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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9화 (19/229)

19화 소용돌이 지역(4)

“모두를 배신하고 죽게 놔둔 죄. 그게 당신의 첫 번째 죄이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에어리스에게 소리쳤다.

에어리스는 영문조차 모르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은 대체 과거에 어떤 존재였던 걸까.

무엇이 저 사람이 이렇게 저주하고 원망하도록 만들었을까.

마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철창을 중간에 두고 단절된 느낌이었다.

마음이 갑갑했다.

고통스러운 감정이 심장에 닿았고,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남았다.

“나는… 기억하지 못해요.”

에어리스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것만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의 생각은 달랐다.

“당신의 두 번째 죄…….”

푸른 갑옷의 남자는 손에 든 장검을 들어 에어리스를 겨누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에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에어리스는 순간적으로 대검을 들어 상대의 공격을 방어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맞부딪치어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큭.”

남자의 힘은 상당했다.

검과 검을 맞대면 어느 정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전투에서의 경험이 에어리스의 손에 묵직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검으로 힘을 겨루는 동안, 에어리스는 상대의 눈을 유심히 바라봤다.

분노로 가득한 남자의 눈빛에는 경멸이 느껴지고 있었다.

“알려 주세요. 내가 누구였고 무엇을 했는지…….”

에어리스는 진심으로 물어봤다.

저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

자신의 과거가 두렵기도 했다.

‘피하지 않겠어.’

어떤 결과를 받더라도 감수하겠다고 각오했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세 번째 죄이자 마지막 죄…….”

남자에게는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싸늘하고 차가운 냉기가 그의 몸에 감돌았다.

“당신의 존재 자체이다.”

차가운 얼음 기운이 다가오자 에어리스의 손이 서서히 얼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했다.

에어리스는 크게 검을 휘두르고 뒤로 물러섰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어느새 냉기를 강렬하게 발산했고 이대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근처에 다가갔다가는 얼어 버릴 거야.’

에어리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건틀릿과 반지를 주목했다.

속성 능력이 있는 건틀릿이 있다면 냉기와 맞설 방법이 있었다.

“파이어.”

에어리스가 작게 말하자 건틀릿에서 발산된 불길이 대검에 실렸다. 화염을 머금은 대검으로 냉기에 맞설 작정이었다.

푸른 갑옷의 남자는 차가운 냉기 속에서 조용히 에어리스의 불길을 주목했다.

“그래.”

남자는 장검의 끝으로 에어리스의 얼굴을 겨냥했다.

“허무한 결말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전력으로 너를 쓰러뜨리겠어.”

둘은 동시에 움직였다.

냉기과 화염.

장검과 대검.

콰과과과.

서로의 힘과 기량을 걸고 전력을 맞붙었다.

사방은 얼음으로 뒤덮인 지하였다.

마치 갇힌 것 같은 이곳 얼음 지하 굴에서 둘만의 대결이 계속됐다.

* * *

위쪽은 상황이 달랐다.

빙룡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인간들은 강력한 주인 몬스터에 맞서야 했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최정예 여성 요원 J의 전략은 실패했다.

그녀는 열 명의 요원과 함께 석궁과 특제 화살로 빙룡을 묶어 두고 제압하려 했다.

그 작전이 무너지자 이제는 유진하의 차례가 되었다.

“저는 카드 한 장으로 제압하겠습니다.”

당당하게 나선 유진하를 보면서 모두가 의아해했다.

거대한 빙룡은 최정예 정부 요원들도 공략이 쉽지 않았고, 강철의 성에 비할 만큼 빈틈없이 단단했다.

그런데.

유진하는 겨우 카드 한 장으로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허세 부리는 거야?”

J는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오히려 차분한 쪽은 유진하의 동료들이었다.

M은 물론이고 이소민은 심지어 팔짱까지 끼고 지켜봤다.

“지켜봐요. 허튼 말 하는 녀석은 아니니까.”

이소민은 코웃음까지 치면서 웃었다.

J가 오히려 당황할 만큼 여유가 넘쳐흘렀다.

‘정예 요원들이 덤벼도 어려운 몬스터인데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정말로 카드 한 장만 가지고 걸어가는 유진하가 J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료들이 철석같이 신뢰한다?

저 녀석을 믿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 같았다.

전장에서 신뢰란 능력 있는 자만 받을 수 있는 훈장이었다.

믿음직한 동료.

앞장선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동료들이 믿고 따르는 법이다.

원래 J는 유진하가 아니라 에어리스를 주목했다.

이 어정쩡한 팀에서 대검을 휘두르는 괴력의 여자, 에어리스가 유일한 전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힘에 기대어 저들은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나?’

저들이 믿는 사람이 에어리스가 아니라 유진하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유진하의 손에 든 카드 한 장.

정말 그게 전부였다.

‘레어 카드?’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카드는 뒷장으로 나름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금빛 혹은 은빛으로 카드 뒷면이 장식됐다면 그 카드는 그만큼 강한 위력이 있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싸고 귀한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유진하의 카드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축에 가까웠다.

‘저 한 장으로 빙룡을 잡는다고?’

J는 도무지 그 말이 믿기지 않아서 유진하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든 계획은 오직 저 소년만이 알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크게 울부짖는 빙룡의 온몸에 서리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녀석의 피부와 온몸은 점점 얼음의 힘을 모았고,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이 방을 전부 얼려 버리려는 듯했다.

바닥과 벽이 흔들렸고 모두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큰일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자 다급해진 J가 유진하에게 달려갔다.

“그 카드는 대체 뭐야?”

한 장의 카드.

유진하가 이곳에 가져온 카드는 단 세 장이었다.

첫 번째는 순간 이동.

두 번째는 화염.

세 번째는 준비한 히든카드.

지금 그의 손에는 세 번째 히든카드가 쥐어졌다.

“이거요?”

유진하는 카드에 적힌 능력을 살펴봤다.

-머릿속에 내재한 말과 생각을 특정 대상에게 전달할 수 있다.

‘전언 전송’ 카드였다.

“겨우 그걸로?”

J는 놀라서 붉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공격 카드도 아니고 심지어 방어 카드도 아니었다.

겨우 보조 카드에 불과했고, 그것도 인기가 없어서 사람들은 잘 챙기지 않았다.

싸구려라 버림받는 저 카드 한 장으로 어떻게 저 커다란 빙룡을 제압한단 말인가.

도무지 불가능한 소리였다.

“그걸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나선 거야. 당장 물러나.”

J가 다급하게 외치면서 양날검을 치켜들었다.

“방해는 그쪽이 하는 거예요.”

유진하는 오히려 당당하게 더 앞으로 나갔다.

J가 말리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치니 당황할 틈도 없었다.

“원래 이 카드는 중요한 작전 지시를 하려고 산 거였어요. 하지만 다른 사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유진하는 조용히 얘기했다.

점점 바람이 폭풍우처럼 빙룡에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유진하는 마침내 전언 카드를 사용했다.

머릿속에서 명령을 내렸다.

‘파이어.’

사실 유진하는 이미 한 장의 카드를 더 사용했다.

화염 카드였다. 그 카드는 이미 아주 중요한 곳에 들어가 있었다.

바로 빙룡의 몸속이었다.

화염 카드가 발동하자 빙룡은 가슴 안에서 갑자기 뜨거운 기운을 느끼더니 고통에 몸부림쳤다.

“캬아아아악!”

확 치솟은 불길에 의해 빙룡은 상체의 일부가 순간적으로 녹아 내렸다.

녀석은 겉에 강렬한 얼음 피부를 가졌으나 속은 달랐다.

연약한 몸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니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말았다.

“뭐지?”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빙룡을 바라봤다.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아무도 몰랐다.

유진하만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서둘러 J가 달려와서 물어봤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화염 카드를 발동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했냐고.”

다급하게 재촉하는 그녀와 달리 유진하는 침착하게 손을 들어 만류했다.

“알았어요. 알려드릴게요.”

유진하는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아까 들고 있던 전송 카드였다.

“이걸로?”

“카드를 어떻게 쓰는지 다들 알잖아요.”

카드를 손에 쥔 채로 명칭을 외치거나 머릿속에서 생각하면 능력이 발동한다.

아까 J도 ‘윈드’라고 외쳐서 바람 카드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송 카드는 뇌리에서 어떤 말을 원하는 대상에게 범위 내에서 전달할 수 있어요. 중요한 점은 그게 대상이라고 했지. 반드시 사람이라고는 안 했다는 겁니다.”

“아…….”

그제야 J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전송 카드는 특정 대상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

그 얘기는 물건이나 몬스터나 전부 가능하다는 거였다.

이걸 이용해서 유진하는 화염 카드를 향해 ‘파이어’라는 생각을 ‘전송’시켰다.

생각을 전송시켜 원격으로 카드를 발동시킨다.

그것이 유진하의 계획이었다.

‘대단해.’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몬스터에게는 공격 카드나 방어 카드만을 사용했다.

저 카드는 그냥 멀리 떨어진 동료들과 무전기처럼 의사소통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이건 기발한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사용법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에도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게 원격으로도 카드를 발동시킬 수 있다니…….’

이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유진하라는 소년이 다르게 보였다.

대단한 관찰력과 판단력을 겸비한 건 확실했다.

다만, 의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어떻게 화염 카드를 빙룡의 몸속에 넣어둔 거야?”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유진하는 딴청을 부리듯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쪽에는 정예 요원이 보였다.

“당신 동료들이 해준 거예요.”

J는 문득 아까 기억을 되돌려 봤다.

그때, 유진하는 석궁과 특제 화살에 관심이 있는 척 요원들에게 다가와서 직접 들고 살펴봤다.

“아!”

J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석궁의 화살을 만지는 척.

유진하는 슬쩍 카드를 작게 접어서 화살촉에 끼워 놓은 거였다!

열 명의 요원들이 발사한 특제 화살은 정확히 빙룡에게 꽂혔고, 덕분에 화염 카드가 몬스터의 몸에 들어갔다.

‘이 녀석, 우리를 이용했구나.’

유진하는 J의 작전을 보자마자 바로 이용한 거였다.

심지어 J와 요원들이 실패할 거라 예상하고 자신의 작전을 심어 놨다.

그 짧은 틈에…….

이렇게 기발한 발상과 판단력이 가능하다니.

대담한 전략을 짜고 실행했다.

유진하.

천재적인 발상력과 지략.

‘이 녀석이 리더였어…….’

에어리스가 아니라 이 소년이 팀의 리더이자 구심점이었다.

J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비틀거리다가 큰 소음과 충격파를 느끼고 나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저건?”

빙룡이 땅에 떨어졌다.

몸속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화염을 못 이기고 결국 공중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이에요.”

유진하가 소리쳤다.

동시에 이소민과 M이 앞으로 나섰다.

J와 요원들은 이번에도 한 발 늦었다.

“기다렸어.”

이소민은 접이식으로 펴지는 창을 꺼냈다.

M은 한손검을 준비했다. 반대쪽 손에는 J처럼 카드를 쥐었다.

빙룡이 몸을 추스르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창과 검이 매섭게 빙룡의 머리부터 가슴까지 찌르고 들어갔다.

“크아아아아아!”

빙룡은 괴로워서 몸부림쳤다.

아직 힘이 남아서 팔을 마구 휘저었으나 이소민과 M은 일부러 그 범위에 닿지 않는 방향으로만 빙빙 돌며 움직였다.

쿵쿵.

땅바닥에 진동이 전해졌다.

빙룡이 발버둥치는 바람에 J와 요원들은 다가갈 타이밍을 놓쳤다.

다급해진 J가 소리쳤다.

“어서 돌입해. 이번 기회를 놓치면 끝이야.”

요원들은 전부 가방에서 도끼와 검, 창을 꺼내어 달려들었다.

승부는 간단치 않았다.

빙룡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고 최후까지 저항하려 들었다.

날지는 못했으나 땅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위용을 뿜어냈다.

J는 카드를 들고 첫 번째 바람의 카드를 사용했다.

“윈드.”

바람 카드를 사용해서 자유자재로 날아가는 능력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었다.

공중에서 균형을 잘못 잡으면 바로 추락해 버린다.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가면 벽과 충돌할 수도 있다.

실수하면 끝장인 기술이었다.

J가 나름의 노하우와 고된 훈련 끝에 터득한 기예에 가까웠다.

다른 요원들은 감히 흉내조차 못한다.

후우욱.

바람을 타고 빙룡의 얼굴에 정확히 당도한 J가 그대로 양날검을 휘둘렀다.

정확한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아!

빙룡은 고통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틈에 J는 바람 카드를 하나 더 사용했다.

“윈드.”

이번엔 방향을 위로 바꾸어 최대한 높이 치솟았다.

솟아오른 후에 내려다보니 저 밑에는 고통스러워하는 빙룡이 보였다.

“자이언트.”

마지막 카드는 ‘거대화’였다.

A급 카드였고 이 능력은 특정 물체를 거대하게 키울 수 있었다.

J는 거대화 대상으로 손에 든 양날검을 선택했다.

양날검은 화려한 빛에 휘감기더니 순식간에 빌딩 건물처럼 어마어마한 크기로 증강됐다.

당연히 J에게 그 엄청난 검을 휘두를 만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중이었다.

중력의 힘으로 거대해진 양날검은 가파르게 밑으로 낙하했다.

“같은 생각이었군.”

밑에 있던 M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도 한손검과 카드를 각각 가지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거대화’ 자이언트 카드를 들었다.

“자이언트.”

M은 자신의 검을 땅에 꽂아둔 채로 거대화시켰다.

물론 거대화된 검은 M도 들 수 없다. 그래서 땅에 세워 두고 증강시킬 계획이었다.

J는 위에서 아래로.

M은 아래에서 위로.

서로의 검이 거대화됐다.

두 사람의 거대화 검은 공교롭게도 하나의 목표물이 있었다.

빙룡의 머리였다.

콰앙!

큰 충격이 빙룡의 머리에 위아래로 느껴졌다.

마치 모든 시간이 멈춘 듯이 정적이 흘렀다.

거대한 검 사이에 머리가 끼인 빙룡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으깨진 조각과 파편이 흩어졌다.

최후의 일격은 빙룡의 저항을 조용히 잠재웠다.

에어리어의 주인이었던 빙룡과의 사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해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소민이 쓰러진 빙룡의 몸체를 바라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정말로 우리가 이긴 거야. 이 엄청난 괴물을…….”

이소민이 두 팔을 들어 만세를 외쳤다.

“이겼다. 우리가 이걸 쓰러뜨렸어. 유진하, 네 덕분이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유진하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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