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던전에서 만나다(1)
“넌 하이에나 같은 녀석이야.”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경멸 중에 최악에 속했다.
“뒤에 숨어서 전리품만 챙기는 녀석. 싸우지 않고 도망갈 생각만 하는 녀석.”
유진하가 1년 동안 꿋꿋이 전투를 피하고 혼자 다니자 다른 공략자들이 붙여준 평가였다.
그들은 유진하를 비웃으면서 먼저 걸어갔다.
유진하는 혼자 남았다.
1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 취급을 받았다.
물론 형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난 그저 조심하자는 얘기를 했을 뿐이야…….”
아무도 없는 곳.
혼잣말이 공허하게 남았다.
“목숨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뭘 조심하자는 건데?”
그런데 한 명의 공략자가 남아 있었다.
검을 가진 긴 머리카락의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아직 옆에 있었다.
이번에는 유진하가 혼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몬스터를 조심하자고요.”
“응? 에어리어 공략이 시작되려면 아직 남았는데.”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이에요.”
유진하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부정하면서 말했다.
여자는 그런 유진하를 바라봤다.
“그런데 몬스터가 어디에 있다는 거야?”
유진하는 그녀에게 손짓을 까딱하면서 바위 뒤에 숨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그대로 따랐다.
“저기요.”
바위에 몸을 숨긴 후에 유진하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출입구에 있는 커다란 석상이었다.
“저게 왜? 그냥 석상이잖아.”
“목소리 낮춰요. 그렇게 크면 숨은 의미가 없잖아요.”
유진하가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발을 봐요.”
여자는 석상의 발을 바라봤다.
흙이 묻어 있었다.
“저 녀석, 움직이는 거예요. 석상이 아니라 몬스터죠.”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그럼 앞에 들어간 사람들은?”
“…….”
유진하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말릴 수가 없었죠.”
최악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석상의 발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앞으로 나왔다.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처럼 들렸다.
석상은 천천히 앞의 멤버들이 간 입구 방향을 따라갔다.
쿵쿵.
석상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빨라지더니 곧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소름 끼치는 소리.
“으아아.”
여자는 소름이 끼쳤다.
까딱했다가는 자신도 저 지옥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다.
“지금 가요.”
유진하가 천천히 일어섰다.
“어디로 가려고?”
“이제 입구가 열렸어요.”
앞에는 석상이 걸어가면서 생긴 충격으로 열린 문이 하나 있었다.
“저기로 갈 생각이야? 지금 앞에 전멸했잖아.”
“전리품 챙기러 온 거 아니었어요? 그냥 나가면 빈손이잖아요.”
유진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여자는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일단 이 예리한 눈치를 가진 녀석을 뒤따라가기로 했다.
“저 녀석, 에어리어의 주인이었어요.”
“주인?”
현대 도시에서 갑자기 특이한 차원 공간이 생긴 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차원 공간을 ‘에어리어’라고 불렀다.
에어리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안에는 다양한 괴물들이 있었다.
“닫는 방법은 간단해요. 에어리어의 주인을 물리치든가. 아니면 주인이 지키고 있는 전리품을 가져오든가.”
“그 정도는 아는데.”
“저런 괴물과 싸우면 죽음이에요. 처음부터 제 말을 들었다면 다른 방법을 같이 찾겠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없어요. 빨리 주인의 전리품을 찾아서 돌아가는 수밖에 없죠.”
유진하는 문으로 들어와서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누나, 검은 쓸 수 있어요?”
“검술 대회 우승은 좀 했어.”
“실전은요?”
“아직…….”
“그럼 웬만하면 싸울 생각은 하지 말아요.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유진하는 그녀에게 가볍게 얘기했다.
“좋은 충고 고마워. 잘 받아들일게.”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지금은 부드럽게 말할 여유가 없어서 그래요.”
“나도 알아. 빈정거린 거 아니었어.”
여자는 유진하의 뒤를 따라갔다.
“너는 경험이 많은 것 같은데?”
“조금 와봤죠.”
“관찰력이 뛰어난 것 같아. 아까 석상의 정체를 파악한 것도 그렇고.”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이 있어요.”
“1000가지?”
깜짝 놀란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그 책은 다들 알고 있었다.
“던전에서 얻은 무기나 카드를 잘 사용하면 되고. 그게 없으면 지형을 이용하면 가능해요.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되더라고요.”
“그 책은 아는데. 그게 정말 잘 되나?”
여자는 도통 믿기지 않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던전에서는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죽어요. 뭐든지 잘 관찰하고 전략도 잘 세워야 하죠.”
“좋은 생각이야. 혹시 다른 충고는 더 없어?”
“누나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요. 전투에서 그렇게 긴 머리카락이 적들에게 잡히면 끝이에요.”
“아, 그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검을 뽑았다.
단숨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검으로 쑥 잘랐다.
잘린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며 흩어졌다.
“누나 성깔 있네요?”
“네가 그랬잖아. 목숨은 하나뿐이라고. 나쁜 버릇은 고치고 좋은 충고는 받아들이는 편이야. 천 가지나 된다는데 이왕이면 빠를수록 좋지.”
“내 이름은 유진하예요.”
“난 이소민.”
서로 악수는 생략했다.
그런 여유는 나중에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
이소민은 유진하를 뒤에서 따라가면서 얘기했다.
“난 처음 왔어.”
“그런 것 같았어요. 목적은 물건이죠?”
“팔면 엄청 큰돈이 되잖아.”
대부분의 공략가들은 부와 명예를 원한다. 당연한 소리였다.
이곳에 있는 물건을 잘 가져가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한탕만 잘하면 빌딩은 구매할 수 있는 정도였다.
“첫 무기로 검을 골랐는데 괜찮을까?”
“자기 손에 맞는 게 가장 좋은 무기예요. 그거 나름 비싸 보이는데.”
“자동차 한 대 값이었어. 물론 비싼 외제차로…….”
이소민은 옆구리에 찬 검을 손으로 꾹 쥐었다.
에어리어에는 주인의 전리품 말고도 각종 아이템이 많았다.
여기서는 현대 무기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총이나 검조차도 들어오자마자 부식되거나 아예 망가져 버린다.
에어리어에서 얻은 장비만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다.
희귀한 아이템은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폭등한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뭘 안 가지고 있네? 여기서 안 챙겨?”
“무겁지 않은 거만 챙겨요.”
“흐음. 그럼 돈이 별로 안 될 거 같은데?”
“괜찮아요. 원래 여기 온 목적도 돈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니까.”
가벼운 차림새였던 유진하는 덕분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생존에서 중요한 부분은 움직임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무기가 안 보이는데? 단검?”
“나는 싸울 생각이 없어요. 주인의 전리품이나 아이템만 챙기는 거죠.”
“그래도 뭔가는 가져왔을 거 아냐. 뭘 가져왔는데?”
이소민이 질문을 남기는 찰나, 앞에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늑대처럼 생긴 몬스터 세 마리가 나타났다.
“크르르르르.”
며칠은 굶은 듯한 소리였다.
날카로운 송곳니에서는 침까지 흘러나왔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쳐다보는 기분이랄까. 불쾌감 이전에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이소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았다.
너무 손이 떨려서 검을 쉽게 뽑지 못했다.
“누나, 이리 와요.”
유진하가 조용하게 손짓했으나 이소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패닉 상태에 빠진 거였다.
“쳇.”
어쩔 수 없이 유진하가 이소민에게 다가갔다.
“후우.”
유진하는 손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화염 카드였다.
상대는 세 마리의 늑대 몬스터.
크르르르.
카드의 존재를 보자 화염을 피하려고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거리를 벌렸다.
영리한 대응이었다.
이래서는 한 장으로 전부 당해내기 어려웠다.
“파이어.”
유진하는 주저하지 않고 화염 카드를 사용했다.
쏘는 방향이 예상외였다.
위쪽이었다.
“어?”
화염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 이소민이 순간 당황했다.
“그 중요한 카드를 왜 잘못 날린 거야?”
이소민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유진하를 바라봤다.
“가만히 있어요.”
유진하는 옆에서 조용히 있었다.
크아아아아.
화염 방향이 빗나가자 늑대 몬스터들은 일제히 자신감을 가졌다.
세 마리 모두가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그 순간.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종유석?”
동굴 천장을 바라보니 종유석 뿌리 부근이 녹아 있었다.
아까 화염에 의해 천장의 종유석의 윗부분만 녹여 버려서 바닥으로 떨어뜨린 거였다.
콰과과광!
화염이 지나간 부근의 종유석들의 뿌리가 녹아버리자 무수히 낙하했다.
마치 비처럼 떨어졌다.
쾌애액!
늑대 몬스터들은 떨어지는 종유석에 깔렸다.
그나마 빗맞은 녀석은 몸에 중상을 입고 도망쳤다.
“와아.”
이소민은 엉겁결에 탄성을 내질렀다.
“일부러 천장에다 한 거구나. 종유석을 떨어뜨리려고.”
“동굴 자체가 열에 약한 재질이었어요. 종유석 뿌리만 가열시키면 다 떨어질 거였죠.”
유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몬스터들은 화염을 못 맞출 수도 있고, 설사 잡아도 한 마리 정도겠죠. 그럼 나머지 두 마리한테 당할 거고요.”
늑대는 세 마리였다.
카드 한 장으로는 모두 잡기 어려워서 지형을 활용한 거였다.
“지형을 이용하라. 던전을 활용하는 여섯 번째 방법이죠.”
“대단하다. 그 위급한 순간에 반응하다니.”
이소민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슬쩍 닦았다.
몬스터를 실제로 마주하니, 생각 이상으로 압박이 대단했다.
실전이 그래서 중요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대결은 연습으로는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누나가 패닉 상태에 빠져서 어쩔 수 없었어요. 싸우지 않는 편이 최선이니까요.”
유진하가 투덜거렸다.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이소민이 사과했다.
“고마워. 구해 줘서.”
“웬만하면 누나는 다음에 들어오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사람은 적성에 맞는 일이 따로 있어요.”
유진하는 뚜렷한 어조로 강조했다.
“여기선 당황하는 순간, 바로 끝이에요. 죽어요.”
손가락으로 목을 살짝 긋는 시늉을 했다.
죽음이라는 의미.
실제로 늑대 몬스터에게 당했으면 그랬을 일이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세 번, 많으면 다섯 번 정도 왔을 적에 거의 죽어요. 누나도 거기에 카운트로 들어갈 필요는 없어요.”
“조심할게.”
“저는 여기서 많은 것을 봤어요. 녀석들에게 잡히면 장난감처럼 괴롭힘을 받다가 죽는 것도 여러 번 봤죠. 끔찍한 광경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목소리가 진지했다.
“내 형도 여기서 그렇게 사라졌거든요.”
“형이라고?”
“네, 저랑 같이 다녔죠.”
유진하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진지했다.
“우리 형은 굉장한 사람이었어요. 실력도 뛰어났고, 많은 곳에서 항상 성공했죠. 하지만 저를 구하려다가 몬스터 무리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어요.”
“포위당했다고?”
유진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이소민은 말끝을 흐렸다.
단순히 돈을 위한 사람만 있지는 않았다.
이곳의 정체와 기원을 알아내려는 탐사자들도 있었다.
유진하처럼 가족을 찾는 사람 역시 존재했다.
목숨이 걸린 곳.
안전과 복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유진하의 생각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아직 형이 어딘가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모든 에어리어에 들어가서 찾으려 하고 있어요.”
돈을 버는 행위보다 훨씬 더 힘든 목표였다.
실낱같은 희망을 원했던 걸까.
‘그래도 이 녀석. 꽤 친절한 거 같은데?’
약간 자기 주관이 강하지만 판단은 정확했다.
카드까지 사용해서 살려준 데다가, 돈보다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충고까지 해주는 모습도 그랬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더 가봐야 알겠죠.”
둘이 한참을 다시 걸어가다가 허름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저기 보물 상자? 어쩌면 주인의 전리품이 있지 않을까?”
모처럼 얼굴이 밝아져서 이소민은 앞으로 달렸다.
유진하가 앞서가는 이소민을 급하게 말렸다.
“잠깐만요.”
“왜?”
“중요한 거는 관찰력. 절대 잊지 말아요.”
유진하는 이소민을 향해 귓속말을 전했다. 이소민은 고개를 계속 끄덕이면서 한참을 듣더니 각오를 단단히 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잘해볼게.”
“네, 믿을게요.”
이소민은 침착하게 칼 손잡이를 잡았다.
여기 들어온 후로 처음 제대로 칼을 뽑아봤다.
그동안 유진하는 근처에 떨어진 돌멩이를 하나 쥐었다.
“시작할게요. 실수하면 안 돼요.”
“걱정 마. 네가 구해준 값은 하고 싶거든.”
유진하가 손에서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더니, 신호와 함께 보물 상자를 향해 힘차게 던졌다.
타악!
정확히 보물 상자에 명중했다.
그러자 보물 상자가 갑자기 열리더니 혓바닥이 나왔다.
“지금이에요.”
동시에 이소민이 칼을 앞으로 내밀며 찔렀다.
내지른 칼은 정확히 보물 상자의 혓바닥을 찌르고 들어가서 안까지 박혔다.
“물러서지 말아요!”
유진하가 와서 이소민의 칼을 같이 잡아 깊숙이 밀었다.
보물 상자는 거친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정말이야. 이것도 몬스터였어.”
“페이크 트래져. 간혹 길에 있는 종류예요.”
유진하는 보물 상자의 상태를 살폈다.
“이건 어떻게 알았어?”
“보물 상자가 열리는 입구를 잘 보세요.”
자세히 살펴보니 상자의 입구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피잖아. 사람 거로 보이는데?”
“보물 상자인 줄 알고 속아서 오는 사람들을 노리는 거죠. 멋모르고 열었다가는 단숨에 삼켜져요. 저 길쭉한 혓바닥 안으로.”
이소민은 보물 상자의 늘어진 혓바닥을 바라봤다.
저기에 삼켜진다니 끔찍했다.
“그래도 잘했어요. 누나도 아예 가망이 없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처음으로 받은 칭찬이네. 고마워.”
유진하는 단검을 하나 꺼내고 죽은 보물 상자의 옆에 앉았다.
“뭐 하려고?”
“이 녀석, 가짜 보물 상자지만 아이템은 진짜로 가지고 있거든요.”
단검으로 단숨에 보물 상자의 옆구리를 갈랐다.
유진하는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검이다.”
아쉬운 목소리였다.
“왜? 아이템을 얻었잖아.”
“이런 무기는 제가 선호하는 편이 아니에요. 무거워서 둔해지고 체력이 더 빨리 떨어지거든요.”
이소민은 방금 얻은 검을 살펴봤다.
장식 문양도 그렇고 꽤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누나가 가진 검보다는 훨씬 비싼 거예요. 바꿔도 좋아요.”
“넌 안 가져?”
“저런 무거운 무기는 잘 안 가져가요. 카드나 약처럼 가지고 다니기 좋은 물건이 좋죠.”
“그럼 사양 안 하고 내가 가질게.”
이소민은 검을 옆구리에 찼다.
기존에 가지고 왔던 검을 버리지는 않았다.
양쪽에 검을 하나씩 가지니 쌍검을 찬 모양새가 되었다.
“누나는 욕심이 많네요.”
“돈 벌려는 거잖아. 최대한 물건 잔뜩 챙겨 가서 팔아먹으려면 체력은 기본이어야지. 그건 자신 있어.”
“무거워서 지칠 것 같으면 바로 버려요.”
“뭐, 그렇게 할게.”
이소민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물건을 팔아서 돈을 크게 벌 생각이 강한 듯했다.
욕심은 위험한 욕망과도 같았다.
생명보다 중요한 돈이 의미가 있을까.
“그냥 계속 걸어야 할까?”
뒤에 있던 이소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물건을 많이 챙기면 걸음걸이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거의 다 왔을 거예요.”
유진하가 먼저 향했다.
목표는 역시 주인의 전리품이었다.
유진하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수첩에 메모했다.
간단한 지도를 그리면서 움직이는 거였다.
“다행히 전체 크기는 작은 편이에요. 중심부도 멀지는 않아요.”
톡.
작은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물이 있나?”
“그런 것 같아요. 시냇물? 아니면 호수까지?”
유진하는 천천히 물방울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어둡고 칙칙한 동굴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물줄기를 찾으니 멀리 야금야금 빛이 보였다.
“나왔다.”
마침내 동굴에서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바닥에는 물줄기가 흐르는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조심스레 따라 걸어가는 동안 물방울이 조금씩 얼굴에 튀었다.
“저긴가 보네요.”
물안개 얼핏 보이는 너머에는 정원이 보였다.
간단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느낌이 들었다.
장식된 받침대 위에는 이전에 봤던 그 어떤 상자보다 커다란 보물 상자가 있었다.
“상자라기보다는 궤짝 같은데? 엄청 크다.”
“주인의 전리품이에요.”
마침내 에어리어의 중심부.
주인의 전리품을 찾는 데 성공했다.
유진하는 먼저 받침대 위로 올라가서 이소민의 손을 잡아줬다.
“그 칼 하나 버리면 안 돼요? 무거워서 올리기 힘들어요.”
“내가 처음으로 얻은 아이템이잖아. 기념이야.”
“목숨을 최우선으로 여기라니까요.”
“알아. 너 친절하기는 한데 잔소리가 많구나.”
둘은 커다란 보물 궤짝 앞에 섰다.
“열게요.”
유진하는 천천히 두 손을 내밀어서 궤짝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살짝 열리자마자 빛이 흘러나왔다.
궤짝이 열릴수록 빛은 차츰 강해졌고 나중에는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뭔가 있나?”
완전히 열리자 상자에서 나오는 빛이 사방을 완전히 밝게 만들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주인의 전리품?”
궤짝 내부를 확인한 유진하와 이소민은 깜짝 놀랐다.
안에는 옆으로 누워서 팔과 다리를 모은 채로 구부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은발의 긴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사람……?”
자세히 보니 손등에는 푸른 문양이 보였다.
아마 빛은 저기서 나온 것 같았다.
“주인의 전리품으로 사람이 나온 적이 있었어?”
“아니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들어본 적도 없고.”
서서히 그녀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두리번거리더니, 두 사람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누구세요?”
이쪽이 먼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왠지 어색하고 머쓱해져서 서로를 바라만 봤다.
침묵이 흐르고 물소리만 들렸다.
쿵.
그때, 진동이 느껴졌다.
멀리서 이 에어리어의 주인이 달려오는 거였다.
쿵쿵쿵쿵.
거대한 석상이 육중한 몸집으로 다가왔다.
주변의 천장이며 벽까지 전부 부서지고 있었다.
“저 녀석이 전리품을 지키려고 왔어.”
마침 옆에 에어리어의 출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빨리 가요.”
유진하와 이소민은 멀뚱히 있는 여자의 손목을 각자 잡고 달렸다.
간신히 출입구에 들어가서 빠져나오기를 성공했다.
거대한 석상은 서서히 사라져가는 에어리어 공간 속에 남았다.
“나왔다!”
푸른 하늘이 지독히도 반가운 순간이었다.
셋은 마침내 에어리어 공간을 클리어하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생존자는 이들이 전부였다.
“다행이다. 살았어.”
이소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을 활용하는 1000가지 방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듯했다.
유진하는 조용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봤다. 전리품 궤짝에 있었던 여인이 같이 있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여전히 푸른 문양이 어른거렸다.
“당신은……?”
유진하가 처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만난 사람.
그녀 역시 처음으로 만난 사람.
서로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