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소용돌이 지역(5)
강렬한 위압감을 발휘하던 빙룡이 마침내 쓰러졌다.
세상을 얼려 버리려던 위세는 사라지고 이제는 축 늘어진 신세가 되었다.
던전의 주인은 완전히 제압됐다.
“이쪽은 됐어.”
유진하는 멀리서 M과 J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장면까지 지켜봤다.
오래 바라보지는 않았다.
살아남았다는 감상조차 느끼기에 시간이 촉박했다.
‘에어리스가 남았어…….’
이번 거대 에어리어는 두 개가 연결된 구조였다.
공간의 주인도 둘이었다.
빙룡을 잡았어도 아직 푸른 갑옷의 남자가 남았다.
매서운 눈매를 가진 그 남자의 존재 자체가 많이 신경 쓰였다.
에어리스를 안다는 그자의 말…….
푸른 갑옷의 남자는 에어리스의 과거를 안다고 했다.
그녀를 알기에 복수하겠다고 외쳤다.
‘위험한 느낌이 들어.’
유진하는 관찰력뿐만 아니라 감각도 예민했다.
미묘한 느낌을 받으면 당장 빠져나오거나 후퇴하곤 했다.
지금도 비슷했다.
에어리스와 푸른 갑옷의 남자가 같이 있으면 위험하다 느꼈다.
“가 보자.”
빙룡을 제압하고 남은 뒤처리는 여기 남은 요원들에게 맡겨도 될 거였다.
주변에 널려 있는 로프가 있었다.
그걸 가져와서 몸과 바위에 묶은 후에 내려갈 준비를 마쳤다.
“후우.”
유진하는 천천히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밑으로.
에어리스가 푸른 갑옷의 남자와 맞붙은 지하로.
다행히 유진하는 필수적인 체력과 기술은 가지고 있었다.
던전 공략을 할 적에 자유롭게 이동하려면 암벽 등반은 필수였다.
카앙.
조금 내려가니 벼랑 아래에서 치열한 칼날 소리가 들려왔다.
에어리스와 푸른 갑옷의 남자가 격렬하게 맞붙고 있었다.
유진하가 내려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에어리스가 무사하기만 기도했다.
* * *
“기억은 없어도 검술은 뇌리에 남은 듯하군.”
푸른 갑옷의 남자가 차가운 서리 기운을 발휘하면서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그의 장검에 매서운 냉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반대편에 있던 에어리스도 건틀릿 장갑의 힘으로 화염의 기운을 발산했다.
화염을 머금은 대검이 차디찬 한기를 막아 냈다.
“저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상대는 터무니없이 강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휘두르는 대검을 이렇게 가볍게 받아내는 자는 처음이었다.
에어리스의 과거를 아는 자.
그는 에어리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피부를 얼려 버릴 냉기보다 흑발 속에 드러난 그의 눈빛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당신을 죽일 기회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는 몰랐지. 고맙게 받아들이겠다.”
그 말과 동시에 남자는 장검을 겨누며 덤벼들었다.
‘온다.’
화염의 대검을 든 에어리스가 곧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남자가 장검을 매섭게 휘두르는 동시에 냉기도 발산됐다.
마치 파도가 얼어 버리듯이 매서운 얼음이 그가 휘두르는 검에 맞추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아앗.”
에어리스는 건틀릿에서 발휘된 화염 덕분에 냉기와 얼음을 막아냈다.
건틀릿은 화염, 얼음, 번개까지 다양한 속성을 발휘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전용 속성에 비해 화력이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푸른 남자가 가진 검은 오직 냉기 전용 능력만 보유했으니 더 강했다.
“위험해.”
정면 승부는 무리였다.
에어리스의 주변은 어느새 얼음벽으로 뒤덮여 갔다.
화염의 대검은 너무 작은 불빛이었고, 겨울바람 속에 있는 성냥불만큼 위태로웠다.
“하압!”
에어리스는 기합을 외치면서 대검을 휘둘러서 얼음벽을 깨뜨렸다.
사방이 냉기와 얼음으로 뒤덮여 가는 속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지?”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 때문에 남자의 존재를 놓치고 말았다.
‘얼음벽 어딘가에 숨어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얼음벽 사이에 몸을 숨기고 노릴 거라고 여겼다.
에어리스는 강력한 압박감 속에서 주변을 주시했다.
발걸음을 줄이고 주변의 소리에 집중했다.
허억. 허억.
살얼음 같은 긴장감…….
조용한 공간 속에서 에어리스는 침묵하고 기다렸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멈춰 버렸고 오직 한 사람만 떠올랐다.
유진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순간,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숨 막힐 듯이 짧은 시간이 지나가고 에어리스는 결심한 듯이 대검을 고쳐 잡았다.
“하앗!”
기합과 동시에 그녀는 최대한 높이 뛰어올랐다.
일반인과 비교해서 에어리스의 운동신경은 확연히 뛰어났다.
무려 5미터 가까이 뛰어오른 그녀는 공중에 잠시 머물렀다.
밑에는 얼음벽이 가득했고 여전히 푸른 갑옷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에어리스는 건틀릿 장갑에 힘을 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라이트닝…….”
막강한 번개가 건틀릿에서 흘러나와 대검에 휘감겼다.
에어리스는 낙하하면서 번개의 힘이 감도는 대검을 그대로 얼음벽에 내리쳤다.
파바박!
전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얼음은 물과 같은 성질이라 번개에 약했다.
성채같이 둘러쌓던 얼음벽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콰과과과광.
큰 충격이 퍼져나갔다.
사방에 깔렸던 모든 얼음벽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조각났다.
부서진 살얼음 파편이 나부꼈다.
“크윽!”
그 얼음 조각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감췄던 푸른 갑옷의 남자가 드러났다.
“이건…….”
푸른 갑옷 역시 얼음과 비슷한 성질이 함유됐고 번개에 취약했다.
번개가 남자의 몸에도 감돌았다.
그 충격으로 장검까지 손에서 놓쳐버렸다.
“해냈어.”
에어리스는 대검을 내리친 후에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직 번개가 약하게 저리는 땅에 착지했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번개에 감전된 상태였고 장검마저 놓쳤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알고 싶어요. 내가 누군지.”
에어리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요구했다.
나에 대해 알려 달라.
부탁과도 같았다.
온몸이 저리는 전기 충격을 입었음에도 남자는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너는 내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 그 대검으로 날 쓰러뜨린다면 알려 주지.”
에어리스는 차분히 대검을 움켜잡았다.
무기가 없음에도 남자의 저 굳건한 자세는 마지막 자존감처럼 보였으나 존중할 여유는 없었다.
에어리스는 결정했다.
“하아아압!”
대검을 높이 들고 일격을 날리려고 맨손만 남은 그에게 달려들었다.
최후의 참격이 그의 갑옷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이.
에어리스의 대검은 그 순간 멈춰 버렸다.
“안타깝군.”
푸른 갑옷의 남자는 옅은 미소를 흘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에어리스가 휘두른 대검을 잡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당신은 기억을 잃어버렸군. 내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고.”
에어리스의 대검을 움켜쥔 그는 고개를 내밀어 에어리스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심지어 자신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지.”
푸른 갑옷의 남자는 다시 강렬한 냉기를 발휘했다.
에어리스는 얼어 버린 조각처럼 완전히 굳어 버렸고, 강한 바람에 밀려가기 시작했다.
“와앗!”
남자가 더 강한 눈보라를 일으키자 에어리스는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차가운 얼음벽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으윽.”
신음이 고통스럽게 에어리스의 입가에 감돌았다.
고통을 억누르고 몸을 추스르다가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을 깨달았다.
얼음 기운에 휩싸인 탓에 몸이 얼어 버려 벽에 붙어 버리고 말았다.
“아.”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반면에 푸른 갑옷의 남자는 이미 온전한 상태로 돌아왔다.
“당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야.”
차디찬 회오리가 그의 손에 감돌아서 날카로운 얼음 단검이 되었다.
그는 차디찬 냉정을 유지한 채로 복수심에만 집중했다.
한 치의 웃음도 미소도 감돌지 않은 흑발의 기사였다.
“알고 싶어요. 내가 저지른 죄가 있다면 그것을 갚을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얼음벽에 얼어 버린 에어리스는 여전히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외쳤다.
이 싸움에 담긴 원한과 내 목숨을 원하는 이유.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남자는 냉소적인 말로 일관했다.
“죽은 사람의 목숨. 누구도 갚을 수 없어.”
남자는 냉기를 모아서 작은 얼음 단도를 만들었다.
곧바로 그 얼음 칼이 에어리스를 겨누었다.
망설임이지 않았다.
이미 그의 가슴 속에는 비장함만이 채우고 있었다.
바람과 함께 얼음 조각과 가루가 살포시 흘렀다.
“끝이다.”
에어리스의 목숨을 가져가겠다고 결단했다.
퍼억.
작은 소리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단검이 정확하게 에어리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죽어간 순간이었다.
에어리스의 시간은 여기서 멈췄다.
이제 더는 그녀에게 생명의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의 목소리나 감촉이 전해지지 않는다.
작은 침묵이 죽음을 집어삼키고 절망만을 뿜어냈다.
비극이 남았다.
파앗.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뭐지?”
에어리스에게 작은 빛이 감돌았다.
건틀릿 장갑 위에 꼈던 반지였다.
에어리스 손등의 문양과 같은 문장이 새겨진 그 반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저 물건은?”
푸른 갑옷의 남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반지의 빛은 점점 커지더니 광활한 섬광을 발휘했다.
모든 얼음이 깨지고 화사한 기운이 되돌았다.
에어리스의 심장이 원래대로 뛰기 시작했다.
맥박이 돌아오고 체온도 감돌았다.
멈췄던 시간이 되돌아왔다.
“하아.”
에어리스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예전에 호수 아래의 던전에서 에어리스가 발견했던 그 반지.
사용법을 몰라서 그냥 끼고만 다녔는데, 사실 부활의 힘이 담겨 있었다.
단 한 번만 발휘되는 힘이었다.
“부활의 반지였나.”
푸른 갑옷의 남자는 다시 살아난 에어리스를 마주했다.
반지는 능력을 발휘한 후에 산산이 부서졌다.
마치 에어리스를 대신해서 죽은 듯이 모래처럼 사라졌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다시 내 손에 죽는 건 변하지 않아.”
“아니야.”
푸른 갑옷의 남자 뒤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진하였다.
어느새 밧줄을 타고 내려온 유진하가 지켜보고 있었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전투에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유진하의 행동 하나하나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에어리어는 두 개. 주인도 두 개. 그렇다면 전리품도 두 개겠지.”
유진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위에 빙룡은 해치웠어.”
“그런가. 쉽게 공략할 수 없는 녀석일 텐데.”
남자는 칭찬 속에 비아냥을 섞어서 중얼거렸다.
그런 반응에 대해서 유진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전리품은 아마 빙룡의 배 안에 있을 테고 지금쯤은 위에서 회수했을 거야. 그럼 다른 전리품은 어디에 있을까?”
아까 에어리스의 번개 공격을 맞아서 남자가 떨어뜨렸던 장검이 있었다.
유진하는 가만히 남자의 장검을 손에 들더니 싱긋 웃었다.
“이 검이 전리품이지? 당신이 에어리어의 두 번째 주인이니까 전리품을 계속 들고 다녔던 거잖아.”
주인을 쓰러뜨리거나.
전리품을 차지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내면 된다.
빙룡의 전리품은 위에서 회수했을 테고, 방금 유진하가 푸른 갑옷의 기사가 지닌 전리품 장검마저 손에 넣었다.
“에어리어 클리어.”
유진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던전은 매섭게 흔들렸다.
공간이 사라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외부로 탈출할 수 있는 차원문이 등장했다.
“이 녀석!”
푸른 갑옷의 남자가 뒤늦게 유진하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이미 상황은 늦은 뒤였다.
공간은 붕괴의 시간을 맞이했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전리품을 잃었고, 자신이 패배했다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에어리어의 주인은 자신의 공간과 운명을 같이하곤 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네 녀석, 제법이군.”
남자는 솔직하게 유진하의 실력을 인정했다.
에어리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진하와 이소민과 같은 동료가 있었다.
“에어리스, 같이 가자.”
시간이 없었다.
차원문이 닫히기 전에 원래 세계로 넘어가야 했다.
유진하는 에어리스의 손목을 잡아서 차원문 쪽으로 향했다.
더는 여기에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에어리스는 자신의 과거를 알아야 했다.
“알려 주세요.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누구인지.”
푸른 갑옷의 남자는 알 듯 모를 듯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나는 시리안…….”
천천히 사라져 가는 공간 속에서 푸른 갑옷의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시리… 안……?”
에어리스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는 다음 말을 남겼다.
“당신은…….”
최후의 말이 에어리스에게 전해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차원문이 닫혔다.
야속하게도 남자의 마지막 말은 에어리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사라진 차원문과 허물어가는 공간 속에서 푸른 갑옷의 기사는 혼자 남았다.
‘시리안’이라 이름은 가진 그 남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어리스의 진짜 이름을…….
“당신은 아델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