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우형
누가 옮긴 말인지는 모른다. 소문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형님에게 들었는데, 나는 곳간을 들락날락하다 들었는데, 나는 저어기 아랫집 아낙이 했던 말로 아는데, 주절거리는 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들은 자는 있는데 말한 자는 없는 기묘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몇 날 며칠을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알아낸 사실이었지만 당연히 주인 나리는 조금도 흡족해하지 않았다.
마님이 이 집에서 몸종 노릇을 하였더라, 주인 나리가 어렸을 적 수발을 받던 사이였다더라. 노랫가락처럼 퍼져 나간 말이었다. 거짓이었다면 권위와 폭력으로 금세 사그라들었겠지마는 어쩔 수 없게도 사실은 사실인지라 타다 남은 불씨처럼 잘 보이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숙주의 심기를 좀먹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물갈이가 된 터였다. 확실하게 갈아 버리려면 아예 야음 전체를 손에 들고 엎어야 하리라. 더 이상은 소용이 없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주인 나리는 늘 상한 낯으로 비복들을 노려보는 것을 버릇으로 삼았다.
그러면 목숨 줄이 아깝다는 것을 아는 비복들은 마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주인이 마님 말에는 껌뻑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 또한 주인 나리의 뜻일지도 모른다.
“계집종이라…….”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언제 바라보아도, 비단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나 보기 드물게 아름답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그러했다. 물론 저리 고운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고…… 마님은 날 때부터 양반이었던 것처럼 고왔다.
살갗도 희었고 수언이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살결이 주인 나리가 쓸어 모으는 비단보다 매끄럽단다. 손바닥을 쫘악 펴면 다 담길 것 같은 조막만 한 낯에는 얇은 붓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이목구비가 있었다. 언제나 허리를 펴고 목을 꼿꼿이 세우는 태도 또한 그러했다.
무엇보다 제일가는 이유는 부리는 것에 익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님은 주인이 손을 뻗으면 당연하게 팔을 벌렸다. 그렇게 안겨 다니는 것에 아무 낯설음도 없어 보였다. 식사 시중도 그러했고 치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을 익숙해하는 계집종은 없었으니 계집종이 아니라 함이 더 옳았다. 그리하여 나는 비복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 순간 마님의 옆에 있던 주인 나리와 눈이 마주쳤다. 이런, 실수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일했다. 마님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놓칠 주인이 아니었다. 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걸음에 심장이 같이 쿵쿵 떨어진다.
눈을 바닥에 처박고 있음에도 커다란 손이 위로 향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후려 맞는다. 비복들이 마님을 쳐다보는 것을 그 무엇보다 경멸하는 주인이었으니 오늘 귀가 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바닥이 아닌 검지 하나가 질끈 감긴 눈꺼풀을 툭툭 치고 갔을 뿐이었다.
“우형이가 왜요?”
줄곧 바라보고 있었는지 마님이 물으신다.
“송구합니다. 제가, 제가 주인 나리께서 시키신 일에 실수를 했습니다.”
주인 나리는 비복에게 달리 바라는 것이 없는 사내였다. 그렇다고 그저 너그러운 마님과 같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랫것들에 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냥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며 거스르지 않는 것만이 주인이 정한 쓸모였다.
그러면 밥과 잠자리뿐만 아니라 얼마간의 재물 또한 주어졌으니 해야 할 일만 머리에 잘 박고 있는다면 그리 힘든 종살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킬 것이 적은 만큼 그 중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온화한 목소리를 듣고도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럴 수도 있지.”
마님이 웃었다. 그러면 그 소리를 따라 주인의 발이 움직이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목을 낮춘 채로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같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수언이가 보였다. 좋다고 비웃는 낯이었다.
계집종이라 함은 저런 걸 보고 이르는 말이지. 모두가 주인의 심상치 않은 심기에 긴장하고 있는데도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게 상전을 성심성의껏 모시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당당한 것이다. 귀감이다, 귀감이야. 열셋, 열넷, 열다섯…… 그런 생각을 하며 수를 세었다.
주인 나리와 마님이 함께 걸으실 때에는 스무 보 뒤에서 따라야 한다. 발걸음을 세는 것이 습관이 된 비복들이 정해진 수가 지난 후에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꼴좋다. 나한테는 어디서 고개를 드냐고 뭐라 하더니.”
수언이 말했다. 저 계집애는 장에 가서 떡이며 단술로 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놓고는 무엇을 봤는지 왜 가르쳐 주지 않느냐며 아직도 내게 꽁해 있었다. 그것을 어찌 말하느냔 말이다. 저리 무서운 주인 나리가 장옷을 쓰고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고…… 왜인지 요새 따르지 말라며 명하는 일이 잦다 했더니 그런 일을 하고 계실 줄 누가 알았느냔 말이야.
그날 저녁에 멀쩡한 입성으로 갈아입은 주인 나리는 나를 보며 한번 웃고 말았지만 나는 오금이 후들거렸다.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일 판인데 수언이 계집애는 나를 무슨 변절자 보듯 하며 못살게 굴었다.
그러면서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저고리도 빨아서 풀 빳빳하게 먹여 주고, 지나가다가 만나면은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마님이 주셨다고 당과 따위를 내밀고 휙 가 버리면서 괜히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알고 보니 혁이 놈이랑 춘재 놈까지 다 받은 것이라 사람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이다. 그걸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쥐고만 있던 제 모습이 제일 꼴값이었지마는…… 아무튼 요즘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 사람한테……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말을 말자.”
“뭐?”
씩씩거리는 수언이와 발을 맞추지 않고 그냥 걸었다. 저 계집애도 나한테 그러는데 나라고 똑같이 그러지 못할 건 또 뭐야? 그러나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뒤통수에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다. 수언이가 나를 후린 것이다. 그러고는 저가 더 화났다는 듯이 나를 앞질러 거의 뛰듯이 걸어간다.
“뭐, 뭐 저런 게 다 있어.”
맞은 건 난데 성은 저가 다 낸다. 내 말을 들었을 것이면서도 수언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병신이 되는 거라고 하지마는 이것은 도를 넘는 일이다. 그 후로 우리는 숫제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원수 짓도 어디 따로 떨어져 멀리 살아야 타기를 갈고닦는 것이지 모시는 주인들이 사이가 좋다 못해 한 몸처럼 들러붙어 있으니 될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아, 아기 앞에서 참.”
살을 빠는 소리에 절로 낯이 붉어졌다. 해가 조금 기울자마자 마님을 찾아온 주인 나리가 입술을 잡아 무는 소리였다. 옹알이를 하는 어린 도련님의 음성과 섞여 들리니 낯을 안 붉히려야 안 붉힐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다고 되뇌어 보아도 한창때의 사내인지라 민망하여 귓바퀴에 열이 뜨끈하게 올랐다.
무시하려고 작정을 하였음에도 문 앞에서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언이가 신경이 쓰여 살갗이 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괜히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척 이마를 쓸어내리며 힐긋 바라본 수언이의 낯은 굳은 채로 곧게 앞을 향해 있었다. 아주 이글이글 끓는 눈빛으로 주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무엇을 바라겠냐, 너한테. 수언이는 여전히 주인이 계집질을 한다고 생각했다. 마님을 보필하는 데 죽고 못 사는 저 머릿속에서는 딴 가랑이를 차고 있으면서 왜 물고 빨며 가증스럽게 다정한 척하느냐 따위의 생각이 가득할 테다.
답답한 일이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것도 그러했고 조금만 자세히 보면은 주인이 그럴 시간도, 그럴 마음도 없다는 것이 보이는데 무조건 덮어놓고 계집질한다 새롱거리는 것도 그러했다. 그리고 또…… 빌어먹을. 생각할수록 구질구질해진다.
“너는 네 주인 편이니 그렇지.”
무슨 말만 하면 돌려받는 대답이 저것이었다. 첩질이 아니니 아니라고 한 건데, 아니, 자기가 첩처럼 차려입고 부인한테 들러붙어 있는 것도 첩질이라고 하나? 내가 모르는 새에 첩질 뜻이 바뀌었나 보지? 그리고 같은 집안을 모시는데 네 주인, 내 주인이 따로 어딨다고 저러는지도 모르겠고…… 아, 모르겠다. 그렇게 건방지게 노려보다가 후려 맞든가 쫓겨나든가 나는 이제 모른다.
“유모를 불러와라.”
“영정이 아직 잘 시간이 아닌데요?”
“자지 않아도 누울 순 있지.”
나에게 유모님을 불러오라 명한 주인 나리가 마님께 대답하며 도포를 훌렁 벗었다. 도포 안에 홑옷 하나만 걸치고 있었던지라 살갗이 반이나 비쳐 보였다. 원래 주인 나리는 비복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서 맨몸을 드러내는 데에 저어함이 없었고, 나 또한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니거니와 같은 사내 몸을 보았다고 부끄럽고 자시고 할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옆에는 수언이가 있었다. 수언이가!
불안한 마음에 눈알을 굴려 옆을 보는데 수언이는 고개를 낮추지도 않고 앞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부친이 의복을 갖추고 있는 것보다 헐벗고 있는 것에 더 익숙한 어린 도련님이 그 모습에 좋다고 웃고 있는 것과 비교되었다.
물론 계집종 따위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의 작은 얼굴에 남는 곳 하나 없이 입을 맞추던 주인 나리는 이제 마님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하나씩 입에 넣고 빨아 당기는 중이었다. 손가락 뿌리에 끼워진 가락지가 벌써 세 개나 주인 나리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볼을 부풀리고도 주인 나리는 여전히 잘난 낯이었다.
수언이도 이미 여러 번 본 데다 주인 나리가 마님과 붙어 있는 것을 증오했으니 저 번듯한 외피에 마음을 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요란하게 두방망이질 친다.
“예. 속히 불러오겠습니다.”
급하게 대답하고 수언이의 손을 잡아채 반쯤 내달렸다. 혼자 가면 되는데 나는 왜 달고 가냐는 수언이의 종알거림이 들렸지만 앞만 보고 뛰듯이 걸었다. 안방 문 앞에 붙어 있어 봐야 물고 빠는 소리만 더 듣고 주인 나리 등짝이나 볼 텐데 뭐 좋은 것이라고 붙어 있으려 하는 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너도 보기가 영 껄끄러운가 보지?”
“뭐가.”
“주인이 지랄하는 것 말이야.”
“그따위로 말하지 마라.”
수언이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주인 나리는 수언이를 봐주고 있었다. 마님이 특히 아끼는 몸종이니 눈에 거슬려도 놔두는 것일 테다.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 눈알을 부라리고 다니는데…….
“야. 그렇게 감싸는 것을 보니 느이 주인하고 생각이 똑같은갑지? 종놈이 첩질도 하겠다?”
머리로 열이 뻗친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렸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이 손을 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뭐?”
“그렇게 덮어놓고 맞다고 하는데 못 할 것 무어냐? 나 좋다는 계집 있으면 다 품어 주고 살란다.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이면은 하고 욕먹는 것이 억울하지나 않지.”
“실성했어?”
“내가 실성하든 제정신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하느냔 말이야.”
제 귀로 들어도 심장이 욱신거릴 만큼 찬 음성이었다. 나는 한 번도 수언이에게 이런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 증거로 수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달라붙어 얼렀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이 무어야,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계집애가 수언이뿐인 것도 아니고 좋아할 만한 여자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개나리꽃마냥 고운 내자를 얻어서 수언이 보란 듯이 살 테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주인 나리가 마님께 하듯이 신을 신은 발이 땅에 닿을 일도 없게 안고 다녀 수언이 계집애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 것이란 말이다. 아, 빌어먹을…… 수언이 운다.
금세 눈두덩이를 자두 알처럼 부풀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나는 그러면 너무 걱정이 되어 속이 탔다.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안 그래도 큰 눈알이 도로록 떨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닦아 주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가 마른세수를 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요란을 떨고 결국 뒤를 돌았다.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고. 내자도 아니고 정인도 아니다. 내가 저 계집애를 좋아한다 뿐이지 저 계집애는 나한테 아무 마음도 없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집사님한테 가서 빨리 아무나 그냥 순한 여자기만 하면 좋으니 짝을 지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흐으.”
수언이 여전히 울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도 함께 들리는 것을 보아 나를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낯이 터져라 울고 있는지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 개미가 기어 오는 것과 같은 빠르기였다.
병신, 병신……. 지금 뒤돌면은 빼도 박도 못하는 병신이 되는 거다. 머저리가 되는 것이고…… 그러나 발걸음은 저절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향했다. 수언이 저리 우는 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까까지 다른 여자랑 혼인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 참으로 병신다운 생각이었다.
비치적거리며 걷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 뛰었다. 내 다리로는 열 걸음이면 닿는 거리였는데 수언이는 왜 이렇게 느리기만 한지……. 개구리 눈알처럼 부풀어 오른 눈이 가느스름하게 뜨인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로 아직도 눈물이 샘솟아 무엇이 보이긴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팔을 뻗어 닦아 주려는데 손끝이 눈가에 닿기도 전에 뺨을 차지게 얻어맞았다. 이럴 줄 알았다.
그런데 눈물로 축축한 손이 내 뺨을 잡더니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어리벙벙하게 있다가 입을 맞추기 위해 달려드는 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급하게 수언이를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맨땅에 부딪힌 등이 쓰라려야 하는데 놀랍게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너, 너…… 나는 네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어?”
가슴팍에 낯을 묻은 채 훌쩍거리면서 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내가 하는 모양새를 보며 계속 생각해 보니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자꾸 말을 붙이고 불러내고 했던 것인데 이리 냉정하게 구니까 속이 상한다는 말이었다.
“너도 근데 나만 보면 쌜죽거리고 당과도 다른 놈들한테 갖다주고…….”
“나 혼자 착각한 거면 창피하잖아.”
그래서 아니라고 말할 빌미를 만들어 두기 위해 툭툭거리고 혁이 놈이랑 춘재 놈에게도 당과를 나누어 준 것이라고. 맞지. 그렇지. 혼자 좋아하는 줄 알고 잘해 주다가 아니면은 얼마나 창피해. 잘했네, 잘했어.
“근데 이제 주지 마라. 나한테만 줘.”
“응.”
수언이 울음을 멈췄다. 따뜻한 숨이 가슴팍으로 쌕쌕 쏟아져서 말도 못 하게 간지러운데 절대 긁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이 말랑한 몸 위에 평생 깔려 있고만 싶었다.
“마님과 주인 나리 있잖아.”
“응.”
“그거, 네가 보았다는 여자. 그거 주인 나리가 치마 입으신 거다.”
수언은 부어오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더니 크게 웃었다. 내가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농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맞닿은 가슴팍으로 즐거운 진동이 나를 울렸다. 그래. 무엇이 중요하냐. 이렇게 웃음이 나는데.
“너 오라비가 송호에 산다고 했지.”
수언이와 나는 대개 이 나이대 비복들이 그러하듯 늘어난 입을 견디지 못한 모친이나 부친이 금전과 맞바꾼 것이었다. 나는 다섯 번째 자식이었고 아버지를 잃은 후 어찌어찌 남은 자식을 부양하던 어머니가 견디지 못하고 나를 노비로 팔았다. 형제들이 다 자라 제 몫을 하면 돈을 구해 나를 꼭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마는…….
수언이가 어찌 노비 신세가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물은 적이 없었다. 뭐 좋은 일이라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송호에 오라비가 산다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른 피붙이와 척을 져 영 싫어했으면 그렇게 말을 흘리지도 않았겠지.
“나중에 보러 가자.”
“언제?”
“나중에, 내가 돈을 모으고 있으니까 우리 면천 받으면은 그때.”
그래. 수언이 또 웃는다. 몸을 기대고 다리를 달랑거리기까지 했다. 흔들거리는 몸을 붙잡고 말을 덧붙였다.
“근데 네가 그날 장에서 다 써 버렸지 뭐냐. 나 이제 거덜 났는데 어쩌냐. 네가 벌어야겠다.”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미리 몸을 붙잡아 얻어맞는 것은 피했다. 그것에 더 성이 난 수언이 뺨을 깨물려 들길래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추었다. 마님이 주신 당과를 먹고 왔는지 입술부터 혀뿌리까지 달지 않은 게 없었다. 깨물려는 것에 역으로 입을 맞추는 것이 웃겼는지 수언이 킬킬거렸다.
날이 좋았고 바람이 따뜻해 우리는 오래도록 끌어안은 채 웃음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품에 그러안은 몸이 갑자기 바짝 굳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
“잠깐만…… 우리 유모님 부르러 가는 길 아니었냐?”
그렇게 내지른 수언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럴 수가. 까맣게 잊었다.”
늦은 것보다 어떻게 주인 나리가 시키신 일을 새까맣게 잊고 노닥거릴 수가 있었는지가 더 충격적이었다. 지금 주인 나리가 헐벗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지도 않을 유모님을 기다리며 문만 쳐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절로 피가 식고 등으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나는 급하게 수언의 치마를 펴고 수언은 내 등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주었다. 반쯤 벗겨진 신을 다시 신겨 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어떻게든 반듯하게 귀 뒤로 밀어 넣고…… 달리면서 하는 일이라 모양새가 참으로 볼품없었다. 근데 좋아한다는 게 참 우습다. 혼꾸멍이 날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난다는 것 말이다.
아마 오늘은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 실실 웃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수언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