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왕좌의 시련(1)
‘왕좌의 시련?’
탑의 목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와 신의 육성처럼 느껴졌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부여하듯이 강렬한 떨림마저 안겨 주었다.
탑에 들어온 40명 전원은 조용히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기에 다들 긴장감에 휩싸였다.
“참멸의 탑은 4층으로 보이나 최상층이 따로 있다. 그 숨겨진 최상층에 에어리어의 주인이 있지. 너희가 여기까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탑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시련의 규칙을 설명했다.
“나머지 4개 층에는 너희가 열 명씩 나뉘어 들어가게 된다. 같은 층에 있는 이들은 한 팀이 되지.”
열 명씩 모인 팀…….
유진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1층에 열 명.
2층에 열 명.
이런 식으로 3층, 4층까지 채워진다.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이 한 팀을 이룬다는 얘기는 이런 의미 같았다.
여기 사람들은 전체 40명이니 정확히 4층에 10명씩 나뉜다.
“각 층에는 왕좌가 하나씩 있다.”
탑의 목소리는 시련의 다음 규칙을 알려줬다.
“그 의자는 해당 층의 주인이 앉는 자리이지. 너희끼리 상의해서 대표자를 한 명 선발해서 그 의자에 앉히면 리더로 확정된다.”
왕좌는 리더의 자리였다.
진짜 규칙은 이제부터였다.
“시련은 간단하다. 어느 한 팀이 1층부터 4층까지 전부 차지하면 시련의 승자가 된다.”
J를 비롯해 요원과 용병팀 모두가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
빼앗으라.
싸워라.
이 얘기는 결국 우리끼리 팀을 나눠서 피 흘리고 싸우고 쟁취하라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동료가 적이 된다.
“시련의 승자만이 최상층을 열 수 있고 주인에게 도전할 수 있다. 패자는 전부 죽는다.”
왕좌의 시련은 잔혹한 게임이었다.
인간들은 말도 안 되는 시련 앞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거운 공기가 모두를 짓눌렀다.
탑의 목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각 층을 빼앗는 방법은 해당 층의 리더를 죽이거나 그곳의 왕좌에 앉으면 된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그것은 너희의 자유다.”
리더를 죽이거나 왕좌에 앉아라.
4개 팀이 벌이는 아비규환의 대결 속에서 서로 피 흘리는 사투를 벌이다가 죽어가라는 소리였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
자기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는 양보는 없다.
붉은 머리의 J는 앞서 들어간 팀들이 왜 모조리 실패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최악이군. 서로 싸우다 자멸하고 말았던 거야.’
안 좋은 결말이 예상됐다.
이번 에어리어의 주인은 단순한 몬스터가 아니라 ‘지성’이 있는 존재였다.
남들이 불쾌해할 시련을 준비할 이성과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지력이 있었다.
고등 진화된 몬스터?
아니면 저번에 만났던 푸른 갑옷의 남자처럼 인간 형태?
“…….”
어떤 놈인지는 모르나 하나는 확실했다. 녀석이 악취미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후우.”
누군가의 한숨이 들렸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모두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고 있었다.
40명의 사람들은 다들 공략전의 프로였고, 수많은 던전에서 살아남은 전문가였다.
목숨이 걸린 상황.
흐름이 변하자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로가 적…….’
자기 목숨이 걸렸다면 어제까지 함께 웃고 마시던 사람조차도 망설임 없이 베어 버릴 수 있다.
“제한 시간은 24시간이다. 그때까지 어느 팀도 승리 조건을 이루지 못하면 전원 죽는다.”
탑의 목소리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규칙은 어떤 변수에도 변하지 않는다. 명심해라. 30분 안에 팀을 나누고 리더를 결정하지 않으면 전원 탈락한다.”
이내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40명의 공략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펴봤다.
이제 각자 4개의 팀으로 나뉘고 적이 되어야 했다.
무섭도록 침울한 분위기가 깔렸다. 섣불리 먼저 말을 꺼낼 상황이 아니었다.
에어리스는 침묵을 깨고 먼저 나섰다.
“저 문을 깰 수 있는지 한 번 쳐 볼게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꺼내서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분위기는 미묘해졌다.
용병팀과 요원팀 전부 에어리스를 경계했다.
‘저 대검이 나를 찌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주의하고 있었다.
불신이 모두의 머리에 각인되고 말았다. 팀은 분열됐다.
“긴장하지 말아요. 에어리스는 정말로 문을 깨보려는 거니까요.”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챈 유진하가 얼른 에어리스의 앞에 나섰다.
그래도 서로를 의심하고 분열된 상황이 계속 됐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고 탑의 출구 앞에 섰다.
앞을 막고 있는 저 높다랗고 굳건한 대문을 깨고 싶었다.
대검을 크게 들었다가 최선을 다해 내리쳤다.
“하압!”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은 끄떡도 하지 않고 멀쩡했다.
“단단하네.”
민망해진 에어리스가 몇 번을 더 해 봐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보통 문이 아니야.”
유진하는 에어리스를 말렸다.
허투루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던 에어리스는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서로 힘을 합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다 같이 힘을 모아서 방법을 찾아도 되고요.”
에어리스의 외침은 간절했으나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시련이 곧 시작된다는 안내 음성이 모두를 긴장시킬 따름이었다.
요원 J는 일단 상황부터 받아들여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없어요. 협력이나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팀부터 나누도록 해요.”
용병 대장 제이슨은 손을 들어 동의했다.
“용병팀은 20명이니 반으로 나누기로 하겠어.”
용병1팀과 용병2팀으로 나뉘었다.
유진하도 자신의 팀을 구상해서 앞으로 나왔다.
“에어리스, 이소민 누나하고 개인 공략자 팀을 이룰게요. 요원 몇 명이 더 오면 되겠네요.”
M은 유진하 쪽으로 향했다.
그가 데려온 요원들도 합류했다.
“그쪽도 됐네.”
J는 남은 요원들을 이끌고 마지막 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소민은 실력자를 데려오려고 슬쩍 말을 건넸다.
“우리 쪽으로 오는 건 어때요?”
“어머, 스카웃 제의인가 보네.”
J는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더니 손을 흔들며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것도 괜찮은데 내 부하 요원들이 있어서 말이야. 지휘를 맡았으면 끝까지 책임도 져야 해.”
직장 상사의 책임감일까.
J는 부하 직원들을 끝까지 맡겠다고 했다.
그런 자세는 본받을 만했다.
“이제 어떤 층으로 갈지 결정하자.”
J는 요원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각 팀이 1층부터 4층까지 어디로 갈지는 제비뽑기를 해서 결정했다.
1층: 하이코스 소속 용병팀1.
용병 대장 제이슨.
2층: 유진하, 에어리스, 이소민,
M과 요원들.
3층: 하이코스 소속 용병팀2.
용병 부대장
4층: J와 요원들.
이렇게 10명씩으로 팀을 구성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왕좌의 시련은 본격적인 승부를 시작했다.
* * *
“리더를 누구로 할까요?”
이소민이 첫 질문을 던졌다.
리더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자 가장 위험한 자리였다.
리더가 죽으면 모두가 탈락한다.
당연히 최우선 목표가 된다.
“M이 해도 괜찮고. 다른 사람도 괜찮네요.”
유진하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듯이 대답하더니 탑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유진하, 네가 하겠나?”
M이 먼저 제의했다.
따르는 부하 요원들이 있으나 리더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유진하라고 여겼다.
“…그럴게요.”
유진하는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받아들였다.
예의상 한 번은 거부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쉽게 승낙하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놀랐다.
“리더는 내가 하지만 실제 지휘는 M이 해요. 그래야 밑에 요원들이 말을 따를 거니까요.”
“그러지.”
M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부하 요원들이 유진하의 말을 들을 리는 없으니, M의 입을 빌어서 지시하겠다는 소리였다.
전달자 역할을 받아들인 거였다.
M은 격식에 연연하기보다는 실력에 따른 대우를 중시했다.
유진하의 전략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면 제일 뛰어난 자가 리더를 맡아야 옳았다.
유진하가 가장 적격이다.
M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진하, 뭘 하고 있어요?”
에어리스가 슬쩍 유진하의 옆에 다가왔다.
리더를 정하고 앞으로 계획을 상의하려는데 유진하 혼자 다르게 움직이니 신경 쓰였다.
“그냥 어떤 탑인지 보는 거야.”
벽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이곳저곳 유심히 살펴봤다.
“어쩌면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잖아. 지형과 장소는 잘 살피는 쪽이 좋지.”
방은 매우 넓었다.
커다란 운동장처럼 널찍했고 특별한 장애물은 없었다.
벽에 걸린 횃불은 불빛이 작아서 어둠 속에 숨을 만한 사각은 존재했다.
유진하는 카드를 하나 꺼냈다.
“섬광.”
섬광의 카드에서 빛이 발산되자 주변이 환해졌다.
그제야 어둡던 방이 대낮처럼 밝아져 사각지대를 전부 없앨 수 있었다.
“일단 이걸로 시야를 밝히고요.”
유진하는 다음 물건에 집중했다.
리더가 앉은 자리, 왕좌였다.
왕의 자리답게 금으로 만들어져 비싼 보석도 박혀 있었다.
“보석이 비싸 보여.”
이소민은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들을 휘둥그레 바라봤다.
귀한 가치를 담은 귀중품이었다.
관심이 없는 사람도 별안간 욕심이 생길 만큼 화려했다.
“왕좌답다. 금이야.”
관심을 끄는 부분이 더 있었는데 왕좌의 뒤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방패와 검이 합쳐진 푸른빛의 문양.
에어리스의 손등에 새겨진 문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에도 있었다.
“또 이 문양이 있어요.”
에어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유진하에게 속삭였다.
“그러네.”
어느 던전에 들어가도 곳곳에 특이한 문양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에어리스의 과거는 던전과 연결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들 모여 앉아서 전략 구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30분의 준비 시간에 거의 도달했다.
“이제 리더는 왕좌에 앉으라.”
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리에 앉는 순간, 리더가 결정됨과 동시에 시련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진하의 눈앞에 금빛의 왕좌가 보였다.
어쩌면 과거의 왕이 정말 앉았을지도 모를 황금 왕좌가 번쩍거리며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듯했다.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시작이다.”
유진하가 앉는 동시에 왕좌에서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짧게 별똥별처럼 지나갔다.
잠잠해진 실내는 천천히 평온함을 되찾았다.
유진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소민이 슬쩍 옆구리를 쿡 찌르고 농담을 던졌다.
“리더가 되니까 어때?”
책임감이 느껴질 뿐.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이제 왕좌의 시련은 시작됐고, 다른 층의 동향이 중요했다.
“24시간 제한이니 아직 시간은 충분해요. 다른 층과 협상이 되느냐. 아니냐. 그게 중요한데…….”
유진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층을 전부 제압하거나.
아니면 제압당해서 죽거나.
다른 층과 전쟁이냐 협상이냐가 중요하게 결정되리라고 여겼다.
“우리는 2층이야. 불리한 위치이지.”
이 탑은 전체 4층이었다.
유진하 팀은 2층이라서 아래에는 1층, 위로는 3층이 있다.
샌드위치 빵 사이에 낀 햄처럼 중간에 낀 신세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1층과 3층에서 동시 공격이 올 수도 있었다.
“위아래가 용병팀인데.”
하필이면 그 두 층이 전부 용병.
그들이 미리 작당했다면 타이밍을 맞춰서 선제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샌드위치 작전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유진하는 전투가 벌어지면 서로가 죽고 죽이며 자멸해 가는 시나리오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피 터지는 서로 간의 대결은 최악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반드시 피해야 했다.
아직 24시간이 남았고, 왕좌의 시련을 함께 타개하려고 힘을 합칠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과연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
정답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침묵 속에서 각자의 고민이 스며들 즈음이었다.
그때, 한 곳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모두의 운명까지 바꿀 중대한 변화가 시련이 시작하기 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 * *
시련이 시작하기도 전이었다.
“허억. 허억.”
용병 대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복부에 깊은 자상을 입었고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넌 누구냐?”
치명상을 입은 대원 앞에는 한 남자가 예리한 검을 들고 있었다.
그 칼은 오늘을 위해서 새롭게 준비한 비밀병기였다.
특이한 부분은 그의 발소리였다.
철그럭. 철그럭.
철로 된 신발이 특유의 마찰음을 냈다.
쾌속의 사바톤 부츠였다.
“리더는 내가 차지하지.”
“…정체가 뭐냐?”
용병 대원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피를 토해 냈다.
남자는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비웃음을 날렸다.
“위장 해제.”
발동된 카드가 해제되자 남자는 모습이 바뀌었다.
그는 용병으로 정체를 위장한 자였다.
“카드로 모습을 바꾼 건가?”
“위장 카드라고 하지. 원하는 상대에 손을 대면 그자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목소리까지 완벽하게 가능하지.”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더는 용병이 아닌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당당히 나섰다.
“나는 용병이 아니야. 살인을 더 좋아하지.”
쿨럭.
용병 대원은 입에서 피를 뿜어냈다.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다른 녀석들도 널 따라갈 테니…….”
살인마는 단숨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비정함과 살의만이 남은 그에게는 살인만 의미가 있었다.
“…….”
주변이 조용해졌다.
피로 물든 바닥과 아홉 명의 죽음만이 남아 있었다.
참변의 현장으로 변해 버린 3층에는 살인마만 남았다.
같은 층의 팀원은 그의 손에 전부 죽음의 제물로 전락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리더는 내가 하지.”
그는 천천히 왕좌에 앉았다.
아마 다른 층의 리더 역시 모두 정해졌을 터였다.
탑의 시련은 그가 원했던 거의 완벽한 놀이터를 제공했다.
다 죽이고 혼자 나오면 되는 룰.
살인마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목표는 그 녀석들이다…….”
살인마의 목적은 유진하와 에어리스, 이소민이었다.
그들과의 대결에서 받았던 굴욕은 잊지 않았다.
“반드시 빚을 갚겠다고 했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녀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다.
위장 잠입은 절호의 기회였다.
용병팀으로 위장했는데 운이 좋게도 공략전까지 순조롭게 들어왔다.
‘조금만 있으면 된다.’
살인마는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왕좌의 시련이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잠시 후.
새로운 방문자가 살인마가 혼자 남은 3층으로 왔다.
붉은 머리의 최정예 요원 J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