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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3화 (13/229)

13화 살의를 가진 자(4)

용암 지대 에어리어의 마지막 방을 앞두고, 유진하 일행의 장비 상태는 이러했다.

유진하.

- 카드 보유 없음.

에어리스.

- 대검 버스터 슬레이어 & 복면 살인마, 반지.

이소민.

- 채찍 하나.

에이전트 요원 M.

- 검 한 자루. 카드 보유 없음.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서 카드가 단 한 장도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맞설 상대가 일반 몬스터가 아니라 에어리어의 주인이 상대라면 결코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었다.

“비상구로 빠져나가도 돼요.”

유진하가 일행에게 다른 방법을 알려 줬다.

“지금 전력으로는 에어리어의 주인과 맞서기는 어려울 거예요.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는 편이 좋아요.”

요원 M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여기는 비상 통로가 많은 편이었지. 에어리어 클리어에 도전하기보다는 퇴각하는 편이 좋을 거다.”

천천히 선글라스를 만지던 M이 단호하게 얘기했다.

“민간인이라면 말이다.”

이소민이 살짝 반응했다.

“당신은요?”

“나는 정부 에이전트 요원이다. 코드네임을 받은 이상 당연히 임무에 충실해야 하지. 상대와 맞서지도 않고 도망갔다는 보고서를 쓸 수 없어.”

에어리스는 볼을 간질거리면서 유진하의 눈치를 살폈다.

“저도 가 봤으면 해요.”

“에어리스?”

“주인의 전리품. 저는 거기서 나왔어요. 잃어버린 기억의 힌트라고는 손등의 문양이 전부예요. 저번에 얻은 반지에도 같은 문양이 있었고요. 어쩌면 이번에도 제 기억과 관련된 물건이 나올 수도 있어요.”

“…….”

“이대로 돌아가면 계속 후회할 것 같아요. 끝까지 가 보고 싶어요.”

“…….”

유진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결정했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에어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남고 싶은 사람은 남는 거야. 나는 돌아갈게.”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결정 하나에 자기 목숨이 걸렸다면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선택은 냉정하게.

지금까지 백 개가 넘는 에어리어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비결이었다.

“지금 전력으로 에어리어의 주인을 제압하기는 어려울 수 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카드는 한 장도 없었다.

포기하고 가는 선택이 유진하가 보기에 지금 가장 올바른 판단이었다.

“정말 돌아가는 거야?”

걸어가는 유진하의 뒷모습을 보던 이소민이 중얼거렸다.

“유진하, 네가 어떻게 그동안 살아남았는지 이제 이해가 됐어. 여기서 이렇게 돌아갈 수도 있는 거구나.”

“선택은 자신의 몫이에요. 저는 살아남기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목숨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유진하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서로가 인식하지 못할 거리까지 떨어진 후에 에어리스는 가장 먼저 문 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가던 길을 가요.”

“그래.”

에어리스는 두 팔을 뻗어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두껍고 커다란 문이 열리는 중에 모래가 후두두 떨어졌다.

에어리스, 이소민, M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는데 방이 정말 컸다.

마치 경기장처럼 어마어마하게 넓은 방이었다.

길은 일직선인데 양쪽으로는 용암이 가득했다.

“방이라기에는 너무 넓다. 콘서트장 수준인데.”

이소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안으로 향했다.

에어리스는 대검은 물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살인마를 어깨에 메고 걸어갔다.

M이 가장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 에어리어의 전리품이군.”

멀리 커다란 궤짝이 하나 보였는데 빛이 살짝 어른거렸다.

틀림없이 주인의 전리품이었다.

“조심해.”

M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분명 녀석이 있다.”

유진하 다음으로 관찰력이 뛰어난 M이었다.

이소민은 숨을 죽이고 사방을 살폈는데 물론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저기다.”

용암 속에서 기포가 나오는 지점이 보였다.

부글부글.

“아까 그 용암 몬스터일까요?”

에어리스가 뒤에 멘 대검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기포 수준으로 작았는데 조금씩 거품으로 커지더니 물 폭탄처럼 거대해졌다.

“왔다.”

드디어 에어리어의 주인,

거대한 용암 몬스터가 등장했다.

녀석의 온몸은 커다란 푸딩처럼 부풀었고 용암으로 덮여 있었으며 양팔이 있었다.

거대한 폭발 같은 용암 덩어리에 가까웠다.

“너무 크다!”

이소민이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내질렀다.

M은 비로소 다시 선택의 순간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어리어의 주인과 싸우느냐.

주인의 전리품을 여느냐.

다시 방향을 돌려서 문으로 도망가느냐.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의 전리품만 갖는 거겠지.’

지금은 카드조차 없었다.

순간 이동도 불가능했으니 매우 불리했다.

“지금은 물러서야 해.”

결론은 후퇴였다.

M, 에어리스, 이소민이 서둘러 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것은 의외로 에어리스였다.

대검과 살인마를 들쳐 메고도 체력이 가장 뛰어났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인간 같지가 않아.”

이소민이 숨을 헐떡거렸다.

“소민 언니도 쓰러지면 제가 들고 갈게요.”

“정말 든든하네.”

점점 문이 보였다.

거의 다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방의 주인은 거대 몬스터였다.

한 번 들어온 침입자를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는 듯이 주먹을 크게 휘둘러서 용암 덩어리를 던졌다.

콰앙.

문 위쪽의 벽에 충격이 가해졌다.

우수수 바위 조각과 파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에어리스가 위를 바라보면서 외쳤다.

M과 이소민도 떨어지는 바위 파편을 겨우겨우 피했다.

“아, 저기는!”

부서진 바윗덩어리가 문으로 가는 입구를 막아 버렸다.

에어리스 일행이 장애물에 막혀서 잠시 버벅거리는 순간, 에어리스의 주인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잠깐 맡아 주세요.”

에어리스는 어깨에 메고 있던 살인마를 이소민과 M에게 건넸다.

“짐짝은 우리한테 주는 건가?”

“잠깐만 맡아 주세요.”

에어리스는 귀찮은 짐을 넘긴 후에 대검을 양손에 쥐었다.

“길을 열게요.”

대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입구를 막은 바위들을 두부처럼 썰 듯이 마구 베었다.

순식간에 입구가 열렸다.

“이제 가세요.”

에어리스가 소리쳤다.

“에어리스는?”

“저는 조금 시간을 벌어볼게요. 녀석이 너무 가까워졌어요.”

에어리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대 용암 몬스터는 이미 그들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서 천천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보기에 인간들은 벌레 수준으로 보였을 거였다.

“먼저 가세요. 저도 금방 따라갈게요.”

에어리스는 대검을 굳게 쥔 채로 자리에서 버텼다.

상대는 용암을 뒤집어쓴 커다란 몬스터였다.

서로를 잠시 바라보면서 견제하는 시간이 짧게 흐르는 동안에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먼저 움직인 쪽은 몬스터였다.

콰아아아아.

용암으로 덮인 팔을 에어리스를 향해 내리찍었다.

정면으로 막을 위력이 아니었다.

에어리스는 최대한 멀리 뛰어서 피하려고 했다.

큰 충격이 바닥에 가해졌다.

“와아아.”

단순 주먹이 아니어서 피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부차적으로 용암까지 사방에서 날아왔는데 대검으로 쳐내야 했다.

“다행이야. 대검이 아니었으면 못 막을 뻔했어.”

대검에 막힌 용암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몇 번 휘둘러서 검날에 묻은 용암을 털어냈다.

용암이 사방에 퍼진 상태가 되어서 이동도 쉽지 않았다.

거대 용암 몬스터를 상대로 근처에 접근도 어려운 상태였고, 정면 승부는 희망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멀리 갈 수 있도록 시간만 버는 거야.’

에어리스는 다리를 움직였다.

남들보다 빠른 달리기 실력이 지금은 필요했다.

거대한 괴물과 작은 인간의 숨바꼭질 같은 승부가 펼쳐졌다.

* * *

“에어리스는 괜찮을까요?”

이소민과 M은 살인마를 메고 함께 달렸다.

“그 운동 신경과 반응력이면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잠깐은 가능하겠지.”

가면 살인마가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M은 계속 달려가면서 어깨엔 멘 녀석을 바라봤다.

“이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아까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정신이 안 깰 리가 없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상황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그래. 이대로 가면 멍청한 너희들 때문에 나도 죽을 것 같아서 말이지.”

가면 살인마가 냉소적이게 얘기했다.

“M, 그냥 버리고 갈까요?”

“나도 그러고 싶어지는데.”

이소민과 M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살인마가 움찔했다.

“…지금 살고 싶으면 내 얘기를 듣는 편이 좋을 텐데…….”

“무슨 얘기? 너를 버리고 가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 여자. 그대로 두면 당할 거다.”

살인마는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날 풀어줘라. 그러면 그 여자, 에어리스라고 했나? 내가 구해 주지.”

“널 뭘 믿고 그래야 하지?”

“이러다가는 전부 죽는다. 내가 미끼 역할을 해 줄 수 있어. 팔은 안 풀어줘도 된다. 다리만 풀어줘도 충분히 할 수 있어.”

M은 잠시 멈칫했다.

이소민은 조용히 살인마를 바라봤지만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었다.

“내 말대로 안 하면 여자도 죽고 너희도 죽고 나도 죽는다. 다리만 풀어줘. 그러면 구해 주지.”

“살인마와 약속을 하라는 거냐? 만약 네가 우리만 두고 도망갈 수도 있어.”

“나는 살인마이지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조용히 얼마 전 일을 생각했다.

살인마는 아까 에어리스와 일대일 승부에서 패했다.

제안은 에어리스가 한 거였고, 카드는 서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살인마는 분명 그 약속을 지켰고 승부는 깔끔하게 검술 대결로만 이뤄졌다.

M은 빠른 결단을 내렸다.

“좋다…….”

“M?”

이소민은 살인마를 노려봤다.

“정말 풀어줄 건가요?”

이소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M을 바라봤다.

“녀석은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했지.”

“유진하가 그랬죠.”

“지금이라면 녀석도 그렇게 했을 거야.”

M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서 살인마를 바라봤다.

녀석이 신고 있는 부츠.

사바톤 부츠의 속도가 지금 반드시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발을 묶었던 끈을 풀어줬다.

“됐어.”

살인마는 마침내 두 다리에 해방을 맞이했다.

“이제 자유를 얻은 내 차례겠군.”

녀석의 속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톡톡. 톡톡.

탭댄스 같은 특유의 발 구르기 소리가 들리더니 단숨에 내달렸다.

녀석은 약속을 지켰다.

에어리스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살인마는 양손이 두 팔에 묶인 상태였지만, 사바톤 부츠가 있는 두 다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저게 에어리어의 주인이군.”

단숨에 에어리스와 거대 용암 몬스터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내부는 이미 전쟁터였다.

여기저기 치솟는 용암과 화마, 부서진 바위와 파편이 가득해서 마치 지옥의 광경과도 같았다.

“당신은?”

에어리스는 그 안에서 거대 용암 몬스터에 맞서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살인마는 사바톤 부츠의 속도를 이용해서 벽을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이제 내가 유인할 수 있어. 너도 일행이 있는 쪽으로 가라.”

살인마는 빠르게 벽을 타고 달리면서 소리쳤다.

확실히 반응은 있었다.

거대 용암 몬스터의 시선이 눈높이에서 달려가는 살인마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신경이 거슬리는 살인마로 향했다.

“정말 빠르긴 하다.”

에어리스는 문 쪽으로 달려갔다.

미끼 역할은 교대했다.

이제 고속의 살인마가 이 방의 주인을 유인했다.

“크아아아아!”

거대 용암 몬스터가 손을 뻗었지만, 고속의 살인마를 붙잡을 수 없었다.

속도는 살인마 쪽이 더 위였다.

그르르르륵.

화가 난 몬스터가 이를 으드득 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바퀴벌레 하나가 너무 빨라서 못 잡는 느낌이랑 비슷할 터였다.

‘저기다.’

살인마는 두 손이 묶인 상태에서도 목표물에 집중했다.

주인의 전리품이었다.

자신을 막는 방해물은 없었다.

주인의 전리품을 열고 탈출구를 만들어서 나가면 계획은 끝이었다.

‘저걸 얻고 나만 나간다.’

멀리 보였던 궤짝이 점점 시야에 가득해졌다.

벽을 달리던 살인마가 전리품 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건 내 거다.”

거의 다 닿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맘대로…….”

공중에서 누군가 궤짝까지 쭈욱 내려왔다.

“너는?”

살인마보다 먼저 주인의 전리품에 도착한 사람.

유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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