용병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있었다.
‘제이슨과 저 여자를 상대로 승산이 없다.’
용병팀은 빠르게 계산했다.
확실히 프로였다.
“우리끼리 싸우지 않아도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더는 싸우지 말도록 해요.”
“…그러죠.”
에어리스의 말 한마디가 상황을 정리했다.
용병팀의 항명은 없었다.
분위기가 진정되어 가자 유진하가 마무리를 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한 방법이 있어요.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지만요. 제 말에 따라준다면 여러분 모두가 무사할 수 있어요.”
유진하는 장담했다.
다들 조용히 무기를 거두었다.
용병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믿어 보기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다행이네요.”
에어리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검을 도로 등에 멨다.
제이슨도 자신의 도끼를 내렸다.
마침내 긴장감이 사라졌다.
“과연…….”
대결을 지켜본 M은 조용히 수첩을 꺼냈다.
에어리스의 평가 부분을 고쳤다.
에어리스.
지력: C
전투력: S → SS
민첩: A
정신력: B
체력: S
대결은 이렇게 2층 유진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제 3층과 4층도 신경을 써 봐야겠네요.”
유진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바로 위에서 숨 가쁜 승부가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 *
3층은 피로 물들었다.
양날검과 카드를 양손에 나눠든 J는 신중하게 상대를 쳐다봤다.
‘협상이나 하려고 혼자 내려온 거였는데…….’
J는 서로 협력할 생각이었다.
탑의 시련은 1층부터 4층까지 서로 싸우도록 조장하는 게임이었다.
자멸하기를 원하는 규칙이었다.
문제는 3층이었다.
‘저 미친 살인광.’
J는 이를 악물었다.
살인마는 쾌속의 사바톤 부츠를 신고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3층에서 살육전을 벌인 녀석은 사이코패스였고 정상이 아니었다.
살의.
피를 탐닉하는 자.
죽음의 기척에 어른거리는 괴물이었다.
‘만만치 않아.’
성격은 괴이한데 실력은 진짜였다.
살인마가 사바톤 부츠의 쾌속을 제대로 활용하는 바람에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나도…….”
J도 윈드 카드를 사용해서 스피드에 강점이 있었다.
다만, 바람 카드는 한 번 사용하면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용한 카드는 재사용까지 시간이 걸리는 쿨타임이 문제다.
“바람 카드 3장으로.”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은 같은 카드를 여러 장 번갈아서 사용하는 거였다.
“윈드.”
실제로 J는 바람 카드를 3장 가지고 순서에 따라 딱딱 타이밍에 맞게 사용했다.
덕분에 사바톤 부츠의 쾌속에 맞서 엇비슷한 속력을 유지했다.
“큭!”
살인마는 빠르게 내달리며 J를 향해 달려들었다.
J는 고민했다.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간격을 두고 빠지면서 기회를 노렸다.
가속력의 승부.
마치 바람처럼 몰아치는 싸움은 낯선 도전에 가까웠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J는 최대한 집중했다.
살인마는 가속하면서 카드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무기와 카드를 동시에 사용하기는 사실 쉬운 기술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어설프게 하다가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좋아. 내 장점으로 몰아붙이자.’
스피드는 막상막하.
그렇다면 J의 장점인 카드 활용을 변수로 쓰면 승산이 있었다.
어느 정도 살인마의 속도가 눈에 익자 먼저 역공을 감행했다.
“하아압!”
살인마를 스치듯이 지나가면서 양날검을 휘둘렀다.
녀석에게 닿지는 않았으나 위협은 충분히 주었다.
툭툭.
살인마는 피식 웃으면서 적의를 드러냈다.
“제법이군.”
사바톤 부츠의 속력을 점점 더 끌어올렸다.
단숨에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J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이야.’
J는 숨겨둔 작전을 발휘했다.
칼을 옆으로 누인 다음에 회심의 카드를 발동시켰다.
“거대화.”
어떤 물건이든 크기를 순간적으로 최대 100배까지 키워 주는 A급 카드.
빙룡을 상대할 적에도 이 카드가 마지막 일격을 장식했다.
J는 상대의 빠른 속도를 역이용할 작전을 꾸몄다.
발끈한 살인마가 최대 속력으로 달려들도록 유도했다.
‘됐다.’
타이밍을 봐서 잽싸게 거대화 카드로 검을 크게 만든다.
장애물이다.
너무 빠르게 달려온 상대는 미처 이 장애물을 피할 틈도 없이 거대해진 검과 추돌한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계략이었다.
‘걸릴 거야.’
살인마는 뒤늦게 자신 앞에 나타난 거대한 검과 마주했다.
이미 최대 속력으로 끌어올려서 방향을 틀 기회조차 사라졌다.
빠른 속력만 맹신한 대가였다.
그때였다.
“하압!”
살인마는 공중으로 뛰었다.
거대한 검에 부딪치는 대신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공중제비를 돌며 몸을 비틀었다.
“많이 쓰던 방식이지.”
살인마는 사실 이런 함정에 익숙했다.
빠른 속력은 필연적으로 추돌에 주의해야 했다.
좁은 골목과 담벼락과 빈번하게 부딪치는 사고도 많다.
그때마다 사용한 방법은 공중에서 비틀기였다.
파바박!
살인마는 체조선수처럼 몸을 비틀어 피했다.
공중에서 유연하게 움직였다.
“아앗?”
살인마는 J의 계략을 여유롭게 회피했다.
이제 살인마에게 우선권이 생겼다.
거대해진 양날검을 담 넘어가듯이 뛰어넘었다.
“아차!”
J의 계획과 달리 살인마는 쉽게 피해냈다.
예상치 못한 반격.
곧 살인마의 검이 J를 향해 날카롭게 내리쳤다.
“아악!”
J는 어깨를 베였다.
그나마 반사적으로 피한 덕분에 부상을 줄일 수 있었다.
치명상은 피했으나 팔을 하나 사용하기는 어려워졌다.
카가가각.
살인마는 가속력 탓에 멀찍이 더 달려간 후에 멈췄다.
“빗나갔나. 다음에는 정확히 찔러 주지.”
살인마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끔찍한 이빨이 드러났다.
스르륵.
거대화된 J의 검은 카드 효과가 사라지자 다시 줄어들었다.
다만, J가 어깨를 다친 탓에 검을 들기도 버거웠다.
“안 좋네.”
멀쩡한 팔이 하나만 남았고, 그렇다면 검과 카드를 동시에 사용하지 못한다.
하나만 선택해야 했다.
“그렇다면…….”
J의 선택은 카드였다.
바람의 카드가 없다면 살인마의 속력에 대응하기란 불가능했다.
일단 저 쾌속의 스피드에 농락당하지 않는 쪽이 중요했다.
이쪽도 같은 움직임은 기본으로 가져가야 했다.
“정신은 사이코 패스라 이상하지만 그쪽 실력은 인정할게.”
J는 일부러 괜찮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친 어깨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 지혈할 틈이 없었다.
목숨을 노리는 녀석을 앞에 두고 치료에 집중하기는 불가능했다.
“하아. 어렵네.”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J는 기죽기보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최정예 요원으로서 J는 강인한 정신력을 유지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재밌는 상대였군.’
살인마의 눈빛이 번뜩였다.
J의 의지는 역설적이게도 살인마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라. 죽이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 가장 재밌지.’
강인한 의지력과 생존력을 가진 사람은 살인마에게 더욱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살고 싶어 하는 존재를 결국 죽였을 때의 쾌감.
살인마는 그런 감각을 최상의 욕망으로 여겼다.
“좋아. 더 저항해라. 그럴수록 나는 더 즐겁지.”
툭툭.
살인마의 부츠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천천히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긴장감을 발산했다.
“언제든지 오라고.”
J는 붉은 머리카락을 살짝 휘날렸다.
부상 탓에 움직임은 최소화하고 모든 신경을 적의 모습에 집중했다.
‘카드 한 장으로 승부를 봐야 해.’
정적이 짧게 흘렀다.
살인마는 검을 굳게 쥐고 천천히 가속할 태세를 갖췄다.
서로가 마지막 승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쿵!
살인마는 최대 속력에 돌입했다.
순식간에 J에게 다가와 일격으로 베어 버리려고 했다.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밑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곧 폭풍우처럼 치솟았다.
“윈드.”
J는 원래 바람 카드를 자신의 움직임에만 사용했다.
지금은 방식을 바꿨다.
바닥에 두고 발동시켰다.
폭풍우는 J의 주변 반경으로 매섭게 치솟았다.
‘바람을 치솟아서 녀석을 날려버린다.’
살인마가 쾌속으로 달려드는 순간과 정확히 맞아야 했다.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타이밍이 정말 중요했다.
‘카드 발동이 늦으면 살인마의 검에 찔리고. 빠르면 녀석이 피할 틈이 생긴다.’
정확하게 딱 맞춰야 살인마를 폭풍우 바람에 휘감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J는 감각이 뛰어났다.
그동안 녀석의 속력이 눈에 익은 터라 정확한 순간을 잡아냈다.
“크윽!”
윈드 카드가 발동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강하게 달려오던 살인마가 J의 계산에 걸려 버렸다.
파아아아!
살인마는 폭풍우에 휘말려 몸이 붕 떠올랐다.
지금처럼 공중에 올라가면 잡을 수 있다.
무의미하다.
“잡았다.”
J는 마침내 역전의 기회를 맞이했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움켜쥐고 살인마를 겨냥했다.
“위에 있다.”
폭풍우에 휘말린 녀석은 공중에서 움직일 수 없다.
쾌속의 부츠만 믿은 자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뭐지?’
J는 문득 위화감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살인마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대체 왜?
어째서 녀석은 위기가 아닌 걸까?
그와 동시에 살인마의 검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외쳤다.
“거대화.”
살인마는 카드를 사용해서 자신의 검을 크게 키웠다.
아까 J가 사용한 전략을 눈여겨 두었다가 바로 써먹은 거였다.
“아악!”
폭풍우는 순식간에 거대한 검에 깔려 버렸다.
마찬가지로 밑에 있던 J 역시 늦게 피하는 바람에 타격을 입었다.
“이런…….”
살인마는 전투에 굉장한 재능이 있는 타입이었다.
기민하면서도 적응이 상당했다.
‘단순한 살인마가 아니야.’
살인마이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
뒤늦은 후회였다.
내리치는 거대화된 칼.
콰아앙!
“으윽!”
J는 완전히 바닥에 널브러졌다.
거대한 검은 카드 효과가 끝나자 다시 작아졌다.
“승부는 났군.”
살인마는 여유를 부렸다.
사실 자신도 카드를 쓰면서 전투할 수 있었다.
철저하게 숨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했다.
“좋은 대결이었다. 물론 내가 이겼지만.”
J는 모든 기력을 잃고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줄이 끊어진 인형과 같았다.
살인마는 이제 J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패배한 자에게는 금세 흥미를 잃었다.
마무리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허억. 허억.”
“하고 싶은 말은 있나?”
살인마가 물었다.
“…많지.”
J는 온갖 욕설을 녀석에게 쏟아부었다.
살인마는 이런 저주에 익숙했다.
패자가 승자에게 보내는 헌화쯤으로 받아들였다.
살인마는 검을 거꾸로 들었다.
“끝났으면 죽여 주지.”
이제 J에게 영원한 침묵과 안식을 주려고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피맺힌 절규가 다시 들리려나.
살인마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감돌았다.
“그만둬!”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온 거였다.
멀리서 낯익은 두 사람이 서서히 다가왔다.
“이제야 메인 게임이 되겠군.”
나타난 사람은 유진하와 에어리스.
살인마와 악연으로 뒤얽힌 두 사람이 마침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