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4화 (14/229)
  • 14화 살의를 가진 자(5)

    “네가 왜 여기 있지?”

    놀란 살인마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유진하는 궤짝 위에 있었고, 살인마는 한발 뒤에 궤짝 앞에 도착했다.

    “너는 분명 돌아갔잖아. 비상구로 나간다고 했는데…….”

    “나 혼자였으면 그랬겠지. 그런데 지금은 일행이 있어서 그냥 다수결에 따른 거야.”

    “뭐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말 안 했어. 그래야 작전이 효과적이라서.”

    유진하가 내려온 천장에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여기도 통로가 있었나?”

    “이번 에어리어는 비밀 통로와 환기구가 굉장히 많았어. 이 방에도 물론 있었지.”

    천장에서 내려올 적에 사용한 하얀 줄은 아까 살인마가 이소민을 묶었던 그것이었다.

    “당신 물건도 잘 써먹었지.”

    “재밌는 녀석들이군. 대검을 휘두르는 여자에다 너까지.”

    살인마는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내가 이렇게 나올지도 알았군?”

    “물론이지. 당신 아까부터 일부러 기절한 척 연기했잖아. 나도 알면서 그냥 놔뒀지. 당신이라면 이렇게 스스로 미끼가 되려 할 거고. 그 틈에 전리품을 노릴 것도 뻔하니까.”

    녀석과 대화를 나누던 유진하의 낯빛이 갑자기 굳었다.

    “뒤에 놈이 온다!”

    살인마는 고개를 휙 돌렸다.

    용암을 둘러쓴 에어리어의 주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거리가 멀었다.

    “아차!”

    “속았지. 멍청아.”

    살인마는 두 팔이 묶인 상태였는데, 유진하는 아까 천장에서 타고 내려온 줄을 거기에 엮었다.

    그 바람에 살인마는 완전히 천장에 묶인 꼴이 되었다.

    “이 녀석!”

    다음에는 살인마 녀석을 공중에 매달리도록 만들었다.

    대롱대롱.

    “주인의 전리품도 얻고 살인마도 다시 잡고. 일석이조 맞지?”

    유진하는 룰루랄라 휘파람을 부르더니 천천히 궤짝의 뚜껑을 잡았다.

    마침내 용암 지대에서 주인의 전리품을 얻는 순간을 맞이했다.

    “성공이다.”

    궤짝이 열리자 안에서 장갑이 나왔다.

    “건틀릿.”

    중세 갑옷의 보호 장갑이었다.

    전리품이 열리자 동시에 바로 옆에서 에어리어 탈출구가 회오리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차원문이었다.

    “유진하!”

    멀리서 이소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어리스, 이소민, M까지 모두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 잘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어.”

    문제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었다.

    거대 용암 몬스터는 여전히 건재했고, 세 사람이 무사히 탈출구까지 도착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어이, 살인마 아저씨. 한 번 더 해 볼래?”

    유진하가 공중에 매달린 살인마에게 말을 걸었다.

    “장난하나?”

    “개인적인 악감정을 얘기할 때가 아니잖아. 목숨을 최우선으로 해야지.”

    “…풀어주면 유인을 또 맡아 달라는 거냐.”

    “이해가 빠르군.”

    “좋다. 지금 놔 주면 그 약속은 지키지.”

    “대답도 시원하네.”

    유진하가 줄을 풀어주자 암살자는 바로 바닥에 착지했다.

    녀석의 고속 사바톤 부츠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죽었던 생명을 다시 얻은 것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크르르르르.”

    살인마는 거대 용암 몬스터의 주변을 알짱거리면서 시선을 끌어 준 후에 다시 벽을 타고 달렸다.

    마치 모기처럼 기분이 나쁘게 몬스터의 신경을 잘 긁어 줬다.

    “최고의 미끼는 이소민 누나가 아니었네. 저 녀석이었어.”

    “누가 미끼야!”

    이소민의 목소리가 버럭 들렸다.

    “다 들렸어요? 소민 누나?”

    “당연하지. 내가 귀는 엄청 밝아. 특히 내 욕은 다 들려.”

    유진하에게 달려온 이소민이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유진하, 너 도망간 줄 알았는데?”

    “살인마가 듣고 있었어요. 녀석을 미끼로 써먹어야 가능성이 있는데, 다 듣고 있으면 속일 수가 없었죠. 그래서 이렇게 해야 했어요.”

    이소민이 다가오자 유진하는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이소민의 행동은 달랐다.

    유진하의 머리를 감싸고 살짝 안아 주었다.

    이소민의 돌발 행동에 유진하는 깜짝 놀라서 말까지 더듬었다.

    “뭐, 뭐예요.”

    “돌아와서 다행이야. 정말 간 줄 알았잖아.”

    “…….”

    유진하는 조용히 있었다.

    M이 탈출구를 가리켰다.

    “재회의 반가움은 나중에 하지. 이제 가야 해.”

    넷은 서둘러 차원문으로 뛰어갔다. 달려가던 와중에 에어리스가 유진하의 얼굴을 보고 살짝 웃었다.

    “얼굴이 빨개진 거 같은데요?”

    “아, 열이 좀 생겼나?”

    유진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고개를 돌려 차원문에 들어갔다.

    “이제 나가자.”

    “네.”

    전리품을 챙기고 마침내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에어리어 클리어의 순간이었다.

    * * *

    반가운 하늘이 가장 먼저 마중 나왔다.

    뭉게구름 속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나올 때면 참 눈이 부셔.”

    유진하는 하늘을 보며 감탄했다.

    이소민 역시 이번엔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정말 힘들었어. 죽을 뻔한 게 몇 번이냐?”

    “소민 누나는 다음에는 안 하는 편이 낫겠어요.”

    “그러고 싶어도 못 하거든. 이번에 아무것도 못 챙겼어. 빚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그때, 뭔가가 생각난 듯 이소민이 한마디를 꺼냈다.

    “아, 맞다. 주인의 전리품. 뭐 얻었지?”

    유진하는 품에서 조심스레 꺼냈다.

    “건틀릿이에요.”

    건틀릿이 나오자 에어리스는 관심을 보였다.

    “여기도 문양이 있어요.”

    자신의 오른 손목에 있는 문양과 비교했더니 이번에도 같았다.

    “확실히 같아.”

    저번에도 같은 문양이 있는 반지였다.

    이번에는 건틀릿이었다.

    이 문양의 의미.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에어리스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다.

    “가치가 있을까? 상점에 비싼 값으로 팔릴 정도는 되려나.”

    이소민이 건틀릿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소민 누나는 역시 돈으로 바로 보네요. 지금 문장 얘기하는데.”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 난 대출이 많고. 넌 카드도 전부 날렸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어리스, 이소민과 함께 다닌 이후로 계속 카드만 소모하는 적자 인생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유진하는 건틀릿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했다.

    “글쎄요. 단순한 방어구라면 큰 가치는 없어요.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몰라도.”

    에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면 살인마의 신발 같은 건가요?”

    모두 말이 없어졌다.

    살인마 녀석은 나오지 않았다.

    타이푼 급의 대형 에어리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고, 차원문은 남아 있는 상태였다.

    “녀석은 나오지 않았어. 아마 쉽게 나오기는 어렵겠지.”

    M은 담담하게 차원문을 바라봤다.

    그는 G를 비롯해 요원 동료들을 전부 잃은 터였다.

    유진하가 조심스레 물어봤다.

    “에어리어 안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 정부에 알려지는 거죠?”

    “물론이지. 녀석의 살인 행각은 바로 보고한다. 너희들 덕분에 제대로 보고서를 쓸 수 있겠군.”

    M이 현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상황부터 보고하러 가겠다. 여기는 한동안 봉쇄할 거야. 너희도 이만 돌아가라.”

    가기 전에 잠깐 걸음을 멈춘 M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 보자.”

    그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천천히 걸어갔다.

    유진하와 에어리스, 이소민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정부 요원 중에서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일 수도 있겠어요.”

    “그런 것 같네.”

    세 사람은 모두 동의했다.

    “이제 커피숍으로 가자.”

    “커피요?”

    이소민은 벌써 커피숍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일이 끝난 후에도 커피를 마셔야 정말 퇴근하는 느낌이 들어.”

    에어리스가 이소민을 바로 따라갔다.

    “저는 카라멜 마키아또. 그거 먹고 싶어요. 소민 언니.”

    “달달한 커피가 입맛에 맞구나. 취향껏 먹자고.”

    유진하도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을 따라갔다.

    이번만큼 고생했던 에어리어 공략이 있었을까.

    살아서 돌아온 덕분에 커피도 마실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형에 대한 실마리를 이번에도 찾지 못했으나 희망은 품고 있었다.

    “후우. 피곤하다.”

    유진하는 이번에 얻은 건틀릿을 챙기며 따라갔다.

    오늘따라 향긋한 커피 향과 샤워가 생각났다.

    정말 힘겨웠던 하루였다.

    * * *

    어느덧, 밤이 되었다.

    유진하 일행이 나온 타이푼 급의 대형 에어리어가 거의 사라져갈 즈음이었다.

    차원문이 거의 닫히기 직전이었고, 앞을 지키던 요원들도 조금씩 철수 준비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파아앗!

    그때, 마지막 생존자가 탈출구에서 튀어나왔다.

    “누구?”

    퍼억!

    알아볼 틈도 없이 그자는 단숨에 에이전트 요원을 냅다 차서 쓰러뜨리더니 빠른 스피드로 달아났다.

    “젠장.”

    뒤늦게 총을 겨누는 요원들이지만 녀석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본부에 연락해.”

    중무장한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상대는 너무 빨랐다.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할 골목으로 한참을 달아나던 그자의 발이 어둠 속에서 드디어 멈췄다.

    사바톤 부츠를 신은 가면 살인마.

    마지막 생존자였다.

    “정말 흥미로웠어.”

    어두운 골목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살인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가면을 손으로 만졌다.

    “일대일 승부에서 날 이긴 그 여자. 에어리스라고 했나?”

    다른 손은 명치 부근에 손을 댔다.

    그러자 카드 한 장이 나타났다.

    “잠금 카드. 몸에 지닌 모든 물건은 잠금 상태가 되어 상대방이 뺏을 수 없다.”

    아까 유진하 일행이 살인마의 가면을 벗기지 못하고, 사바톤 부츠를 벗길 수 없었던 이유였다.

    잠금 카드는 한 번 발동하면 주인만 풀 수 있었는데,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차라리 물건을 부수는 쪽은 가능했다.

    살인마는 잠금 해체한 후에 드디어 가면을 벗었다.

    “꽤 맘에 든 가면이었는데 바꿔야겠군.”

    에어리스가 주먹으로 강하게 쳐서 가면에는 금이 간 상태였다.

    가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유진하라고 했나? 날 두 번이나 미끼로 삼은 것도 모자라 약을 올리던 녀석이었지.”

    절그럭 절그럭.

    암살자가 걸을 때마다 발소리가 들렸다.

    철로 만들어진 사바톤 부츠 특유의 소리였다.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다. 너희들과 다시 붙을 날이 곧 올 거야.”

    골목에서 나오자 그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에어리어에서 만날 거다. 거기서 너희를 영원히 묻어 주겠어.”

    도시의 밤이 깊어갔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하루였지만, 다른 이에게는 굉장히 길고 힘들었던 날.

    가면을 버린 쓰레기통에는 도둑고양이가 올라와서 안을 뒤지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 * *

    “시청자 여러분들, 저와 함께 오늘의 튼튼 운동을 따라해 보세요.”

    아침이 되었다.

    티비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다.

    티비 프로그램은 운동 방송이었는데, 요가복 복장의 여자 선생이 나와서 쉬운 자세부터 어려운 자세까지 시범을 보여 줬다.

    “정말 쉬워요. 누구나 따라서 할 수 있어요.”

    티비 앞에는 매트를 깔고 요가 선생을 따라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에어리스와 이소민이었다.

    “아침부터 뭐 해요? 둘이서?”

    우유를 마시면서 부엌을 나온 유진하가 두 사람을 바라봤다.

    “보면 모르니. 요가 하잖아, 요가.”

    이소민은 끙끙거리면서 티비 속 요가 자세를 열심히 따라했다.

    “에어리스, 힘들어 보이는데?”

    생각보다 에어리스가 잘 따라 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눈치였다.

    “어렵네요. 요가는 정말 잘 안 되네요.”

    유진하는 왜 둘이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요가 연습이야?”

    다리를 하나만 들고 균형을 잡던 이소민이 대답했다.

    “에어리스가 나한테 물어봤거든. 자기가 힘은 자신 있는데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이야.”

    “그래서 이걸 하자고?”

    “그런 거지. 진하야, 너도 할래? 너도 굉장히 뻣뻣할 거 같은데.”

    유진하는 손에 든 우유를 다시 마시면서 방향을 틀었다.

    “아뇨. 저는 됐습니다.”

    억지로 시킬까 봐 서둘러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소민이 더 빨랐다.

    “하는 김에 같이 하자. 너도 지금 할 거 없잖아.”

    유진하를 뒤에서 콱 잡은 이소민이 질질 끌어서 데려갔다.

    “아니, 나 할 거 많거든요. 이번 공략전을 수첩에 정리하고 작전 계산도 해야 하고.”

    “이따가 해도 되잖아. 조금만 같이해도 돼.”

    요가에 집중하던 에어리스도 밝게 웃었다.

    “그래요. 소민 언니가 잘 도와줄 거예요.”

    “하아.”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온 이상 피할 도리가 없었다.

    유진하는 세 번째 요가 트레이닝 참가자가 되었다.

    “손을 쭉 뻗으세요.”

    요가 선생의 지시에 세 사람이 모두 손을 뻗었다.

    “다리도 쭉쭉.”

    엎드려서 다리까지 쫙 뻗었다.

    “소민 누나, 언제까지 해야 해요?”

    “금방 끝나.”

    티비에 있는 요가 선생의 수업은 무려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어때? 그래도 운동하니까 좋지?”

    요가 수업이 끝나자 이소민은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네, 아침부터 힘을 다 빼서 좋네요.”

    에어리스도 음료를 마시면서 상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유를 다시 마시던 유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힘이 다 빠졌네. 저번에 얻은 건틀릿이나 체크하려 했는데…….”

    전리품 소리를 듣자 에어리스의 눈빛이 빛났다.

    “드디어 성능을 알아낸 건가요?”

    “아아, 괜찮은 물건 같았어.”

    유진하는 테이블에 놓아 둔 건틀릿을 가져왔다.

    “타이푼 급 대형 에어리어에서 나온 물건답다고나 할까. 역시 어려운 곳을 클리어하면 좋은 아이템이 나오네. 레어 등급이야.”

    이소민이 건틀릿을 매의 눈빛으로 살폈다.

    유진하가 얼른 이소민의 속셈을 제지했다.

    “누나한테 주면 팔아 버릴 거 같아서 안 돼요.”

    유진하는 건틀릿을 에어리스에게 건넸다.

    “에어리스가 한 번 껴봐.”

    “제가요?”

    “딱 괜찮을 거야.”

    물건을 손에 쥔 에어리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건틀릿을 바라봤다.

    반짝반짝 빛나는 건틀릿이 세 사람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