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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 복과 희락, 그리고 (5/9)

후일담 - 복과 희락, 그리고

부용화가 바람에 날리는 계절이 왔다. 들판에서 흔들리다 이제 화병 속에서 멈춘 꽃은 어디에서 피든 아름다웠다. 그것을 꺾어 준 이와 마찬가지로…….

백옥같이 매끈한 손이 꽃대를 꺾어 내 머리에 꽂아 준 일이 바로 어저께였다. 제가 꽂아 놓고는 좋은지 웃길래 마주 웃어 주었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 아름 꺾어다가 장식을 해 둔 것이 저것이다.

꽃을 보면 좋아할 것이라고 저리 가득 꽂아 두었을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러나 세 번 볼 때에도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꽃이 아니라 그것을 꺾으며 내가 웃을 것이라 여긴 사내의 마음 때문에.

좋은가. 좋아서 웃나. 나는 오늘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 아기씨는 낯을 꽃처럼 피우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고 싶어 조바심을 냈다. 그러면 보통 나는 조잘대며 바로 알려 주지만 오늘은…….

“아기씨.”

“응.”

“오늘도 어려운 것을 보시네요.”

아기씨는 햇빛이 가득 내리비치는 정자에 앉아 서궤를 앞에 두고 글씨가 가득 적힌 종이를 보고 있었다. 허연 종이가 은행나무 잎처럼 드문드문 노랗게 번졌다.

방 안에 들어앉아 농탕질만 했던 것이 언제냐는 듯 해가 떠 있을 때는 여느 집 가장처럼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 장했다. 전에 집사님이 하시던 일이었다. 내가 계집종 일을 할 적에, 나는 알지 못하는 뜻이 담긴 종이를 보고 일을 나누어 주시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그것과 비슷한 종이 하나가 곱게 접혀 내 손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혼례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씨의 기분이 한껏 풀어지고 집안이 어수선하였을 때, 집사님이 떠나기 전에 내 손에 쥐여 주신 것이다.

아기씨에게 받은 것을 말하니 그것을 펼쳐 보지도 않고 너에게 한 재산 떼어 주려나 보다 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쓸 일이 없을 것이니 대충 어디 처박아 두라는 말은 덤이었다.

들여다보아도 무어라 적힌지 알 수가 없으니 대충 땅문서인갑다, 하고 옷궤 밑바닥에 넣어 두었다가 오늘 손에 쥐고 의원을 만나러 갔었다. 그냥저냥인 전답이면은 그동안 시달리느라 고생 많으셨소, 하고 건넬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그대로 손에 쥐고 돌아와야 했다.

“어렵지 않다. 그냥 오늘 얻은 것과 지금 있는 것이 종이에 적힌 수와 같은지만 보면 되니까.”

“아기씨.”

“응.”

“저도 글씨를 보면 어때요.”

대번에 검은 먹이 빽빽하게 들어찬 흰 종이가 눈앞에 들이밀어진다. 누가 이것을 보자고 말을 꺼냈을까.

“말고요. 배워서 무슨 뜻인지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요.”

“좋지.”

다른 말도 없이 문방사우가 올라가 있는 서궤가 내 앞으로 디밀어진다. 예전에 그림을 그릴 적 만져 봤는데도 붓을 쥐는 법부터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렇게 오래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런데,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깨칠 수 있을까요? 보면은 요만할 때 학당을 가는 것 같던데, 저는 이만한데.”

내 말을 들은 사내가 과장된 몸짓으로 나를 요리조리 살펴본다. 뺨을 돌려 보고 팔을 들었다 놨다 난리를 피운다. 또 왜 이러는 것인가.

장난질하지 말라고 눈을 치켜뜨니 진중한 표정으로 말한다.

“음. 요만한 것 같은데.”

“웃기는 소리. 몇 해 전만 해도 비슷했으면서 이제 컸다고 유세를 부린다?”

“이만해서 문제라면 내가 옆에서 읽어 주어도 좋지. 읽어 주고 써 주고.”

“안 돼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단 말이에요.”

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말에 아기씨의 낯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생각을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좋아하는 듯 보이다가 또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저 버릇은 팔순이 되어도 못 고칠 것이다.

“어디 갔다 왔니?”

“제가 밖에 나가면 갈 곳이 어딨어요. 그냥 바람 쐬는 겸 걷다가 의원 댁에 인사나 하고 왔지요.”

나가는 걸음에 비복을 붙인 것이 본인이면서 아기씨는 모른 척 내 입으로 들으려 했다. 벌써 두 번이나 같이 유람 떠났고 여러 번 나들이를 갔으니 좀 괜찮아질 법도 한데…… 아직 배를 부풀리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저러는지……. 이제는 진정 나아져야 할 텐데.

“아기씨는 언제 깨치셨어요?”

“글쎄. 아주 어릴 적에 유모가 가르쳐 주었지.”

“하하. 요만했겠네요.”

“너만 했지.”

짜증이 나서 눈알을 희번덕이며 바라보니 얼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다. 청록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어딘가로 가더니 책 한 권을 들고 온다. 천자문이었다.

평소 성정을 생각해 보면은 허벅다리에 앉혀 놓고 뺨에다가 혀로 글씨를 적어 주고 알아들었느냐 물을 줄로만 알았는데, 웬일로 똑바로 가르쳐 줄 것인가 싶어 의아하게 쳐다보니 역시나 허리를 붙잡고 품에 들어앉힌다.

“그렇지. 틀릴 리가 없지.”

내 혼잣말에도 고개를 끄덕인 아기씨가 붓과 내 손을 함께 쥐고 선을 죽죽 긋는다. 그저 따라 쓰고 따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기씨는 나에게 탁월하다느니 영재니 하면서 추켜세워 주었다. 또 호들갑을 떤다 싶었지만, 자꾸 그러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안 해 봐서 못한다고 여긴 것이지 한번 하면은 또 기가 막히게 잘할 줄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나는 자신감이 붙어 쑥쑥 획을 그었다.

“복, 복 자를 써 주세요. 얼핏 기억은 나는데 쓰지는 못하겠어요. 노마님이 제 이름을 지으며 적어 주셨던 적이 있는데…….”

아기씨는 지체 없이 내가 원하는 글자를 적어 냈다. 글을 쓰는 데에는 곰 발과 다름없는 내 손을 달고 있음에도 물 흐르듯 유려했다.

“아, 맞아요. 또, 향, 누릴 향.”

복향. 두 글자를 써낸 아기씨가 제일 앞에 또 알 수 없는 글자를 하나 써 붙인다.

“소복향.”

소복향. 내 이름인데 모르는 성씨가 붙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빙글 웃고 있는 아기씨가 뺨을 맞대고는 말을 보탠다.

“유모의 성씨다. 너는 이 집안의 양녀야. 부모가 있고 친척이 있고 남편도 있지.”

소복향. 소복향……. 내가 적어 달라 말하지 않아도 아기씨는 끊임없이 붓을 움직여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나갔다.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해도 손이 기억할 수 있도록 오래, 오래. 다시는 잊지 않기 위해서.

“아기씨.”

“응.”

새삼스럽게 이상하다. 이제 나를 허리춤에 차고 다닐 만치 커다란 사내를 아기씨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내 등을 받치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몸이 내 앞으로도 길쭉한 팔을 죽 뻗고 있었다. 굵직해진 손목에 어울리는 손가락이 내 손을 온통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면 빛깔만큼이나 따뜻한 눈빛이 따라온다. 오래 눈을 맞추고 있으면 좋아하는 것인지 눈꺼풀이 접힌다. 가을 햇빛에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뺨까지 늘어지다가 나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팔랑팔랑…….

오늘 오전에 내 손에 잡힌 종이도 저리 팔랑거렸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바람이 얇은 종이에 씌어진 글자를 허공으로 날려 내 눈 안에 담았다. 오래 붙잡고 있어 미지근해진 지면에 적힌 것은 어느 땅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증명이 아니었다. 주인 없는 이름들이 각자 비할 데 없는 상서로움을 견주고 있었다.

소매에서 그것을 꺼내 건넸다. 둥글어진 눈으로 그것을 받아 든 사내가 잠시 멈추었다가 묻는다.

“어딜 갔다 왔어?”

어디서 습득한 것인지 묻는 것이다. 서로의 삶을 손아귀에 쥐고 있으니 이런 것에 예민한 사내였다.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이 쥐여 주지 않은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노여워했다.

“집사님이 주신 거예요.”

“땅문서인 줄 알았더니.”

“집사님은 작은 마님 것이었다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작은 마님께서 웃어른의 도리로 후에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미리 점지해 주셨나 했다. 내가 아기씨의 배필이 되었으니 그것이 이제 내 손으로 들어왔다고. 그러나 지면에 적힌 먹은 하나같이 사내아이의 이름이었다. 의원은 하나하나 불러 주며 다 좋은 이름이라고 하였다.

손자를 원하셨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것이지 이런 이름이 길한 것일까. 짧은 생각을 거듭하다 답과 비슷한 추측을 얻었다.

“아기씨. 아버지가 되어서도 아기씨라고 부르게 할 텐가요?”

장난스레 말하니 허리를 둘러싼 팔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잘난 도련님, 제가 무어라고 부르면 되나요?”

아기씨는 이름이 없었다. 더듬어 본 그 어느 과거에도 누구도 아기씨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작은 마님은 오로지 아기씨만을 걱정하며 사셨는데 어찌 저것이 이제야 아기씨의 손에 들어간 것일까. 그렇게 다정하셨으면서 어찌 이름 하나 불러 주지 않았을까.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모두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어질까 저어하는 것이 아기씨였는데 왜인지 또한 알 수 없었다. 괴로운 일이라는 것밖에는…….

사내는 괴로운 낯이었다. 대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일그러짐도 눈에서 뺨으로 길어져만 갔다.

나는 저 낯을 본 적이 있었다. 눈물이라고 다 같은 눈물이랴. 숱하게 젖은 눈을 본 적이 있다지만 떠오르는 것은 달랐다. 작은 마님이 돌아가신 후에 지금보다 한참 작았던 사내는 저리 울었다.

“슬프세요?”

“아니.”

단호하게 내뱉었으나 드러난 살갗을 전부 혼란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혼란, 두려움, 분노, 서러움, 슬픔. 슬픔…….

“나는 잘 모르겠어. 여전히 잘 모르겠어.”

숨기고 싶은 죄를 토로하듯 그렇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알려 줄 이는 이미 땅속 깊은 곳에서 영면 중이었으니 우리는 영원히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무슨 마음으로 불러 주지도 못할 이름을 하나하나 더해 갔는지, 왜 죽는 그 순간까지 한번 언질조차 주지 않은 것인지, 어째서 이제야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인지.

“더 좋은 이름을 주시고 싶었나 봐요. 어떤 이름에도 아기씨가 너무 아까워서 차마 짓지 못했나 봐요.”

답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좋은 몫을 보아야 한다. 답을 알 수 없으니 무엇을 선택해도 그 누구도 틀렸다 손가락질하지 못하리라. 지금부터 우리는 너무 사랑하여서, 이 세상 모든 이름을 고르고 골라 보아도 아까울 만큼 사랑스러워서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더라도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말에 괴로움이 깊게 팬 볼이 부풀며 기쁨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곱다. 사납게 구겨져도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면부였다. 작약의 한 귀퉁이를 뜯어 짓이겨진 꽃잎에 코를 대어도 그 향기가 상하지 않듯이…….

가만가만 그 아름다움을 더듬는다. 어쩌면, 어쩌면 나는 당신 이름을 알 것 같아.

“사람 사는 것이 이름을 따라간다고 하잖아요. 제 이름에는 복이 들어가 있으니까 우리는 이제 좋은 것을 많이 누릴 거예요. 그러면 많이 웃겠지요. 즐거워서 웃을 거예요.”

의원이 더딘 목소리로 하나하나 읊어 주던 이름들을 기억한다.

나는 처음 들을 때부터 그 이름이 좋았어요. 어울려요. 당신은 웃는 것이 잘 어울리거든요. 처음 볼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기억하나요? 나를 보고 처음 웃어 줄 때 말이에요.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부풀어 올랐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희락.”

소복향(蘇福享)과 이희락(李喜樂). 복과 희락. 갓 주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기쁨과 즐거움은 금세 주인의 살갗에 스며들어 입술을 벙긋하게 벌렸다. 원래 당신의 이름이었을지도 몰라요. 누군가는 이미 당신을 그렇게 불렀을지도 몰라요. 나의 기쁨, 나의 즐거움으로. 작은 속삭임에 큰 웃음이 터진다.

“또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요?”

“충분해.”

그럴 리가. 따뜻한 손을 잡아 손가락을 죽죽 폈다. 가만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 사내의 손을 내 배에 대어 주었다.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족하리라.

“의원을 만나고 왔다고 했잖아요.”

희락이 웃는다. 웃고 또 웃는다.

아직은 복과 희락뿐이겠지만, 곧.

*

“아기씨!”

노여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 나를 부른다. 복향이는 심하게 흥분하면 습관처럼 나를 아기씨라고 불렀다. 그만큼 경황이 없다는 뜻이다. 내 딴에는 숨긴다고 숨긴 것인데 벌써 들켜 버렸나.

저리 성을 낼 일이라고 한다면 처음 몸을 맞출 적에 복향이가 제발 불태우라 애원했던 이불을 몰래 숨겨 보관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는 예전에 쓰던 내별당 방 안 삼층장에 고이고이, 겉에 비단까지 둘러 보관했던 것인데 복향이가 수태한 후로는 가끔 꺼내 얼룩에 코를 박고 수음하기를 여러 차례였다. 그리하여 들켰나 보다.

“부인, 누구를 부르십니까? 이곳에 아기씨라고는 부인의 고 귀여운 배 속에 든 아기뿐인데.”

“농치려고 들지 마세요. 한 대 치고 싶으니까.”

이런. 독이 단단히 올랐는지 작은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며 나를 위협한다. 귀엽다고 하면은 바로 뺨을 맞을 것 같아서 침통한 낯을 흉내 냈더니 가증 떨지 말라고 정강이를 얻어맞았다. 맵시 있게 운혜를 갖춰 신은 발이 매섭게 후리고는 겹쳐진 꽃잎 같은 치마 속으로 폭 사라졌다.

몹시 아픈 듯이 허리를 굽히고 끙끙대는 내 등 위로 버리라고 한 종이를 왜 버리지 않았느냐, 그놈의 족자 만들지 말라는데 왜 자꾸 하느냐는 호령이 박힌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동안 글씨 연습 한 것을 족자로 걸어 두었더니 싫다고 저러는 것이다. 처음에 잘한다고 기를 북돋아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으니 복향이는 자신의 글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깨치기는 했어도 쓰는 것은 제 이름 석 자와 아이의 이름으로 지을까 고민하는 글자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모두 모아 벽에 걸어 두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은 화준(和浚)일 때도 있었고 현(賢)일 때도 있었다. 모두 모이니 그저 아름다울 뿐이었으나 글씨의 주인은 내 생각보다 더 탐탁지 않았나 보다.

아, 어쨌든 이불은 들키지 않았구나. 하마터면 밤마다 외로울 뻔하였다.

아픈 척 낯을 감추고 웃었다. 물론 입은 웃고 있어도 입술 사이로는 그저 보기 좋아 그랬다, 아기가 보면 좋아할 줄 알았다느니 하는 말 따위를 줄줄 내뱉었다. 왜 그러기는. 한 번씩 이렇게 쳐 주는 게 좋아서 그러지.

옆에 선 비복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전의 걸음을 돕기 위해 모여 있던 참이었다.

“그럼 오늘 산보 안 가니?”

“다신 안 그런다고 하면 가요.”

“그럼, 다시 안 그러지.”

수태하였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살살 걷는 것은 오히려 좋다는 의원의 말에 복향이는 매일 한 시진은 걸으려 애썼다. 그 덕에 나는 손만큼은 실컷 잡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배가 제대로 부풀지도 않았는데 유난이라며 종알거리던 복향이지만 챙겨 주는 것이 싫지 않은지 그러면서도 볼을 발그스름하게 데운다.

산보라고 하여도 집을 도는 것뿐이었다. 닦이지 않은 길을 걷다 사달이 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발등에 얹고 다니지 않는 이상 해소되지 않을 마음이었지마는…….

“아기씨.”

오늘은 계속 아기씨인가 보다. 복향이는 보통 희락이라고 부르고 기분이 좋을 적에는 서방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당연히 기분이 나쁠 적에는 아기씨 소리뿐이다. 그래도 내 귀에 국화꽃을 꽂아 주는 손길은 너그럽다. 오른쪽 귀에 꽂아 주고는, 길을 꾸미며 소담하게 핀 꽃을 하나 더 꺾어 왼쪽 귀에도 꽂아 주고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린다.

요새 복향이의 취미가 나를 꾸미는 것이었다. 아기씨일 적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직도 한이란다. 그러면 나는 몸을 내주어야지.

다 내어 줄 수 있어. 분을 바르고 싶다고 하면 면부를 내어 줄 테고 머리칼을 올리고 싶다고 하면 머리를 내어 줄 거야. 손을 잡고 싶다고 하면 손이 다 무어야, 팔도 뽑아다 줄 수 있다. 내 마음속이 궁금하다 하면은 갈비뼈를 갈라 보여 줄게.

가끔 너의 배를 만질 때마다 이런 마음을 토해 내고 싶어진다. 지금, 함께 방으로 돌아가자며 내 손을 잡고 있는 너는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한 발을 내딛고 그곳이 너의 자리다, 허락을 받은 후에도 그러했다. 끝내 떨치지 못할 것이다…….

종이 치듯 그런 깨달음이 나를 울릴 때면 무섬증이 인 사람처럼 사지를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내가 결코 바란 적 없는 언젠가가 손쓸 수 없이 밀려들고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다.

어느 날, 자꾸 예전 일이 떠올라 나를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복향이가, 나를 용서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진실로 나를 후려치고 나는 남은 사랑에 허덕이다 목을 매는 상상이 마치 예지처럼 떠오른다.

난 스스로 떠올린 상상이 퍽 타당하다고 여기면서도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마주 웃으며 하루를 끝내는 날에도 감은 눈에 맺히는 비극을 떨치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오늘과 같이…….

“주무세요. 그래야 내일 또 산보 나가지요. 걷기만 하는데도 은근히 곤하다니까요…….”

내가 깨어 있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잠든 줄 알았던 복향이가 눈도 뜨지도 않고 조용히 말했다. 잠결이었는지 졸음에 흠뻑 젖은 목소리를 길게 늘이며 팔을 뻗는다. 이불을 더듬더니 내 손을 잡고, 팔뚝을 쓸고, 어깨에 다다라 나를 품에 꼬옥 안아 주었다.

온 시야에 복향이가 가득 찼다. 다른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보드라운 살갗이, 오로지 향그러운 숨이, 오로지 나의.

그리하여 나는 눈 감지 않았다.

아,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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