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불의 지역(3)
용암 골렘을 제압하고 넘어온 장소는 간만에 용암이 없었다.
간만에 더위를 피할 수 있어서 쾌적했다.
유진하는 잠깐 주변을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서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확인할 것이 있어요. 조금만 앞으로 간 다음에 돌아올게요.”
유진하가 잠시 가버리자 에어리스와 이소민 둘만 남았다.
이소민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면서 에어리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저번에 레스토랑 간 거 말이에요.”
“같이 갔었어요. 영화도 보고.”
“오호라. 영화도 같이 봤구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이소민이었다.
“데이트… 사실 맞는 거죠?”
“아, 저도 티비에서 봐서요. 데이트 같아서 그거 맞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유진하 님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데이트냐고 물었다고요? 그런데 진하가 아니라고 했다?”
“네.”
에어리스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볼을 간질거리면서 대답했다.
이소민은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냐는 듯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하하. 뭔가 이상하네.”
“그런데 데이트 맞나요?”
“그건 둘이서만 아는 거예요.”
이소민과 에어리스는 서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 웃는 이유는 서로 달랐다.
가벼운 농담을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정체불명의 시선이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을 몰래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 눈빛은 아까부터 빈틈을 노리는 듯이 침착하고 차분했다.
목표는 에어리스, 이소민.
두 사람이었다.
에어리스는 자리에 앉아서 계속 유진하가 갔던 방향을 쳐다봤다.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왜 안 돌아올까요?”
이소민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게요. 왜 안 오지?”
“제가 가 볼까요?”
옆에 세워둔 대검을 들면서 에어리스가 일어섰다.
“조금만 더 있어 봐요. 갈 거면 나도 같이 갈게.”
이소민도 채찍과 가방을 챙기고 에어리스 옆에 섰다.
아까부터 그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자는 제법 조심스러웠다.
비밀 통로에서 쉽게 나가지 않았고 최대한 위험을 줄이려는 성향이 강했다.
이제는 결정을 굳혔는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별안간 뒤에 나타난 사람을 향해 그자가 고개를 돌렸다.
“너는?”
“이 통로에서 뭘 하고 있어요? 에이전트 M.”
유진하가 시큰둥한 얼굴로 뒤에 있었다.
비밀 통로에 숨어 있던 사람은 에이전트 요원 M이었다.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누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그게 당신인지는 몰랐지만.”
M은 움찔했다.
“두 사람을 남기고 떠난 것도 이걸 위해서였나?”
“누가 계속 훔쳐 보는데 이상하잖아요. 우리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별다른 행동은 없어서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계속 신경이 쓰여서요. 일부러 뒤를 잡으려고 혼자 삭 빠졌죠.”
유진하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용건을 밝혔다.
M은 유진하의 집중력과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밀 통로. 잘 찾았군.”
“그거는 벌써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
M은 쓴웃음 지으면서 선글라스를 만졌다.
사실 오래전부터 유진하 일행의 뒤에 몰래 따라붙은 거였다.
저번에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할 때도 그렇고, 용암 골렘을 잡을 때도 그렇고.
‘이 녀석들은 뭔가 특이한 게 있군.’
현장에서의 감이었다.
저들을 분석하고 싶었다.
과연 믿을 수 있는지도 중요했다.
“쓸데없는 짓이었군.”
“나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여기 너무 좁아서 계속 쭈그리고 있는데. 다리 저려요.”
“좋아. 나도 밖에 있는 아가씨들과 인사해야겠지.”
비밀 통로에서 유진하와 M이 나오자 이소민과 에어리스가 마중 나왔다.
“유진하, 그리고 M이네?”
이소민은 유진하를 보고는 반가워하다가 M을 보고는 떨떠름했다.
에어리스는 두 사람에게 모두 인사했다.
“다시 만났네요.”
“당신들을 미행한 꼴이 되었는데 미안하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다고 약속하지.”
M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실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이곳은 본인의 판단으로 목숨이 결정되는 장소였고, 책임은 자기가 지면 되는 거였다.
비난과 지적이 일상적이지 사과는 자주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M은 사과를 했다.
M의 솔직한 모습에 여기 있는 세 명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다.
“혼자보다는 같이 가는 쪽이 낫겠죠?”
유진하가 슬쩍 물어보자, M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직 너희는 모르는 모양이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소민이 반문했다.
“모른다고요?”
“지금 여기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M은 먼저 걸어갔다.
“따라와라. 내가 왜 너희를 계속 쳐다봤는지 알게 될 거다.”
M은 유진하가 왔던 방향과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 M이 한 방을 가리켰다.
“저기를 봐라.”
“이건?!”
유진하가 눈앞에 펴진 광경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방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식량을 따뜻하게 굽기 위해서 켜 놓은 모닥불이 있었다.
주변으로 함께 앉아서 식사했을 사람들은 전부 쓰러져 있었다.
“아!”
에어리스와 이소민도 뜻밖의 모습을 보자마자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일곱 명의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전부 누워 있었다.
“모두 죽은 건가요?”
에어리스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사람들이 확실히 그렇게 대답하는 듯했다.
“유진하, 자네가 한번 살펴보겠나?”
M의 요청에 유진하가 나서서 시신 한 구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소민도 옆에서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지만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몬스터? 습격당한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유진하는 죽은 자들의 상태를 조심스레 살피더니 말했다.
“외상이 없어요.”
“그래?”
이소민도 다른 사람들을 살폈는데 특별한 상처는 없었다.
“다들 식사를 하긴 한 것 같아요. 외상이 없으니 그럼 음식이 의심스럽겠죠.”
“설마 독살인가요?”
에어리스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유진하는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살펴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다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도 있고. 가슴을 긁은 모습도 있어. 혀를 살피니 변색 상태도 보이고.”
유진하의 말에 M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생각이야. 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는 한 시간 전이었지.”
“독살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져요.”
유진하가 M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대체 누가 한 걸까요?”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정적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고요한 적막을 깨면서 유진하가 입을 열었다.
“독살하려면 몰래 음식에 독을 넣어야 했을 거예요. 아마 여기에 같이 있던 멤버 중 하나였겠죠.”
“이번에 들어온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거구나.”
이소민은 턱에 손을 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M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맞아. 나도 같은 생각이지. 누군가 에어리어에 들어온 사람을 모두 독살했다. 범인도 모르고 목적도 전혀 몰라. 이제 다른 사람을 보면 의심할 수밖에 없지.”
유진하도 동의했다.
지금까지 에어리어를 수차례 들어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해했어요. 같이 들어온 사람 중에 살인마가 있다는 것을.”
소름이 끼쳤는지 에어리스가 두 팔을 잡았다.
불쾌한 침묵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뭔가 무서워하는 듯한 에어리스 뒤로 장난스러운 손길이 다가왔다.
“와악!”
이소민이 몰래 에어리스의 등을 확 밀쳤다.
“꺄아아아아!!”
에어리스는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 달아나 버렸다.
“어? 장난이었는데. 리액션이 엄청나네.”
이소민의 행동에 유진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소민 누나, 장난칠 때가 아니잖아요.”
“너무 심각한 분위기는 영 적응이 안 돼서. 놀랐다면 미안.”
이소민은 빠르게 사과했다.
M은 이상한 여자를 봤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원래 장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진하도 많이 놀란 에어리스를 달랜 후에 합류했다.
“다시는 장난 안 한다고 했어. 소민 누나도 사과했고.”
“정말 놀랐어요.”
에어리스는 아직 여파가 남은 듯했지만 그래도 꿋꿋했다.
조금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는 모습이 계속되긴 했다.
이제 멤버들은 유진하, 에어리스, 이소민, M까지 네 명이 되었다.
몬스터도 상대해야 했는데 의문의 암살자도 잡아야 했다.
‘목적이 뭘까? 무차별 살인마라면?’
일행이 걸어가는 동안 유진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대체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을 죽여서 뭘 원하는 거지?’
* * *
다른 방에서는 한창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자식, 대체 뭐야?”
회사 소속의 용병팀이 검을 들었다. 이미 네 명이 당했고 세 명만 남았다.
반대쪽에 있는 자는 정체불명의 가면을 쓴 인간이었다.
한 손에는 검.
다른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었다.
검과 도끼는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몬스터는 아니고 누구지?”
가면을 쓴 자는 대답할 생각이 없었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용병들도 나름 검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상대는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크악!”
용병들은 검을 들고 동시에 공격했다.
검과 도끼를 동시에 휘두르는 살인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한 명씩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용병팀은 이제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 방에 온전히 있는 사람은 가면을 쓴 살인마뿐이었다.
“일곱 명 더.”
녀석은 자신의 팔에 죽은 사람의 숫자를 검으로 하나씩 새겼다.
팔에는 칠십 개가 넘는 표식이 있었는데, 이제 일곱 개가 더 추가됐다.
“아직 많이 남았어. 지금 열다섯 명밖에 못 죽였어.”
가면 살인마는 천천히 다른 희생자를 찾아서 발길을 옮겼다.
“남은 녀석들은 삼십 명이 넘어. 부지런해야 해. 한 명도 살아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용암 지대 에어리어는 많은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유진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몬스터만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살인마가 있었기 때문에 긴장감이 극도로 심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몬스터를 상대할 때와 살인마를 상대로 싸울 때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사람을 상대로 싸운 적이 없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유진하는 긴장해서 어색하게 움직였다.
반면에 M은 침착하게 걷길래 의문이 생겼다.
“M은 괜찮은 거 같네요.”
“무슨 소리지?”
“상대가 무차별 살인마일 수도 있잖아요. 몬스터에 맞서는 것과는 또 다르잖아요.”
“아, 그 소리였나?”
M은 고개를 돌려 유진하를 바라봤다.
“나는 정부 에이전트 요원이다. 에어리어 공략을 하지만 평소에 다른 일이 없으면 범죄자와 상대하는 일도 하지. 아마 그래서 그럴 거다.”
“그렇군요. 이런 경우도 많이 봤겠네요.”
“조금은.”
M은 선글라스를 살짝 만졌다.
“살인마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라.”
“인간이 아니다?”
“몬스터보다 더 몬스터 같은 인간들이지. 사이코패스는 괴물이다. 그런 녀석들은.”
M의 말은 짧고 간결했다.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
유진하는 방금 그 말을 거듭 새겨들었다.
M과 대화하니 조금은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래, 이쪽은 내가 전문이야. 너희들까지 희생시키지는 않으마.”
든든한 목소리였다.
M의 위로 덕분에 이소민과 에어리스도 어두웠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일행은 천천히 방을 차례차례 지나갔다.
용암 골렘을 쓰러뜨린 후에 나온 길은 하나였다.
외길을 따라 쭉 가면 곧 에어리어의 주인이나 주인의 전리품이 나올 터였다.
방을 하나하나 넘어가는데 특별한 상황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잠깐.”
가장 앞서가던 유진하와 M이 발걸음을 멈췄다.
“봤나?”
“네.”
둘은 침착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왜 그래?”
이소민이 말하자 유진하가 대답했다.
“앞에 뭔가 있어요.”
다음 방으로 가는 통로가 보였는데 특별한 뭔가 보이지는 않았다.
“안 보이는데?”
“자세히 봐요. 하얀 줄이에요.”
유진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하얀 줄이 살짝 드러났다.
“부비트랩이에요.”
그 말에 긴장감이 확 올라갔다.
이소민과 에어리스도 상황을 파악했다.
부비트랩은 당연히 누군가 설치한 함정이었다.
누군가는 당연히 살인마일 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살인마가 여기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긴장된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모두 조심해요.”
살인마가 여기 있다.
유진하는 근처에 떨어진 돌멩이를 들었다.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하얀 줄을 향해 던졌다.
탁!
돌멩이가 하얀 줄을 치자 함정이 발동했다.
위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우수수 쏟아졌다.
함정은 사냥의 시작 신호였다.
살인마 역시 상대가 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자, 당신이었나?’
유진하는 앞을 바라봤다.
멀리서 한 명의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가면을 쓰고 걸어오는 녀석이었다.
‘녀석이다. 살인마.’
차라리 비밀 통로나 환기구에 숨어서 기습하는 스타일이었으면 뒤를 잡을 방법이 있었다.
녀석은 그런 타입이 아니었고 천천히 다가왔다.
자기 실력에 확신을 가진 것은 분명했다.
그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장 두려웠다.
‘몬스터와는 달라. 인간의 전투는 예측할 수가 없어.’
어떤 전술로 어떻게 공격할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아까는 독살. 이번에는 부비트랩.
살인마의 다음 공격법에 빨리 반응하지 못하면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복면의 살인마는 양손에 도끼와 검을 꺼냈다.
“후우.”
녀석이 다가오자 이쪽에서도 한 명이 나섰다.
대검을 꺼낸 에어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