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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12화 (12/229)

12화 살의를 가진 자(3)

에어리스와 가면 살인마의 대결은 막바지로 향해 갔다.

사바톤 부츠의 고속 능력은 살인마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최초의 살인도 여기서 시작됐다.

“탐이 났지.”

다른 사람이 가진 이 부츠를 간절히 원했다.

살인마는 결국 칼에 손을 댔다.

증인을 없애기 위해서 당시 에어리어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죽였다.

당연히 혼자만 살아남았다.

“다른 사람은 죽었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들 몬스터에 당했다고 말하면 끝이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맞았다.

처음에 있었던 망설임은 이미 먼지처럼 사라진 뒤였다.

이제는 아이템이 목적인지 살육이 목적인지 슬슬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마치 살인에 중독된 사람처럼 죽음의 손맛에 매혹되어 갔다.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야.”

그렇게 그는 괴물이 되어갔다.

인간 스스로 변해 버린 몬스터.

그게 살인마의 본모습이었다.

‘내 손에 죽을 운명이다.’

살인마는 상대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에어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살인마의 생각을 하나하나 깨면서 스스로 과거의 경험을 깨우쳐 갔다.

기억을 잃은 이유.

주인의 전리품으로 궤짝 속에 갇혀 있던 이유.

손등에 있는 문양의 정체.

모든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알아내고 싶어요. 내가 누구인지.”

목숨을 건 전투를 통해서 과거의 전투 실력도 점점 되찾아가는 것도, 기억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죽지 않아요.’

에어리스가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상대가 아니었다.

땅바닥이었다.

콰과광!

에어리스가 크게 땅바닥을 쳐버리자 바닥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 방은 용암 지대였다.

바닥이 부서지면 용암이 드러날 거였다.

“뭘 하는 거지?”

가면 살인마는 에어리스의 행동에 의아한 듯이 말했다.

에어리스는 다른 바닥도 대검으로 계속 찍어 버렸다.

점점 바닥이 무너지면서 용암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건?”

살인마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용암이 바닥 대부분을 차지하자 더는 움직일 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아예 달리기할 트랙을 없애 버렸나?”

“들은 적이 있어요. 절 구해 준 분이 하던 말이죠.”

에어리스는 유진하를 떠올리며 말했다.

“약점이 없다면 약점을 만들어라.”

살인마는 자신의 가면을 만지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제법이야. 정말 마음에 들어. 이런 긴장된 상황은 오랜만이라서… 그동안 너무 쉽긴 했지.”

천천히 다시 사바톤 부츠 특유의 발 구르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바닥이 없어지면 너 역시 용암 속으로 들어간다.”

용암은 점점 가라앉는 바닥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곧 바닥은 대부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나는 부츠가 있어.”

살인마는 살짝 벽을 향해 뛰었다.

고속의 사바톤 부츠는 벽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재빨랐다.

“달릴 수 있는 범위를 줄이는 건 좋지만. 이래서는 아무 의미가 없지.”

벽을 타고서도 달릴 수 있는 사바톤 부츠의 힘은 예측할 수 없었다.

용암은 점점 바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에어리스도 이제 바닥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진 전부는 대검뿐이었다.

콱!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어 벽을 향해 강하게 찍었다.

“후우.”

대검이 벽에 박혀 고정되었다.

에어리스는 서둘러 대검 위로 올라갔는데 대검이 워낙 두껍고 평면이 넓어서 사람 하나가 올라가기에 충분했다.

“당장은 살았군. 하지만 무기가 없어졌어.”

벽을 타고 달리던 살인마는 천천히 에어리스 쪽으로 다가갔다.

녀석의 손에는 도끼와 검이 있었다.

에어리스의 대검은 벽에 꽂힌 채 발판이 되었다.

이제 무기는 없었고 빈손이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살인마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절체절명의 상황이 되었다.

“괜찮은 승부였어. 끝이다.”

승부를 확신한 살인마의 눈에 에어리스가 보였다.

에어리스는 여전히 포기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는 여전히 강렬한 빛을 품고 있었다.

“당신이 모르는 걸 알려 주겠어요. 첫 번째, 여전히 빠르기는 하지만 벽을 타고 달리려면 궤도가 같은 방향이죠.”

사실 그랬다.

살인마는 벽을 타고 시계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높낮이를 바꿀 수도 없었다.

조금만 방향을 비틀다가는 바로 용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였다.

아래에는 펄펄 끓는 용암이 기다리고 있었다.

“빠른 고속이 무서운 건 언제 뒤를 노릴지 예측하지 못하는 공격 방향 때문이에요. 지금은 당신이 다가오는 궤도가 다 보여요.”

에어리스는 두 손을 살짝 펼쳐서 앞으로 뻗었다.

“두 번째는 속도가 빠르지만 이제는 제 눈에도 익숙해졌다는 거죠.”

살인마는 에어리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그것도 이제는 다 적응한 속도로 다가왔다.

반격할 타이밍은 에어리스가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팟!

살인마의 도끼와 검을 든 양손은 에어리스의 두 손에 잡혔다.

‘잡혔다고? 내가?’

에어리스는 살인마의 두 팔을 정확히 맨손으로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 행동은 당연히 에어리스가 빨랐다.

상대의 달려오는 스피드를 역이용해서 살짝 비틀어 버렸다.

“큭!”

벽에 꽂힌 대검 위에 선 에어리스가 유도의 던지기 기술로 살인마를 날려 버린 순간이었다.

살인마는 마치 용수철처럼 벽에서 옆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이기도 했다.

“이건 뭐지?”

공중에서 완전히 균형을 잃은 살인마가 허우적거릴 틈도 없이 용암 속으로 꼼짝없이 떨어질 순간이었다.

녀석의 도끼는 이미 용암 속에 떨어져 삼켜지고 있었다.

그때, 녀석은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검을 위로 던졌다.

검에는 하얀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검이 천장에 꽂히자 줄이 팽팽해졌다.

살인마는 그 줄에 매달렸고 간신히 용암에 빠지지 않았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밑에는 부글거리는 용암이 보였다.

하마터면 지금쯤 저 안에서 먹히고 있을 뻔했다는 상상이 들자 오싹했다.

“이야아!”

여자의 기합 소리였다.

에어리스는 대검에 있다가 살인마를 향해 뛰었다.

상대가 줄을 타고 올라가면 이제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거였다.

반드시 이번 기회에 끝을 봐야 했다.

에어리스가 살인마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일격이 정확하게 가면에 작렬했다.

그 충격으로 살인마의 가면에 금이 갔고 손에 쥐고 있던 줄마저 놓쳐 버렸다.

에어리스는 손을 뻗었다.

왼손으로는 천장에 매달린 줄을 잡았고 오른손으로는 살인마의 멱살을 붙들었다.

“후아. 후아.”

에어리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긴박했던 상황이 마침내 결론이 났다.

천장에 꽂힌 검에는 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은 에어리스가 왼손으로 잡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살인마의 멱살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줄 하나에 의지해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고, 살인마는 방금 에어리스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고 기절했다.

“에어리스.”

멀리 방의 입구에서 유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있어. 곧 구해 줄게.”

“저는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는 않아서 힘이 많이 안 들거든요. 무리하지 마세요.”

M이 뒷머리를 긁었다.

“하긴 저렇게 큰 대검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는 여자였지.”

“하하.”

유진하와 M은 천장으로 향하는 환기구로 서둘러 갔다.

에어리스와 살인마를 바로 끌어올렸다.

이제 용암이 가득 찬 방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모두 옆방으로 내려왔고, 유진하와 에어리스는 반갑게 마주했다.

“정말 대단했어, 에어리스. 보고 있는데도 심장이 몇 번이나 멈추는 줄 알았다고.”

“죄송해요. 어려운 싸움일 줄은 알았는데 더 힘들었네요.”

“다행이야. 무사했으면 됐어.”

에어리스와 유진하가 대화하는 동안, M은 살인마를 살피고 있었다.

“카드는 더 없어. 다른 무기는 단도밖에 없군.”

수갑을 꺼내서 살인마 등 뒤로 손목에 채웠다.

“여기에 수갑은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평소에는 수사관이라고 했잖아. 하도 갖고 다녔더니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다고 할까?”

천천히 자리에 일어선 에이전트 요원 M이 유진하를 바라봤다.

“에어리스라고 했나? 치열한 격전에서 살아남은 건 다행이지만 안 좋은 소식도 있지.”

“안 좋은 소식이요?”

에어리스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되물었다.

아까 치열한 눈빛은 전투에서만 나오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평소의 에어리스로 돌아왔다.

“아가씨가 바닥을 전부 부숴 버리는 바람에 카드가 전부 용암에 먹혀 버렸거든.”

“아!”

에어리스는 작은 비명을 냈다.

에어리스와 살인마가 싸우기 전에, 모두가 카드를 꺼내서 방바닥 구석에 놓았었다.

그게 에어리스와 살인마가 단둘이 싸우는 조건이고 약속이었다.

전투 중에 그 땅바닥을 부수면서 용암이 모든 카드를 전부 먹어치우고 말았다.

“죄송해요. 제가 그걸 깜빡했어요.”

“아니야. 됐어. 에어리스가 무사했으면 됐지.”

M이 용암이 가득 찬 옆방을 바라봤다.

“나는 어차피 정부에서 받은 카드다. 그냥 시말서를 쓰면 끝이지. 유진하, 너는?”

“나는 그게 전 재산이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에어리스는 거듭 사과했고, 유진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다독였다.

“이제부터 다시 카드는 찾으면 되잖아. 하지만 에어리스를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고.”

“그래도…….”

“미련 두지 마. 그냥 파산했다고 생각하면 돼.”

“슬픈 이야기네요.”

“이제부터 또 모으면 되지…….”

유진하는 최대한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에어리스가 그걸 보면 또 슬픈 표정을 지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뭔가 하나를 잊은 것 같은데.”

“읍읍.”

멀리서 입이 틀어 막힌 소리가 들렸다.

용암이 가득한 방의 다음 방. 거기에는 줄에 꽁꽁 묶인 이소민이 있었다.

“아, 소민 누나를 구하려다 그랬지?”

유진하, 에어리스, M까지 셋은 드디어 잊혔던 인물을 떠올렸다.

* * *

“푸하.”

겨우 줄에서 풀려난 이소민이 바닥에 엎드렸다.

“구해 줘서 모두 고마워요. 좀 더 빨랐으면 더 좋았겠지만.”

유진하가 이소민의 상태를 살펴봤다.

“특별히 다친 데는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도 어떻게 살았나 몰라.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M이 이소민을 묶었던 줄과 여러 장치를 살펴봤다.

“부비트랩과 연결되어 있었어. 그래서 해제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

“전부 저 녀석 때문이었지.”

옆에 기절한 채로 누워 있는 살인마가 보였다.

이소민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소민 언니, 참아요.”

“어이구, 좀 몇 번 푸닥거리하듯이 패 주면 분이라도 좀 풀리겠네.”

하지만 이소민을 꽉 붙잡고 있는 에어리스의 팔 힘이 너무 셌다.

“저기, 에어리스. 나 그렇게 안 할 거니까 좀 그만 잡을래? 숨 막힐 거 같은데.”

“아, 너무 셌으면 죄송해요.”

에어리스는 포옹을 풀어주자 이소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녀석, 가면은 뭐 하러 쓰고 있는 거야?”

가면에 살짝 손을 대고 벗기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벗겨지지 않았다.

“왜 안 되지? 접착제라도 붙였나?”

“아직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 수 있겠죠. 밖에서 경찰이나 요원들에게 넘겨서 조사하면요.”

“이 신발도 안 벗겨진 거야?”

“네, 그래서 일단 줄로 묶어 놨어요.”

살인마의 손에는 수갑이, 발에는 줄이 묶여 있었다.

녀석을 들고 다닐 사람은 가장 힘이 좋은 에어리스가 되었다.

“대검을 멘 채로 사람 하나도 메고. 그게 안 힘들어?”

“할 만해요.”

“만약 깨어나면 어떡하지?”

“그럼 제가 다시 한 대 때려서 잠재울게요.”

“아, 그래……. 그러면 되겠네.”

이소민은 식은땀을 흘렸는데 에어리스가 생긋생긋 웃었다.

이소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유진하한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나중에 기억 좀 찾아봐라. 아니면 전생이라도. 예전에 에어리스가 뭐였는지 정말 궁금하다.”

“저도 그러고 싶어요.”

유진하는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이번 싸움에서 에어리스로부터 다른 검술 스타일을 보게 되었다.

기존에 에어리스의 전투는 대검을 들고 한 방으로 베는 식이었다.

파앗!

최대한 힘을 싣기 위해서 두 다리는 땅을 지탱하고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살인마를 상대하면서, 기둥처럼 멈췄던 두 다리에 해방을 줬다.

대검을 땅에 찍어서 물구나무서듯이 점프도 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처럼 뛰어오르는 움직임을 새로 장착했는데, 다리를 활용한 기동력으로 공격하는 새 전투 스타일을 깨달았다.

긴급한 상황에서 갑자기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수많은 연습과 실전에서 써본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한 수준이었다.

‘어쩌면 에어리스의 기억은 과거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만 찾는 정도가 아닐 수도 있어.’

에어리스의 기억.

잃어버린 전투 능력을 되찾는 것도 기억의 하나일 수 있었다.

* * *

다시 모인 네 사람은 길을 따라나섰다.

드디어 에어리어의 끝에 거의 도달해 가는 중이었다.

“마지막 방이야.”

유진하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지막이라고 부른 방 앞에서 멈췄다.

“문이 있군.”

M이 차분히 살폈다. 문은 크고 넓어서 성문 같았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문이 없었어.”

“아마도 저 안에 있겠죠.”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

문 안쪽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에어리어의 주인. 그리고 주인의 전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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