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몸종의 아기씨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
문씨 집안을 이르는 말이었다. 가주 문종섭의 권력을 두고 찬양하는 말이기도 했고 그의 딸 문희경의 미모를 두고 칭송하는 말이기도 했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생겼나. 여자는 날 때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다. 아비와 어미도 제법 잘났다 소리 듣는 낯을 하고 있었지마는 그럼에도 문희경의 아름다움은 이질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못나도 함함한 것이 핏줄이라는데 남다르게 어여쁘기까지 하니 집안의 보배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나비가 지나가는 모양새를 보고 꺄르르 웃기만 해도 찬미가 쏟아졌다. 나비가 아기씨 웃음이 꽃인 줄 알고 왔나 봐요. 저런 미물에게도 웃음을 나눠 주시다니 마음씨가 어찌 그리 고우세요.
모든 힘이 그녀의 것이었다. 그러니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문희경은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만큼만 욕망하고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만큼만 영리했다. 적당히 까다로웠으며 적당히 정이 깊었고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어느 남자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왕세자빈이 되어도 당연한 단계를 밟은 것이니 성취감은 있을지언정 기쁨은 없었다. 그녀의 눈은 늘 미래를 보았다. 왕비가 될 자신. 더욱더 높은 곳에서 군림할 자신을 꿈꿨다. 부른 배가 그것을 더욱 확신하게 만들었다.
달수에 비해 커다란 배를 보며 모두 얼마나 장한 아드님이 나오시려고 그리 부풀었냐며 웃음을 흘리곤 했다. 그녀도 그리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배에 쌍생아가 든 줄도 모르고.
첫아들이 태에서 빠져나올 때 울리던 환성은 남은 생명이 저도 봐 달라며 삐져나왔을 때 귀신같이 멎어 버렸다. 산파가 마지못해 안아 든 아이가 빽빽 울어 재낄 때 그녀도 울고 싶었다. 완벽한 인생이, 티끌만 한 흠 하나 없었던 문희경이라는 이름에 쌍생아라니…….
혹자는 아비가 둘이라 했다. 두 남자의 씨를 받았으니 아이도 둘, 쌍생아를 수태한 것이라는 말이다. 웃기는 소리! 왕세자는 일갈하고 헛소리를 하는 이들을 치죄했다. 그가 왕세자빈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감시의 눈길이 엄중한 궁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나…….
“쌍생아는 후에 태어난 아이가 먼저 태어난 아이의 복을 모두 훔쳐 자란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형 되는 아이가 원래 가질 힘도, 부귀영화도, 건강도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다고. 모두 뽑아 먹혀 쭉정이만 남아 요절할 것이라고.
장자는 왕이 될 아이였다. 수태되기 전부터 정해진 바였다. 건강하고 잘생긴 갓난쟁이는 왕이 될 터인데 그런 인생을 산다 했다.
“좀 늦장 부리다 둘째로 태어나지 그랬니.”
아비 된 자가 너무 일찍, 그러나 조금 늦게 태어난 아들에게 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어미는 아이를 쳐다본 적도 없으니 음성 또한 전해진 적이 없었다. 죽이니 살리니 하는 설전만이 아이가 가질 수 있는 관심이었다.
문종섭이 온 영산을 뒤져 찾아낸, 곧 신선으로 오른다는 도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떼어 놓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곁에 두고 지켜보십시오. 한쪽이 허약해지면 다른 한쪽이 강건해질 테니. 멀리 볼 필요도 없습니다. 약관이 되면은 세손 저하의 기가 오롯하게 설 것이고 그러면 부정하게 얽혔던 길이 뚜렷하게 떨어져 나올 것입니다.”
목숨 줄을 끊지 말라는 말이었으나 한 번에 죽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죽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형은 수태되었을 적부터 고르고 골라서 지은 이름이 붙었으나 동생은 어디까지나 아이였다. 아이가 크게 울기라도 하려 하면은 다들 식은땀을 흘렸다. 건강하니 크게 우는 것이 아닌가.
그때마다 아이가 입에 넘길 수 있는 젖의 양이 달라졌다. 힘이 없으면 덜 울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 죽어 나가면 더 좋고. 아이고, 이 사람아. 입조심하여야지. 급사하면은 또 우리 탓이 된다고. 젖을 빠는 말간 얼굴이 듣는 대화라는 게 저런 것이었다.
불쌍한 아기씨, 우리 불쌍한…….
애물단지와 연민 어드메에 뿌리를 내리고 숨을 쉬던 아이에게도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은 있었다. 왕비의 유모는 딸자식이 낳은 손주가 수모를 당하는 양 서러워했다. 그저 좀 못 먹고 좀 핍박받는다 하면 제 일신이나 챙기며 모른 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날수록 숨이 모자라 할딱거렸다. 손아귀에 힘이라곤 없었다. 눈에 총기는커녕 앞이 보이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귀한 아기답지 않게 살갗이 버석거렸다. 왕세손은 잘만 자라는데 아이만 그랬다. 바탕이 같을진대 한쪽만 그리 처지는 것은 사람 손을 탔기 때문이다.
독을 쓰지는 않았다. 잔인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어리고 작아 금방 내장이 녹아 죽을 것이 자명했기에 그랬다. 대신 몸에 맞지 않는 약이 줄줄이 올랐다. 혈액 순환을 막고 장기를 차갑게 하고 구토를 유발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약간의 죄책감과 무수한 기쁨이 궁을 채웠다. 우는 아이와 웃는 왕세손을 비교하며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여기는…… 여기는 사람 사는 데가 아니야. 왕비의 유모는 그것이 사무쳐 작은 손을 잡고 그렇게 울었다.
나기를 유순하고 정이 많게 태어난 여자였다. 그것을 높이 사 문희경의 유모로 발탁되었으니 아이에게 준 정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최소한의 애정인지 그녀가 아이가 있는 외딴 궁을 어미 개처럼 빙빙 돌아도 왕과 왕비가 그것을 책잡는 일은 없었다.
끊임없이 훼손되어야 할 삶도 가치가 있을까. 그녀는 아이가 생과 사의 기로에 있을 때 살리는 쪽에 서 있었다.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갓난쟁이는 죽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으나 살고 싶다고도 하지 않았다. 허나 당연한 일이었다. 빽빽 울고 젖만 찾는 어린것인데…….
결국 눈물로 빌었다. 죽이지는 말라고, 이것도 핏줄인데, 저하와 같이 마노라 핏줄인데.
아이는 살아남았다. 불안하지만 아름답게 자랐다. 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그라드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따뜻한 땅은 없나요? 땅속은 항상 차갑나요?”
한번은 아이가 물었다. 시린 봄이었다. 아이에게 주어지는 것이 많지 않았다. 유폐되어 있는 것에 가까웠다. 아는 것이 없으니 궁금할 것도 없었다. 호기심도 자극이 있어야 태어나는 것이다.
이제 아이의 유모가 된 여자가 드문 물음에 흐뭇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요. 근데 그것이 왜 궁금해지셨을까?”
“그럼 나는 항상 추울 것 같아서요.”
눈앞이 컴컴해진다는 게, 발밑이 쩍쩍 갈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그길로 여자는 이제 왕비가 된, 아이의 모친을 찾아갔다.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했다. 어렸을 적 정을 생각해 달라고, 궁까지 이 미천한 몸 데려오신 정을 생각해 달라고 빌었다. 아이를 입에 올릴 수가 없어 옛정만 그렇게 찾아 댔다. 왕비는 아이를 본 적도 없으니 그 가긍함을 호소함이 무용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또한 슬픈 일이었다.
“죽은 것처럼, 지금처럼 키울 것입니다. 진정입니다. 어디 감히 왕세손 저하와 같은 길을 걸을까, 저하가 가지신 대장부의 기를 억누르지 못하게 머리 땋고 치마 입혀 계집아이처럼 키울 것입니다. 계집아이처럼,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출신도, 그 무엇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게…… 저택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그렇게, 그렇게!”
여기 계시면은 약관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실 거예요……. 이미 정신이 땅에 묻혀 있습니다. 몸도 따라가기 전에 제발…….
왕비는 어미와 다름없는 여자가 고두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 꿇고 있는 저 무릎 위에서 천진하게 웃으며 놀았던 기억의 편린이 아직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저 입에 올라온 아이는 아마 그런 기억이 없을 것이다.
아이를 버린 것이 죄스러운 적은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온 사랑은 하나뿐인 아들에게 가 있다는 것이 못내 떨치기 어려운 짐이었다. 가끔은 기쁨만을 예견하던 삶이 어디서 이렇게 틀어졌는지 궁금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면.
여자는 오래지 않아 궁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감시의 눈길은 떠나지 않을 테다. 약관이 될 때까지, 혹은 평생……. 하지만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금보다는.
왕비의 유모라고 누리던 본방 상궁 자리를 저리 차 버리는구나. 복에 겨웠다. 겨웠어. 지나가는 길마다 구시렁거리는 소리는 귀에까지 들리지도 않았다.
몸이 아픈 아이, 아기씨와 갈 길이 멀었다. 이제 고향에서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늘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어디로 가요?”
“야음으로 갑니다. 제 친가가 거기 있어요.”
“가족도 있나요?”
“아니요. 남편은 사별하고 아이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꿰찬 분에 넘치는 자리였다. 친자식이 없으니 친자식처럼 온 정성과 헌신을 쏟지 않겠느냐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초라한 촌에 있는 집이지만 머무르기에 어지간할 겁니다. 그래도, 저도 있으니까…….”
그 말에 아기씨는 작게 웃었다. 그럼 됐다. 한시름 놨다. 살아만 있으면 뭐든 되지 않겠나.
그러나 어린 삶은 그것을 부정하듯 앓았다. 붉은 생명을 줄줄이 토해 냈다.
잘못된 판단이었나? 몇 날 며칠 이어진 여행길을 견디지 못했나? 나는 공연히 불쌍한 아기씨의 명줄만 앞당긴 것인가? 살리려고, 살린다고 데려와 놓고! 저 어린것을! 그저 어미 옆에라도 붙여 놓을걸! 죽는 날에는 가엽다고 한번은 보러 와 주었을 텐데!
늙은 몸이 이제 쓸 일 없는 재산만 가득했다. 여자는 그것을 사방으로 풀었다. 그러나 효용이 없었다.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얼음장 같은 손을 부여잡으니 절로 머리가 차게 식었다.
수도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고심할 때에 아기씨가 차도를 보였다. 쏟던 피를 멈추고 퍼렇던 뺨에 온기가 돌아왔다. 기적이라고 했다. 죽기 직전에 돌아온 것이라고.
“아까 그 아이는 누구예요?”
“어떤 아이를 말씀하시는지…….”
아기씨는, 늙은 몸이 재생의 감격의 눈물을 보이는 것을 허옇게 껍질이 일어난 웃음으로 위로하고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작은 여자애. 나 닦아 주던.”
죽다 살아난 아기씨는 어린 종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 아이도 가여운 처지였다. 측은한 운명끼리는 알아보는 것인가.
“아, 복향이요. 어머니께서 아기 때 거두셨다고 들었어요. 핏덩이 때에 대문 앞에 버려졌다고. 인제 열 살이 넘었으니 일을 돕고 있지요.”
“그렇구나.”
복향이, 복향, 향이…….
짧은 이름을 오래도록 입술에 머금었다. 이것이 버려진 아기씨가 버려진 계집종에게 마음을 주게 된 첫 번째 날이었다.
*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따금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번에는 손을 떠는 것을 모르고 찻잔을 들었다가 허벅지에 그대로 엎었다. 살을 익히고 떠나는 뜨거운 김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면 유모는 제 피부가 벗겨진 듯 슬퍼했다.
그 후로 내가 겁을 내듯 손을 꼼지락거리면 그녀는 서러움에 눈을 흐렸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높은 담에 달린 굳게 닫힌 두꺼운 문은 남색 비단옷을 입은 어의가 의녀를 줄줄 달고 들어올 때만 활짝 열렸다. 늙은 남자는 늘 사납게 굳은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는데, 그 얼굴이 두려워 벌벌 떨거나 기침을 하면 남자는 안색을 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유모를 찾았다.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는 유모를 보며 경과가 바람직하다는 말을 귀에 넣었다. 어제도 기침을 하다가 피를 봤는데…….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냐 묻지도 못하고 그저 유모의 눈물만 붙들었다.
나는 이따금 내가 무엇으로 자라나는지 궁금했다. 먹은 것을 전부 올려 게워 낸 것이 여러 날이었다. 배가 텅 비어 허전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익숙했다. 내 등을 두드리며 우는 유모의 얼굴도 또한 그러했다. 그럼 나는 저 낯에 흐르는 눈물을 양분으로 자라나는 것일까. 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도 나는 그 눈물이 달았다. 그리하여 유모가 주는 이름 모를 약도 달게 마셨다. 이름을 모른다고 하여 그것의 효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제 몸에 일어나는 일인 까닭에 그러했다.
약을 마신 날이면 늘 속이 메스꺼웠다. 그 역겨움에 몇 날 며칠 피가 나올 때까지 토악질을 하고 열이 올라 땀을 죽죽 빼면 약효가 다하는데, 그러면 또 늙은 남자가 찾아왔다. 유모가 또 울고, 경과가 바람직하다는 말을 듣고…….
그럼에도 괜찮았다. 나는 내가 아프지 않았던 때를 기억한다. 어렴풋하지만 여전히 머리에 박혀 있는 순간들이 있다. 팔다리를 놀리고 숨을 쉬고 말을 하는 나를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시선을 기억한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벙긋거리며 웃고 떠들며 작은 온정을 바랐던 그때를…….
그들의 눈에는 내가 팔다리가 붙은 구더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벙긋거리며 웃고 떠드는 구더기 말이다. 사람을 그런 눈으로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내가 사람이었으면 나를 그렇게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에는 유모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벌레처럼 살고 있을 때 말이다.
유모는 내가 고통에 몸부림칠 때 나를 찾아왔다. 내가 몹시 아프고 불쌍할 때. 그런 나를 보며 눈물지었다. 손으로 어루만지며 얼마나 아팠냐고 물었다. 벌레가 으깨지는 것을 동정하는 사람은 없으니 이때의 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불쌍한 것이 좋았다. 불쌍하지 않은 구더기로 사느니 불쌍한 사람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모와 함께 궁을 빠져나갔을 때 나는 죽고 싶었다.
아무리 눈과 귀를 막고 산다지만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은 모여 있는 입이라, 나를 구석에 처박아 두고 궁녀며 내관들이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궁을 나가면 내가 이렇게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을 주었다. 그리하면 유모는 나를 위해 울어 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유모의 눈물만이 내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괴로움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유모가, 나의 유모가 아니라 어머니의 유모인 탓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왕비를 칭송하는 것은 그 얼마나 작은 조각이라도 유모를 웃게 했다. 제 딸을 사랑하듯 그렇게 하염없었다. 나는 그것이 괴로웠다.
유모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할 수 없음이 괴로웠고 나를 버린 이를, 나를 이 고통 속에 몰아넣은 이를 사랑하는 유모가 증오스러워 괴로웠다.
그분은 참 아름다우세요. 아기씨께서도 그분을 몹시 닮으셨어요. 요기, 이마가 봉긋한 것이 닮았고 또 눈동자가 호박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이 닮았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웃는 체했지만 사실 낯가죽을 뜯어내고 싶었다. 눈알을 파내고 이제 무엇이 닮았냐 묻고 싶었다. 피를 짜내고 뼈를 뽑아내어서 내가 그 여자에게서 또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닦달하고 싶었다.
왜냐면, 왜냐하면 유모에게 나는…… 그 여자의 피붙이인 것이 유일한 의미일까 봐. 내가 그 여자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그 여자의 아들이 아픈 것이 아니었으면 내가 진창을 기어 다니다 으깨져도 상관없는 존재였을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나의 공포였다.
죽고 싶은 까닭은 이것이다. 나는 고통보다 다시 벌레로 돌아갈 삶이 더 끔찍했다.
그리하여 다시 쏟아지는 피가 나의 즐거움이었다. 유모의 눈이 마를 날 없는 것이 나의 기쁨이었다. 나는 이렇게 죽으리라. 기필코 사람으로 죽으리라.
유모는 나를 살린다고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 죽고 싶었다. 뒤늦게 돌아와 차게 식은 나를 보면 더 빨리 돌아오지 못한 것을 자책할 것이다. 홀로 죽은 나를 더욱 가엽게 여길 것이다. 피붙이가 죽은 것처럼……. 흡족한 죽음의 풍경이었다.
내가 즐기는 유일한 취미는 눈을 감고 그 풍경을 덧칠하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위로 축축한 방울이 떨어졌다. 흐린 눈을 떠 보니 밤톨만 한 계집애가 내 코앞에서 약을 방울방울 떨어트리고 있었다.
내가 앓는 동안 무수히 많은 비복들이 찾아와 아기씨 제발 한 숟가락만 잡숴 보셔요, 하며 끈덕지게 약과 미음을 들이밀었다. 나는 굳게 닫힌 입을 쉽사리 열지 않았고 그들은 약이 효험이 없는 탓이라 여겨 더 좋다는 약재를 찾아다니기 바빴다. 그런데 이 계집애는 내 입을 향해 약을 방울방울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다.
통통한 손가락이 허공에서 수저를 아주 조금씩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이대 애들의 근력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일 정도로 하찮은지라 손이 벌벌 떨렸고, 그 떨림을 따라 약 방울이 내 온 얼굴로 떨어졌다. 약을 먹이겠다는 건지 약으로 세수를 시키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 냈다.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나 작은 아이는 그것으로도 휘청거렸다. 계집애는 내가 저 때문에 깨어났다고 생각했는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죄했다.
“아기씨,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소리를 들은 계집종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이냐며 계집애의 멱살을 잡고 궁둥이를 손바닥으로 후렸다.
아이는 우악스러운 힘에 고꾸라지면서도 울지 않고 발딱 일어났다. 그러고는 제 얼굴만 한 약사발을 제 상체만큼 커다란 소반에 올려 끌어안고 나갔다.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안쓰러울 법도 한데 다른 종들을 그를 본체만체했다.
“어휴, 아기씨 이게 무슨 일이어요.”
여종은 면포로 내 얼굴을 살살 닦더니 꿀물을 먹여 주었다. 거부하려 했으나 눈이 자꾸 감겨 입술에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정신을 잃고 눈을 감으면 다시 펼쳐지는 풍경에 만족하다가도 아침이 되면 또 눈이 뜨인다는 것에 화가 났다. 나를 숨 쉬게 하는 모든 것들이 증오스러웠다.
몸이 나으면, 내가 건강해지면 유모는 사랑하는 딸의 아들을 건강히 키워 냈다고 자랑스러워할지 모른다. 그리고 딸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훌훌 털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애달파하는 마음의 기저에는 내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있으니까.
어쨌든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를 무엇으로 사랑하든 그녀는 똑같이 나를 보며 웃고 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이유는 모른다. 이유를 모르면서도 나는 이것이 못내 견디기 어려웠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미루기 위해 나는 무던히 노력했다. 그 어떤 진실이라도 내가 모르는 동안에는 거짓과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또 약사발을 던져 버렸다.
다른 종들은 얼마간 먹이다가도 내가 거부하면 상태가 악화될까 봐 그만두었는데, 이 계집애는 아직 어려서 그런가 무조건 다 먹이면 좋은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 입에 약사발을 들이부을 용기는 없으니 입술 사이로 스며들도록 또 방울방울 떨어트리는 것이다. 조잡한 짓거리에 열이 받아 결국 작은 손에 들린 약사발을 잡아채 방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하얀 창호지가 발린 문이 갈색 물로 얼룩덜룩해졌다. 계집애는 그것을 보고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안절부절못했다. 꼴좋다…….
낄낄거리고 싶었는데 정작 목구멍에서 터지는 건 거센 기침이었다. 쇳내가 나는 기침이 사정없이 터졌다.
“아고, 아기씨, 어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내 입에 물 사발을 대어 주었다. 아기씨, 괜찮으실 거예요. 나으실 수 있어요. 괜찮아요. 중얼거리며 위안하는 입을 뭉개고 싶었다. 멍청한 년아, 나는 죽으려는 거야.
그러나 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입이 벌어졌다. 시원한 감각을 꿀떡이며 삼켰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는 결국 뒤돌고 마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를 돕는답시고 뻗는 손들이 원망스러웠다.
네가 손을 잡지 않으면 될 일 아니냐? 너는 기어코 그 꼴을 보고 싶으냐? 너는 네가 사람이 아니라 네 어미의 그림자인 것을 꼭 눈으로 봐야 알 테냐?
거친 몸부림에 계집애가 물 사발과 함께 엎어졌다. 뒤집어쓴 물에 서러워 질질 짤 줄 알았는데 계집애는 늘 그렇듯 발딱 일어나 더러워진 것을 정리하고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프시지요, 아기씨.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저 계집애가 싫었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것도 그렇고 자꾸 나을 거라고 속삭이는 것도 싫었고 얻어맞아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도 싫었다. 뭐만 하면 머리부터 바닥에 박고 보는 천성도 상스럽게 여겨져 눈에 보이면 거슬렸다.
계집애는 몇 번 더 사죄하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나가기 전에 또 속삭였다. 내일은 더 나아지실 거예요. 나는 그것이 귀에 고일까 두려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이년은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안 그래도 남자들이 의원 찾는다, 산삼을 캔다 하며 밖으로 나돌아서 일이 쌓여 있는데 당최 도움이 안 돼.”
“출생이 그러니 본데없어서 그런 건지……. 지가 아직도 사부작거리면서 돌아가신 노마님 차 시중이나 들면 되는 줄 알아.”
“노마님도 참 마음이 너무 너그러우셔도 문제야. 애미 애비가 어떤 종자인 줄 알고 함부로 거두시는지. 애비가 죄인이라 도망치다 버리고 갔는지 애미가 몸 팔다가 낳은 애라 버리고 갔는지 누가 안다고.”
문밖에서 여종들이 주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언짢아 꺼지라고 뭐라도 던지려던 찰나에 불현듯 깨달았다. 저것은 그 계집애를 두고 하는 소리다. 부모가 버리고 간 계집애, 다들 막 대하는 계집애…….
더 듣고 싶었으나 호령이 떨어졌다. 집사가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터느냐 혼을 내니 계집종들이 죽는 소리를 하며 흩어진 것이다. 나는 괜히 조용한 허공을 향해 찻잔을 던졌다.
계집애는 밤에도 나를 찾아왔다. 돌봐 주는 이가 없는지 늦은 시간에도 혼자 찾아와 내 이마며, 피로 더러워진 입가를 닦아 줬다. 걸리적거린다고 치워 낼 수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자는 체를 했다. 자는 체를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기씨를 살려 주세요, 아기씨를…….
멍청한 계집애야. 나는 죽고 싶다니까. 목을 찌르는 고통에 입이 벌어지지 않아 눈을 열고 눈물로 말했다. 가물거리는 앞을 노려보며 눈물로 죽고 싶다고 줄줄 소리쳤다.
그때에 보드라운 면포가 온 얼굴에 부지런히 와 닿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눈물이 닦였다.
“곧 나으실 거예요.”
눈물이 빈 자리에 계집애의 목소리가 차올랐다. 또 흐르면 또 비었고, 또 차올랐다. 밤새에, 끊임없이.
*
계집애의 이름은 복향이라고 했다. 퍽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귀엽고 유순한 계집애에게 쥐여 주면 딱인 이름이지 않나. 입술로 이름을 굴리면 동그란 것이 톡 터지듯 소리가 나왔다. 그것마저도 어울렸다.
“복향아.”
그렇게 부르면 복향이는 좋아 죽으려고 했다. 제 이름을 어찌 아셨어요? 어찌 아셨지? 어찌 아셨을까? 하며 몸을 비비 꼬았다. 나는 그것이 재밌어서 공연히 여러 번 불러 보곤 했다. 그러면 작달막한 아이는 밤톨이 굴러오듯 내 앞으로 달려왔다.
“약 갖다줘.”
“아기씨, 아프세요?”
“그럼.”
“어디가요?”
“다.”
그렇게 대답하면 몹시 난처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울상을 지으며 아직도 그렇게 아프시면 어찌하냐고 걱정을 줄줄 읊어 댔다.
“네가 나을 거라며.”
“맞아요. 꼭 나으실 거예요. 보세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말도 잘 못하셨는데 약도 밥도 잘 드시니까 이제 말도 잘하시잖아요.”
“복향이는 모르는 게 없구나.”
하하. 높게 올라갔다 퍼지는 웃음소리가, 부끄럽다는 듯이 입을 가린 손가락 사이에서 진동했다. 착해 빠진 내 몸종은 내가 그동안 저에게 저지른 패악질을 그저 병자의 앙탈 정도로만 여겼는지 전혀 마음에 담아 두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아프다고 하면 식겁을 하고 어디가 아프시냐, 제가 빨리 가서 약을 받아 올 것이다, 하며 달려 나갔다. 나는 그것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달려 나가는 작은 몸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새로이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유모는 그때쯤 점점 몸이 약해졌다. 처음에는 조금씩 먹는 양과 거동하는 범위가 줄어들더니 이윽고 자리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에 걸린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그녀는 늘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일어나지도 못하시잖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것일까. 나에게는 괜찮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무얼 괜찮다고 말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다 괜찮아요. 이제 건강하시니까 약관이 되시면은, 그것만 지나면 이제 정말 다 괜찮아요. 치마도 벗으시고, 상투도 틀어 보시고, 원래 태어나신 모습으로, 그렇게 사실 수 있어요. 그것이 저는 너무 안심이 되어서…….”
웃기는 말이었다. 내가 사내로 살길 원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죽는 날까지 치마만 입으래도 그럴 수 있었다. 유모가 제 손녀로 사실래요, 하고 물어보았더라면, 그러면 나는 너무 좋아서 입이 찢어져라 웃었을 것이다. 심장이 벅차서 거꾸러져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늘 그녀의 귀하고도 불쌍한 왕자에 불과했으니 이제는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저택이 내 것이 되었다. 저기 저택 뒤로 보이는 산도 이제 모두 내 것이라고 했다.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모르지만, 야음에 농사 지을 수 있는 땅 중 반절이 또 내 것이란다.
“그분들께서 주신 거예요, 궁을 나갈 때.”
궁을 나갈 때 달구지 가득 금은, 비단을 실어 보냈다고 한다. 열이 넘는 말이 달구지를 하나씩 끌었다고 한다. 그 강인하고 어린 말들도 전부 내 것이었다. 유모는 마치 내 부모가 나를 생각해 그 재산을 주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양육비라고 여겼다. 무엇이 다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양육비는 나를 키우라 주는 돈이었다.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보라, 저 후련한 얼굴을. 홀로 남을 나에게 미련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떠나간 여자를. 유모는 나를 야음에 데려다 놓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유명을 달리했다. 나에게 새로운 호적을 만들어 주고 재산을 넘겨주고 그 후에 그렇게 나를 버렸다.
늙어 죽을 나이는 아니었으나 편안하게 잠을 자다 갔으니 호상이라고 다들 떠들어 댔다. 몇몇이 얼굴을 붉히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그들과 비슷하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를 사랑해서 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노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증오하는 일이 늘 두려웠다. 사람이 어찌 은혜를 입고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늘 두려움에 떠는 삶을 살았다.
누구나 사랑할 것이다. 유모 같은 사람을 말이다. 길 가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그를 위해 울어 주고 헌신하고 시간과 금을 퍼붓는다면 누구라도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 안달이 날 테다. 몸이 미욱하다면 마음이라도 쏟을 것이다.
그것이 맞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모른다. 모르겠다.
그러니 이것도 모를 일이었다. 복향이는 유모가 죽었을 때 슬피 울었다. 제 부모가 죽은 것처럼 울었다. 울며 나에게 물었다.
“얼마나 슬프세요?”
슬퍼 우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나 그리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 서럽게 울며 몸부림쳤다. 그러면 복향이는 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줬다. 있지도 않은 나의 슬픔에 공감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것이 좋아 더욱 슬픈 체했다.
어느 날, 그러니까 유모가 죽고 복향이를 내별당 담당으로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늦는 복향이를 마중하러 나갔다. 좋아할 거야. 황송하다며 헤벌쭉 웃어 줄 것이다. 그리고 몸 상한다고 어서 들어가자 걱정할 것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내별당 중문을 여는데 들리는 소리가 이상했다.
“네가 얼마나 영악하면 그 자리를 꿰차냐?”
“놔. 나 빨리 내별당으로 가야 해.”
“너 지금 남의 자리 빼앗아 놓고 내가 아기씨 몸종이다, 이렇게 유세하니?”
“너는 일 늦었다 말하는 걸 유세한다고 하니?”
퍽 소리가 났다. 계집종 하나가 복향이에게 시비를 걸더니 머리를 후린 것이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가 이내 분노했다. 당장 달려가 어디 손을 올리냐고 호통을 치고 복향이를 때린 손이 터지라고 매질을 명령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복향이를 박대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하고 그동안 아팠을 내 몸종을 다독였다.
그러니까, 머릿속에서 말이다.
머릿속에서는 이리 행동하라 말하는데 몸은 따로 놀았다. 누가 볼세라 몸을 숨기고는 눈알로는 그리 맞고도 내별당으로 바삐 향하는 발걸음을 좇았고 귀로는 서러움을 삼키는 숨소리를 핥아 먹었다. 누가 쫓아오는 양 방으로 뛰어 들어가 숨을 몰아쉬며 복향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렸다.
창호 문에 작은 인영이 어릴 때부터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은 얼굴이 문 사이로 빼꼼 들이밀어질 때에는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걱정이 되어 질겁하며 달려오는 복향이를 보며 나는 그렇게 설레었다. 마치 오래전, 유모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러니 내가 그 일을 모른 척한 것은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알지 않으리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복향이에게 안겼다. 체한 것 같다고 등을 문질러 달라고 했다. 작은 손이 등허리에 닿는 감각이 끔찍하게 좋았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리셨어요? 송구해서 어째요. 제가, 제가 일이 있었어요. 다시는 늦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요.”
“혼내는 거 아닌데.”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고 하는 것을 붙잡고 약과를 내밀었다. 복향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이 먹어도 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기씨 약 드시고 입 쓰지 말라고 있는 것인데……. 갈등하며 머뭇거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손에 쥐여 주었다.
나에게는 쓴 약이나 단 과자나 그 맛이 그 맛이었다. 이미 나를 괴롭혀 왔던 약이 내 미각을 앗아 간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네 손에 닿았으니 네 것이다.”
“그럼 요 부분만 떼면은…….”
“내가 주는 것은 받기 싫으니?”
“아니요, 그럴 리가요. 황송해서 그러지요, 황송해서.”
“어서 먹어.”
복향이는 상기된 얼굴로 약과를 한 입 물었다. 새끼손톱만큼 물고 깨작대나 했더니 금세 삼키고는 크게 또 한 입 물었다. 입 안에 퍼지는 달콤함이 좋은지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이것은 곧 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복향이의 기쁜 얼굴을 보는 것 말이다. 정확히는 보는 것이 아니라 비교하는 데에 있었지만.
나를 보는 보드라운 눈빛과 목소리가 타인을 대할 때는 달라진다는 것이 좋았다. 못 견디게 좋아서, 나는 모르는 척하는 때가 많았다.
내가 복향이를 편애할수록 종들은 소태를 씹은 듯 얼굴을 구기며 싫어했다. 그것은 복향이를 향한 박해로 이어지고 그것을 피해 나에게 달려오는 내 몸종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귀엽게도 제 딴에는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나를 생각해 그렇게 구는 것도 좋았고 언젠가 너무 견디기 힘들어질 때 나를 향해 매달릴 것을 기다리는 것도 나의 즐거움이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기씨! 정말로요, 정말로 죽을죄를 지었어요.”
“제 탓입니다, 제가 딸년을 잘못 키워 가지고, 저를 벌하시고 계희는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시면은…….”
웃기는 꼴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죽을죄라느니 자기를 벌하라느니.
복향이의 종아리를 걷어차고 일감을 죄다 떠넘기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어쩌다 눈이 마주친 후 이 꼴이었다. 황망한 작태로 정신없이 달려오더니 눈물로 읍소하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종들이 이것의 어미까지 불러와 안 그래도 추한 꼴에 사나움까지 아주 고루 갖추게 되었다.
“누가 뭐래니?”
불퉁하게 내뱉으니 우둔하게 사죄만 반복하던 모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누가 뭐랬냐고. 더러우니 얼굴 보이지 마라. 보기에 메스껍다.”
무안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따금 견디기 어려웠다. 가까이 닿고 싶었던 것은 유모가 처음이었고 이제 복향이가 유일했다.
저것들은 그저 혐오스러운 채로 존재하는 것이 쓸모였다. 되지도 않는 시기로 복향이를 못살게 굴어 그녀의 미움을 사는 일 말이다.
그리하여 복향이와 닿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길 바랐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를, 나처럼.
나를 보고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보며 나도 웃고 떠들었다. 복향이는 종종 나를 보며 좋아했다. 그러니까, 내가 곱다며 좋아했다. 그러면 나도 좋았다. 복향이는 내 어미를 모른다. 내 얼굴이 온전한 내 것이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곱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이 벅차올랐다.
약을 들이켜며 과자를 내밀었다. 몇 차례 입바른 소리로나마 거절하던 복향이는 이제 자연스럽게 자신의 몫인 양 받아먹었다.
“너 먹는 모습만 봐도 달다.”
진실로 그랬다. 오로지 나의 곁에서만 울리는 웃음소리가, 올라가는 뺨이, 휘어지는 눈매가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복향이는 내 말에 부끄럽다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 좋다.
*
그런데 불순물이 끼어들었다.
대부분의 종은 복향이를 싫어하거나 무시했다. 집사가 말하기를, 습성이라 했다. 그들이 특별히 성정이 막돼먹거나 잔인해서가 아니라고, 그저 낮은 곳에 있으니 자신보다 더욱 아래에 있는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라 했다.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신보다 더욱 미천한 누군가. 그보다 더 나은 위치, 더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위안이 필요한 것이라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선을 넘지만 않으면 관심 둘 필요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복향이는 나만 찾을 테니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아니었다.
청수라고 불렸다. 그 훤칠한 사내놈 말이다. 소처럼 일한다고 했다. 열심히 한다는 것보다는 그만큼 힘이 좋다는 뜻에 가까웠다. 분하게도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집종들이 그놈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시끄럽게 꺅꺅대는 것들이…….
하나하나 비교해 보면 속이 터졌다. 그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내가 무슨 꼴을 하고 있든 저놈이 무슨 꼴을 하고 있든 상관이 없었는데……. 저놈이 복향이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악인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불합리함을 묵과한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악인이 되고 싶다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위선이라고 볼 수도 있었겠으나 나는 묵과라는 선을 지켰다. 모든 종들에게 복향이를 괴롭히라고 명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였고 나는 그것을 막지 않았을 뿐이니 나는 위선자일지언정 악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따금 나는 이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복향이에게 붙여 놓은 눈이 나에게 그 둘이 만났음을 알렸을 때 나는 온몸에 열이 뻗쳤다. 윽박질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체했으나 복향이가 평소와 조금만 다르게 굴어도 나는 그놈 때문인 것만 같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라고는 못 하는구나? 그렇지? 너 청수 생각 하지? 겉으로는 내 수발 들면서 고 작은 머리통으로는 그놈 생각을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놈이 사내답다는 생각을 했을까? 사내다워서 꽤 볼만하다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놈이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복향이가 원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그놈을 목매달고 복향이를 가둬 놓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다른 것들에게도 감히 복향이를 눈에 담거나 말을 걸면 살갗이 터질 때까지 매질을 할 것이라 호령을 내리고…….
“알지요, 아는데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놈 어떤지 제가 어찌 알아요. 저번에 본 것도 말 몇 마디나 나누었나 다섯 손가락 안으로 셀 수도 있겠다. 근데 제가 청수 본 건 어찌 아셨어요?”
그런데 복향이는 그놈을 잘 모른다고 했다. 외사랑인가. 그놈 혼자 복향이를 좋아하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 제 눈에 귀해 보이는 것이 남의 눈에라고 안 그럴 테냐. 거기에 복향이는 몹시 착했다. 그래서 그놈이 말하는 대로 잠자코 들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혼란스러운 발걸음이 어디에서 멈추더라도 결국 나를 향한다면 참을 만했다. 둘이 내가 없는 곳에서 밀회 아닌 밀회를 즐긴다고 해도 말이다.
“오래 보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틈날 때마다 만나는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수 놈이 복향이 손에 열매 같은 걸 쥐여 주고 보냅니다.”
귀여운 짓거리를 해 대는구나. 복향이에게 붙여 둔 눈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덩치도 산만 한 놈이 퍽 섬세한 연인 흉내를 내지 않나. 그러나 제일 가관인 것은 매일 꿀과 밀가루를 섞은 과자를 가져다 바치면서도 산에서 주운 열매 몇 알에 열등감을 느끼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참을 수 있었다. 참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부자유에는 기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이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그저 삶에 다양한 맛을 더해 주는 감미료에 불과했다. 복향이와 내가 맺어지는 날 말이다. 약관이 되면 그 아이에게 내가 사내고, 사내로서 너를 사랑한다 말할 것이다.
아마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쉽사리 믿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존재한다 해도, 서로뿐인 삶 말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그렇게 만들었던 삶.
얼마나 놀라운 삶인가.
나는 현재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미래를 상상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미래, 나의 욕망이 추악하지 않을 미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어도 괜찮은,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또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닌 미래 말이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뜰 때마다, 그날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숨이 벅찰 지경이었다.
그러니 내가 숨이 벅차다 못해 숨통이 막혀 명이 끊겨도 그곳에 청수는 존재할 수 없었다. 더 서둘러 처리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미물도 견디지 못했으면서…….
나는 복향이가 그것을 곱다고 말할 때부터 강샘이 일었다. 털가죽부터 울음소리까지 밉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멀리 떠나보냈다.
집사가 그런 미물을 잘 다루는 이를 안다고 했다. 나는 좋다고 훌훌 털어 버리듯 보내 버렸다. 죽이는 것은 쉬웠으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나는 아주 불행하게도, 복향이가 그 고양이를 잃은 것을 몹시 슬퍼하거나 진실을 알아챘을 때를 대비해 그것을 곱게 살려 두는 길을 택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 나를 추궁한다면 나는 당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것을 안다.
그런데 어찌 일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놔두었을까. 어떻게 복향이의 입에서 그놈과의 혼인이 나올 수가 있을까.
“어쩌면 말이에요, 저도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어쩌면 혼인할지도 몰라요.”
내가 사내라는 것을 밝힌 적이 없으니 저 어쩌면 한다는 혼인의 주인은 청수일 테다. 나는 웃었다. 몸이 떨리는 것은 막지 못했으나 어쨌든 얼굴은 제 기능을 했다. 입도 잘 벌려서 농담도 던졌다.
그리고 그날 밤 미물을 보냈듯이 청수를 보냈다. 일가족 모두 떠나보낼 것을 명령했다. 청수 놈이 제 가족을 보겠다고 다시 찾아오는 일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일가를 모두 팔아 버린다고 하니 청수는 가족을 보러 오는 대신 나를 찾아왔다.
“아기씨, 어찌 이러십니까?”
“무얼?”
“아무리 제가 종놈이라도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팔려 가다니요. 제가,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그런 것 없다.”
청수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대가리가 반쯤 돌아 버린 나도 그 정도 분별은 했다. 아, 상전 눈 밖에 나도록 잘난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인가.
뿌리부터 직선으로 바르게 자랐을 것만 같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몸집이 작아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동자가 뚜렷했다.
“잘생겼구나.”
“예?”
“네 낯이 잘났다고.”
반쯤은 읍소하고 반쯤은 따져 물으려고 굴던 놈의 얼굴이 쑥스러움으로 붉어졌다. 납득할 만한 답이 나오기 전까지 뻣뻣하게 선 채로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만 같던 굵은 목줄기가 수그러들더니 커다란 손이 그것을 벅벅 쓰다듬었다.
“청수야.”
“예?”
“나는 네가 밉지 않다.”
나는 네가 밉지 않다.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 너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죽어 복향이가 눈물로 온 얼굴을 적시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네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없길 바란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미워할 수 있을까. 세상에 없는 것을 어찌 증오하느냔 말이다.
“너는 잘나고 건강하니 어디로 가든 잘 지낼 것이다. 가족도 같이 떠나니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은 부당하다 여겨도 며칠만 지나면 그리움도 옅어질 것이다. 네가 여기에 아내를 두고 가느냐, 무엇을 두고 가느냐.”
“아기씨, 그것이…….”
“네가 어디에서든 행복하길 바란다.”
청수는 저 멀리로, 마치 이승과 저승처럼 떨어진 곳으로 떠났다. 따져 물으려던 것은 내 덕담 아닌 덕담에 감복했는지 아니면 대꾸할 말을 잊었는지 그저 흐지부지되었다. 나는 야음에서 아주 멀고, 또 제법 살기 좋은 집을 고르고 골라 그들을 보냈다.
행복해라. 진정이다. 네가 너무나 행복하여서 결코 이곳을 다시 떠올리지 않길 바란다. 추억으로 묻어 두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 언젠가 기억을 되짚으려 했을 때 그 형체조차 찾지 못하길 바란다.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랑을 찾아서 아무런 고난 없이 결실을 맺길 바란다. 그리하여 어린 날 풋사랑은 그 내음조차 흔적도 없이 휘발되길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바란다.
아마 나는 이즈음에 제법 자비로운 처분을 내린 자신에게 감동한 것 같았다. 한순간의 폭력적인 충동에 몸을 내맡기지 않고 앞날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 것을, 제법 이상적인 사람처럼 굴었다는 생각에 취한 듯했다.
그러니 안심한 것이다. 그 계집종이 입을 벌릴 줄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하고.
“계희가 말하길, 아기씨가 다 알고 계셨대요. 제가 괴롭힘당하는 것을요.”
허튼소리. 아무렇지 않게 부정을 내뱉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욕지거리를 쏟아 냈다. 그 멍청한 년이 일을 쳐. 사지육신 멀쩡하게 놔두었더니 정도를 모르고 날뛰어. 봐주는 것에, 복향이에게 입을 떼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챌 정도로는 머리가 돌아간다고 여겼는데 선을 넘어.
나는 거짓을 내뱉었고 노여워했으며 어쩌면 해방의 순간이 조금 이르게 찾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감시의 눈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결코 알아채지 못하는 곳에서조차 나를 주시하는 눈이 있음을 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어 그저 두 눈으로 똑바로 봐 주길 바랐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결코 말할 수 없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그러나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다. 나는 내가 사내인 것을 알면 복향이가 몹시 좋아할 줄 알았다. 그렇게, 아기씨라며 달라붙은 적에는 그렇게 붉었던 볼이 가슴팍을 맨손으로 더듬으면서도 굳어 있었다.
사랑하는 아이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어디가 좋으냐고 물었다. 이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질문이었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모자란 적이 없는 마음이었으니 간지러울 것도 낯부끄러운 것도 없었다.
“너랑 나, 불쌍한 것이 같잖아.”
그리하여 우리에겐 서로뿐이었다. 바탕이 다른 이는 사고하는 것도 다르다.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 관계는 결국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같이 버림받았고 같은 사랑을 갈구하니까. 사랑하길 바라고, 사랑받길 바라는 존재가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와 어긋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데 내 말을 듣는 복향이의 낯이 점점 어긋났다.
*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그 어긋남을 바로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닿아 보지 못하고 세차게 밀쳐졌다.
헐떡거리는 숨을 삼킨 복향이가 노기가 어른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 발짝조차 밀려 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 눈빛에 뺨을 후려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싫어요.”
“뭐?”
“싫다고요.”
복향이는 무엇이 싫다는 것인지 덧붙이지도 않고 그저 싫다는 말만 연신 반복했다. 나는 귀를 막는 대신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팔뚝을 잡아채고 나를 부정하는 말을 그러쥐고 정정했다.
“너는 나를 좋아하잖아. 좋다고 했잖아.”
“아니요, 아니요.”
“아니. 네가 네 입으로 똑똑히 말했어. 나를 제일 좋아한다고.”
“이제 아니에요. 싫어요.”
그 후로는 지지부진한 반복이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좋아한다 말하고 싫어한다 반박했다. 뒤돌아서려 하면 몸을 잡아 돌려세우고 손을 잡으려고 하면 매섭게 쳐 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서로에게 내 말을, 나를 인정하라 소리쳤다.
어깨를 붙잡은 손을 거부하듯 손톱이 달려와 박혔다. 나는 그 붉은 감각이 좋아서 웃음 지었다. 씨근거리는 숨 사이로 거친 욕이 섞여 들렸다. 그것마저 좋아서 크게 웃고 말았다.
기어코 불손한 웃음을 짓는 낯으로 손이 날아왔다. 머리가 돌아가도록 맞아도 웃음을 거두지 않자 이제는 주먹을 쥔 손이 가슴팍을 사정없이 후렸다. 나는 편하게 때리라고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워 몸을 대 주었다.
“어떻게……! 어떻게 웃음이 나와, 어떻게……!”
복향이는 분에 차서 몸을 떨었다. 아무 반항 없이 완력에 몸을 내어 준 것도 화를 부추긴 듯했다. 기진한 몸은 주먹질을 몇 번 하지도 못하고 오금을 후들거리며 무너지려 했다. 급하게 팔을 뻗어 끌어안았으나 그 손길을 거부하는 거친 몸부림에 우리는 결국 두 갈래로 찢어진 채 무너졌다.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작은 손을 붙잡으려 했으나 날카로움 외침이 나를 후려쳤다.
“싫다고 하잖아요!”
“뭐가 그렇게 싫은데?”
“그걸, 지금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그 질문은 마치, 내가 지금껏 모르는 체해 왔고 또 영영 모르고 싶었던 것에 대한 물음처럼 들려서 나는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모르니까 묻는 것이지.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웃고 먹고 떠들고,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 똑같잖아.”
복향이는 내 말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허물어지려는 몸을 채 전부 일으키지도 못하면서 걸음을 옮기려 애썼다. 조금이라도 더, 나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나는 그것을 참지 못했다. 닿는 것이라면 폭력조차 기꺼웠으나 멀어지는 것은 그 어떤 보드라운 부정도 거부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국 분심이 터져 나왔다.
“너도 나를 불쌍하게 여겼잖아! 추한 꼴로 다 죽어 가는 나를 보면서!”
부르짖는 소리에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나무를 휘두르던 바람 소리가 잦아들고 멀리서 울던 이름 모를 새들도 부리를 다물었다. 도망치려 안간힘을 쓰던 작은 몸도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온 얼굴을 슬픔에 흠뻑 적신 채로…….
“그런 적 없어요.”
저는 아기씨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왜냐면, 아기씨는…… 아기씨는……. 물기 섞인 중얼거림이 점점 잦아들었다. 복향이는 소매로 붉어진 얼굴을 벅벅 닦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차마 그 얼굴을 보고서도 더 말해 달라 재촉할 주제가 되지 못했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힘없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멀어지고, 이윽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기쁨을 느껴야 하나? 나를 좋다고 하던 그때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내가 가엾어서 좋아한 것이 아님에 환희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곱씹고 되물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묻고 싶었을 때에 나는 이 적막 가운데에 오로지 혼자라, 대답해 줄 이를 찾지 못한 물음은 허공만 더듬을 뿐이었다.
나는 그 밤부터 해가 떠오를 때까지 두려워했다. 이런 밤이면 결코 원한 적 없던 망상이 내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크기로 나를 덮치곤 했기 때문이다.
당장 날이 새면서부터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문고리를 두들기는 다정한 목소리가 더는 나를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를 돌보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예 도망을 갔으면 어쩌지? 나를 버리고 떠났으면 어떡하지? 그럴 리 없다. 복향이는 하늘 아래 피붙이라곤 없다. 돌아갈 곳이란 없는데……. 청수, 청수를 따라갔으면?
나는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알아서 어쩔 것이냐.
나는 늘 인정하는 것을 미루고 싶어 했다. 너무나 간절한 일도 몹시나 두려운 일도 그러했다. 이 혹독한 망상이 진정이라면 당장 눈알을 부라리며 득달같이 달려가 목덜미를 채 올 것임이 자명함에도 복향이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고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그저 미루고만 있는 것이다.
아닐 거야, 나를 버릴 리 없다. 내가 아무리 미워도 그럴 리가 없다.
너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미운데 어찌 떠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느냐, 그놈과는 혼인한다 말도 나누었다는데.
시끄럽다, 시끄러워…….
어스름이 밝아 오며 얄팍한 빛이 사위의 윤곽을 드러낼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습관처럼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늘 그곳에서 복향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아픈 척을 했을 때처럼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고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육신이 멀쩡하여 아픈 곳이 없음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닌가, 나는 아픈 것일까. 사람들은 아플 적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하던데. 통증도 없고 숨이 막히지도 않는데 복향이가 이제 내 방문을 두드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뜨거운 것이 뭉텅 쏟아졌다.
그런데 그때, 귓바퀴 안으로 익숙하고도 낯선 음성이 고였다.
“아기씨, 들어가요.”
복향이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도 않았고 들어오라 대답하지도 않았다. 너무 여상한 목소리라, 내가 환청을 들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목소리가 들린 이후 밖이 조용했기에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서 몸을 구기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나야 했다.
내가 기겁을 하든 말든 복향이는 놋쇠 대야에 세숫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비비고 아무리 끔뻑거려도 그 모습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세수하세요.”
어리바리하게 앉아만 있지 섣부르게 움직이질 못하자 복향이가 면포를 물에 적셔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는 눈도 감지 못하고 그것을 쳐다보았다. 차가운 천과 함께 조그마한 숨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저 몸을 내맡겼다. 손길이 이마를 향할 때에는 그저 좋았고 귀밑의 예민한 살로 향할 때에는 몸을 떨었다.
얼굴을 다 닦아 내고 손까지 전부 씻어 내자 맑은 세숫물이 흙먼지와 피로 뿌옇게 더러워졌다. 나는 비로소 이제까지 무슨 꼴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열없어 귀를 붉혔다.
“아기씨, 시장하세요?”
대야를 바깥으로 내고 옷궤에서 깨끗한 자리옷을 꺼낸 복향이가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예전처럼 복향이가 간식을 얻어먹으려 옆에 붙어 있어 줄 것이란 걸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시간이 이른데, 국수랑 떡 올리라고 할까요? 복향이가 무엇을 묻든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주면 받았고 더러워진 이불을 치우려고 하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시선뿐이었다. 복향이가 방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시야에 보이는 것이 닫힌 문뿐일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바라던 일이었고 그리하여 거스르지 않았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지난밤을 생각하면 더없이 타당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입을 벌려 물음을 뱉어 내는 대신 더운 국수를 밀어 넣었다. 어긋난 것을 맞추는 대신 떡이 담긴 접시를 밀었다. 복향이는 늘 그랬듯이 예의를 차리고 받아먹었다. 아, 되었다. 되었어. 무슨 조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난밤의 일은 말 그대로 지나간 일인 것이다.
뒤끓던 마음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나는 다시 나의 안온한 미래를 떠올렸고 그곳에 낯을 묻었다.
우리는 다시 전과 같이 지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별당의 작은 방 한 칸이 복향이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행랑채와 내별당 사이의 걸음도 견디지 못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오래 기다리고 있으면 복향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시답잖은 말을 건네면 고갯짓과 함께 예, 맞지요. 오늘 보니까 영산홍이 피었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그날 화병에는 영산홍이 물에 담겨 붉게 빛났다.
사실 나는 요즘 모든 일에 건성건성인지라 무슨 꽃이 화병을 장식하는지에 대해선 별 감흥이 없었다. 만족을 모르는 탐욕스러운 종자라 해도 별수 없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은 종과 주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떠하니?”
비단으로 지은 다홍치마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일부러 보드레한 결을 손등으로 미끄러트리듯 문질러 댔다. 좋아 보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갖고 싶고 걸쳐 보고 싶도록.
나는 그날 이후, 그러니까 사내라는 것을 밝힌 다음부터 복향이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아기씨일 적에 모자라게 굴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늘 사내로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도록 참아야 했다.
아마 복향이는 넓은 방 못지않게 커다란 옷궤에 색색별로 쌓인 비단옷이 전부 제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빗접에 쌓인 빗도 빗치개도 뒤꽂이도 모두…….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을 사들였는지도 그 빛나는 것들과 같이 한데 모아 넣고 문을 걸어 닫아 놨으니 알 턱이 없었으리라.
“고와요.”
“네 것이다.”
복향이는 늘상 하던, 종년이 받기에 과분하니 옳지 못하다는 입바른 소리 하나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허리에 찼다. 다홍치마가 비로소 제 주인을 찾은 모습이었다.
나는 너무 좋아서, 저고리도 꺼내어 걸쳐 주었고, 빗을 꺼내 머리를 빗겨 주었고, 땋은 머리 끝에 금박이 박힌 붉은 댕기도 물려 주었다. 하나씩 갖춰질 때마다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좋다, 좋아.
“곱다.”
“아기씨가 된 것 같아요.”
“더 고운데 무얼.”
경대를 들여다보던 복향이가 멋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어깨에 걸쳤던 저고리를 벗어 곱게 접기 시작했다.
“왜?”
“일하며 입기엔 너무 고와요.”
“그러면 일하지 마라.”
“예? 에이, 농도 심하시다. 몸종이 일 안 하면 어째요.”
“내 방에서 이렇게 옷 갈아입으면서 놀면 되지. 그래도 심심하면 머리꽂이 골라 보아도 좋고.”
나는 아무렇게 던지듯 말했지만, 사실 늘 바라던 것이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무언가 잡고 싶고 만지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복향이는 몹시 웃긴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는 치마와 저고리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접히는 것을 쳐다보지 못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
복향이는 얼굴이 동그스름했다. 봉긋한 뺨은 가만히 있어도 좋지만 웃을 때에는 한껏 올라가는 모양새가 몹시 사랑스러웠다. 눈매 또한 유순한 성정을 닮아 그저 둥글었다. 커다란 구리색 눈동자가 숱이 많은 속눈썹에 감싸여 커졌다가, 사라졌다가, 휘어졌다가…….
작은 코가 무언가 심기가 불편해질 때마다 작게 씰룩거리는 것을 나는 그렇게 좋아했다. 반질거리는 검은 뒤통수를 좋아했고, 끝이 축 처진 눈썹을 좋아했고, 복사꽃 잎 같은 입술이 겹쳐졌다 떨어질 때마다 나는, 나는.
“신고 다녀라, 응? 아니다. 그냥, 발에 맞는지 한번 신어 보기만 해라. 그것만 해 줘.”
모란꽃이 수놓아진 비단신을 들이밀다 못해 빌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신을 들고 몸을 낮추었다. 머리 위에서 이러지 마시라, 어서 허리를 펴시라는 애원이 들렸으나 나는 내 눈높이에서 하늘거리는 치마에 시선을 빼앗겨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감색 무명 치마 아래로 얄따란 발목이 보이고 그 밑으로 가죽신을 신은 발이 보였다. 나는 감히 치맛자락에 손끝이라도 닿을까 겁을 내며 가죽신을 잡았다.
“아기씨, 더러운데…… 더러워요. 그러지 마세요.”
“무어가 더러워.”
날이 좋아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발이잖아요. 더러운데. 아니, 저녁상 들이라고 하시고서는 갑자기 왜 이러신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뒷걸음질 치려는 발을 꼭 붙들고 있으니 균형을 잡지 못한 손이 열 가지 뜨거움으로 내 어깨를 데웠다. 나는 그 무게감에 속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신을 벗겼다. 벌겋게 익은 발이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작은 발가락을 한껏 움키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는 붉어진 발가락을 하나하나 잡아 펴면서 손으로는 비단신으로 그것을 감추었다. 한쪽 신을 신긴 후에는 어느 정도 체념했는지 작은 발이 저항 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이제 감색 치마 아래에는 꽃분홍 비단신이 발간 발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주먹을 쥐고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제, 이제 되었지요?”
복향이는 날름 신을 갈아 신었다. 나는 구태여 그대로 신고 있으라 종용하지 않았다. 다시금 맨발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더욱 몹쓸 마음이었다.
“나중에 꼭 신어.”
“예, 나중에요.”
“꼭.”
“예, 나중에 꼭이요.”
저렇게 말해도 저 비단신 또한 복향이의 작은 방을 장식하게 될 것임을 안다. 이미 쌓여 있는 여러 벌의 비단옷과 함께 방 한쪽에 곱게 놓여 있는 백동 장식 반닫이 안에서 나올 일이 없을 것이다. 찾아가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마는 첫날 내가 떠맡기듯이 줄 적 외에는 복향이의 몸에 걸쳐진 일이 없기에 그리 헤아려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곳을 채우는 데에도 나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멈추지 못했다.
“보아라. 비취랑 밀화 중에 무엇이 더 보기 좋으니?”
“저는 비취랑 밀화가 무엇인지 잘 몰라요.”
“여기 노리개에 달린 노란 호박이 밀화고, 이 녹색이 비취다.”
나는 괜히 알려 주는 체하며 그것을 복향이의 옷고름 밑에 대 보았다.
“둘 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나 말고.”
“아고, 말씀도. 제가 이걸 어디 차고 나가요.”
“어디 차긴. 저번에 준 삼회장저고리 있잖아. 미색 바탕에 녹색 천을 댄 저고리. 거기에 살구색 치마 받쳐 입고 이거 하면 아주 곱겠다.”
은근히 저번에 안겨 준 것을 하면 되지 않느냐 피력했다.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꾸 복향이가 꿈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준 것을 차고 말이다. 위아래 다 갖추어서 준 날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어쨌든 나는 이것이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탓으로 여겨져 자꾸 말을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또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머리 위로 곤란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이러다 좀 있으면 걸레질하라고 비단 떼어다 주시겠네.”
“그러면 쓰고 다닐래?”
“말도 마세요!”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네게 영원과 헌신을 약속하며 끼워 줄 지환이 벌써 열이 넘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혼례복 치수라도 재어 보자며 빌지도 않았고 연서 한번 봐 달라 울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미 한집에서 사는데 신부 가마는 어찌할지, 그래도 한 번뿐인 혼례인데 남들처럼 곱게 꾸민 가마에 범 가죽 올리고 동구나 한 바퀴 돌고 올지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작은 몸이 별당 마당에서 보라색 잔꽃이 달린 풀의 뿌리를 뽑는 것을 마루에 앉아 지켜만 보았다.
“무얼 하려고?”
“아, 말린 것만 보셔서 모르시는구나. 이거 맥문동이에요. 뿌리를 말려서 차로 마시면 기침에 좋지요.”
나는 흥미롭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고 그 옆을 기웃거렸다. 물론 기침에 좋다는 것 따위가 흥미를 끈 것은 아니었다. 제법 탐스럽게 핀 꽃이 누렇게 수염이 난 뿌리에 밀려 그저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더기로 피어난 꽃 중에서도 가장 보드랍고 청초하게 핀 것을 하나 골랐다. 뿌리가 아니라 꽃을 집어 잎이 상하지 않게 치마로 닦아 내고 무릎을 접고 앉아 있는 복향이의 귀 옆에 살살 꽂아 주었다. 놀란 눈이 나를 쳐다보더니 귀를 만져 본다. 보라색 꽃줄기가 만들어 낸 가느다란 그림자가 둥그런 눈언저리에서 살랑거렸다.
“노리개 없어도 되겠구나.”
“그렇다니까요.”
“아무 꽃이나 꽂아도 어여쁘니까.”
길지 않은 마디였지마는 마음을 크게 먹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하여 말을 들었을 복향이를 쳐다보지 못하고 꽃 더미로 고개를 처박은 채 맥문동만 힘차게 뽑아야 했다.
“아고, 어찌 그런 일을 하세요? 손이 상하실 것이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인데 나도 할 필요가 있다.”
복향이는 흙 묻은 손이라고 나를 붙잡고 말리지도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나는 그날 마당을 아주 뒤엎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진정으로 혼인하자 말할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마음이 거짓이거나 장난이라는 게 아니라, 그날 밤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 여긴 탓이었다.
큰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투락댕기를 복향의 방에 두고 올 참이었다. 혼례복을 입을 때에 쓰는 뒷댕기 말이다. 금박을 물리고 진주와 산호를 박아 넣은 댕기는 패물에 관심이 없는 눈에도 제법 귀해 보였다.
어쩌면 나는 복향이의 방에 들어가고 싶어 시답잖은 구실을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방에 들어갈 결심을 한 것뿐인데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기 때문이다. 별다를 것도 없는 문고리가 미지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심장이 뛰어서 도저히 오래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빨리 댕기만 놓아두고 나와야지. 잘 보이는 데에 걸어 두고 나중에, 복향이가 나를 찾아와서 방에 무슨 댕기를 두었느냐고 물어보면은…….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순간 방을 잘못 찾았나 싶었다. 내 방에서 옮겨 간 반닫이가 눈에 익숙하게 박히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활짝 열어 보았다. 텅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기씨?”
이름 모를 계집종 하나가 문 앞에서 나를 부르다 제 말에 깜짝 놀란 듯이 낯을 가리고는 잘 들리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 장황한 변명의 요지는 내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이 없으니 또 혼자 난리를 피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 순간 나는 혼자였다.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이 무수했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그렇게 어지러웠다.
“왜 여기 계셔요? 저는 여기 계신 줄도 모르고…….”
약간 벅찬 숨을 담은 목소리가 머리 뒤에서 울렸다. 나는 이곳으로 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복향아.”
“네.”
“누가 너를 여전히 괴롭히니?”
“아니요.”
그 밤 소란이 얼마나 컸는데. 감히 누가요. 타당했으나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다 어디 갔어?”
“잘 모르겠어요. 그냥 오가다 보면 하나씩 없어져요.”
“왜?”
“몰라요.”
“왜 말하지 않았어?”
“원래 그랬어요. 알고 계셨잖아요.”
나는 알고 있었던가. 내려 주신 가죽신을 잃어버렸다고 울상 짓는 낯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란 적 없다.”
복향이는 웃었다. 눈꺼풀을 반쯤 겹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것은 그때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내가 옷이나 갈아입고 머리꽂이나 고르며 살라 했을 적 지은 웃음 말이다.
아, 진정으로 우스워 지은 웃음이었구나.
“그렇게 웃지 마라.”
말 한마디에 금세 웃음이 거두어졌다. 이제 또렷해진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보지 마.”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참지 못했다. 다시 봐. 아니, 아니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거세게 외쳐 보아도 바뀌는 것이 없었다. 복향이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질적인 것을 보는 눈 말이다. 한 번도 나에게 닿은 적 없는 눈길이었다. 저 눈은 나를 늘 애틋하게 보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나, 내가 시킨 거 아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너 못살게 굴라고 시킨 적 없다.”
“예.”
“못된 것들. 저것들이 너 못살게 굴었지? 내가 지금 경을 칠 것이다. 응? 서운해서 그러지? 내가 잘못했다. 지금, 지금 내가 다 잡아다 족쳐 줄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야. 지금 다 잡아 오라고 할게. 잡아다 매질을 할까? 채찍으로 후리라고 할까? 아, 우선은 무릎 꿇고 빌라고 해야겠다. 어디 감히…… 아씨라고 깍듯하게 높이라고 하고 손이 터질 때까지, 응?”
“왜요? 시킨 적 없어도 바라셨잖아요. 그것이 잘 지내는 것이잖아요.”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그렇게 보지 마.”
다물어지는 입과 돌아가는 고개를 보며 속이 터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꼈다. 위에 서 있는 것은 나였고 소리치고 명령하는 것도 나였는데 빌며 안달하는 것도 나였다.
“다시, 다시 봐. 너는 나를 그렇게 보지 않잖아. 그렇게 본 적이 없잖아.”
무엇이 다르지. 무엇이 다를까. 내가, 내가 사내라고 밝혀서, 이제 가여운 아기씨가 아니라서 나를 보지 않는 것일까.
닫힐 줄 모르고 팔을 벌리고 있던 반닫이를 향해 뛰어갔다. 가장 화려한 것을 골라 팔을 꿰고 허리에 찼다. 어설퍼서 우스워 보일 정도의 의대였으나 추스를 겨를이 없었다. 반닫이와 함께 떠맡겼던 경대도 박살을 내듯 뒤졌다. 뺨을 치듯 분을 바르고 연지를 입술에 문질렀다. 진즉 박살이 난 거울은 상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복향아, 향아. 봐. 네가 늘 말하던 대로 곱게 분칠하고 연지도 발랐다. 네가 늘상 말했잖아. 한 번만 발라 보시라고. 이제, 이제 많이 바를 테니까, 응?”
낯을 들이밀고 손을 잡아끌었다. 다시 곱다 하며 쓰다듬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발밑에 꿇어앉아서 머리째로 그 손 위에 건네주었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해 주어도 끝내 그 눈동자에 온기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예전처럼 봐 줘. 불쌍하게라도 봐…….”
애걸하면서도 손이 덜덜 떨렸다.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작은 얼굴을 손에 쥐고 엄지로 눈알을 터트리고픈 충동을 말이다.
손을 맞잡았다. 빌기 위함인지 자신을 억제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복향이에게서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이제는 웃음이 실실 나올 지경이었다.
“진정 안 되는 것이냐?”
대답은 없었으나 답은 있었다. 그래, 그래…….
“좋아. 그럼 네 마음대로 해.”
*
나는 이제 헉헉대는 숨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지친 몸이 세숫물을 받아 오고 마당을 쓰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도 또 할 일이 있다는 듯이 발을 빠르게 놀리는 것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면 부르고 늦으면 질책했을 뿐이다.
편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종이 자유롭게 내별당을 드나들었다. 복향이는 이제 옆에 있으면 일을 시키고 없으면 어디서 일을 하고 있겠거니 하는 계집종의 삶을 살았다.
그날,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마치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인 양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너를 마음대로 하지 못해 이렇게 빌고 있는 줄 알아?”
굽힌 무릎을 펴고 우스꽝스럽게 끼워 놓았던 의대를 벗어 던지며 말했더랬다. 입술을 문지르니 연지가 손등에 피처럼 묻어 나왔다. 끔찍한 몰골일 것이다. 지금 내가 내뱉는 말도 비슷할 것이고.
“당장 너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을 수도 있다. 사람 발길은커녕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가두고, 평생 그곳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숨만 쉬며 살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살다가 너무 외롭다고, 이렇게 살다가 미칠 것 같다고 눈물로 읍소하면 가랑이 한번 벌려 줄 수 도 있겠지. 왜, 내가 못 할 것 같으냐?”
실실 웃으며 말하니 아주 미친놈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복향이에게선 반응이 없었다. 이미 한 번씩 수틀리면 윽박지르곤 했으니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으리라.
나는 걸친 치마를 벗으며 멈추지 않고 자리옷까지 벗어 냈다. 비로소 복향이의 얼굴에 그 전과 다른 빛이 떠올랐다.
“모를 수도 있지. 모를 수도 있고말고. 그동안 치마나 차려입고 있던 놈이 사내구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도대체 누가 알 수 있겠느냐. 나도 궁금했는데, 이번에 한번 알아볼까?”
나는 무뢰한처럼 반쯤 헐벗은 채로 아랫도리를 주물렀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찰 무렵부터, 새벽녘 저도 모르던 몸부림이 지나가면 뿌연 물을 뱉어 내는 것 말고는 쓰임새가 없던 것이었다. 진정으로 궁금하긴 했다. 꿈속에서나 흔들어 본 것이 다인데 제 쓸모를 다하는지 어떤지 나라고 어찌 알겠느냐.
야릇한 흥분이 몰려왔다. 무엇이 나를 상기시켰는지 알 수 없기에 그러했다.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이것 또한 만성이 된 자해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어떤 끝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서도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멈추지 못하는 습성 말이다.
그러쥐고 있는 것이 뻣뻣해지는 걸 느꼈다. 한도를 모르고 부피를 늘려 가며 손아귀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발기가 된다는 것이 우스워 킬킬거렸다.
그러나 복향이는 웃지 않았다. 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쓸데없는 짓을 한다. 무슨 마음인지 헤아려서 무엇 할 것이냐. 미움밖에 차오를 것이 없는데. 그러지 말라 억압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면서.
나는 또 그 지지부진할 싸움을 떠올렸다. 지치는 일이다. 너무나 지치는 일이다. 제 손으로 자신을 망치는 일은 이리도 지치고 힘에 부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사실에 현기증이 일어 그냥 퍼질러 앉아 팔을 들었다. 손끝으로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라. 네가 원하는 대로, 주제에 맞는 곳으로 가.”
그리 일갈한 후, 우리의 얼굴은 누구의 것을 구분할 필요도 없이 일그러졌으나 부정하기 위해 입을 여는 이 또한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복향이가 번복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에 불과했다.
작금을 보아라. 내 눈앞에는 복향이가 아닌 계집종과 사내종이 과장되게 바지런을 떨고 있었다. 내가 나가라고 하는 대로 복향이가 시원하게 털고 나간 결과물이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답답하다 못해 문드러졌다.
나는 가고 싶은 곳도 없으면서 괜히 방을 나섰다. 안에 있다가는 열이 뻗쳐서 무어라도 던지고 박살 내고 싶어 참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디딤돌 앞에 서니 어디선가 달려온 복향이가 신을 신겨 주었다. 옷소매며 치마가 축축한 것을 보니 어디서 물일을 하다 온 듯했다. 아주 어릴 적 외에는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내 앞에서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조아리는 일도 그러했다. 수치스러울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치워라. 신을 신기는 것이 아니고 신에 물칠을 하는구나.”
반쯤 신겨진 당혜를 걷어찼다. 그 가볍고 아름다운 비단신은 높이 날아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복향이의 고개도 같이 높아졌다가 바닥으로 푹 수그러졌다. 영영 다시 솟아오르지 못할 것 같던 몸은 잠시 멈추어 있다가 신을 주우러 달려갔다.
그러나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종이 재빠르게 내온 새 신을 신고 어딘가로 걸었다. 조급한 발소리가 울리다가 멈춘 것을 듣고도 결코 뒤돌지 않았다.
제법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온종일 무엇을 얼마나 하는가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마는 종들을 반절이나 내보냈으니 예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비복들을 전부 모이게 해 그중 반을 골라 떠나라고 했다. 몇몇은 당장 행랑채로 달려가 그동안 훔친 것을 내밀고 잘못했으니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 빌기도 했다. 나는 돌려줄 필요 없으니 그것이라도 제값 받아 잘 팔아서 앞길에 보태라고 비아냥거렸다.
‘저것들은 훔친 죄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어찌 저희까지 가야 합니까?’
‘고이 보내는 것이 의문이냐? 그럼 매질하여 반병신 만들어 보내 주리?’
서늘한 일갈에 따지려고 들던 비복들이 입을 다물었다. 늘상 집사를 통해 일을 시키고 복향이와만 이야기하였더니 이것들이 주인의 성질을 모르고 시건방을 떨었다. 계속 모시던 주인은 돌아가신 지 오래고 새 주인은 어리고 병약하니 아주 우습게 보는 것이다.
분기가 차오르려 했으나 이내 시들해졌다. 누구 탓을 하느냐. 그 건방을 보아준 것이 자신인데.
그렇게 반이 떠났으니 남은 반이 모든 일을 맡아야 했다. 복향이는 아래 중의 아래에 있는지라 남들의 배는 더 일해야 할 것이다. 계집종치고는 퍽 곱게 큰 복향이니 매일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될 것이다. 알고 한 것이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알아주길 바란 것이다. 내가 너를 괴롭히던 이들을 전부 쫓아냈다, 알아 다오. 그 계희라는 계집애도 멀리 보냈다. 네가 진정 미웠으면 같이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이유를 네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냥 한 번만 와서 아기씨, 하고 불러 주면은 이런 헛된 짓거리는 당장 그만둘 터인데. 먼저 말을 거는 것이 굽히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 영 내키지 않는다면은 옷자락만 살짝 잡아당겨도 나는 다 알 터인데. 그러면 나는 다시 무릎 꿇고 빌 것인데…….
이 마음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길지 않은 생 중에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 보낸 사이였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쯤은 비쳐 보이는 것이 우리였다.
복향이는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것이다. 어쩌면 모른 체가 아니라 나는 네 마음을 모른다고, 알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일지도.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웃음이 나왔다. 기꺼이 고난을 모른 체할 마음이 들었고 상처를 주어도 상처받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비가 쏟아지는 날 그 물줄기를 온통 맞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복향이는 천 뭉텅이를 가득 안고 그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마른빨래를 급히 거두고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다시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면 뭐 하나.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버린 것을.
서두르다가 발을 잘못 놀렸는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구르는 꼴이 보였다. 애초에 물을 흠뻑 머금은, 자기 몸집만 한 천 뭉텅이를 들고 뛴다는 것부터가 멍청한 짓이었다. 옷과 이부자리 따위가 흙바닥에 굴러 누런 물이 들었다. 그것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한 복향이가 잔해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울고 있을까. 넘어질 때에 무릎이 깨져 그 아픔에 눈물이 흘렀을까, 아니면 저만 고된 허드렛일을 하는 불합리함에 울분을 터트렸을까. 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갔다.
빗줄기가 소리를 삼킨 탓에 내가 지척에 다다라서야 복향이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내쉬는 숨마저 젖어 있건만 헐떡이는 입술은 까슬하게 말라 껍질이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긁어내듯이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더디게 내리며 가늠해 보았다. 나흘쯤 지났나. 원래 잘 먹어도 살이 붙지 않던 몸은 그새에 비쩍 말라 있었다. 낡은 저고리 동정 사이로 앙상하게 툭 튀어나온 빗장뼈를 빗방울이 무심하게 치고 나가며 줄줄 흘렀다.
저도 모르게 그 물줄기를 따라 눈길을 주는데 똑같이 앙상하게 거치른 손이 급하게 그것을 감추었다. 복향이가 눈을 매섭게 치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기꺼이 비웃어 주었다.
“내가 네 앙가슴이나 훔쳐보려는 줄 알았느냐?”
명백한 우롱이 담긴 말에 찬 빗물이 무색하게도 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이제야 뒤처리를 할 정신이 든 것인지 복향이는 허겁지겁 천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자기 옷이나 추스를 것이지……. 옷이 물기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다 못해 비칠 듯한 작태를 쳐다보니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무슨 꼴인지도 모르고 이제 할 일을 하러 갈 것이라고 고개까지 꾸벅 숙이고 인사를 한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머리통을 지나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엉킨 누런 천 뭉치를 쥐고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복향이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답 대신 멱을 잡고 끌었다.
“왜, 왜 이러세요?”
“아, 주인 되어 종년 목소리 듣기가 참 어렵구나.”
“아니, 저걸 어쩐다고 이러세요? 흙물이 들 터인데…….”
“저 좆같은 천 뭉치 비만 그치면 당장 불태워 버릴 테니 입 다물어.”
끌려오는 몸이 벅차하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누가 볼 줄 알고, 대체 어디로 간다고…….
마루를 딛고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복향이를 밀어 넣었다. 불과 며칠 만인데도 내별당 방 안을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것에 배알이 뒤틀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탕물을 줄줄 흘리면서 어떻게든 바닥에 물칠을 그만하겠다고 몸을 구기는 것도 볼만했다. 뭐, 내 꼴이라고 다르겠냐마는.
옷궤에서 아무것이나 꺼내 던졌다. 힘 조절을 하지 않고 건성으로 던진 옷가지는 복향이의 머리로 떨어졌다. 복향이는 그것을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하고 덮어쓰고 있었다.
“입으라고 말까지 해 주어야 하나? 아니면 다 벗은 것만도 못한 꼴로 나돌아 다니고 싶었던 것을 내가 몰라준 것인가?”
그제야 벌게진 얼굴로 몸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주섬거리는 것을 쳐다보지 않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나기인 줄 알았는데, 빗줄기가 제법 굵고 길게 내린다. 마른 옷을 덮어쓰고 있어 봤자 다시 나가면 또 물독에 빠진 생쥐 꼴일 것이다.
“비 그치면 나가라.”
“일이 많은데요.”
“그 일을 주는 것이 대체 누구인데? 어차피 다른 것들도 다 비 피해서 방 안에 들어앉아 쉬고 있을 것이다.”
“오늘 끝내지 않으면 내일 더 해야 해요.”
“할 말이 그것뿐이야?”
결국 나는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있던 바깥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복향이를 쳐다보았다. 일이 많으면 줄여 달라 하면 그만이고 일이 고되면 바꿔 달라고 하면 그만일 터였다. 모르지 않으면서…….
나는 부추기듯 다시 한번 물었다.
“진정 할 말이 그것뿐이야?”
“예.”
저 꼴을 하고도 대답이 장했다. 대단하다, 내가 아주 대단한 계집종을 두었다. 이것을 어디 가서 자랑해야 할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그것이 아주 우스워서 화통하게 웃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눈물까지 쏟아 내며 웃다가 말했다.
“비 그치면 나가라. 명령이다. 그 후에는 네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일, 아주 온종일 시켜 줄 테니.”
복향이는 고개만 숙이고 말이 없었다. 나도 더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
저녁상을 밀었다. 거칠게 밀린 밥상이 방바닥을 할퀴는 소리를 내더니 그릇에 담겨 있던 음식을 줄줄 흘려 댔다.
뜨거운 국물이 상다리를 타고 흐르는 것과 같이 후끈한 땀방울이 복향이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밥상과 바깥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해가 떠 있을 동안 해야 할 일을 가늠하는 것이리라. 물론 내가 밀친 저녁상을 치우고 다시 내오는 동안 해는 무정하게 떨어져 버릴 테지만.
“내가 치우고 다시 내오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요, 아니에요.”
“왜 치우라고 하는지는 알고 있고?”
복향이는 표정만 굳히고는 말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네 더러운 심보와 변덕으로 인함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는 대답을 들은 양 빈정거렸다.
“손을 좀 보아라.”
공손하게 바닥에 붙이고 있던 손을 가리켰다. 시중뿐 아니라 고된 밭일에 시달리는 손에는 미처 씻어 내지 못한 흙먼지가 붙어 있었다. 복향이는 치부를 들킨 양 부끄러워 얼굴을 터질 듯이 붉히더니 송구하다 중얼거리며 짧은 소매로 그것을 닦아 내고 가리려 애썼다. 안쓰러울 법도 했으나 나는 굼뜨게 굴지 말고 어서 상이나 새로 내오라고 다그쳤다.
그렇게 무안을 주고 받아 낸, 얼마나 벅벅 씻었는지 새빨개진 손끝이 가져온 새 상을 나는 반절도 비우지 않고 돌려보냈다.
“이제 힘겨워하는 것이 보입니다. 끼니도 제때 챙기지 못하고 있고, 보이신 바가 있으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마는 터진 입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인지라…….”
집사 일을 맡고 있는 늙은 여자를 가느스름하게 눈에 담았다. 유모의 청을 받고 온 여자, 나를 보살피는 유모의 피붙이…….
나는 이 여자의 이름도 모르고 낯을 면밀히 쳐다본 일도 없었다. 유모와 닮은 부분을 찾을 때마다 늘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죄를 짓고 있는 것이 맞았다. 유모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맡겼는지 알면서 그 입으로 내 죄를 읊게 하고 있으니.
터진 입은 막을 수 없다. 익히 깨달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들은 바가 없지도 않았다. 끈 떨어진 연, 이제야 주제를 아는 계집애, 멍청한 년…….
그런 주절거림은 신기하게도 제 주인을 찾아간다. 멀찍이 떨어져 들리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속삭인 것도 기어코 주인의 귀에 닿아서 피를 차게 하고 억장을 짓누른다.
뒤통수가 쭈뼛 일어나는 무지근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주인이 내가 아님에도 그러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미 없이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고 내가 하는 짓을 본다면 천하에 둘도 없을 천치라 욕을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하는 짓거리가 천치와 다름없다면, 그렇다면 알려 주오. 내가 어찌해야 멈출 수 있는지.
“……지금도 방에 못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 방에는 이제 아무도 없는데.”
처박고 있던 축축한 눈을 들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라 그러했다. 달이 떨어지려 하는 시간인데……. 괴롭히는 이가 방에서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못 들어갈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냇가에서 치마를 빨고 있습니다.”
“누가 시킨 일인가?”
“아닙니다.”
나는 아연했다가 이내 수긍했다. 제 치마를 빨고 있는가 보다. 옷이 더럽혀질 일이야 무궁무진하다고 봐도 좋았다. 물일 하다 구정물이 튈 수도 있고, 밭일하다 풀물이나 흙물이 들 수도 있는 일이니.
나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감히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차치하고서, 안타까움에 사납게 휘몰아치던 마음이 가라앉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내 앞에 곱게 놓인 치마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바로 알아보았다. 비가 오던 날 젖은 몸에 덮어쓰라 준 치마였다. 고달픔에 푹 익은 낯이 그것을 접어 내밀고는 고두했다.
나는 그것이 복향이의 손을 떠나자마자 발로 걷어찼다. 무엇에 분노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번도 거부받은 적 없던 성의를 되받음에 분노했을 수도 있겠고 그 낡아 빠진 몸으로 적선하듯 준 천 쪼가리를 정성스럽게 빨고 말렸을 생각을 하니 어이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어쩌면 이렇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나만 이런 것인지, 아니면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인지……. 정말로 모두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채로 숨을 쉬고 눈을 뜨는 것일까.
“종년이 덮은 것을 다시 걸치는 주인도 있다더냐?”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달아오른 낯이 날 선 말을 쏟아 내는 나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발에 차여 구겨진 치마에 시선을 박았다. 부당한 처우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히는 것일 테다. 그러나 나는 복향이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를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
대체 어디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내몰려야 입을 여는 거야. 내가 어디까지 인간 말종이 되어야 해.
쩍쩍 갈라져 피가 맺힌 손이 치마 끄트머리를 잡더니 그것을 거듬거듬 그러안는 꼴을 보았다. 내가, 내가 손이 저 지경이 되는 것을 보고서도 이걸 받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네가 걸칠 것이 아니면 버려라.”
“아기씨…….”
“버려. 못 버리겠어?”
나는 치마를 사납게 당겼다. 핏방울을 떨어트리던 손이 오래 힘을 주지 못하고 허무하게 쥐던 것을 빼앗겼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부질없는 사죄가 귓등을 쳤다. 진심도 아니면서…… 나에게 비참함을 알려 주기 위해 이 꼴을 보여 주는 것이면서…….
나를 말리기 위해 뻗은 팔을 옳다구나 하고 잡아당겼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마른 몸이 훌쩍 딸려 왔다. 한쪽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 치마끈을 잡았다. 무작정 그것을 야윈 허리에 두르려는데, 내 어깨를 미는 손과 발버둥이 거세었다. 살가죽이 뜨끔한 것이 어디 손톱에 걸려 찢어진 듯했다.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허우적거리는 손이 나를 찢든 치든 내버려 두다가 좀처럼 매듭을 지을 수 없자 양손을 잡아채 바닥에 짓눌렀다. 내리누르는 힘에 아픈 것인지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뭐에 씐 놈처럼 치마끈만 뚫어져라 노려보며 동여매려 애썼다.
“이, 씨발…….”
애초에 한 손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반신으로는 복향이를 짓누르고 남은 한 손으로는 서툴게 매듭을 지으려 했다.
욕지거리와 함께 턱 밑에서 떨어진 땀이 벌벌거리는 살갗 위로 떨어져 둥근 자국을 남겼다. 한순간도 닿아 본 적 없는 곳으로, 내 땀방울이 매끈한 면에 흐르고 옴폭한 곳에 고였다. 나는 땀에 절어 있는 얇은 끈을 뭉쳐 으깨 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내둘렀다.
“입어. 입으라고.”
“왜 이러세요, 진정 왜 이러세요, 왜…….”
“지금 내가 네 치마를 들추고 있나? 속곳에 손이라도 집어넣었어? 입으라고 하잖아. 허리에 둘러매!”
내지르는 고함에 그때까지도 힘을 꽉 주고 뻣뻣하게 저항하던 몸이 쓰러지듯 무너졌다. 헐근거리는 숨소리 사이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작은 손이, 이제 과장 조금 보태면 피 칠갑이 되어 있는 손이 주글주글하게 구김살이 가 원래 형태를 잃은 치마끈을 잡아당겨 허리에 찼다.
이미 다 껴입은 옷 위에 차는 것임에도 복향이는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이고 수치스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누가 보았으면 내 앞에서 제 손으로 옷을 벗으라 강제한 줄로 알 만한 낯짝이었다.
저 치마도 옷궤에 들어 있을 적에는 복향이가 참 곱다 하며 접어 넣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제 해어진 천 옷 위에 억지로 동여매어져 있었다. 머리칼이고 옷차림이고 죄다 헝클어진 채로 목단 금박을 입힌 비단 치마를 둘러매고 거꾸러져 있는 꼴이…….
그렇게 입으라 발작하였음에도 뱃속에서 만족감이 피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시근덕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불온한 열기가 사라진 후에도 뺨과 턱을 따라 축축한 것이 줄줄 흘렀다. 모르는 새에 제법 매섭게 살이 파였나 하고 손등으로 닦아 냈으나 붉은 것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앞을 뿌옇게 적시는 것은 언제 흐른지도 모를 눈물이었다. 엎어져 일어날 줄을 모르는 복향이의 고개 아래에 고인 것도 비슷했다.
“잘 어울린다.”
빈정거리려 했으나 입술까지 스며든 눈물이 음성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조롱은 자조를 닮아 있었다.
“왜 그런 낯짝을 해?”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몸뚱이 위로 물음을 툭 던졌다.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 대신 물음이 나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왜 그런 낯짝이냐. 여기에 눈물을 흘릴 일이 무어가 있냐. 모두 네 마음대로 하고 있잖아. 종년이니 종년처럼 살겠다는 애를 붙잡아서 비단옷까지 입혀 놓고 무엇을 더 바라느냐. 무엇을 바랐기에…….
“꼭 겁간이라도 당한 것 같은 꼴이구나. 나는 네 소맷부리 한번 걷어 본 적이 없는데.”
말을 꺼내고 보니 궁금했다. 소맷부리를 걷으면 어떤 느낌일지 말이다. 늘 소원하던 것이었으니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느껴질지 아니면 얼뜨기처럼 어쩔 줄 몰라 할지…….
복향이의 어깨를 붙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멀건 얼굴이 축축했다. 나는 옷고름을 당겨 그것을 닦아 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천만 추지게 늘어지지 물길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나는 싫증이 난 사람처럼 옷고름을 내팽개치고 손가락을 구부려 난발이 된 머리칼을 슥슥 빗겨 주었다. 헝클어진 것을 풀어내고 귀 뒤에 단정하게 꽂았다. 제법 마음에 들었다.
보드라운 손길로 매만지고 입꼬리를 올리고 있으니 혼란스럽게 뒤룩거리던 눈이 안정을 찾은 듯 축 늘어졌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 여기는 낯이었다. 그 안온하고…… 지금 돌이켜 보면 안일했던 그때 말이다.
“복향아, 그것 기억나니? 너 내 목욕 시중 든다고 그렇게 조잘거렸던 것 말이다.”
나는 얇은 손목을 잡아 들었다. 어찌나 말랐는지 손목 안쪽에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비쳤다. 소맷부리를 팔꿈치까지 걷어 내고 여린 살을 쓸어내려도 고간에 열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나머지 소매도 똑같이 팔꿈치까지 접어 주었다. 단단히 고정되었는지 살피고는 흐트러진 저고리 깃을 바르게 당겼다. 당기는 힘에 끌려온 머리가 가슴팍에 닿았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깃의 둘레를 따라 목덜미에 손이 닿을 때마다 복향이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네 바람 들어줄게, 응? 등도 밀어 주고 물이 식으면 더운물도 부어 주어야지. 목욕 마치면 몸도 닦아 주고 머리도 말려 주고…….”
그렇게 목간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했잖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뺨을 맞붙인 채 친근한 음성으로 귓가에 호령을 불어 넣었다. 모욕이었다. 진실로 계집종에게 수발을 들라 명하는 것이었다면 달랐겠으나 나는 복향이를 계집종으로 본 일이 없으니 이것은 모욕이 맞았다.
그러나 복향이의 눈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흐르든 불응의 빛이 떠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내가 들이미는 수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를 거스르는 일 말이다. 제 몸이 스러지는 만큼 나 또한 스러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몸뚱어리로 자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향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늘 모르는 체하고 싶어 했고 복향이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렇게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귀 언저리가 바스락거렸다. 고개를 드니 눈앞에서, 닳은 헝겊 같은 천과 비단 치마가 어우러지지 못하고 서로 다르게 나부끼는 것이 보였다. 한 허리에 차고 있으면 같이 날릴 법도 하건만…….
나는 내 말대로 목욕물을 준비하러 비껴가는 몸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얼굴을 일그러트렸을 뿐이다.
*
말린 동백꽃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물기를 머금다 못해 녹아 버린 꽃잎이 색을 잃고 투명하게 흐려졌다. 지난겨울 미처 꽃봉오리를 피우지 못한 망울을 복향이가 고르고 골라서 따고 손으로 일일이 꽃잎을 펴 내 말린 것들이었다.
그때의 복향이는 시리게 찬 바람이 무색하게도 뺨을, 손에 쥔 꽃망울만큼 붉게 피워 놓고서도 좋아했었다. 나는 그냥 맹물에 씻어도 좋으니 추운 데 있지 말고 들어오라고 달래 보았으나 귀한 아기씨가 아무 향도 나지 않는 물에서 몸을 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말리는 동안 색이 흉하게 변하지 않는지 혹시 썩은 것은 없는지 솎아 내는 눈길이 진중했다. 나는 복향이가 그렇게 꽃망울에 신경을 쓰는 동안 관심을 못 받는 것이 서운하여서 얼마간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났다.
“아직 뜨거워요.”
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쳐다보니 복향이의 눈길이 내 팔에 닿아 있었다. 그 눈길을 따라가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욕통의 뜨거운 물에 팔을 담그고 뭉그러진 동백꽃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꺼내 보니 살이 벌겋게 익은 채 김을 뿜었다.
아고, 팔이 아주 익어 버렸네. 아프시지요? 이걸 어째……. 자연스럽게 나를 걱정하여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입가에 웃음이 번지려 했으나 눈앞의 복향이는 경고만 주고 뒤돌아 무명베 수건 따위를 챙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뒤태도를 바라보며 옷을 벗었다. 한 꺼풀씩 벗겨지며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복향이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첨벙이는 소리가 들리고 욕통에 물이 넘쳐 바닥에 흐를 지경이 되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뜨거우니 다시 일어서라는 말도 없었다.
나는 목 끝까지 몸을 밀어 넣고 숨을 쉬었다. 내쉬는 것도 들이마시는 것도 뜨겁지 않은 게 없었다. 몇 차례 힘겹게 숨을 쉬니 복향이가 대야로 찬물을 부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서 비껴 나 있었다.
“이리 와.”
물속에서 한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젖은 팔이 물비늘이 달린 양 빛났다. 꽤 잘난 껍데기지 않나. 유년 이후 곧 깨어질 도자기처럼 취급받은 덕택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나를 그리 다루고 어여쁘다 좋아했다.
“씻겨 줘야지.”
복향이의 눈앞에서 과장되게 팔을 휘저으며 청했다. 그러자 이제까지 태연함을 가장하던 낯이 긴장으로 굳는 것이 보였다. 내가 목욕 시중을 들라 하며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퍽 공평한 일이었다. 나라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느냔 말이다. 누구라고 두렵지 않은가 말이다.
“안 씻겨 줄 거야? 그렇게 시중든다, 타령을 해 놓고……. 나는 너무 서운하다.”
새침하게 내뱉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복향이가 그렇지 않다고 종알거리거나 내게로 움직이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목을 물 안으로 처넣었다. 통증에 가까운 자극이 여린 살에 고열이라는 칼날을 박았다. 잘못 들이마신 숨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기 위해 귀를 잡고 바닥으로 힘껏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먹먹한 귀로 음성 대신 거센 물살이 밀려들었다. 복향이가 내 머리를 끌어 올리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뿌리치고 욕통에 아주 가라앉을 기세로 몸을 낮추었다.
“이…… 미친…… 무슨…… 당장…… 들……!”
물결이 파도처럼 솟구칠 때마다 드문드문 끊긴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끓는 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복향이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좁은 욕통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을 때가 되어서야 거친 손길에 기꺼이 고개를 맡겼다.
낯이 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부터 거센 기침이 터져 나왔다. 드센 손길이 내 낯을 휘감고 있는 머리칼을 밀어 내고 숨구멍을 터 주었다. 정신없이 몰아쉬는 숨이 서로의 낯으로 쏟아졌다.
“왜 구해 줬어?”
“이게, 구해 준 거예요? 구해, 준다는 건 탈이 났을 때나, 누가 해코지를 할 때나, 아무튼 그런 걸 말하는 거예요. 이건, 이건…….”
“씻겨 주기도 싫고 물에 대가리 처박고 죽는 꼴 보는 것도 싫어?”
“아기씨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그런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어요?”
“왜 싫은데?”
“귀에, 귀에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갔나?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지는 알고 계세요?”
“이제는 네가 좋아하는 아기씨가 아니라서?”
어처구니가 없다며 손으로 낯을 쓸어내리던 복향이가 내 말에 눈을 들었다.
뜨거운 열이 정신을 흐리게 했다. 그리하여 구차해 도저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들이 터져 나왔다.
“네가 좋아하는 아기씨가 아니라서 이제 말도 하기 싫고 닿기도 싫으냐? 내가 계속 그 아기씨였으면 좋겠어?”
복향이는 답이 없었다. 나는 이제 같이 벌겋게 익어 가고 있는 손을 잡았다. 살갗이 터진 손은 나보다 더 엉망이었다.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비단 치마를 헤치며 허리를 세웠다. 손을 놓고 팔뚝을 지나 어깨를 잡고 낯을 들이밀었다.
“너는 내가 무엇으로 보여? 내가 무엇인 거 같아?”
눈알이 맞닿을 만치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숨소리가 고함처럼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는데 오히려 맺히는 상이 흐려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매어 준 치마의 솔기를 따라 쓰다듬으며 허리에 팔을 둘렀다. 복향이가 걸친 저고리 너머로 축축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그렇게 맞닿은 채로 나는 절절히 끓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였던 목욕물의 열기는 이제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말이다, 향아. 네가 알던 그 아기씨였어도 말이다. 너를 이렇게 안았을 것이다.”
팽팽한 허리말기 사이로 검지를 집어넣었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손가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죄였다. 불편함을 느낀 복향이가 허리를 뒤틀었다. 난 그 몸을 붙잡고 압박감을 즐기며 벌어지지 않으려 하는 틈새에 중지를 밀어 넣었다.
아. 그 순간 떨리는 숨소리만 가득하던 귓바퀴에 탄성 같은 신음이 닿았다.
“사내가 아니었어도 네 가랑이를 벌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손 한번, 입 한번 붙여 보려고 안달을 냈을 거라고. 응?”
기어이 세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억지로 늘어진 천이 비명을 지를 기세였다. 복향이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좁아진 숨통에 숨을 몰아쉬다가 내가 손가락을 더욱 깊게 밀어 넣을 때마다 끅끅대며 통증을 삼켰다. 아니, 삼키려 했으나 내 목을 쥐고 있는 손은 손톱을 있는 대로 세우고 있었다.
이미 내 손가락도 허옇게 질려 곧 끊어질 듯 욱신거렸다. 붉은 멍이 들 것이 자명했다. 복향이의 살갗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예 손아귀까지 밀어 넣고 힘으로 매듭이 터질 때까지 잡아당겼다.
“아!”
겹칠 듯 비껴 있던 입술 사이에서 외마디 비명이 겹쳤다. 복향이는 순간적으로 끊길 듯 조여 온 허리끈에, 나는 그 손에 살이 파인 고통으로 신음했다.
“다시 보니까, 안 어울리는 거 같아서.”
혼란으로 가득 찬 눈이 나에게 이유를 요구하는 것이 보였다. 이리 미친놈처럼 구는 이유를……. 그 의문에 나는 조악한 변명을 했다. 왜 치마를 그렇게 입히고 싶어 했다가 이제는 벗기려 하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성한 사람을 보는 눈을 하고 있는 복향이에게 더한 밑바닥을 보여 주기가 싫었다.
노려보는 눈을 맞받아쳤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억분에 찬 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복향이가 욕지거리를 하며 일어서자 수용된 인원을 견디지 못해 넘친 목욕물 때문에 욕통의 수위가 한참 낮아져 반신을 다 드러냈다. 벗은 허리께를 기다란 머리칼이 거미줄처럼 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쳐다볼 마음이 들었어?”
더 잘 쳐다보라고 어깨를 펴고 머리칼을 걷어 내니 복향이가 질겁을 하며 뛰쳐나가려 했다. 그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갈아입으라고 가져온 옷은 네가 입어라. 나는 이거면 충분하니.”
벗겨 낸 치마를 흔들며 킬킬댔다. 억눌린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한 복향이는 젖은 옷 위에 마른 옷을 걸치고 달려 나갔다.
자신의 한심한 행태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아랫도리의 사정도 비슷했다. 욕심에 몸집을 한껏 불린 것이 수면 위로 붉은 대가리를 꺼떡이고 있었다.
복향이가 봤을까. 봤으면 아마 얼굴이 터지기 직전까지 붉어지겠지. 식겁을 하고 자기는 모른다며 급한 일이 있었다는 걸 잊었다며 도망을 가려 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그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골리다가 땀에 젖은 손을 잡고…….
“아…….”
물에 젖어 있으니 턱턱거리며 치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었음에도 단단하게 일어선 양물을 쥐고 흔드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한참을 포피가 귀두까지 올라붙도록 문지르는데도 절정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엄지로 귀두를 짓누르듯 비벼도 꺼떡이며 선액만 뱉어 낼 뿐이었다.
어중간한 쾌락과 극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괴로움 사이에서 몸부림치다가 치마를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는 그대로 양물을 쥐고 흔든 채였다. 감히 맨살갗을 들여다본 적도 없는 정인에게서 벗긴 옷을 쥐고 용두질한다고 생각하니 등허리로 슬금슬금 쾌감이 차올랐다.
“아, 복향아, 향아…….”
체취를 맡으려 치마에 낯을 엉망으로 뭉갰다. 이미 푹 젖은 옷에서는 물 내음밖에 나지 않았지만 나는 복향이가 치마를 둘렀을 적 모습을 떠올렸다. 늘어진 천 사이에서 허리에 꽉 조이던 그 끈을, 그 사이로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안다. 음부를 헤집듯이 긁으니 허리를 비틀던 그 감각을…….
결국 욕통에 앉아 쥐고 흔드는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치마를 손에 둥그렇게 말아 쥔 그대로, 그 사이로 허리를 쳐올렸다. 손과 사타구니가 맞닿을 때마다 천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가 미처 다 꺼지기도 전에 다시 솟아오르는 것을 보니 눈알까지 저릿할 지경이었다.
“하, 아…… 아, 향아. 좋아. 더 해 줘.”
예민한 귀두에 닿는 거칠음에 고통을 느낄 새는 없었다. 상상 속의 복향이를 부여잡고 애원하기 바쁜 나는 고통과 쾌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들리는 질척한 소음까지 모두 절정으로 향하기 위한 자극에 불과했다.
“아니, 아니. 조금만 더, 더…… 아, 그냥 씹어 줘. 물어뜯어 줘…….”
양물에 덕지덕지 붙은 핏줄을 모두 터트려 매끈하게 밀어 버릴 기세로 치대는데도 귀두에서 씨물이 터져 나올 기세가 보이질 않았다. 질퍽한 즙을 짜내지 못하고 투명한 물만 줄줄 흘리며 쩍, 쩍, 쩍 마찰할 때마다 애가 끓었다.
아, 복향아, 향아. 자지 터트려 줘, 응? 이제는 숫제 흐느끼는 꼴이었다. 멀리서 보면 제 사타구니에 주먹질을 하는 꼴로 보일 것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수면에 목을 밀어 넣었다.
한 손은 여전히 양물을 휘두른 채였다. 처음 쥘 때부터 더욱 힘을 더하면 더했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팔뚝에 힘줄이 사납게 불거졌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다른 손으로는 고환을 으깰 듯 주물렀다. 골 안으로 직접 밀려드는 듯한 자극으로 저절로 신음이 흘렀다.
물 밖에서와 다를 바 없는 거친 움직임에 욕통 안이 파도가 치는 듯 흔들렸다. 마치, 복향이가 나를 구하려 손을 뻗어 주었을 때처럼……. 숨이 막혀 오는 것도 잊고 물거품을 뿜으며 웃었다.
막힌 숨통을 뚫으려 목줄기에 압박이 거세었다. 눈알이 빠질 듯 아려 왔다. 그러나 아직 아니다. 아직, 더, 더, 더.
눈알이 빠질 듯이 아리면서 의식이 흐려졌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가니 안면을 후리는 물살이 모두 복향이의 손길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리고 복향이의 소리가. 아.
“허억……!”
커어, 컥……아, 아! 머리를 들어 올린 순간부터 시작된 사정의 쾌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못한 손짓에 귀두의 구멍에서 허연 씨물이 주욱 뿜어져 나왔다. 흐으, 아. 아……. 사정을 두지 않고 거세게 쥐고 밀어 낼 때마다 긴 선을 그리며 솟구치는 것을 온 살갗으로 느끼며 오랫동안 몸을 떨었다.
*
“하아, 하…… 하…….”
숨을 고르고 제법 살 만해지니 아랫도리가 다시 꺼떡이며 몸집을 불리려고 했다. 미친놈. 얼마나 더 우스워지려고.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욕을 지껄이면서 비웃었다.
몸을 씻으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복향이가 받아 준 물이 피와 뿌연 것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아, 복향이가 치우려고 들어오면 질겁을 할 것인데……. 혐오와 경악으로 낯을 물들이고 내 뺨을 후릴 것을 상상하자 퉁퉁한 것이 곧장 배꼽에 들러붙었다. 벌겋게 서서 핏줄을 움찔거리는 것이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퍽 볼썽사나웠다.
“음…….”
왼손으로 뿌리를 쥐고 오른손으로 주먹질을 했다. 청초하기로 소문난 내별당 아기씨가 치마 한가운데를 불룩하게 만든 채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러나 주먹질조차 흥분으로 받아들이는 돼먹지 못한 아랫도리가 한 대씩 쥐어박힐 때마다 좋다고 침을 질질 흘려 댔다. 글렀나…….
무엇에 대한 판단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를 찾는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씨.”
“복향이는?”
벌어진 사타구니를 가릴 생각도 없이 답했다. 어릴 적부터 몸을 보이는 수발을 도맡아 하던 자라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벗은 몸을 가리기보다 멈추고 있던 보고를 받는 것이 먼저였다.
용두질에 정신이 팔려 벌써 시간을 한참이나 흘려보냈다. 인식하자마자 초조함이 나를 덮쳤다. 이미 땀에 흠뻑 젖은 몸 위로 새로운 땀방울이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웃기게도 복향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잠시라도 놓치면 이 꼴이었다.
“복향이가 그리 뛰쳐나올 줄 몰랐나 봅니다. 아기씨와 함께 있으니 덕서가 안심을 한 것 같습니다.”
“돌리지 말고 필요한 말만 해.”
덕서는 집사가 복향이에게 붙인 눈 중 하나였다. 본래는 복향이의 동선 안에서 일하는 비복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갑자기 냇가로 향해 동선을 일탈한 복향이를 빠르게 잡아내지 못한 것을 계기로 셋의 감시자를 붙였다. 곧잘 하는 듯하더니.
“눈을 뗀 시간은 정말 짧았습니다. 근데 복향이가 그새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뛰쳐나가느라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집사가 달려가는 내 몸에 간신히 장옷을 덮어 주는 것이 얼핏 느껴졌을 뿐이다.
목간을 나서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내종 하나가 급히 끈을 묶었다.
“어딨어.”
“내별당 방 안에 있습니다. 그곳이 가장 가까워서……. 아마 아기씨가 자리를 비우신 틈에 마당을 정리하려고 했나 봅니다.”
“아마? 내가 아마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이리 있는 줄 알아?”
“눈을 뗀 시간이 채 일각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줄 모르고 다른 곳을 찾아다닌지라……. 발견한 직후에는 바로 방으로 옮기고 의원을 불렀습니다.”
노여움이 끓었으나 탓하지 않았다. 복향이와 단둘이 있을 때 주변에서 멀어지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타인의 시선이 오물처럼 느껴지는 결벽증 탓이었다.
이런 자괴감은 벌겋게 익어 땀을 뻘뻘 흘리는 작은 몸을 보았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열증입니다.”
눈이 달렸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겠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의원은 헛기침을 하며 복향이의 체질이 어떻고 병증이 어떻고 따위를 읊었다. 열만 내리면 된다고,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심한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는 무슨 약을 먹어야 하고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데, 나는 그것을 유심히 들으며 한마디 했다.
“다른 이가 불러와서 이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계집종처럼 보인다고 설렁설렁 보았다가는 너는 열증이 날 새도 없을 것이다.”
후덕하게 살이 오른 늙은 의원은 내 말을 듣자마자 투실한 몸 전체에 땀을 뻘뻘 흘렸다. 더 쳐다보았다가는 오줌을 지리려 할 것 같아서 대충 불러온 계집종에게 새로 이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기씨도 목이…….”
“필요 없다.”
내 목을 흘깃 쳐다본 의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으나 단칼에 잘라 내었다. 복향이가 손톱으로 긁어 낸 세 줄기 상처가 신경 쓰였나 본데 나는 이것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지 않았다. 곪은 채 진물을 줄줄 흘리며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다가 흉터로 영원히 자리하게 되길 바랐다.
“아기씨…….”
의원과 같이 나간 계집종이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곤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열을 내리려 몸을 닦아야 하는데 내가 복향이 옆에 딱 붙어 있으니 비켜 달라고 말을 건 것이다.
“두고 가라. 약이 다 되면 그때 가져오고.”
나는, 공손히 고두하고 나가는 계집종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복향이의 옷을 벗겼다. 의원까지가 참을 수 있는 인내의 한계였다.
복향이에게 붙어 있는 것은 꼭 사내가 아니더라도 다 거슬렸다. 나부터가 글러 먹은 종자라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복향이가 귀엽다 하던 그 미물이었다면, 그 옆에서 치마 속에 풀풀 풍기는 수컷 내를 감추고 있던 괘씸한 것의 목을 진작에 물어뜯어 버렸을 것이다.
“으…….”
험악한 생각을 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복향이가 신음했다.
“아파? 미안해, 미안해…….”
복향이는 끙끙거리기만 하고 답이 없었다. 내 손아귀 힘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뺨이 터질 듯이 붉었고 몸은 손끝까지 불그스름했다. 닿으면 델 듯 뜨겁고 닦을 때마다 새로운 땀이 솟아나는 것도 그랬다.
불현듯 요 며칠 복향이가 항상 낯을 붉혔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나는 그냥 내가 주는 모욕에 수치스러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그날이었을까. 둘 다 속곳까지 푹 젖을 정도로 비를 맞았던 날 말이다.
“왜 그랬어? 왜 그리 미련해?”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아픈 것은 저인데, 저도 속상한데. 복향이가 할 대답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맞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보내면 또 그 야윈 몸을 말리지도 않고 일을 하러 갈 것을 알았으면서…….
열꽃이 핀 낯에 흐르는 땀을 부지런히 닦아 냈다. 두통이 이는지 복향이는 드문드문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 마주쳐도 늘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는 내가 내뱉은 날 선 말에 낯을 일그러트리고…….
나는 물을 갈고 약을 달여 온 계집종에게 보이지 않도록 복향이의 낯을 가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복향아. 약 먹자.”
시원한 물로 닦아 내 개운해진 몸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복향이는 곤한 정신을 깨우는 것이 짜증이 났는지 뒤척이면서 내 품을 파고들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약은 약이었다. 나는 귀에 입술을 붙이고 살살 타일렀다.
“약을 먹지 않으면 오래 아플 거야. 입만 벌리면 내가 먹여 줄게.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아플 때 그렇게 먹여 주었잖아. 너무 아프면 한 입만, 딱 한 입만…….”
“……아기씨…….”
“응.”
“너무, 너무 아파요.”
아프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줄 알았다. 앓고 있는 것은 복향이인데 어떻게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갈빗대부터 어깨까지 칼에 베인 듯 느껴지던 통증이 목줄기를 타고 올라가 머릿속을 징징 울렸다.
복향이가 울었다. 아니, 내 눈물이 맞닿은 뺨을 타고 흘렀다.
“아기씨도 이렇게 아프셨어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어떻게 낫지…… 안 나을 거 같아요. 너무 아파요…….”
“아니. 나는 이제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너도 그럴 거야. 아주 잠시뿐일 거야, 곧 나을 테니까.”
“아닌 거 같은데…… 아픈데…… 너무 아픈데…….”
뻐끔하게 벌어진 허연 입술 안에서 단내가 났다. 병자의 냄새인 것만 같아서 나는 얼른 수저로 약을 떠넘겨 주었다.
어떻게 한 모금 먹였나 했는데 복향이가 그대로 뱉어 냈다. 턱 밑으로 색이 짙은 액체가 줄줄 흘렀다.
“왜, 왜?”
“너무 써요…….”
“너무 써?”
단것만 먹이고 키웠더니 이런 때에 편식을 한다. 복향이의 말에 한 입 삼켜 보았으나 내 입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잠이 들기 전에 얼른 마시게 해야 하는데…….
머리를 굴리다가 엿 조각을 물려 주려 했다. 엿 조각을 입에 문 채로 약을 마시면 덜 쓰지 않을까 하는 짐작에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미 말라붙은 입가가 벌어지지 않아서 억지로 엿 조각을 밀어 넣었다가는 입꼬리가 찢어질 듯했다.
끙끙대는 신음이 강해졌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참아.”
나는 퉁퉁 부은 뺨에 입을 맞추고 엿 조각을 문 채로 약을 머금었다. 달아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뜨거운 약에 엿이 녹아 작아지고 있는 것은 혀로 느껴졌다.
적당히 녹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작게 벌어진 입으로 약을 흘려 넣었다. 쓰다며 내뱉어 버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던 입술이 이제는 단맛이 나는지 꼴깍꼴깍 잘도 받아먹었다. 흐르는 것이 없도록 입술을 꼭 맞붙이고 있으니 다 받아 넘긴 복향이가 새끼 짐승처럼 더 달라고 혀를 할짝거렸다.
“음, 응…….”
약간 거칠한 혀가 맞닿을 때마다 등허리가 조여들었다. 아랫도리가 다시 좋다고 일어서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해서는 안 되는데, 복향이가 아파서 그런 것인데. 파렴치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복향이와의 관계가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다면 이 지경까지 올 리도 없는 일이었다.
몇 모금 같은 방식으로 넘겨 주자 이제는 입술을 쪽쪽 빨아 댔다.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쁘다.”
내 말을 들은 복향이가 같이 웃었다. 눈도 못 뜨면서 입가를 약물로 축축하게 물들이고 껍질이 일어난 입으로 웃었다. 내가 우스워 짓는 웃음이 아니라 진정 좋아서 짓는 웃음 말이다. 계희의 말을 듣고 나를 찾아와 추궁하기 전처럼…….
아마 지금 복향이의 머릿속에는 그 일이 없을 것이다. 열이 올라 두통으로 머리가 깨지기 직전이니 정신없이 습관처럼 나를 찾는 것이겠지. 나는 차마 약을 입에 물지 않고는 입을 맞출 자신이 없어 뺨만 맞붙인 채 눈을 감았다.
다음 날도 비슷했다. 나는 몇 시진에 한 번씩 몸을 닦이고 입을 맞춰 약을 밀어 넣고 미음과 꿀물을 먹였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방을 가꾸는 일도 잊지 않았다. 십장생이 수놓아진 병풍을 세우고 모란이며 작은 새 따위가 그려진 족자도 걸어 두었다. 고운 저고리와 치마 한 벌도 보란 듯이 벽에 늘여 두고 옷궤에는 비단을 채우고 경대에, 자개함에, 무언가 담는 용도로 만들어진 모든 것의 끄트머리까지 가득 쌓아 두었다. 그러고 도망쳤다.
싫은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눈물이 줄줄 나도록 좋았다. 좋다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평생 그리 살게 해 준다면 길바닥에서 이마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좋았다.
얼마간 더 복향이 옆에 붙어 있는다면 입도 몇 번 더 맞춰 보고 껴안아 볼 수 있었겠으나 나는 두려웠다. 몸이 다 나아서 깨어난 복향이가 맑은 눈으로 나를 미워하는 일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리하여 열이 내린 것을 확인한 후에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도망쳤다.
그리고 그날 오후, 집사가 복향이가 깨어났다고 알려 왔다.
*
나는 기이하게도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복향이가 아무 말도 없이 비복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언행을 헤아려 본다면 당장 박차고 나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그들이 누구의 명으로 자신을 보살피는지 복향이가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복향이가 얌전히 누워 밥을 먹고 약을 마신다는 말을 전해 들을 때에는 희망에 찼다가 여전히 나를 찾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는 절망에 빠졌다.
왜지? 왜 나를 찾지 않지? 병상에서 깨어났는데 내가 찾아보지도 않는다고 여기는 것일까? 도망치지 말걸. 복향이가 깨어났을 때 나를 보았다면, 나를 용서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까지 보살펴 주셨느냐고 다시 나를 안아 줬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달려가서 내가 너를 돌보았다, 네가 정신을 잃은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품에 안고 얼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늦은 밤 남몰래 찾아가 도둑처럼 잠자는 낯의 잔상만 훔쳐 온다 해도 그러했다.
복향이는 이제 알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모순되게도 나는 외면으로 질 낮은 괴롭힘을 묵과하면서 내 옆에서는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비호했다. 외면만이 남았을 때 복향이의 삶이 얼마나 더 초라해졌을지는 눈앞에 두고 보지 않았어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 쓰러진 것이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를 찾아올 거야. 곧바로 찾아오면 자존심이 상할 테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를 찾아와서 다시 아기씨라고 부르면서 내 손을 잡아 줄 거야. 내 옆이 너무 좋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고. 내가 없는 곳에서는 너무 힘들다고.
그러면 나는 다정하게 웃으면서 받아 주어야지. 널 기다렸다고. 너무 간절하게 기다리느라 화도, 노여움도 느낀 적 없다고. 너만 다시 와 주면, 나는 아무것도…….
그리하여 복향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소리를 들어도 참았다. 다시 행랑방으로 돌아갔다는 소리를 들어도 참았고 집사에게 말해 내별당에서 아주 먼 일만 골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참았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지른 일이 있으니 나에게 찾아오기가 분할 수도 있을 터였다. 거기에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떵떵거렸으니 말을 번복하게 되는 것이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 내가 져 주어야 한다. 내가 먼저 잘못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맞다.
나는 집사에게 넌지시 나에 대해 흘리라고 말했다. 아기씨가 외로우신 것 같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아마 눈치가 있다면 내가 복향이를 정성으로 돌보았다는 것도 덧붙여 주겠지.
바란 대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복향이 내 방문을 열었다. 복향이에게 닫힌 적이 없는 문이었으니 지금 막 마음을 먹고 나를 찾아온 것일 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사실 이즈음 되어서는 불안증이 극에 달아 불면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해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복향이가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손바닥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나 능숙하게 감춰 냈다.
“무슨 일 있어?”
매끄러운 목소리를 흉내 냈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눈을 맞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물었다.
“문 앞에서 뭐 하니? 어서 들어와, 응?”
눈으로는 표정이 없는 얼굴을 뜯어낼 듯 살피면서도 입으로는 방 안으로 들어오라 여상하게 말을 건넸다.
어서 말해, 어서. 예전처럼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나를 좋아한다고. 작은 입술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기다리는 게 천 년 같았다. 어서, 어서.
“저는 불쌍하지 않아요.”
“뭐?”
“저는 불쌍하지 않다고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라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나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답밖에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기씨는…… 저를 좋아하는 게 제가 불쌍해서라고 말씀하셨지만…….”
복향이는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이어 갔지만, 그 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힘들게 산다고 불쌍한 건 아니에요. 슬픈 일이 있다고 불쌍한 건 아니에요. 남들이 저를 천시한다고 해서도 아니에요. 가진 게 없다고 해서 제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건 다른 거예요. 그건 그냥 힘든 거고 슬픈 거예요. 어쩌면 불쌍했던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저라고는 생각 안 해요. 종년이 건방지게 무슨 생각이냐고 윽박지르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제가 저를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를 향해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 주던 희망찬 예상이 다 바스러지고 있다는 것밖에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불쌍하니까 좋아한다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불쌍한 것이 좋다고 저를 그렇게 여기신다면, 받으실 수 있는 건 굴종밖에 없으실 거예요. 불쌍한 종년이 상전께 드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아기씨는 저를 좋아할 필요가 없으세요. 좋아하지 않으셔도 저는 복종하니까요.”
혹여나 부족한 언변으로 심기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그럼 쉬세요. 그러고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복향이가 갔다. 그림자조차 봄볕에 늘어지다가 뚝 끊겨 보이지 않았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완전한 분리였다. 복향이가 자신은 불쌍하지 않다고 했다. 나와는 다르다고……. 나와 비슷하게 불쌍한 네가 좋다고 하는 말에 자신은 불쌍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아니. 너는 나랑 같아.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나를 좋아할 리 없잖아. 다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잖아.
그래서 나는 네가 미천한 것이 좋았다. 너의 남루함과 외로움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생각이다. 부끄러운 생각인 줄을 알면서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러나 한 몸처럼 붙어 있는 불안이 그것을 놓지 못하게 했다.
불안, 두려움, 울분, 고통…… 나의 유년과 함께 녹아 굳어진 것들. 굳어서 육신을 이룬 것이 나였다. 모양만 사람인 채 갖추고 숨을 쉬고 입을 벌리는 게 나다.
겉모양새는 보기 좋을지라도 그 역겨움이 사라질 리 없다. 어디 과거라는 것이 완전히 단절될 수 있는 것이던가? 가까이 붙으면 누구라도 이내 나의 저열함을 알아채고는 겉만 보고는 몰랐다며 멸시하고 떠나갈 것이다.
나의 이 아귀 같은 마음을 본다면, 애정을 받고도 더 내놓으라 윽박지르고 싶은 이 갈증을 본다면, 네가 가진 단 하나가 되고 싶어서 네 인생이 눈물겹게 고단하고 고독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하여서만 네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나를 깨닫는다면.
복향이는 불쌍하니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이 들자마자 우스워 바닥에 몸을 비비며 킬킬댔다.
네 주제에 가당키냐 하냐? 죽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 빠를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 되나?
사는 것에도 죽는 것에도 마음이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았으나 죽고 싶지도 않았다.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숨을 멈추고 싶다는 게 아니다. 허리를 끊어 피를 줄줄 쏟고 싶다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끄럽게…….
바닥에 뭉개진 뺨이 축축했다. 손을 들어 닦아 내기만 하면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삶은 눈물을 흘리며 닦아 줄 이를 기다리는 것이지 스스로 손을 뻗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다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마는 나는 그 정도도 바랄 수 없나? 눈물이 흐르면 그것을 닦아 줄 이 하나조차 염원해서는 안 되나?
어린 날을 생각했다. 비린내가 풍기는 검붉은 기억을 헤치면 온몸의 구멍으로 피가 쏟아지던 날이 둥실 하고 떠올랐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 곁에 작은 손이 부지런히 얼굴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닦아 주던 때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줄줄 샜다. 팔다리가 잘린 짐승마냥 몸통으로 바닥을 기어가며 웃었다.
피가 역류하던 때를 떠올리며 웃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었다. 사랑이 아닐 리 없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어린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시 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늘어진 몸을 일으켜 방을 뒤적거렸다. 눈알을 굴리고 걸리적거리는 것을 모두 떨어트리며 언젠가 복향이가 불러 준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찾는 게 빨리 나오지 않자 짜증이 났다. 경대를 집어 던지니 안에 있던 화장품이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우르르 쏟아졌다. 제각기 나름의 소용이 있었고 고운 모습을 뽐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죄다 쓸모없었다.
“검정 개야…… 짖지 마라…….”
목태 칠기를 뒤집어 까서 열어 보니 날카로운 뒤꽂이가 여럿 나왔다. 밀화 뒤꽂이에 옥접뒤꽂이까지 없는 게 없었다. 복향이 머리에 꽂아 주면은 제법 쓸모를 다할 테지만 내가 찾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작위적이잖아.
삼층장 위에 올라가 있는 도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괜찮은데.
“우리…… 아기 잠을 깰라.”
노래에 맞춰 높이 든 도자기를 힘차게 발밑으로 던졌다. 파열음은 극락에서 부는 나팔 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곧 고통이 내게 사랑을 되찾아 주리라.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