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살의를 가진 자(2)
요원들마저 당한 지금.
유진하, 에어리스, M.
세 사람은 어느새 참극이 벌어졌던 현장에 도착했다.
아까까지 요원들이 살인마에게 농락당한 뒤 전멸한 곳이었다.
“여기는…….”
살인마가 깔끔하게 물청소를 해놔서 살육이 있었던 장소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남은 물기도 그들이 오기 전에 이미 다 증발했다.
이곳은 다시 용암이 있는 곳이었고 열기는 꽤 높았다.
“앞에 뭔가 있어요.”
그때, 건너편 방에 사람이 보였다.
유진하는 누군지 금세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이소민……”
가만히 서 있는 이소민이었다.
하지만 자세가 불안정했다.
엉거주춤하면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묶은 거로군.”
M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에어리스는 슬픈 눈빛을 지었다.
“…너무해. 어떻게 저럴 수가.”
모두의 시선이 이소민에게 가 있는 동안, 유진하는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이소민이 여기에 있다?
살인마는?
“녀석은 숨어 있어.”
부비트랩도 설치하던 녀석이었다.
이소민이 미끼라면 함정은 대체 뭘까?
방은 간단한 구조였다.
이소민이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바윗길이 있고 양옆은 용암이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살인마는 왜 이곳을 선택하고 기다렸을까?
“모두 뒤로 물러서요.”
유진하의 지시에 에어리스와 M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용암 속에 뭔가 있어요.”
놀란 M이 용암 쪽을 바라봤다.
“방금 기포 같은 것이 올라왔어요. 잘 생각해 봐요. 용암 속에 숨 쉴 수 있는 녀석이 있는지.”
그제야 M은 유진하의 말을 알아들었다.
“몬스터 말고는 없지.”
그 말대로였다.
세 사람이 물러갈 즈음.
용암에서 몬스터들이 나오고 있었다.
“쿠르르르.”
용암을 잔뜩 뒤집어쓴 괴물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홍염의 몬스터.
저 용암에 닿았다가는 온몸이 녹아버릴 터였다.
“몬스터를 이용한 함정이었어.”
이소민에게 시선을 쏠리게 한다.
구하려고 들어갔다가는 사방에서 용암 몬스터가 튀어나와 포위하는 방식이었다.
살인마는?
“여기 있어요.”
유진하는 단언했다.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서 우리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야비한 작전.
몬스터를 함정에 쓰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살인마는 승부에는 관심이 없고, 죽이는 행위만 즐기는 사이코였다.
함정에 빠져 죽어도 그것대로 재밌다고 여기는 놈이었다.
“하아압!”
에어리스는 다가오는 용암 몬스터를 향해 대검을 내리쳤다.
“살인마가 여기 있다는 거죠?”
“분명 어디선가 노리고 있을 거야. 몬스터를 함정에 이용할 정도로 영리한 녀석이니까 기습을 노리겠지.”
M도 검을 꺼냈다.
묵직한 검이었다.
에어리스의 대검만큼 거대한 크기는 아니나, 양손으로 쓸 정도의 크기였다.
“용암이 걸리적거린다. 없는 셈으로 치고 한 번에 베어 버리는 거다.”
경험이 많은 M이 충고해 주자 에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문제는 어딘가에 숨은 살인마였다.
녀석은 반드시 사각의 틈에서 노릴 거였다.
앞을 보면 등을 놓친다.
살인마는 거기를 노리고 있다.
“둘이서 한쪽을 맡아요.”
유진하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두 사람이 서로 한 방향씩을 바라보면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다.
“괜찮은 방법이군.”
M은 감탄하면서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에어리스 역시 대검으로 용암 몬스터를 하나씩 베었다.
에어리스와 M.
두 사람은 대단한 검술을 발휘하면서 몬스터들을 압도했다.
“꾸에엑!”
근접전에서 불리하자 용암 몬스터가 입에서 불꽃을 토해냈다.
“하압.”
용암 불꽃은 에어리스가 대검으로 방어했다.
동시에 빠르게 달려들어서 크게 360도로 대검을 휘둘렀다.
파바밧!
순식간에 몬스터가 일제히 사라졌다.
흩어지는 용암과 괴물들의 파편 속에서 차분한 에어리스의 눈빛이 지나갔다.
한편, 유진하는 매섭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살인마는 어딘가 숨어 있다.
분명히.
“어딨지?”
그때, 천장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역시 비상구가 있었다.
사람 하나 숨을 만한 공간 정도는 충분해 보였다.
“좋아.”
유진하는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그 순간, 천장에서 살인마가 확 튀어나왔다.
유진하가 카드를 꺼내자마자 바로 천장에 던지리라 눈치채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확실히 눈치가 빠른 녀석이야.”
유진하는 살인마의 실력을 확실히 인정했다.
눈치도 빠르고 기민했으며 동물적인 감각도 있었다.
행동에 군더더기도 없었다.
부비트랩과 함정을 교묘하게 설치할 정도로 꾀까지 있었다.
“냉정하고 실력을 갖춘 괴물.”
전투에서 고속 부츠를 사용하는 살인마의 속도는 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
지금까지 상대한 에어리어의 주인보다 훨씬 까다롭고 어려운 상대가 분명했다.
살인마 역시 유진하 일행을 다르게 봤다.
“너희들은 보통이 아니군.”
밑으로 내려온 살인마가 중얼거렸다.
“살인마의 칭찬은 받고 싶지 않은데. 이소민 누나는 풀어줘.”
“그건 너희 하기 나름이지.”
살인마는 도끼와 검을 양손으로 굳게 쥐었다.
유진하는 카드, 에어리스는 대검, M은 검을 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살인마가 킥킥거렸다.
“아까는 20명을 잡았던가? 요원들이었지.”
“뭐라고?”
M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요원들을 죽였나”
“약하더군. 전부 죽여 버렸지.”
살인마의 도발이었다.
평상심을 잃게 하려는 의도였다.
넘어가면 안 되었다.
“기다려요.”
유진하가 얼른 M의 어깨를 잡았다.
다행히 M도 더는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동료가 죽었다는 소식에도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속이 썩어가면서도.
“보통이 아닌 상대입니다. 모두 집중해요.”
살육의 살인마와의 승부가 다시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상대하겠어요.”
그 순간,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에어리스였다.
“에어리스?”
깜짝 놀란 유진하를 뒤로하고, 에어리스는 앞에 집중하면서 걸어갔다.
진지한 눈빛이었다.
완전히 집중한 에어리스였다.
“저 혼자 상대하고 싶어요.”
“아까 대검을 휘두르던 여자인가.”
살인마는 가만히 에어리스를 지켜봤다.
에어리스는 대검을 든 채로 살인마에게 다가갔다.
“일대일로 할 수 있나요?”
“셋이서 덤벼도 된다. 실전에서 머릿수 차이는 당연하지. 난 항상 혼자서 다 해치웠어.”
“저는 당신과 제대로 맞대결하고 싶어요. 검술 실력만으로.”
“일대일. 검으로만 승부하자? 카드도 쓰지 않겠다?”
살인마는 에어리스의 제안을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어떤 조건이든 상관이 없어. 오히려 속임수인가 생각이 드는데.”
“그런 거는 아니에요.”
에어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에 두 녀석은 동의했나?”
“제가 하겠다고 하면 할 거예요.”
에어리스와 살인마가 단둘이 맞붙는 단계로 이어지자, M이 불안한 눈빛으로 유진하를 쳐다봤다.
“어떻게 할 거냐?”
“모르겠어요. 에어리스가 저런 적은 없었거든요.”
유진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아까 에어리스와 가면 살인마의 맞대결을 가만히 떠올렸다.
‘에어리스가 휘두른 대검이 살인마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어.’
살인마의 사바톤 부츠는 쾌속이었고 에어리스가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 일이 에어리스의 마음에 어떤 의미로 작용한 걸까?
처음 궤짝에서 에어리스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내비친 적은 없었다.
기억을 잃은 에어리스.
손에 있는 문양이 유일한 힌트였고, 전투에서 의외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살인마와의 대결도 그런 걸까?
“원하는 대로 하게 해요.”
“괜찮겠나?”
“에어리스가 저렇게 나섰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유진하는 살인마에게 외쳤다.
“이쪽도 받아 주겠어. 우리는 한 칸 옆 방으로 가지. 여기서 둘이 승부를 보게 해 줄게.”
“좋다. 도망갈 생각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받아 주지.”
“대신 너도 에어리스 말대로 검으로만 승부해라. 카드를 쓰지 말고. 검술 대결이라고 했어.”
“그쪽도 카드를 버려.”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인질이었던 이소민이 풀려나자 유진하가 데려갔다.
“좋아. 동시에 하지.”
유진하와 M은 자신의 카드를 모두 꺼냈다.
살인마도 카드를 전부 꺼냈는데 한 움큼이나 됐다.
카드는 녀석이 훨씬 많았다.
저 정도나 가지고 있었으니 살인마가 다수를 상대로도 자신감 있게 나설 만했다.
“바닥에 두겠어.”
모두가 방구석에 카드를 내려놨다.
“좋다.”
살인마도 카드를 내려놓은 후에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절그럭. 절그럭.
사바톤 부츠 특유의 소리가 깊게 들려왔다.
“아까 검 대결이 아쉬웠나? 하긴 나도 맘에 들지는 않았다.”
“알고 싶은 거가 있었어요.”
에어리스는 차분했다.
“검술에 대해서인가?”
“아직 몰라요. 하지만 승부에서 뭔가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살인마는 자신의 가면을 손으로 만지더니 뭔가를 깨달은 듯이 중얼거렸다.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나.”
“…….”
“전사와 살인마의 차이가 뭐지? 어차피 사람 죽이는 일은 그게 그거인데.”
“차이는 있어요.”
“그게 뭐지?”
에어리스는 대검을 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당신은 지키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 자기 목숨마저 버려도 되는 거죠…….”
에어리스가 대검을 들고 앞으로 먼저 달렸다.
살인마 역시 도끼와 검을 들고 맞섰다.
카앙!
금속 마찰음 소리가 들렸다.
“크윽!”
에어리스와 살인마는 정면에서 맞부딪치더니 다시 세차게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기가 세차게 맞부딪칠 때마다 충격이 손에 찌릿찌릿 전해졌다.
‘엄청난 힘이다.’
살인마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사바톤 부츠의 속도로 치고 빠지기에 집중했다.
에어리스의 움직임을 관찰하려는 의도였다.
‘저 여자의 검술. 힘과 속도가 깔끔하게 밸런스를 갖췄어.’
에어리스의 검술 자세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 속에서 무게 이동도 완벽했다.
대검은 위력이 높지만 연속해서 휘두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무기였다.
한 방의 힘.
쉽게 말해 단발 위력으로 승부를 보는 거였다.
‘일반적인 대검이라면 그렇겠지.’
에어리스의 활용법은 달랐다.
마치 일반 검을 휘두르듯이 가볍게 휘둘렀고 위력은 묵직했다.
‘보통의 상대라면 한두 방이면 끝나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조금 눈에 익숙해지자 살인마가 기술적으로 변화했다.
카각!
도끼로 방어 대신 대검을 살짝 흘리며 쳐냈다.
전투 방식의 변경은 에어리스도 이내 알아차렸다.
‘전과 달라졌어?’
아까 맞붙었을 때는 살인마가 사바톤 부츠의 속도를 활용해서 계속 피하고 반격했다.
탐색전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정면에서 대검을 받아치면서 자꾸 넘겨 버렸다.
‘정면에서 내 검을 받아넘기고 있어? 설마?’
살인마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검술 역시 높은 경지에 있었다.
‘이 사람. 실력은 진짜야.’
일대일이 되자 살인마는 오로지 에어리스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썼지만 지금은 혼자였다.
일대일.
지금이 살인마의 진짜 실력이었다.
‘이대로는 당하겠어.’
상황을 깨닫자마자 에어리스는 잠시 뒤로 물러섰다.
빠른 판단이었지만 그것도 살인마의 계산 아래에 있었다.
‘알아차려도 늦었다.’
뒤로 물러서는 에어리스를 보자마자 바로 살인마가 달려들었다.
쾌속의 사바톤 부츠.
속력도 압도했다.
카아앙!
살인마가 왼손에 든 도끼로 내려찍자 에어리스는 대검으로 방어했다.
“으윽!”
이어서 오른손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끼로 대검을 봉쇄하고 바로 검이 에어리스의 배를 노리고 들어왔다.
파앗!
살인마의 검이 에어리스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쳤다.
“큭!”
에어리스는 짧은 고통을 느끼면서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당할 뻔한 위기였다.
“반사 신경이 좋군. 대부분은 거기서 끝이었다.”
“…칭찬인가요?”
“감탄이기도 하지. 죽이기에 아까운 실력이야. 그리고…….”
살인마가 처음으로 말에 뜸을 들였다.
“확실히 너는 이런 전투에 경험이 있다. 그것도 굉장히 많은 거야. 그러지 않고는 방금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서 피하는 움직임이 나올 수 없다.”
“…….”
어쩌면 에어리스가 정말 알고 싶은 얘기였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전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에어리스는 살짝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 봤다.
손에 살짝 피가 묻었다.
“당신과의 대결에서 깨닫고 싶어요. 내가 누군지 알아내고 싶어요.”
“대가는 죽음이다.”
도끼와 검을 든 살인마가 강하게 치고 나왔다.
에어리스는 뒤로 피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살인마를 향해 앞을 내달렸다.
살인마의 눈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어리스가 먹잇감으로 보였다.
‘어차피 사냥감은 실패한 방식을 반복하다 죽는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생사가 갈린 전투에서 자신이 이겨온 방식을 고집한다.
목숨을 잃을 때까지.
‘너도 마찬가지다.’
살인마는 양손에 든 도끼와 검을 강하게 쥐었다.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는다.’
살인마와 에어리스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순간.
에어리스의 발 디딤이 바뀌었다.
‘뭐지?’
살인마가 반응할 틈도 없이 에어리스는 변화를 선택했다.
대검을 거꾸로 들어서 땅바닥을 향해 강하게 찍었다.
콰앙!
바윗덩어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살인마의 시야를 가렸다.
그 때문에 순간적으로 에어리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어디로?’
살인마가 당황했다.
뒤늦게 고개를 드니 에어리스가 위에 보였다.
“하아압!”
에어리스는 대검을 찍은 후에 그 반동을 이용해서 거꾸로 공중에 떠올랐다.
밑에는 살인마.
공중에는 에어리스.
“이야아아!”
에어리스가 마치 장대 높이 선수처럼 대검을 땅에 박은 후에 점프하듯이 올라갔다.
그대로 공중에서 대검을 다시 내리쳤다.
카가각!
허를 찔린 살인마가 도끼로 간신히 방어했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공중에서 대검을 빠르게 빙글 돌린 덕분에 원심력이 최대로 실렸다.
그걸 내려오면서 바로 휘두르니 대검의 베기 위력이 평소보다 훨씬 강력했다.
파앗!
살인마가 손에 든 도끼를 놓쳤다.
동시에 튕기듯이 나가떨어졌다.
“크윽!”
멀리 나동그라진 살인마가 고통스러운 듯이 비명을 흘렸다.
‘저 여자는 나랑 같은 과였어.’
순간적으로 전투 패턴을 바꾼다.
긴장된 전투의 경험이 있고, 다른 패턴을 미리 체득하고 있어야 했다.
살인마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 여자. 나와 싸우려던 이유가… 다른 패턴을 깨우치기 위해서?’
에어리스는 천천히 다시 대검을 들어서 전투 자세를 갖췄다.
‘자신을 찾고 싶다고? 나를 상대로 전투에서의 경험을 깨우치려는 거?’
살인마가 이를 악물었다.
나를 이용하는 거냐?
“크아아아아!”
살인마가 다시 기운을 차리려는 듯이 고함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놓쳤던 도끼도 다시 들었다.
흥분한 살인마의 양손에 핏줄이 강하게 드러났다.
“제법이구나. 최선을 다해서 죽여 주겠어.”
살인마의 사바톤 부츠가 빛을 드러냈다.
톡톡. 톡톡.
“가속.”
통통 튀는 고무공 같은 특유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경쾌한 탭댄스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살인마의 발이 움직였다.
엄청난 가속이었다.
단숨에 에어리스의 바로 앞까지 왔다.
에어리스는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의 선택은 회피였다.
“큭!”
한 번 실수하는 순간, 상대에게 치명적인 틈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반격은 잊지 않았다.
“하아압!”
에어리스는 피하면서 동시에 대검을 휘둘러 살인마의 뒤를 노렸다.
“멋진 움직임이야.”
살인마는 속도감을 유지하면서도 서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절대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지.”
녀석에게는 절대적인 자신감의 원천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검술 실력.
둘째는 자기 목숨에 미련을 두지 않는 정신력.
마지막은…….
이 쾌속의 사바톤 부츠였다.
“속도에서 앞서는 한, 이기는 건 나다.”
에어리스는 가만히 대검을 들었다.
“후우.”
속도는 상대가 압도적이었다.
그것을 따라잡을 방법은 없었다.
톡톡. 톡톡.
살인마의 발소리만 들려왔음에도 에어리스의 눈빛은 굳게 다짐했다.
‘강력한 속도라는 무기에도 치명적인 결함은 있어.’
이제부터 그것을 꺼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