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1권
목차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다정가(多情歌) - 이조년(李兆年 : 1269~1343)
1부 - 아기씨의 몸종
닭이 운다.
바쁘게 허리를 세워 일어나니 옆에 누워 있던 계희며 자언이가 괜히 새벽부터 시끄럽게 사람 깨운다고 욕을 해 댔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시끄러울까 봐 살금살금 깨금발로 움직여 누비저고리와 치마를 챙기고는 문밖으로 나섰다.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새벽은 삼짇날이 지났다 해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시렸다. 얼른 저고리 소매에 팔을 끼우고 치마를 허리에 찼다.
솜을 도톰하게 누빈 저고리는 아기씨가 지난겨울 우리 복향이 추워서 어떡하니, 하며 손수 내려 주신 귀물이었다. 아끼고 아끼며 그저 눈으로만 보아도 좋았는데, 추운 날 입지 않으면 아기씨께서 서운한 기색을 보이며 팩 토라지시는 터라 부득불 껴입어야 했다.
지금 발을 끼우는 가죽신도 아기씨가 내려 주신 것이었다. 닳을 때마다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니 아기씨께서 해당화마냥 곱게 웃으며 버릴 때 되면 또 하나 사 주마 하셨다. 하지만 몇 번 신으면 귀신같이 사라지는지라 닳을 새도 없이 새 신을 받았다.
분명히 계희 짓인데 물증이 없어 한번 따져 묻지도 못했다. 저 계집애는 나 싫다 하며 죽일 듯이 잡으면서도 꼭 방은 같이 써 댔는데, 모르긴 몰라도 아기씨가 나 주는 것을 몰래 빼돌리려 함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디 갖다가 파는 것인지 귀신같이 사라지기만 하지 계희 년 품에서 발견된 일이 없는지라 나는 속만 태우는 것이다.
우물가에서 받아 놓은 찬물로 대충 눈곱만 떼고 행랑채를 벗어나 내별당으로 향했다.
별당에 계신 아기씨는 저어기 멀리 있는 도성에서 오셨다고 했다. 나 같은 천것은 들어도 뉘신지도 모를 높으신 분의 따님이신데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위해 이곳, 야음으로 오셨다고 했다.
이곳은 소나무가 지천이라 아기씨는 공기가 좋다고 하셨다. 산 내음이 좋다고 하셨다. 나는 늘 코로 들이쉬는 게 거기서 거기인지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방바닥이나 걸레로 훔치곤 했다.
“복향이 왔니.”
아기씨, 들어가요. 하고 말하면은 문고리를 잡아 열기도 전에 다정한 음성이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러면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얼굴이 얼어 있어도 뜨끈한 열이 뺨이나 귓가로 밀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이리 붉어. 아기씨가 그리 물으시면 괜히, 추워서 그런가 봐요, 별당에 온돌이 뜨끈해서 그런가 봐요, 하며 변변찮은 변명을 해 댔다. 왜인지 아기씨가 저를 불러 줘서라고 말하기에는 영 무엇해서 그리 말할 수가 없었다.
문을 열면 자리옷 입은 아기씨가 이부자리 속에 앉아 나를 보며 웃으셨다. 휘황찬란한 오색빛깔 비단옷을 아니 입으셔도 허연 자리옷 차림의 아기씨는 저기 마당에 핀 작약꽃보다 훨씬 아름다우셨다. 귀찮다고 머릿기름도 안 바르시는데 숱 많은 머리카락은 절로 미끈하고, 새하얀 얼굴에 콕 찍힌 붉은 입술이 하얀 꽃 안에 붉은 수술마냥 피어 있었다.
“뭐 하니?”
아기씨는 일어나면 꼭 자신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라고 하셨다. 제가 불경하게 아기씨 잠을 깨우면요, 하고 물으니 나는 늘 깨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말씀대로 아기씨는 내가 언제 일어나 찾아가든 늘 자리에 앉아 복향이 왔니, 하며 맞아 주셨다.
일어나거든 빨리 찾아오란 말의 저의는 이랬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몸 좀 녹이다 햇빛이 내리쬐어 공기가 좀 데워지거든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가요, 아기씨.”
나는 면구스럽게도 아기씨 옆자리에 앉아 몸을 녹였다. 처음에는 천것이 어찌 아기씨와 같은 자리에 앉느냐고 송구스러워 그러지 못한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는데, 아기씨는 오히려 그것에 펄쩍 뛰며 화를 내셨다. 내가 좋다는데 무엇이 송구스럽냐는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나 죽었다 하며 아기씨 옆자리에 기어들어 갔다.
비단 금침이 아기씨 살결마냥 보드레했다.
“차갑다.”
아기씨가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씀하셨다. 거칠은 손이 괜히 부끄러워 빼내려고 하니 그보다 거센 힘이 내 손을 쑤욱 잡아당겨 따뜻한 목덜미에 아주 묻어 버렸다.
“아기씨!”
“하하, 차갑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피부에 금세 손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달아오르다 못해 짜릿하기까지 했다.
아기씨는 차갑다고 하시면서도 목덜미에 내 손을 비비셨다. 아기씨 피부는 꼭 아침에 핀 나팔꽃마냥 보들보들한 것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모른다.
입으로는 송구스럽다 하면서도 더 만져 보고 싶어서 괜히 손가락을 살짝 꼼지락거리니 아기씨가 깜짝 놀라신다. 아, 내가 또 주책을…….
손을 빼고 사죄를 하려는데 아기씨가 다시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만져 보고 싶었어?”
“아니요, 아니요, 아기씨. 제가 감히 어째 그래요.”
급히 사죄의 말을 주절거리는데 아기씨 얼굴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역시 불쾌하셨던 게 분명하다.
아기씨는 보통 잘 웃고 상냥하시지마는 수틀리면 토라지시는 것이 장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없는 말주변으로 온종일 아기씨 비위를 맞추어야 겨우 화를 푸실 적도 있었다. 다 미련하고 모자란 저의 탓이었다.
“너는 내가 닿는 것도 싫으니?”
“예?”
“봐라, 손이 얼음장 같은 것이 딱해 녹여 주려 잡았기로서니 그렇게 질겁하며 싫다고 해?”
“아기씨 말씀이 이상합니다. 제가 언제 그래요?”
“만져 보고 싶냐 물으니 절대 아니라며!”
“아니요, 아니요. 송구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싫은 것이 절대 아니어요.”
“정말인가?”
“그러믄요. 어디라고 거짓부렁을 해요.”
“그러면 얼마나 좋지?”
토라짐 끝에 늘 나오는 물음이었다. 얼마나 좋지? 이럴 때는 아기씨가 얼마나 좋은지 아기씨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줄줄 읊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모자람이 있거나 누군가 다음으로 좋다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아주 호령이 떨어졌으니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저는 우리 아기씨가 가장 좋지요. 가장 좋으니 일어나자마자 보러 오는 것 아니겠어요. 저어기, 뭐야. 때가 아니어도 눈이 떠지면은 혹시 이 밤중에라도 우리 아기씨 나를 기다리실까 봐 다시 눈 안 감고 다리 놀려서 별당으로 오지요.”
말이 먹혔는지 찌푸리며 꾹 감고 있던 눈 중 하나가 슬며시 열렸다. 눈짓하는 것이 더 해 보라는 모양새였다.
“어리숙한 천것이 입을 잘못 놀린 것이지, 어찌 아기씨랑 닿는 것이 싫겠어요? 생전 저는 아기씨만큼 고운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마당에 모란이 아기씨보다 곱나, 동백이 아기씨보다 곱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아기씨만큼 고운 게 없는데.”
“꽃만 그렇고?”
“꽃만 그렇나? 나는 온종일 아기씨만 보니 아기씨만큼 어여쁜 다른 건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고 볼 생각도 없는걸.”
“그렇지?”
그제야 아기씨가 벙긋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시 내 손을 잡더니 아예 깍지까지 끼셨다.
혹여나 내 거친 피부에 아기씨가 따가우실까 봐 헐겁게 잡으니 또 호령이 떨어졌다.
“너 진심 나 곱다는 것 맞니? 말만 달큼하게 늘어놓고 행동이 다르니 내가 믿을 수가 없다.”
“아이고, 왜 자꾸 의심을 하실까. 손이 거칠어 아기씨가 따가우실까 봐 그랬어요.”
“손이?”
그러더니 이불 속에서 마주 잡은 손을 꺼내 요리조리 돌려 보셨다. 버석하게 일어나고 쩍쩍 갈라진 손이 부끄러워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몰랐다. 왜 몰랐지?”
아기씨는 진심으로 왜 자기가 몰랐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셨다. 내가 왜 몰랐지? 눈알에 깍지가 껴서 그랬나. 그러면서 주섬주섬 경대를 뒤지시더니 밀랍에 당귀에 동백기름을 넣어 만든 연고를 꺼내어 내 손에 덕지덕지 발라 주셨다.
“아기씨, 아까워요.”
“뭐가? 온종일 온돌 위에 누워 있는 내 손이 트겠니? 내가 쓸 일이 없으니 먼지만 쌓일 물건이라 너 쓰는 것이 이치에 맞다.”
손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기름 덕에 살갗이 반지르르해진 것이 어찌 좀 보기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아기씨 덕에 호강이다.
“정 아까우면 내 손에도 발라 주련?”
“그러믄요.”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고가 담긴 통을 건네주시질 않는다.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니 아기씨가 내 손을 가리켰다.
“네 손에 많은데 뭘 또 꺼내니? 우리 복향이, 몰랐는데 낭비벽이 좀 있다. 너 데려갈 남자는 바지런히 일해야겠구나.”
이러려고 덕지덕지 발라 주셨나. 졸지에 아기씨 손을 평생 만질 만치 더듬게 생겼다.
쭈뼛거리며 아기씨 고운 손을 잡았다. 또 맞닿은 부분이 찌릿했다. 이제 차갑다가 갑자기 따뜻해진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 손바닥으로 아기씨 손등을 슬슬 문질렀다.
양 손등을 그렇게 문지르고 나서는 손을 떼려는데 또 혼이 났다.
“내 손이 언제부터 고만큼뿐이었나?”
다시 손을 잡고 손바닥끼리 살살 맞대었다. 이러면 아기씨 맘에 드는가 싶어 눈을 들어 쳐다보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아기씨와 눈이 마주쳤다. 큼지막한 개암색 눈이 매끄럽게 반짝이고 입꼬리가 사악 올라간 것이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아기씨가 좋으면은 나도 좋은 것인데 왜인지 배가 간질거려서 참기가 어려웠다. 후딱 하고 빨리 손을 놔야지.
손바닥을 비비던 손을 손가락 쪽으로 옮겨 섬섬옥수를 하나씩 쥐고 문대는데 아기씨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내 손을 콱 잡았다.
“인제 그만해도 된다.”
“그래요?”
나는 좋다고 대답했는데 그러고도 손을 놔 주시지 않았다. 이제 몸에 열이 올랐으니 나가서 아궁이에 불 때서 아기씨 세숫물 받아야 하는데…….
“너 이거 먹어라.”
아기씨가 한쪽 팔만 저쪽으로 쑤욱 뻗더니 귤이 담긴 광주리를 쥐여 주셨다.
“아직 추워서 그런가 제법 달다. 추워도 좋은 게 있다. 그렇지?”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말했다.
아기씨가 주시는 대부분의 것들은 몹시 과분한 것들이라 송구스러워 못 받습니다, 하며 거절을 하지마는 먹을 것은 좀 참기 어려웠다. 아기씨 수발드는 것이 힘든 일은 아니지만 다른 몸종들이 나를 우습게 알고 일을 떠넘기거나 밥에 장난질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비질을 하게 시키고서는 밥때 다 지났는데 왜 이제 오냐며 숭늉 그릇만 내밀 때도 있었다. 그러니 아기씨가 주실 때 날름 잘 챙겨 먹어야 배를 곯지 않았다.
“달아요.”
이불 안에 넣어 두셨는지 뜨끈한 귤이 시큼한 맛 없이 그저 달큰했다. 이것이 꿀맛인갑다.
허겁지겁 씹다가 은혜 모르는 종년이 혼자 입에 귀한 것을 처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부끄러워졌다. 급히 귤 하나를 새로 까서 한쪽을 크게 떼어 아기씨 입 쪽으로 내밀었다.
아기씨는 불쾌한 기색도 없이 내가 먹으면 먹는 대로 웃으시고 귤을 내밀면 내미는 대로 웃으셨다. 항시 다정하시다니까.
아기씨는 내미는 내 손가락째로 입에 넣으시더니 내가 손가락을 빼기도 전에 콱 씹어 버려 터져 나온 과즙이 내 손을 타고 줄줄 흘렀다. 이런, 아깝게! 입에 넣어 쪽쪽 빨고 있으니 아기씨 눈길이 내 얼굴에 콕 박혔다. 너무 추접스럽게 굴었나 보다.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이제…… 이제 저는 나가 볼게요. 아기씨 세숫물 들여야지요.”
“필요 없다. 더 앉아 있어.”
“예?”
“너 오기 전에 미리 씻었지.”
“어찌 귀한 몸이 먼저 움직이셨어요?”
“네가 곱다며.”
아기씨가 나리꽃마냥 곱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복향이가 곱다고 했으니 늘상 고운 모습으로 있어야지.
아기씨 고운 것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나는 괜히 또 심장이 벌렁댔다. 아기씨를 보기 힘들어 광주리에 담긴 귤만 부여잡고 줄기차게 입에 처넣었다. 그 탓에 공연히 귤껍질만 호되게 찢겨야 했다.
*
“계희 고 육시랄 년이……!”
습관적으로 욕을 지껄이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냥, 그냥 다들 하는 욕이었기에 나도 아무 주저 없이 입에 담곤 했는데 내가 욕을 하는 것을 본 아기씨가 너 그거 무슨 욕인지 아니 하며 물으셨다. 욕이면 욕이지 무슨 욕이 따로 있나?
‘너 그거 시체 파내서 다시 목 자른다는 뜻이다.’
‘예에?’
너무나 끔찍했다. 시체라면은 다 썩어 뭉크러지고 벌레가 들끓을 텐데 그것을 어찌 파내나? 더러운 일이니 비복들이 맡아 할 텐데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 욕 안 해야지. 나보고 파라고 하면 어째. 그런데도 이미 입에 붙은 것인지 종종 나도 모르게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계희 나쁜 년, 고약한 년…….”
급하게 다른 욕을 중얼거렸다. 아기씨는 욕을 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아기씨도 아시면은 욕을 한 바가지 하실 게다.
아침에 귤을 한 광주리 입에 넣고 별당 아궁이 쑤시고 마당 비질하고 마루 훔치고 글 쓰신다 하면은 옆에서 먹 갈아 드리고 아기씨 점심 챙겨 방에 넣고 나도 늦은 점심 하러 돌아와 보니 계희 년이 또 지랄을 해 댔다.
소매에 자국 저거 무어냐? 새콤한 냄새 봐라. 종년 팔자 전부 박복하다는 거 다 거짓부렁이다. 나는 딱 저년처럼만 살고 싶다. 이러면서 면박을 줘 댔다.
지가 아기씨 눈에 못 든 것을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면상에 심술만 그득 붙었으니 상전께서 알아보고 못 써먹겠다 하시는 거지.
톡 쏘아붙여 주고 싶었으나 입을 열지 못했다. 계희가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을 숨기지 않아도 아무도 말리는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냥 심드렁하니 입에 밥숟갈만 넣어 댔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입 다물고 종일 죽어라 일만 하는데 왜 나를 못살게 구는지. 괜히 밥숟갈로 삶은 무가 반절인 밥그릇을 푹푹 찔렀다.
나는 부모가 없었다. 이 집 주인이셨던 노부인이 너그럽고 정이 많다는 것이 동리 밖까지 소문이 나 대문 앞에 버려진 것이 나였다.
다행히 노부인은 소문대로신지라 불쌍타 하며 거두어 주셨지만, 애새끼가 갑자기 뚝 떨어져 일이 늘어난 계집종들은 내 존재를 별로 반기질 않았다. 눈칫밥 먹고 큰 터라 먼저 살갑게 알은체도 못 하는데, 나 말고는 조부모 때부터 여기 살던 애들 천지라 텃세 아닌 텃세도 진창 당했다.
‘신분이 뭔지도 모를 버려진 년인데 우리랑 어떻게 같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소리였다. 사실 백정 년이면 어떡하냐고 쑥덕댔다. 아니, 그러믄 양반 자식일 수도 있고 중인 자식일 수도 있지 그런 건 왜 쏘옥 빼나. 저들은 덮어놓고 나를 천것 중의 천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무시만 하지 눈에 드러나는 괴롭힘은 없었는데 아기씨가 내 시중 받고 싶다 하신 후부터는 배알이 꼴린지 괴롭힘이 심해졌다. 모두가 아기씨 시중을 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병자 시중 까다롭다 하여도 아기씨는 그냥 몸이 약하신 것이지 중병은 아니라 성정도 너그러우시고 또 종년 팔자에 없는 비단옷이며 노리개 같은 귀물을 눈과 손으로나마 한껏 즐겨 볼 수 있으니 다들 내심 저를 골라 주십사 바라는 것이다. 입의 혀처럼 굴면 또 아나. 다디단 떡고물 떨어질지.
그런데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년이 떡하니 아기씨 옆자리에 들어앉아서 비단옷은 아니어도 누비옷에, 꽃신은 아니어도 가죽신 신고 온갖 달큼한 냄새를 풍겨 대니 속이 쓰리다 못해 신물이 죽죽 나겠지.
그 생각을 하니 별 같잖은 괴롭힘도 견딜 만했다.
나한테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것도 보통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아기씨가 그러하다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우리 아기씨가 나를 좋아하신다고. 만날 우리 복향이 하신다니까.
고런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어 대니 계희 년 속이 또 비틀린 것이 분명했다.
면박을 반찬 삼아 꾸역꾸역 점심밥 먹고는 아기씨 방 치우러 달려갔다. 점심상 내리고 창문 열고 환기하고 걸레로 방바닥 벅벅 닦고는 이불 새로 갈아서 깔아 놨더랬다.
내가 분주히 움직일 동안 아기씨는 마루에 앉아 차와 떡을 먹고 계셨는데 힐긋힐긋 보니 차는 줄어들어도 떡은 영 줄어들지 않음이라. 수국잎차에 두텁떡이었는데 아무래도 떡은 나 줄라구 안 드시려는갑지? 아고, 설레발이다.
“다 했니?”
“예, 아기씨.”
“그러믄 너 이거 먹어라.”
생각대로 아기씨가 떡 먹어라, 접시를 밀어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척, 송구해 죽겠다는 척을 하며 하나 집어 입에 쏙 넣는데 고소하고 달고 아무튼 천하에 가장 맛난 것 중 하나였다.
우물우물 씹어 대니 아기씨가 찻물을 새로 따른 찻잔을 내미셨다.
“목 멘다. 마시면서 먹어라.”
“예에? 이 귀한 것을 제가 어찌 써요.”
아기씨 찻잔은 청자로 만들어서 이게 옥인가 도자기인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푸른 겉면에 흰색으로 그려진 무늬가 몹시…….
“아기씨!”
귀한 찻잔이 허공을 가르더니 바닥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저 아름다운 것은 깨지는 소리마저 청아했다.
“찻잔이 차 마시라고 있는 것인데 귀하다고 쓸모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귀한가? 박살 나도 할 말 없다.”
아고, 또 화가 나셨구나. 고운 눈썹을 살벌하게 구긴 아기씨가 쌀쌀맞게 내뱉으셨다.
아까까지는 새끼 새 돌보는 어미 새마냥 눈이고 입이고 웃는 낯이더마는 또 왜 저러실까. 아기씨를 좋아하는 것은 진정이지만 가끔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이, 천것이 송구스러워 한번 맘에도 없는 거절 한 것을 그렇게 던져 버리시면 어째요? 한 번만 더 물어보셨으면 감사하다 하고 입에 넣었을 것인데.”
“정말이야?”
“그러믄요. 찻주전자는 멀쩡하니 제가 발을 빨리 놀려서 새 잔 가져올 것입니다. 아기씨가 주신 것이니 못 마실 게 없다.”
“나처럼 예쁜 것으로 가져와.”
늦으면 또 경을 칠까 봐 쏜살같이 달려갔다 와서 다시 함박꽃마냥 웃는 아기씨를 앞에 두고 가져온 잔으로 찻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사실 아닌 척했지마는 깨어진 잔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입으로 들어가는 게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들큼했다.
놀란 마음 때문인지 입맛이 없어져서 남은 떡은 나중에 허기지면 먹으려고 헝겊에 싸서 행랑채 방에 치마 사이에 몰래 숨겨 두었다. 근데 좀 있다 와서 보니 그것이 홀라당 사라진 것이다. 개같은 년…….
그년 또 청수 갖다준다고 들고 날랐구나. 무어가 자꾸 없어지긴 하는데 계희한테서 보인 일이 없으니 이것 참 귀신 짓인가 하였는데 알고 보니 청수를 외사랑하는 계희가 맛난 것이나 귀한 것이 있으면 가져다가 죄 줘 버리는 것이었다.
망할 년이 좋아하는 사내한테 훔친 것을 주나? 훔친 것을 주는 건지 주고 싶어서 훔치는 건지……. 그 정도로 좋은가?
하긴, 청수가 썩 잘생기긴 했다. 지금 나이가 열여섯이랬나 열일곱이랬나…… 아무튼 어른도 아닌데 키가 어른만치 훌쩍 크고 허벅지도 굵었다.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요리조리 잘 박혀서 어릴 때부터 주변 여자들이 청수 보는 눈이 퍽 남달랐다.
아기씨 시중들기 전에는 좀 자주 봤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온종일 별당에만 있으니 근래에는 청수 본 게 손에 꼽는다.
사내놈인데 다정하니 제법 살갑긴 해. 계희 년도 그렇고 좋아할 법하단 말이야.
저번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청수가 먼저 인사를 걸더니 잘 지냈느냐 아픈 데는 없느냐 날씨가 좋지 않으냐 배가 고프진 않냐 어딜 가는 길이냐 하고 쉴 새 없이 말을 걸어 댔었다. 아기씨 심부름 간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온종일 붙잡고 질문을 할 태세였다. 고러니 여자들이 좋아하는갑다. 사내놈이 싹싹해.
근데 또 고놈이 그리 순하니까 계희를 족치지도 못하겠는 것이다. 아깝지마는 또 청수한테 들어간다고 하면 썩 나쁘지도 않을 것 같고……. 에라이. 청수한테 계희 고년이 주는 거 받지 말라고 해? 아, 그러면 또 나를 쥐 잡듯이 잡을라구 할 텐데.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어째 인생에 되는 일이 없다, 되는 일이.
허한 속으로 탕약을 달였다. 아기씨 간식 드실 적마다 같이 주워 먹은 지가 좀 됐더니 눈치도 없는 배가 때마다 뭐라도 넣어 달라 지랄이 났다. 그래도 이거 드시라 가져다드리면 나한테 엿 조각 하나는 주시겠지? 말린 감이라도 주실지도 모른다. 콩떡도 좋은데…….
주전부리 생각을 하니 부채를 든 손이 더욱 힘차졌다. 빨리 달일수록 간식도 빨리 먹을 수 있다.
“아기씨, 들어가요.”
문을 열고 죽어라 달인 약을 올린 소반을 들였다. 봉춘 어멈이 아기씨 입 쓰지 말라고 생강을 얇게 저며 설탕에 조려 말린 편강을 챙겨 주었다. 편강…… 알싸하니 입에 침이 고이고 씹으면 달달하고 쫄깃하니…….
“이거는 복향이 먹으렴.”
아기씨는 생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쓰디쓴 약은 잘만 들이켜시면서 요 달짝지근한 것은 안 내켜 하셨다. 그러고 보면 절편도 안 좋아하시고 화채도 영 싫어하시지.
봉춘 어멈이 알았으면 다른 입가심거리로 바꾸었겠지마는 맨날 내 입에 다 들어가 빈 그릇만 나오니 그저 아기씨가 다 잘 먹는구나, 하는 것이다. 나도 구태여 아기씨 생강 안 좋아하십니다, 하지 않았다. 아기씨가 말하라고 하신 적 없는걸.
“맛있니?”
나는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씨는 나 먹는 것만 봐도 입이 달다고 하셨다. 그러면은 나는 왜인지 얼굴이 벌게졌다. 어쩐지 편강이 평소보다 더 단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뭐 했니?”
아기씨는 꼭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물었지만 사실 아기씨와 내가 떨어진 것은 밥 먹거나 심부름하거나 잠자는 시간뿐이었다. 그 외에는 진종일 붙어 있었는데 잠시간 떨어진 일로도 저렇게 묻곤 하셨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된다. 처음 몇 번은 사실대로 오늘 누굴 만났고 누구랑 이야기를 했고 누구와 무얼 먹었고 읊으니, 시키신 대로 대답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길길이 성을 내셨다.
몇 번 헛발질을 하다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기씨는 내가 아기씨 이야기만 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냥 그랬지요. 오늘 밥에는 삶은 무가 있었는데, 물컹하니 영 그랬어요. 감자나 고구마가 들어 있었으면 좋았을걸.”
“아기나 가려 먹는 것이다. 복향이 아기니?”
“무슨, 내일모레 시집도 갈 수 있는데 무슨 소리셔요.”
“아, 그 내일모레 참 더디게 온다.”
아기씨는 그러시며 하하 웃으셨다. 무어가 좋으실까.
종들은 혼기가 차면 재산을 불리기 위해 대충 짝을 지어 주고 새끼를 낳게 한다. 같은 집 종이면 운이 좋은 것이고 어쩌면 다른 집에 팔려 그 집 사내종을 지아비 삼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면은…… 그러면은 아기씨를 모실 수 없는데. 그즈음이면 아기씨도 곱게 자란 훤칠한 도련님과 혼담이 오갈 터인데……. 성혼하여 그 집 가실 적에 유모가 아니면은 비슷한 미혼 처녀 애들이나 데리고 가실 것인데…….
나는 괜히 꽁해졌다.
“복향이 얼굴이 왜 그리 어두울까?”
아기씨가 내 기분이 저조해진 것을 아시고는 달래는 말씀을 하셨다. 건방지게도 나는 왜 토라졌는지 쉽게 알려 드리고 싶지 않았다. 아기씨도 가끔은 속 좀 썩어 보셔야 해.
“기분이 안 좋으니? 내가 말을 잘못했니?”
“아기씨가 무얼요…….”
온 얼굴로 속이 상했음을 피력하면서 괜히 아니라고 했다.
“이걸 어쩌나. 속상하면 내가 주는 것도 싫으니? 타래과 가져다 놓았는데…….”
“아기씨도 참 이상하시다. 제가 언제 속이 상했다고 그러셔요? 복향이는 만날 겉도 속도 튼튼한데.”
아기씨가 내미는 타래과를 날름 집어 입에 쏘옥 넣었다. 꿀물로 반죽해서 기름에 튀긴 타래과는 잔칫날에나 구경하는 귀한 것이었다. 달콤하고도 고소한 것이 맛이 기가 막히다, 기가 막혀……. 혀 밑에 숨겨 두고 날마다 핥아 먹고 싶다.
“맛이 좋으니?”
“예!”
신이 나서 대답했다. 우울함은 진즉 타래과와 함께 삼켜 버린 후였다.
*
나는 요새 조금 바빠졌다. 행랑채와 아기씨가 계신 내별당을 오가는 사이에 들를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비 게 있느냐?”
그렇게 부르면은 어디 숨어 있는 줄 모르겠던 녀석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나타났다.
별당 뒤 담장 근처에서 어디 자리를 튼 것인지 그 근처에서 부르면은 담장을 폴짝 넘어 나에게 걸어왔다. 내가 좋아서 오는 것 같은데 얼마나 새침을 떠는지 나를 보고서도 절대 먼저 다가오지 않고 내가 손짓, 발짓 하며 제발 제 옆으로 좀 와 주십사 하고 빌듯이 해야 저기 한번 쳐다보고 여기 한번 쳐다보면서 아주 유람을 하며 걸어오신다.
그래 놓고는 막상 오면은 내 다리에 온몸을 비비며 쓰다듬어 달라고 애옹거리는 것이다.
꼭 누구를 닮았다니까…….
머리며 등이며 벅벅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꼬리가 아주 하늘을 향해 치솟은 채로 살랑거린다.
“너 나 기다리는 것이니 아니면 이거 기다리는 것이니.”
손에 쥐고 온 다시물 내고 남은 멸치 몇 개를 내미니 또 금세 나는 뒷전이고 멸치 씹는 데에 정신이 없다. 너 생긴 게 몹시 귀여워서 내가 봐주는 줄 알아라. 나는 원래 은혜 모르는 것은 질색한다.
다 먹으니 기분 좋다고 또 드러누워서는 자기 쳐다보라고 배를 까 대며 요리 누웠다가 조리 누웠다가 하며 귀염을 떨었다. 몸통은 검은데 배는 허예서 털이 탐스러웠다.
에라, 모르겠다. 양손으로 드러난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주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있던 나비가 정신을 차리고 앙! 하고 울더니 벌떡 일어나 멀리 달려갔다.
킬킬거리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저렇게 가도 내가 다시 멸치 쥐고 부르면 또 어슬렁어슬렁거리며 다가올 것이다. 그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실실 올라갔다.
“요새 기분이 좋구나.”
점심상 내가니 아기씨가 물으셨다. 아이고, 얼굴에 티가 났나.
“제가 또 낯짝 단속을 못 하고…….”
“뭘 또 그렇게 말을 해? 보기 좋아서 말한 건데.”
“그러셔요? 그게 말이에요, 아기씨. 고양이가 한 마리 들어왔지 뭐예요.”
사람 이야기는 질색하시지마는 고양이는 귀엽다 하실 것 같아서 사실대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성격만 비슷한 게 아니고 생긴 것도 비슷했다. 새침허니 매초롬하게 생긴 것이나 검고 허연 것이. 아기씨도 분명 고양이 보면 나처럼 곱구나, 하시며 좋아하실 것이다.
“얼마나 살가운지 몰라요. 고 짐승이 보통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아서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거나 무섭다고 도망을 가는데, 요 요물은 처음 볼 때부터 제 종아리에 코를 비비더라니까요.”
“그랬어?”
예상대로 아기씨는 맞장구까지 치며 흥미를 보이셨다.
“그렇다니까요.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간드러지는지 몰라요.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암컷이겠죠? 수컷이 그리 울었다가는 고추 떨어질 것이다.”
“음.”
“고것이 아양을 부려 여기저기서 얻어먹는 게 많은지 길에서 크는 게 털도 보드레하니 윤기가 흐른다니까요. 생긴 것도 제법 보기 좋다 할 만하고 털이 비단옷 저리 가라 하는지라 만지는 재미가 있어요.”
아기씨는 내 말을 다 듣고도 뭐라 말씀 없이 입에 밥만 집어넣으셨다. 짐승은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 정말로 이쁜데…….
“복향아.”
“예?”
“나 목욕간 써야겠다.”
“아! 그러믄요. 물에다가 말린 국화 좀 띄울까요? 가을에 말린 게 제법 있습니다. 저번에 향기가 제법 좋다 하셨지요?”
“응.”
나는 그길로 내별당을 나가서 보이는 사내종에게 아기씨 목욕물 받아 달라 일렀다. 이르기는 했지만서도 나도 뜨신 물 담긴 물통을 바지런히 같이 퍼 날랐다. 나무 욕통에 차오르는 뜨끈한 김에 땀이 뻘뻘 흘렀다. 남들 추워서 손 곱고 발 어는데 나는 땀 흘리니 이것도 호사라.
물이 식기 전에 발을 재게 놀려서 넙데데한 광주리에 말려 놓은 국화꽃 한 뭉텅이를 가져와 목욕물에 들이부었다. 아, 향이 아주 기똥차다.
닦으실 면포까지 다 챙겨 놓고 아기씨를 불렀다.
“아기씨, 준비 다 됐어요.”
“오냐.”
아기씨는 목욕 시중을 받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나한테서만 받지 않는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처음부터 받으시지 않았다고 한다. 귀한 몸이 어찌 홀로 씻으신단 말인가…….
여러 번 읍소하였더니 아기씨가 나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내가 어렸을 적 심하게 앓아서 몸이 흉하다.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그러니 너는 더 청하지 마라. 싫다 하는 내 마음도 불편한 것을 아니?’
상전이 불편하시다는데 더 권할 주제가 되지 않아 그 후로는 입을 다물었다.
내 눈에는 아기씨 몸이 어떻게 되어 있어도 흉해 보이지 않을 텐데……. 피부가 얼룩덜룩 어그러져 있어도 개의치 않아 할 자신이 있었지마는 괜한 주책이다 싶어 말 더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아기씨, 정말 시중 아니 듭니까?”
“그렇다니까.”
“제가 등이라도 밀어 드리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
“저어기 뭐야, 물 식으면은 뜨신 물 다시 부어 드리는 것도 안 되고?”
“복향아.”
“아이, 당연히 안 되고말고. 저는 아기씨 점심상이나 치울 것이어요.”
호령 떨어지기 전에 후다닥 내뺐다.
점심상에 애호박전이 손도 안 댄 채로 곱게 접시에 담겨 있길래 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요 말캉한 것이 꽤 진미라니까. 기름 맛 좀 보아라. 육전만큼 고소하다.
점심상을 배 속으로 치우고 나도 대충 배춧국에 밥 말아 섞박지 올려 훌훌 넘겼다. 아, 고기반찬 없어도 이리 맛나다. 오늘은 계희 년 없어서 그런가.
고년은 요새 밥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고는 청수 보러 가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밤에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청수가 영 계희에게 맘이 없어서 고년이 더 애가 닳아 똥 마려운 개처럼 청수 주위를 맴도는 듯했다. 아, 이게 고기반찬이라 다른 게 필요 없었구나. 아고, 꼴좋다.
국에 만 밥을 유밀과 먹듯 달게 삼키고는 또 내별당을 향해 잽싸게 발을 놀렸다. 목욕 시중은 아니 든다지만 목욕간에서 옷 입고 나오시면 머리 말려 드리고 뒤처리하는 것은 또 내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아기씨가 목욕간에서 나오고 계셨다. 하얀 자리옷 입고 주위로 훈김이 뿌옇게 피어오르니 저것이 선녀가 강림한 자태인가 싶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긴 머리칼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는 걸 반복해 물기를 빼고는 빗질을 하려는데 아기씨가 내 손을 멈추게 하셨다.
“뭐 필요하신 것 있으세요?”
“임자유 발라서 말려라.”
무슨 바람이신지 질색하는 머릿기름을 바르라고 하셨다. 나야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라 기름 쪼르륵 부어 빗질하니 아기씨가 제 손으로 미안수 덜어 얼굴에 두드리셨다.
아기씨로 말할 것 같으면 세수는 하루에 열 번 해도 물 외에는 얼굴에 대는 게 없는 분이셨다. 내가 그렇게 아기씨 요것 좀 찍어 발라 보셔요, 타령을 해도 안 들으시더니 무슨 조화일까?
한겨울에도 매끄러운 피부가 미안수 바르니 윤기가 줄줄 흐르고 삼단 같은 머리가 저기 밤하늘에 별이 촘촘하게 줄지어 뜬 양 반짝거렸다. 손등으로 몰래 쓰다듬으니 방 한구석에 놓인 옷궤에서 하는 일 없이 숨만 쉬고 있는 비단옷과 감촉이 다르지 않았다.
“고우니?”
“예?”
“나 고우냐고.”
“아……! 그러믄요.”
“또 입바른 소리. 언제 물어도 다 곱다고 대답하니 믿을 수가 없다.”
아이고. 목욕 잘하시고 왜 심통이 나셨을까?
물음도 이상했다. 곱다고 칭송한 것이 며칠도 지나지 않았음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밥 잘 드시고 잠 잘 주무시고 목욕까지 하셨는데 당연히 여전히 고우시지 뭐가 변했다고 또 내 말을 못 믿는다 하실까?
“아까 목욕간에서 나오는 아기씨 보고 제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아셔요?”
“네가 말도 안 해 주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아이, 선녀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줄 알고 날개옷 어딨나 두리번거렸다!”
“정말?”
“그렇다니까요. 그때도 놀랐지마는 지금도 어찌나 고우신지 몰라요. 더 고와지시면은 어쩌지? 천것이 아기씨 미모에 눈이 멀어서 일 못 하면 누가 먹여 살리나?”
“아, 우리 복향이 입에 들어가는 건 내가 책임질 수 있지. 걱정 말아라.”
“아고, 저는 아기씨만 믿고 삽니다.”
유들거리게 말을 붙였더니 아기씨 얼굴이 보름달마냥 환해졌다. 그러면은, 그러면은 말이다. 복향아.
“그 고양이랑 나 둘 중에 누가 더 고우냐.”
허어, 이제 보니 아기씨는 아침에 내가 고양이 이야기를 한 것을 마음에 두고 목욕을 하고 생떼를 부리신 것이구나. 아직도 나는 아기씨를 모른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당연히 아기씨가 곱지요. 길에 사는 짐승이 어디 댈 것인가?”
“그러니?”
하하하. 그렇구나. 아기씨는 시원하게 웃으셨다. 앙탈은 많으셔도 지나간 일은 마음에 두지 않는 성정이시라 모시기 영 까다롭진 않았다.
애옹.
이게 무슨 소리인가. 호랑이도 아닌 놈이 어째 시간을 이렇게 잘 맞추어 찾아온대?
힐긋 아기씨 눈치를 보는데 의외로 아기씨는 꺼리는 기색 없이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계셨다.
“나도 고양이 보고 싶다.”
“머리칼이 아직 덜 말라서 바람 맞으시면 안 되는데…….”
“잠깐만 볼 것이다. 응?”
“정말 잠깐만이어요.”
아기씨 모시고 뒷마당으로 가니 나비가 담장 기와 위에 앉아 있다가 폴짝 뛰어내려 젠체를 하며 다가왔다. 저놈은 자기가 불러 놓고 왜 저런대. 혼자 있을 때는 몰라도 귀한 분 모시고 저 꼴을 보니 못내 민망했다.
“저것이 왜 저럴까. 빈손으로 와서 그런가. 하하하.”
괜히 헛웃음 흘리는데 아기씨도 마주 웃어 주셨다. 다행히 노여워하시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나비가 내 발밑까지 다가와 이마며 엉덩이를 비벼 댔다.
“너 이것 본 지 오래됐니?”
“아니요. 나흘 됐나 싶어요. 얘가 몇 년은 본 것처럼 아주 살갑지요?”
“그렇구나. 귀엽다.”
아기씨는 내가 쓰다듬는 나비의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몇 번 톡톡 치시고는 싱겁게 말씀하셨다. 내 눈에만 귀여운가…….
“복향아.”
“예, 아기씨.”
“나 시장하다.”
“혼자 목욕하셔 가지고 그런가 봐요. 어째, 오늘 고깃국이라도 해 달라고 해야겠어요.”
“응. 저녁상 봐 다오.”
날쌔게 가서 아기씨 저녁상 좀 봐 주소, 하고 봉춘 어멈한테 전했다. 아기씨 속이 허하시답니다. 한마디 보태니 소갈비를 넣은 국이 구수한 내음을 흘리며 상에 올랐다.
고깃국인데도 국물이 맹물마냥 맑았다. 이런 국이 진짜 참맛인데 한 숟갈만 해 보았으면…….
내 마음을 아셨는지 내 눈빛을 아셨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뭔가가 튀어 나갔는지 아기씨가 국 한 입 하시더니 비리다고 남기셨다. 나는 그것을 대접째로 훌훌 들이켰다. 아, 이것이 비린 것이면 나는 만날 비린내만 맡고 살 것이다.
이날은 자기 전까지도 배가 든든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아기씨 밥과 간식을 야금야금 주워 먹는데 매일 보이던 나비가 보이질 않았다. 아기씨가 준 도라지정과를 씹으며 아무리 담장을 빙빙 돌아도 꼬리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겨 아기씨께 말씀드렸더니 고것이 어디 갔을까 하며 깜짝 놀라셨다. 아기씨 고것이 아기씨랑 봤을 때, 그때 이후로 보이질 않아요. 이상하지요. 음, 그렇구나. 근데 이제 어디서 찾겠니. 가고 싶은 곳으로 멀리 갔겠지.
그러시더니 옷궤에서 미색 무명 치마를 하나 꺼내셨다. 이거 복향이 해라. 새것이잖아요! 아고, 깨끗하니 곱다.
새 치마를 허리에 대고 요리조리 움직여 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갑자기 사라진 나비에 대한 궁금증 또한 깨끗하게 날아갔다. 그런 내 모습을 아기씨가 흡족하게 바라보셨다.
*
“허어, 오색 비단 좋은 옷 놔두고 뭐 하는 짓이람.”
제가 하겠다고 한 것이지마는 불평이 나왔다. 아기씨가 볼품없는 허연 자리옷만, 물론 아기씨는 거적때기를 뒤집어써도 아름다우시겠지마는, 입으시는 게 마음이 쓰여서 자리옷 치마랑 소매에 자수를 넣긴 넣는데 영 시원찮아서 마음에 들지가 않는 것이다.
저기 옷궤에 있는 꽃분홍 고운 저고리에 연두색 화사한 치마에 비단옷이 아주 궤짝으로 들어차 있는데 밋밋한 자리옷만 좋다 하시니…….
한번 입어 보십사 했더니 오히려 복향이 마음에 들면 네가 입을래 하시며 나를 펄쩍 뛰게 하셨다. 아니, 아기씨 옷을 내가 어떻게 입는담. 아고, 말만으로도 황송해서 그날로 딱 숨넘어갈 것이다.
수를 놓긴 놓았는데 흰 바탕이라 영 힘이 없었다. 주무실 때 입으시는 건데 닿는 게 거칠까 봐 크게 모양을 내 보지도 못했으니……. 아, 재미가 있으려면 좀 울긋불긋하고 그래야지.
그런데도 아기씨는 무어가 좋은지 얼굴을 펴고 벙글거리셨다.
“치마가 잘 어울리는구나.”
“제가 잘 어울려서 무얼 해요.”
“네 옷인데 네게 잘 어울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있니.”
괜히 불퉁하게 대답이 나왔다. 그래도 아기씨는 좋게 좋게 웃으며 받아 주셨다. 자주 웃으셔. 예전에는 안 그러셨던 것 같은데.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4년쯤 전에 아기씨를 처음 모실 때는 이리 밝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때엔 몹시 앓으셔서 그랬을 터다.
으, 그날들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속이 아찔해진다. 예사 병이 아니었다. 하루는 열이 펄펄 끓더니 또 하루는 몸이 얼음장처럼 시퍼레졌다. 기침을 하시다가 이불에 토한 피를 찬물에 세답한 것이 여러 날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처음 가까이서 모신 주인이 죽어 간다는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두려운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틈만 나면 빌었다.
천지신명님 아기씨 살려 주세요, 우리 아기씨…….
지금은 돌아가신 주인마님이 아기씨 간호하실 적 그 옆에서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주인마님도 모시고 온 손님이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니 아주 정신이 없으셨다. 전국으로 용하다는 의원, 효험이 기가 막히다는 약재를 찾으러 사람을 보내다가 나중에는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하셨는지 본인께서 발 벗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셨다.
아기씨가 기침이라도 한번 하면 집에 있는 온 어른들이 다 뒤집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혼란한 틈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아기씨의 이마를 수건으로 닦아 내며 또 빌었다. 아기씨를 살려 주세요. 천지신명님, 부처님. 우리 아기씨 살려 주세요…….
그렇게 중얼중얼거리고 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가늘게 뜨인 아기씨의 눈과 마주쳤다. 하도 울어 붉게 짓무른 지 오래인 눈가는 보기만 해도 쓰라려 보였는데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연갈색 눈동자는 닫힐 줄을 몰랐다. 나는 내가 중얼거린 것이 시끄러워 그러시는 줄 알고 겁을 먹었는데, 허옇게 터진 입술이 노여움으로 열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가만가만 아기씨의 눈치를 보다가 떨어지는 땀방울이 눈에 들어갈까 싶어 수건으로 이마만 콕 찍었더랬다. 그럼에도 아기씨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이미 목이 말할 상태가 아니셨겠지마는…….
그렇게 이마에 땀이 흐르면 땀을 닦고 눈가에 눈물이 흐르면 눈물을 닦는, 아기씨는 나를 쳐다보고 나는 그런 아기씨의 고통을 부지런히 닦아 내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건강하시지. 더 건강하실 거고. 암, 암.
“혼자 무슨 생각 하길래 그렇게 실실 웃니?”
“무슨 생각이요. 제가 생각할 것이 무어가 있어요. 여기, 아기씨 옷에 자수 놓은 것 보실래요?”
나는 아기씨를 앞에 두고 아기씨 생각을 하다가 웃기까지 했다는 게, 그걸 또 아기씨께 들켰다는 게 겸연쩍어서 말을 돌렸다.
“왜 말을 돌려?”
허, 바로 들켰네.
“말을 돌리고 흔들고 할 게 어딨어요. 제가 지금까지 아기씨 옷에 자수 놓고 있었으니 그거 보시라고 하는 것이지. 아, 물론 아기씨 눈에는 볼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마는…….”
“너 청수 생각 하니?”
“예?”
청수라니. 내가 청수 생각을 왜 하나? 아니, 아기씨가 청수는 또 어떻게 아시지. 거기에 지금 상황에 청수 이름은 또 왜 나오는 거고?
“아니라고는 못 하는구나? 그렇지? 너 청수 생각 하지? 겉으로는 내 수발 들면서 고 작은 머리통으로는 그놈 생각을 하는 거지?”
“아니, 너무,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하셔서 대답을 못 한 거잖아요, 아기씨.”
“딱 들킨 것은 아니고? 그리하여 발뺌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너도…… 너도 그런 놈이 좋으니?”
“그런 놈이 무슨 놈인데요?”
“살갗도 잘 그을리고 망아지마냥 잘 뛰어다니고 팔다리도 굵직굵직하고 손아귀 힘도 세고 살갑게 말도 잘 붙이고…… 그런 놈 말이야!”
“청수가 그런 놈이에요?”
“그러믄? 너 저번에 청수 만난 것을 내가 아는데 너 청수 모른다고 할 거야?”
“알지요, 아는데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놈 어떤지 제가 어찌 알아요. 저번에 본 것도 말 몇 마디나 나누었나 다섯 손가락 안으로 셀 수도 있겠다. 근데 제가 청수 본 건 어찌 아셨어요?”
“정말 그놈을 잘 몰라?”
“그렇다니까요. 제가 그런 걸로 아기씨께 거짓부렁을 해서 무어가 이득이라고요.”
마가목 열매마냥 붉어졌던 얼굴이 서서히 제 빛깔을 찾았다. 열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변화였다.
아기씨는 다시 뽀얀 얼굴로 돌아와서는 내가 놓은 자수만 뚫어져라 보셨다.
“예쁘다.”
“자수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새끼손톱만 해 가지구…….”
나는 불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추궁당한 것이 불만인 게 첫 번째 이유요, 실제로 자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칭찬해 주시는 것이 민망한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뭐, 입어 보시면 다를지도 모르지마는…….”
공연히 중얼중얼거리는데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기씨의 입에서, 배 속에서부터 끓어올라 터지는 소리였다. 소리는 아기씨 입에서 나는데 내 심장이 철렁거렸다.
“아기씨!”
“콜록! 나…… 나 물 좀…….”
기침을 참으며 간신히 한마디 내뱉으시는 것을 알아듣고 마루에서 날듯이 일어나 물 주전자와 잔을 들고 와 아기씨께 따라 드렸다.
“아기씨. 목 아프다고 급하게 드시지 마시고 천천히, 천천히…….”
물 한 주전자를 다 넘기시고야 아기씨는 좀 진정되신 것 같았다. 아고, 우리 불쌍한 아기씨…….
“복향아, 나 눕게.”
“예, 제 손이랑 어깨 잡으셔요.”
어깨를 내어 드렸는데 길쭉한 팔이 허리를 파고들었다. 다른 팔이 그 손을 마주 잡으니 이게 내가 아기씨를 부축하는 것이 아니고 아기씨가 나를 포옥 안고 있는 꼴이 되었다.
아, 아기씨가 기침하느라 배가 당기셔서 팔을 못 올리시나 보다. 이걸 어쩐담…….
더욱 힘껏 부축하기 위해 나도 아기씨를 마주 안았다. 우리 아기씨, 언제 이렇게 커지셨대. 예전에 비해 부쩍 늘어난 둘레를 부여잡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니 아기씨 몸이 간간이 떨리고 정수리에서 거친 숨이 푹푹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고, 힘드신가 보다.
이부자리 앞까지 가서 이불을 들치고 그 안으로 아기씨를 뉘었다. 얼굴이 벌게지신 것이 여간 위중한 것으로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기씨, 어디가 어떻게 아프셔요? 말씀만 하시면은 제가 발을 빨리 놀려서 의원을 불러올 것인데……. 예전처럼 아프신 거예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
“그러다 다시 또 아프시면 어째요?”
“그러면 혹시 모르니 나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을래?”
“아, 쫓아내신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아기씨는 내 대답을 듣고는 발그레해진 뺨을 봉긋하게 올리며 웃으셨다. 색이 옮았는지 나도 얼굴이 벌게질 것만 같아서 옷궤에서 빨아 놓은 자리옷을 꺼내 여기도 자수 놓아야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아기씨는 아프시다면서도 내가 성가시게 굴어도 마냥 웃으며 좋다 하셨다. 하, 저리 심성이 고우셔서 어째. 꼭 얼굴마냥 마음도 고우셔.
“아기씨, 무슨 자수 놓을까요?”
“너 좋은 걸로 놓아라.”
“아기씨 옷인데 아기씨가 좋아하시는 걸로 놓아야죠.”
“나 좋아하는 거?”
“찔레꽃이나 국화꽃이나 그런 거요.”
“나는 좋아하는 게 없다.”
“아기씨도 참.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기씨는 당연한 말을 들어 놓고는 허를 찔린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맞다. 나도 좋아하는 게 있지.”
“그렇지요? 그럼 뭘 놓을까요?”
아기씨는 방금 하신 말씀과는 다르게 눈알을 굴려 대충 마당을 훑더니 유채꽃이 좋다고 하셨다.
나는 옷에 석곡을 수놓을 요량으로 실을 골랐다. 석곡은 하얗고 고운 꽃이 피는 난초인데 아기씨 아프실 때 약으로 드시는 것을 몇 번 보았다. 먹는 것만은 못해도 그래도 옷에 새기면은 조금이라도…….
생각대로 아기씨는 내가 노란 실에는 손도 안 대는데도 좋다고, 곱다고 연방 감탄하셨다. 이제 다 괜찮아지셨냐고 물으니 다시 잔기침을 하시긴 했지마는 썩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안심하면 안 된다.
아궁이에 불을 더 세게 때고 약은 물론이거니와 차도 약차로 뜨끈뜨끈하게 우렸다. 아기씨도 내 노력을 아셨는지 잔머리가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연신 건강해지고 있는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아직도 손이 차가운 거 같다고 하시길래 손도 꼬옥 잡아 드렸다. 그리고 잠이 잘 안 온다고 하시길래 창피하지마는 작은 소리로 자장가도 불러 드렸다.
사실 내가 부르는 것이지마는 내 귀로 듣는데도 아니 듣는 게 잠 오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아기씨는 너무 좋다며 잠이 솔솔 온다면서 잠은 안 주무시고 자꾸자꾸 더 불러 달라고 하셨다. 같은 노래를 다섯 번인가 부르고서야 아기씨가 잠이 드셨다.
다음 날부터 아기씨는 꼭 내가 수놓은 자리옷만 입으려고 하셨다. 곱다며 손으로 쓰다듬고 맘에 쏙 든다며 칭찬하셨다. 내 손을 잡으며 어찌 요렇게 작은 손으로 이런 걸 만들었어? 요렇게 날카로운 바늘을 잡고? 하시며 조물거리셨다. 그럴 때면 나는 또 마음이 간질거렸다.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머리를 굴리다 저번에 청수랑 이야기했던 것 어찌 아셨냐고 물으니 또 거친 기침을 하셨다. 후다닥 뛰어 기침에 좋은 약을 달여 오니 쓴 약은 홀라당 삼키시고 엿은 나를 주셨다. 늘 그렇듯이 너 먹는 거 보는 게 내 입에 더 달다 그러시며 웃으셨다.
모자란 머리로는 가끔 따라가기 힘들지만, 여전히 뺨에 열이 오르도록 다정하신 아기씨의 모습이었다.
*
타인의 민망한 모습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 눈만 마주쳐도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사이래도 그랬다.
아기씨 이불 홑청이며 옷이며 세답할 거리를 행랑 마당에 계집종들에게 넘기려고 부둥켜안고 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멈춰 서는데 귀에 불쾌하게 박히는 목소리가 딱 계희의 것이었다.
“이것 봐라. 너 이거 먹어 본 적 있니?”
저어기 좀 떨어진 곳 나무 뒤에서 계희가 헝겊에 싼 들깨강정을 청수에게 내밀고 으스대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아침에 한 입 먹고는 고이고이 싸서 옷궤와 벽 사이 틈에 교묘하게 숨겨 놓은 그것일 게 분명했다. 아닐 수가 없었다.
저년은 종노릇 할 게 아니라 뭐 숨겨 놓은 것 찾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재물깨나 만질 것이다. 그 전에 내 손에 안 죽는다면 말이다!
아기씨 살갗에 닿는 천을 아무 데나 던져둘 수는 없는 일이라 깨끗하고 평평한 곳 어디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무뚝뚝한 음성이 주의를 끌었다.
“먹어 본 일이 없으니 궁금할 것도 없다.”
“지금 먹어 보면 궁금해지겠네?”
“그거 물으려 불러냈냐?”
“아니, 이것 좀 먹어 보라고 몇 번 말하니.”
“언제 그랬는데?”
지금의 상황을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 청수 옆에서 계희가 젠체를 했다가 반응 안 좋으니 살갑게 물었다가 또 대꾸가 퉁명스러우니 이제 아주 빌다시피 했다.
“한번 입에 대 보기라도 하고 싫다 해라, 정말.”
“자꾸 이런 게 어디서 나서 나한테 주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는 계희를 잠시 쳐다본 청수는 밭일하러 가야 한다고 툭 던지듯 말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돌아섰다. 계희는 차마 쫓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 계집애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얼굴값 하냐며 혼자 욕을 하다 질질 짰다. 누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외사랑을 하는지는 분명해 보였다.
저렇게 냉하게 구는 청수는 처음 봤다. 얼마나 귀찮게 굴었으면……. 뭐, 내가 알 바냐마는.
그러나 왜 내 들깨강정 훔쳐 갔느냐고 혼꾸멍을 내 주려던 흥분은 사라졌다.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김이 샜다. 나중에 또 나한테 지랄하면은 네 성질머리가 고따위니까 청수가 너 질색하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여 줘야지. 흥, 흥.
발걸음도 가벼웁게 마당으로 향했다.
아기씨께 내별당을 담당하는 계집종으로 뽑히기 전에는 나도 세답이나 말과 소를 돌보는 궂은일을 맡곤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쪽 종들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종종 마주칠 때마다 질시와 부러움의 눈총을 보내곤 했다. 혼자셨던 작은 마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이 집 주인은 아기씨나 다름없고 그런 분을 나 혼자 모시고 있으니 저런 반응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얘, 아기씨 무어 불편하신 것은 없으시대?”
“그럼요. 늘 그렇죠.”
“밤톨만 한 너 혼자 모시는데 불편한 게 없다고? 네가 눈치가 없어서 모르는 것은 아니고?”
“아니어요. 참말인데.”
“아휴. 내가 벽을 보고 말하지.”
자기 좀 내별당에 끼워 달라는 말인 걸 알면서 일부러 멍청한 척을 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마님이 돌아가셨을 적 종들이 우르르 몰려가 시중들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다 경을 치고 물러나야 했다. 나중에 집사님이 아시고 다들 상 치른 지가 얼마나 됐다고 경거망동이냐며 크게 혼을 내셨다.
근데 또 이제 아기씨가 나이 좀 자셨다고 넌지시 떠보는 것이다.
“이제 손님도 아닌데 언제 안채로 오실는지. 안방이랑 건넌방 쓸고 닦은 지가 몇 년인지 모르겠다.”
쓸고 닦는 거야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뭐 저리 불만이 많담. 아무도 안 쓰는 방 치우는 게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대충 또 몇 마디 멍청하게 대답해서 속을 뒤집은 후에 광에서 새 홑청이며 수건이며 바리바리 싸서 내별당으로 향했다.
눈앞까지 한가득 쌓아 안고 가는데 무언가 발에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어어! 급하게 발을 놀려 간신히 넘어지진 않았는데 중심을 잡으려 팔을 휘두르느라 깨끗하게 빨린 흰 천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이걸 어째!”
“어쩌긴 뭘 어째? 네가 빠는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지 마라.”
계희의 목소리였다. 아까 전 보였던 상처받은 낯은 어디에 던져 버렸는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허둥거리는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보니 내가 돌부리 같은 것에 걸린 게 아니고 저년 발에 걸렸구나.
“이제 아주 돌았는갑지?”
“이년이 뭐라는 거야.”
“너 내 물건 뒤지는 거 모를 줄 아니?”
나를 아주 우습게 보니 내가 추궁할 줄은 몰랐을 거라는 생각에 나름 계희의 허를 찌른 줄 알았는데, 저년은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발뺌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낯가죽이 두꺼운 줄은 알았지만 정도를 넘는구나. 저년 낯가죽으로 가죽옷 한 벌 쫙 빼입을 수도 있겠다.
“뭐, 미안하다 그런 것도 없니?”
“내가 왜? 그게 네 거야? 아기씨가 주신 거잖아. 네가 혼자 내별당에 엉덩이 깔고 앉아 있으니 받은 거지 내가 가도 똑같이 주셨을걸? 근데 그게 왜 네 거야? 억울하면은 내별당 가지 마라? 당장 내가 가서 아기씨 수발 들 테니.”
“그러믄 네가 받아 온 것도 내가 홀라당 훔쳐 먹어도 되겠네?”
“아니? 나는 너처럼 멍청하게 숨기지 않을 건데.”
저, 저……! 주둥이만 살아 가지고……! 내가 진짜 이 말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안 할 수가 없다.
“네가 그 꼴이니까 청수가 너 박대하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아까까지는 뻔뻔하게 얼굴 펴던 계희가 청수 소리가 나오자마자 안색이 싹 변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청수 이름이 왜 나오는데?”
“나 아까 봤는데. 네가 훔친 들깨강정 청수한테 안달복달하며 들이미는 거. 너, 청수한테 그거 훔친 거라고 말은 했니? 내가 말해 주랴?”
“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계희가 발을 동동 구르며 씩씩댔다.
고소한 마음으로 그것을 보는데 돌연 이년이 떨어진 천 위에서 더러운 발을 구르는 게 아닌가?
“진정 돌았냐? 미쳤어? 뉘 것인지 몰라서 이래?”
“어찌 몰라? 설마 이걸 그대로 들고 가려 했나? 멍청한 거 티 내긴.”
“그럼 너는 성격 더러운 거 티 낸다고 수건 더럽히고 있는갑지?”
계희는 씨근덕거리며 나를 노려보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이제 이 정도로는 안 넘어갈 것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어디로 훌쩍 가 버렸다.
아까 전, 한 소리 들으면서 꺼내 온 것인데 이걸 가져가면 아주 혼이 날 텐데. 새것을 다시 꺼내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도 또 빨라고 한가득 갖다주면 지랄을 할 텐데…….
계희가 했다고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지라 간수 제대로 못 한 내 탓을 할 것이다. 그년이 또 다른 사람들한테는 싹싹해요, 아주.
결국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그래도 때가 아니고 겉에 흙만 좀 묻은 것이라 냇가에서 몇 번 휘휘 물에다가 젓고 꺼내면 얼추 깨끗해질 것 같았다.
빨리 갔다 오면 괜찮을 거야. 놀러 갔다 오는 것도 아니니까.
근데 또 막상 일이라는 게 대충 하겠다고 맘먹는다고 대충 되는 것이 아니다. 요것만 더 하자, 요것도 조금만 더 하고. 그러다 보니 아주 광이 나도록 빨고 있는 것이다. 하긴, 애초부터 아기씨 것인데 대충 흙물만 뺀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렇게 나를 찾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한 시진이나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복향아, 여기서 뭐 하냐!”
“아니, 보면 몰라서 화내는 거예요? 빨래하잖아요.”
소와 말을 돌보는 일을 하는 언구 아저씨가 다짜고짜 나를 찾아 대며 사납게 묻는 것에 당황스러워 나도 모르게 말이 쌀쌀맞게 나갔다. 자식처럼 아끼는 소랑 말은 어쩌고 여기까지 왔대?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하느냐고! 너는 아기씨 모셔야지!”
“누가 들으면 아기씨가 어제 태어나신 줄 알겠어요. 원래 아기씨는 저 일하면은 혼자 잘 계셨어요. 이거 아기씨 홑청이랑 수건인데…….”
“입씨름할 시간 없다. 어서 내별당으로 가자.”
뭐가 이리 급해? 심지어 언구 아저씨는 빨래까지 다 자기가 들고는 나보고 빨리 먼저 돌아가라고 재촉을 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일! 종년이 주인한테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빨리 돌아가라 하는 것이지.”
맞는 말인데도 어쩐지 기묘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기씨가 나를 찾고 있는가 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서책 읽으시거나 낮잠 주무실 시간인데 나를 왜 이리 급하게 찾으실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발이 빨라졌다.
예상대로 일이 있긴 있었다. 좀 전만 해도 멀쩡했던 내별당이 방이며 마루며 할 것 없이 아주 너저분해져 있는 것이다. 강도라도 들었나 했는데 어지러운 방 한가운데에 아기씨가 있는 걸 보니 또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기씨! 이게 다 뭐예요?”
“어디 갔었어? 금세 온다더니.”
“아니, 잠깐 일이 있어 가지고……. 이래서 언구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나?”
“뭐? 너한테 뭐라고 하던데?”
그 전까지 반절쯤 정신 빠진 것처럼 굴던 아기씨가 눈을 반짝 뜨더니 내 말끝을 매섭게 잡았다.
“뭐라긴 뭐래요. 아기씨 모셔야 하는데 어디 갔었냐고 그러지. 아니, 근데 그 잠깐 자리 비웠다고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다들 어디서 뭐 하는 거래, 아기씨 방 안 치우고?”
아기씨는 내 말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바닥에서 은빗을 집으셨다.
“응, 찾는 게 있어서.”
그러면서 빗을 내미는 모양새가 이것 찾으려고 방 뒤엎었다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 아니, 빗이야 방 안에 잘 모셔 둔 빗접 속에 가득 들었는데 이걸 찾는다고 방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빗접에 있는 걸 모르셨어요?”
“으응…….”
끝을 길게 늘이며 모호한 대답을 한 아기씨가 귀한 무릎을 꿇으시고는 바닥에 늘어져 있는 저고리며 바늘꽂이 따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무릎 상합니다!”
아기씨가 손에 잡은 것을 가로채고 저어기 그나마 깨끗한 자리에 앉아 있으시라고 권유했다. 혹여나 약하신 몸이 어디라도 상하면 큰일인 것도 큰일이지만, 정리 정돈에는 썩 재능이 없으시니까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돕는 것이었다. 아기씨는 말 잘 듣는 개가 된 것마냥 졸졸졸 걸어 정해 준 자리에 앉았다.
“제가 광에 갔다가 오는데 실수를 해서 천을 전부 흙바닥에 떨어트렸지 뭐예요. 그래 가지고 후딱 빨아 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나 봐요.”
넘어진 장을 세우고 그 안에 비단옷을 접어 넣으며 말했다. 계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기씨는 다정하시니까 내가 겪는 부당함에 분노할 것이다. 나의 설움을 단박에 풀어 주실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 누구도 나에게 면박을 주지 못하게 해 주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동정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아기씨가 나에게 연민을 느끼길 바라지 않는다. 물론 계희가 지랄할 때는 누가 나 불쌍하다고 그만 괴롭히라고 한 소리 거들어 주기를 바랄 때가 종종 있었지만, 아무튼 아기씨는 아니다. 나는 아기씨에게 싹싹하고 정다운 종으로 남고 싶다. 옆에 두고 싶고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는…….
“그랬구나.”
“요거 다 정리하면은 빗질해 드릴게요. 머리 빗으려고 찾으신 거죠?”
“응.”
아기씨가 은빗을 손에 말아 쥐며 웃으셨다. 붉은 입술 속 치아가 은보다 맑게 빛났다. 내가 좋아하는 무구한 웃음이었다.
*
과년. 말 그대로 과년이었다. 저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를 보면 과년한 처녀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사실 너무 컸지……. 몇 년 전만 해도 나와 엇비슷하던 아기씨는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커졌다. 내가 동년배들과 비교해서 좀 작은 축인 걸 감안해도 차이가 제법 크게 났다.
아기씨 나이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혼인하실 법한 나이가 된 것이 확실한데 매파가 문지방을 넘은 적이 없으니 답답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종이 나설 일도 아니고…… 들어오는 청혼서도 없고……. 아이, 다들 눈이 옹이구멍인 건지 청맹과니인 건지. 집사님이 딱 나서 주셨으면 좋겠고만.
집사님은 돌아가신 주인마님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아기씨가 장성할 때까지 어른이 없는 집안의 살림을 맡아보고 계신데, 정말 딱 그것만 하실 요량인지 어느 집 도련님이 헌헌장부시더라 하며 아기씨를 떠보는 일조차 하지 않으셨다.
아니, 아기씨 저렇게 고우시고 심성도 순하시고 이 넓은 집에, 논밭에, 재산이 한가득인데 이럴 수가 있나? 정말 모를 일이다.
1년여 전만 해도 아기씨가 성혼하여 떠나신다 하면은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또 어느 사내도 아기씨를 흠모하지 않는다 하면은 그것도 그것대로 또 짜증이 났다.
“안 그러냐, 청수야.”
“뭐가?”
“아기씨 말이야. 그렇게 고우신데 어찌 아기씨 좋다는 도령 하나 없냐.”
“그런가.”
“그런가?”
시큰둥한 대답에 성이 났다.
“너, 눈 뜨고 있는 거 맞아?”
“아, 고우시지. 엄청 고우시지. 근데 나는 좀 동글동글한 게 최고로 어여뻐 보이더라. 좀 작달막하고.”
“그러냐.”
청수의 취향엔 관심이 없었다.
“다들 눈깔이 삔 것이지.”
“말이 뭐 그래.”
“계희가 작은가?”
“걔가 왜 나와?”
무슨 말을 해도 다 수긍하던 놈이 계희 이야기가 나오자 불만이 툭 불거진 얼굴을 했다. 청수가 계희와 부딪쳤던 지가 벌써 몇 계절이 지났다. 그 후로는 범연하게 굴긴 해도 그냥 얼굴 맞대고 이야기 잘하길래 제법 잘 지내는 줄 알았는데.
“걔가 널 좋아한다. 알고 있잖아.”
“무슨 상관이야.”
청수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털었다. 계희의 치근덕거림을 무덤덤하게 넘기길래 맘이 아주 없는 건 아닌 줄 알았더니.
“걔가 날 좋아한다고 나도 걜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해 달라 한 적 없는데 왜 고마워해야 하고 거절하면 미안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었다. 다들 청수의 짝이 누굴지 그렇게 궁금해하는데, 계희는 아니구만. 그렇게 자기가 청수 부인이 될 것이니 딴맘 품는 년들은 다 죽을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더니. 뭐, 혼인은 혼자 하나? 꼬시다, 아주.
아기씨 저녁상 받으러 왔다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년이 또 지랄하면은 내가…….
“너는?”
“응?”
갑작스러운 물음에 생각이 뚝 끊겼다. 무얼 묻는지 알 수 없어 얼굴을 드니 눈앞으로 붉은 자두를 쥔 손이 쑥 내밀어졌다. 자두만큼 붉어진 얼굴이 입을 뻐끔댔다.
“싫으면 먹지 말고.”
내 손에 쥐여 줘 놓고는 싫으면 먹지 말란다. 그러고는 뒤를 돌더니 몇 걸음 걷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달음박질쳐 도망갔다. 나에게 남은 것은 얼마나 오래 쥐고 있었는지 뜨끈하게 열이 오른 자두 한 알이었다.
그 후로 청수는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마주치면서도 그 시간을 모두 쏟아 나와 이야기하고 개암나무 열매나 으름, 살구 혹은 산딸기 몇 알이라도 내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자꾸 받아먹는 게 미안해서 반절은 다시 청수에게 돌려줬더니 내가 금은보화라도 선물해 준 양 얼굴이 환해졌다.
“나 주는 거야?”
“그러면은?”
하하. 내 대답에 청수가 시원하게 웃었다. 확실히 잘난 얼굴이었다. 그뿐인가. 덩치도 좋고 건강하고 성실하고 살갑고……. 평생 밭이나 매고 소나 끌다가 죽을 종놈으로 태어난 게 아까울 정도였다.
서글서글한 검은 눈이 나를 진득허니 쳐다보길래 눈을 마주 봤더니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다. 귀여운 맛까지 있구나.
“가끔 보니까 아쉽다. 내별당에는 아직 혼자야?”
“그럼. 나같이 일 잘하고 입 속의 혀처럼 구는 애가 둘이나 있을라구.”
청수가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씨익 웃었다. 나랑 비슷하네. 나도 세 사람 몫은 하거든. 얼굴을 붉히며 괜히 나와 비슷한 점을 찾아 댄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지 하늘만 쳐다봤다.
헤어질 때가 되니 또 청수가 무언가 불쑥 내밀었다. 그냥 붉은 헝겊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댕기였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내 손에 그걸 쥐여 주는데 댕기가 축축했다.
“싫으면 하지 마라.”
청수는 자두를 줄 때와 같은 말을 했다.
“좋으면 나중에 더 좋은 걸로 갖다줄게.”
그러더니 또 도망갔다. 처음 자두를 주고 도망가는 모습을 봤을 때는 당황스러웠는데 다시 보니 웃음이 났다. 귀엽다니까.
요리조리 댕기를 살펴보는데 또 뒤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얘는 꼭 달려갔다가 달려오더라? 웃으며 뒤도는데 바로 머리채가 잡혔다.
무슨 일인지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흙바닥으로 몸이 처박혔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손에 있는 댕기를 쭉 뽑아 갔다. 고통보다 의문이 더 컸다. 뭐야? 뭐지?
“갈보 같은 년. 웃음 흘리는 것 좀 봐. 청수한테 꼬리 치지 말라고 했잖아!”
“이 육시랄 년이 터진 주둥이라고…….”
청수가 아니라 계희였다. 욕은 저만 할 줄 아나? 개같은 년. 어디서 보고 있다가 청수가 사라지니 득달같이 달려온 게 분명했다.
얼굴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입을 열었다.
“야. 계희야. 너 진짜 대가리가 머저리인 거야,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거야? 청수는 너 싫어해. 그런데 내가 청수랑 웃든 울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갈보라고? 그렇게 따지면 싫다는 남자 앞에서 꼬리 치려고 웃는 네가 갈보 아닌가?”
“이년이!”
말로만 지랄이지 몸으로 덤빈 적이 없던 계희였다. 근데 이제 아주 보이는 게 없는지 손으로 내 머리를 쥐어뜯고 얼굴을 할퀴어 댔다. 그 틈에 내가 댕기를 다시 낚아챘다.
“도둑년아. 이제는 앞에서 훔치냐?”
그러면서 몹시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나를 보는 계희 눈에 분한 감정이 가득했다. 내 손에 쥔 붉은 댕기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출신도 모를 더러운 년을 왜…….”
“뭐, 너는 출신 알아서 종년이냐? 두 번 알았다가는 아주 볼만하겠다?”
“두 번 알든 세 번 알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너는 부모가 버린 년이라 한 번도 알지 못할 텐데. 억울하면 부모 찾으러 가라? 찾는다고 네년을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만.”
비웃는 소리가 높았다. 흥분하지 않고 맞받아치려고 했는데 내 처지를 들먹이는 소리에 낯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다 같은 종년인데 내가 뭐가 모자라는가 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때마다 계희는 부모 없는 계집이라며 내 주제를 상기시켰다.
부모 없는 것이 죄는 아니다. 허물도 아니었다. 나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고통이었다. 계희가 나와 싸울 적마다 달려가는 제 어미의 품이 나의 고통이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빈손이 나의 고통이었다.
계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저열하다 욕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계희의 가장 큰 고통을 아니까.
“부모 찾을 게 뭐 있니? 내 댕기 안 보여? 나랑 청수 자식 찾는 게 더 빠르겠다?”
바락바락 악을 질렀다. 고통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말에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바라던 대로 계희가 더한 악을 지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저고리 동정을 그득 잡아채더니 다시 한번 바닥에 처박았다. 미친년이라 그런가 힘이…….
그런데 정신없는 시야로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소란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보러 온 다른 종인 것 같았다. 말리려고 다가오면 계희 편을 들어 줄 게 뻔해서 속이 탔다. 그 전에 한 대라도 더 때려야 했다.
계희 옆구리를 발로 차고 바닥을 구르는 몸 위에 올라탔다. 누가 날 뜯어말리기 전까지 물씬 때려 주려고 그랬다. 근데 맘 같지 않게 계희가 드러누운 상태에서도 팔을 뻗어 내 어깨와 배를 퍽퍽 쳐 댔다.
신음을 삼키며 앞을 살피는데 심장이 철렁하며 떨어졌다.
아까와 같은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는 인영이 꼭…… 꼭 아기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야, 멈춰! 저기……!”
“지랄하네!”
내가 멈칫거리자 계희는 잘됐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뒤집어 나를 깔고는 한 손으로 내 턱을 짓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댕기를 빼앗으려 들었다.
계희의 뒤로 보이는 하얀 옷자락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이년이…… 네가 이러는 걸 보면 아기씨가 경을 칠 것인데. 아기씨는 평소엔 유순하지만 수틀리면 성질이 사나워졌다. 분명 계희 등이 터져라 매질을 하라 이르실 것이다.
계희 몸이 걱정되어 이러는 게 아니고 내가 때리고 싶어서 계희를 말렸다. 내가 때리면 속이 시원할 텐데 매질을 당해서 등이 터진 것은 남이 치죄한 것이라 괜히 마음이 찝찝해지니까.
“야……! 저……! 저기……! 아기……!”
저를 위해 주는 줄도 모르고 내 턱을 누르고 있는 계희 손은 힘이 풀리지를 않았다. 입을 잘못 벌리면 혀를 씹게 될까 봐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이 짓거리 하는 걸 다 아기씨께 다 보여 주고 있다니……. 아기씨가 가까이 오시기 전에 빨리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틀었다. 허연 옷자락이 보였다.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못 알아볼 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옷자락이 빙글 돌았다. 허공에 한 번 나부끼더니 그대로 안채 기둥 뒤로 사라졌다.
방금 내가 무엇을 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끄럽게 몸싸움을 하는데 우릴 못 봤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아기씨가 나를 두고 가실 리가 없는데.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아기씨가 맞고 있는 나를 두고 가실 리가 없는데…….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흰 자리옷이 다시 나부끼는 일은 없었다. 복향아! 하고 부르며 나에게 달려오는 이도 없었다. 흙바닥을 굴러 더러워진 나를 안아 일으키고 내 손을 잡으며 내가 겪는 부당함에 나와 같이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이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죽 풀렸다. 그 틈에 댕기를 낚아챈 계희가 그것을 찢으려 발악을 해 댔다. 손톱을 박고 이빨로 꿰뚫어 갈기갈기 찢어 댔다. 그러나 이미 축축해진 눈은 시야가 흐려져 나의 무엇이 찢기고 있는지 분간키 어렵게 했다.
*
냇물에 머리까지 푹 담갔다. 한낮이 아니면 아직 바람이 제법 차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서늘한 물에 잠겨 있으니 하나의 의문이 수면 위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 또 눈물이 나니까……. 생각하지 않으면 괜찮다. 괜찮다고 생각하면 괜찮아진다.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눈앞에서 차게 끓었다. 허리를 세워 일어나니 차가운 냇물이 정수리부터 허리까지 줄줄 흐르는 것에 소름이 돋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졸졸 흐르는 냇물에 고개를 떨궈 얼굴을 비춰 보았으나 떨어지는 물방울 때문에 수면이 일그러져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뺨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흐르지 않으니, 그거면 됐다.
그 난리 후, 계희는 후련하다는 듯이 찢어진 댕기를 내 얼굴에 던지고 아주 가 버렸다. 지도 만신창이 꼴이면서 어딜 저렇게 간대……. 흙바닥에 몸을 누인 채 생각했다.
아, 어딜 가긴. 쟤는 갈 데가 있으니까 갔겠지. 그렇지. 그럼 나는 어디로 가지. 나는 갈 데가 없는데.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댕기의 잔해를 주섬주섬 챙겼다. 버렸다가는 청수가 맘깨나 아파할 것이다. 왜 매지 않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흙투성이로 있을 수 없어 냇가로 무작정 걸어왔다. 그러나 이 차가운 물속도 내가 있을 곳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하늘을 힐긋거렸다. 아기씨 저녁때였다.
벌벌 떨리는 몸에 더러운 옷을 다시 걸쳤다. 옷을 갈아입고 가려면 행랑방에 들러야 하고 거기서 계희를 다시 만나야 한다. 늘 그랬었는데도 새삼스럽게 심장이 벌렁거렸다.
예상대로 계희는 방에 있었다. 깨끗한 낯으로 깨끗한 옷을 입고 옆에 제 어미를 두고 나를 비웃었다. 계희의 어미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입가로 새는 바람 소리가 날카로웠다.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나이도 먹을 만치 먹어 놓고 니들은 대체 왜 그러냐.”
소문은 빠르다. 소문이 어떻게 난지는 모르겠으나 봉춘 어멈은 나를 그렇게 타박하고는 아기씨 저녁상을 들려 보냈다. 내 잘못이 아닌데. 그러나 울지 않으려면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울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종이지 누군가의 딸이나 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내별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전에 없이 무거웠다. 아기씨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랬다. 아기씨가 어떤 얼굴로 나를 볼지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내가 잘못을 했으면 혼이 난 후에 사죄를 했겠지마는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상전의 눈을 어지럽힌 게 잘못이었다면 계희도 진작 불려 가 등을 얻어맞았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기씨가 나를 모른 체한 이유를…….
그림자가 진 창호문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왜인지 몸이 벌벌 떨렸다.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서 다른 사람한테 아기씨 수발 좀 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다들 내별당 올 기회만 노리고 있었으니 좋다고 내 손에서 저녁상 앗아 들고 갈 것이다. 그래. 그러자.
“복향이 왔니.”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발을 돌려 뒤돌자마자 아기씨의 다정한 음성이 나를 콱 붙들어 맸다. 하필 가려고 할 때 들킬 게 뭔가.
“예…… 예, 아기씨.”
놀란 마음에 허둥지둥 문을 열고 상을 들였다.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처박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따뜻한 온기가 내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아기씨가 내 양 뺨을 손으로 감싼 것이다.
“입술이 새파랗다. 낯이 이상한데…… 무슨 일 있었니?”
염려가 뚝뚝 떨어지는 음색이었다. 눈을 들어 쳐다본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낯설었다. 당장 오늘 낮에도 마주친 다정이건만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아니요, 아니요. 일은요. 그런 게 어딨어요. 그냥 어디 부딪쳐 가지고, 그냥 좀 씻었어요.”
“정말?”
아기씨는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물으셨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허리가 뻣뻣해졌다. 시선을 내리니 내 치마 위를 덮는 하얀 자리옷이 보였다. 나를 두고 혼자 나부끼던 옷자락이…….
“식사, 하셔야죠. 아기씨 시장하시겠다.”
얼굴을 비스듬히 돌려 아기씨 손을 피했다. 시야에 흐릿하게 걸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으나 모른 척하고 상 위에 덮어 놓은 비단 보자기를 걷었다.
들깨를 넣은 버섯탕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껍질이 바삭하게 구워진 조기 두 마리가 살이 통통하니 아주 실했다. 육전과 애호박전에서 나는 윤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고추장에 무친 도라지와 오이가 보기만 해도 입 안을 새콤하게 했다.
곶감이 담긴 종지가 상 한구석에 놓여 있었으나 그걸 봐도 하나도 신나지 않았다. 그냥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네가 이런데 내가 어찌 밥을 먹어?”
부지불식간에 어깨가 잡혀 이불 위로 끌려갔다. 걱정스러운 음성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면 납치라도 당한다고 생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밭에서 무가 뽑히듯 쑥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또 쑥 하고 앉혀진 터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기씨?”
“몸이 얼음장 같은 것 좀 봐라. 머리는 축축하고. 이 날씨에 강에서 멱이라도 감았어? 어쩜 이래?”
아기씨는 내 어깨에 솜이불을 단단하게 둘러 주시더니 붉게 차가워진 내 손을 주물렀다. 뜨끈한 손바닥 두 개가 내 손끝부터 팔뚝까지를 부지런하게 왕복했다. 주무르는 압력에 따라 손끝에 점점 열이 올랐다. 물론 내 뺨에도.
“아기씨, 어찌 이러세요.”
“어찌 이러긴. 너 말 이상하게 한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너를 아주 못살게 구는 줄 알겠다?”
“아니,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어요.”
“그렇게 된 게 아니면? 입만 아니라고 하지 너 하는 걸 봐라.”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작태를 눈짓하며 아기씨가 말했다. 하는 수 없이 팔에 힘을 풀었더니 얼굴 옆에서 좋다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밥은 먹었어?”
“이 집에서 누가 아기씨보다 먼저 밥술을 입에 넣어요.”
“그러니? 몰랐네. 밥이야 아무 때나 알아서 먹지 왜 그런대.”
아기씨는 대충 대답하더니 밥숟가락 위에 조기 살을 발라 큼지막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그걸 내 입에 대는 것이 아닌가?
“무―”
무얼 하시는 거냐고 입을 떼는 찰나에 벌어진 틈으로 밥숟가락이 쑤욱 들어왔다. 일단 들어온 것이니 뱉지도 못하고 씹는데 옆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힐긋 훔쳐보니 아기씨는 또 젓가락으로 육전을 집고 계셨다. 아기씨 귀한 입에 들어갈 음식인데 그러지 마시라고 하고 싶은 마음에 입에 든 밥을 빨리 꼭꼭 씹었다. 어디 쌀이래, 밥맛이 아주 달구나…… 조기는 짭짤하니 아주 그냥…….
“하―”
하지 마시라고 말하려고 했던 입으로 육전이 들어왔다. 고소한 육 기름 맛이 끝내줬다. 대체 누가 고기를 계란물에 부칠 생각을 했을까, 그래.
입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종일 아침 말고는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한 입 두 입 밥이 넘어가니 잊었던 허기가 극심하게 몰려왔다.
“옳지, 잘 먹는구나.”
넙죽넙죽 받아먹는 나를 보고 아기씨가 눈을 잔뜩 휘며 웃으셨다.
얼떨결에 평소대로 아기씨에게 휘둘리고 있는 자신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이럴 수가 있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다. 기억을 더듬으면 나를 못 본 체하던 아기씨가 떠올랐지만, 자꾸 되새겨 보니 그 횟수를 거듭할수록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잘못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잘못 본 게 맞는 것 같다. 왜냐면, 그걸 봤으면 나에게 이러시지 않을 거잖아. 그걸 보고 모른 척하셨으면 나를 이리 대하실 리 없잖아.
그러고 보니 아기씨 얼굴을 정확하게 본 것도 아니었다. 맞네. 맞아. 역시 아기씨가 나를 내버려 두실 리 없다. 아기씨는 나를 이렇게 좋아하시는걸. 아고,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
생각을 마치자 벙싯거리며 입가로 웃음이 자꾸 샜다. 따뜻해진 몸을 따라 마음도 다시 제 온도를 찾았다.
아기씨는 귀한 음식을 내 입에 다 넣어 주시고는 내가 배부르다고 남긴 음식으로 요기를 하셨다. 당장 달려가서 새 상을 봐 오겠다는 나를 옆에 꼭 붙들고는 입 다물라고 곶감까지 물려 주셨다. 제대로 말렸는지 아주 쫀득했다.
등 따시고 배부르니 몸이 노곤해졌다. 아기씨는 나를 다 먹이고 소금물로 입가심까지 시켜 주고는 탕파처럼 나를 끌어안고 요 위에 몸을 누이셨다.
추운 날이면 이따금 있는 일이라 나는 얌전히 품에 안겼다. 처음에는 아기씨와 닿는 게 몹시도 부끄러웠는데 익숙해지자 그리움이 느껴졌다. 겪은 적 없는 것을 그리워한다는 게 참으로 우습지만…….
친밀한 접촉은 맞닿은 사람을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지게 했다. 가족같이. 나는 남몰래 아기씨와 그런 사이인 것을 상상했다. 가져 본 적이 없어 흐릿하고 엉성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무도한 상상이었고 또 불온한 상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수줍었나 보다. 그래서 그렇게 슬펐나 보다.
눈이 끔벅끔벅 감겼다. 이마 위로 따뜻한 숨이 내 눈을 감겨 주며 말했다. 잘 자.
꿈을 꾸었다. 그곳에서 나는 개미만큼 작았기에 꿈인 것을 알았다. 개미만큼 작은 나는 늘 그랬듯이 열심히 일을 했는데, 몸집이 너무 작아서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너무 느렸고 아무리 많이 들려고 해도 손에 잡히는 게 너무 적었다.
다들 그런 나를 둘러싸고 큰소리로 나무랐다. 쓸모없다 윽박질렀다. 숨만 쉬고 일해도 그랬다. 그들이 내뿜는 한숨에도 나는 휘청거렸다.
근데 그곳에서는 하늘에 있는 태양이 아기씨 얼굴이었다. 태양인 아기씨는 내가 밭을 매다가 넘어져도,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 머리카락을 태워 먹어도, 마당을 쓸다가 바람에 날려 바닥을 굴러도 뚫어져라 햇빛으로 비춰 댔다.
그러지 마세요. 비추지 마세요. 제발 쳐다보지 마세요. 아무리 간청해도 소용이 없어서 마음이 탔다.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두 손을 사정없이 비볐다. 그만, 그만요. 아기씨. 제발 보지 마세요. 눈물로 애원했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몹시 커서, 저택을 넘어 저어기 산에도 울리고 들에도 울렸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부끄러워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질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했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러다 옆에 같이 누워 있는 뽀얀 얼굴을 보고 여기가 내별당인 것을 깨달았다. 아, 그대로 누워 잤구나. 꿈을 꿨어.
비몽사몽간이라 꿈 내용이 아직 또렷했다. 내가 개고생하는 것을 아기씨가 전부 지켜보고 웃으며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다. 또렷한 개꿈이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 아직 물기가 남은 얼굴로도 피식거리는 웃음이 샜다.
나중에 일어나시면은 꿈에서 해가 아기씨 얼굴이었다고, 그것만 말씀드려야지. 그러면 좋아하실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비실비실 웃는데, 이불 속에서 긴 팔이 주욱 뻗어 나오더니 반쯤 허리를 세운 나를 끌어당겼다. 혹시 나 때문에 아기씨가 깨셨나 심장이 철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눈이 여전히 감겨 있고 숨소리가 일정한 것이 그냥 잠결에 하신 일 같았다. 아직 닭도 안 우니까, 뭐……. 나는 뜨끈한 품속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다시 잘 지냈다. 밥은 물론 아기씨 간식까지 잘 챙겨 먹고 계희랑 싸워도 전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 청수가 다른 집으로 팔려 가기 전까진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
*
청수는 정말 난데없이 팔려 갔다.
야음은 소나무의 수보다 사람이 적고, 종을 부리는 사람은 더더욱 적은 곳이었다. 혼사 같은 큰일이 없으면 그냥 그 집 종으로 나서 죽을 때까지 그 집 종인 바닥이 이곳이었다. 무슨 일이 생겨 팔려 간다 해도 이렇게 급작스러운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아무리 악독한 주인이라 해도 몇 주 전에는 언질을 주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몇 주는커녕 청수는 당장 며칠 전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속상한 것을 애써 티 내지 않으려는 목소리가 쾌활하게 물었다. 맘에 안 들었어? 내가 댕기를 하지 않는 것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 거짓말을 했다. 당연히 맘에 들지. 근데 일하는데 그런 고운 댕기 어떻게 써. 아깝다. 대답을 들은 청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들었구나.
그렇게 중얼중얼거린 청수는 내 손에 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다래꽃 줄기였다. 연녹색 싱그러운 잎 사이에 작은 다섯 꽃잎이 소박한 빛깔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나중에 열매 열리면 그것도 따 줄게.”
“언제 열리는데?”
“꽃 떨어지면. 여름에.”
맞다. 여름이 되면 줄기에 잎과 색이 비슷한 열매가 맺힌다. 그것을 따다가 며칠 두고 물에 씻어 껍질째 먹으면 새콤하니 맛이 괜찮았다.
꽃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았다. 여름 냄새가 벌써 콧잔등 위로 흘러내렸다.
그렇게 며칠 꽃줄기를 갖다 바친 청수는 결국 속내를 털어놨다. 잘생긴 얼굴을 검붉게 물들인 채로 말했다.
“네가 좋아.”
너는 잘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우리가 제법 마주쳤을 때 말야. 그때부터 네가 눈에 들어왔어. 콕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네가 짧은 다리로 총총 걸어가는 그림자만 뒤쫓고 있었어. 그러니까, 어릴 때 말야. 지금 짧다는 것이 아니고. 아, 물론 나는 잘 모르지. 그렇지. 그때도 잘 몰랐는데 이제 와 보니까 너를 가끔 만나는 게 너무 아쉬웠어. 그러다가 잠깐이라도 보면 너무 좋고…….
큰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재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힐긋힐긋 내 얼굴을 살폈다.
“그래서, 네가 싫지 않으면 나랑…….”
살림을 차리지 않겠냐는 고백이었다. 너는 나에게 시집을 오고 나는 너에게 장가를 가고.
나는 잠시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청수는 예상했다는 듯이 실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야지. 그러면서도 헤어질 때가 되어서는 자꾸 내 쪽을 뒤돌아보았다.
청수랑 혼인을 한다, 혼인을……. 나쁘지 않았다. 청수는 잘난 데다가 아직 아내도 아닌 나를 이렇게 잘 챙겨 주지 않는가. 일하기도 바쁠 텐데 어디서 이렇게 단 열매를 찾아와서 나를 먹여 주는지. 거기에 순하고 귀여웠다.
사실 청수를 사내로 좋아하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내종들 중에 마음에 품는 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품을 만한 사람이 생길 리도 없으니 청수는 사실 대단히 좋은 선택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애도 잘 볼 거야. 등짝이 넓어서 애를 한꺼번에 둘은 업고 다니겠더만. 나는 아이를 많이 낳고 싶은데.
늘 많이 낳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귀여울 것이고 딸은 딸대로 깜찍할 것이다. 자식 된 적이 없으니 부모라도 되고 싶었다.
안채 부엌에서 일하는 윤정이 언니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데 벌써 젖 빠는 갓난쟁이 딸이 있다. 그 갓난쟁이는 울다가도 언니만 찾고 언니를 보면 작은 입을 벌려 벙싯벙싯 웃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 것을 빼앗긴 듯 심장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청수랑 혼인하면은 나도 금방 생기겠지? 아이를 생각하며 웃음 짓는데 아이를 만드는 과정이 떠오르니 얼굴이 붉어졌다. 아, 나는 모른다, 몰라.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얼굴이 발그스름하네.”
“그런가?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날이 좋으면 아기씨는 난을 치거나 나는 잘 모르는 글씨를 썼다. 나는 먹물이 모자라지 않게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았다. 먹을 갈 때는 서두르거나 힘을 세게 주면 안 되고 부드럽게 흐름을 타며 둥글게 갈아야 했다. 가르쳐 주신 것은 아기씨였다.
괜히 부끄러워서 아니라고 했지만 가만히 먹을 갈다 보니 입을 열고 싶어서 속이 간질간질했다.
“사실, 사실은요. 제가 인제 나이가 제법 찼잖아요.”
“그렇지.”
“어쩌면 말이에요, 저도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어쩌면 혼인할지도 몰라요.”
“뭐?”
검은 물이 그리던 궤적이 뚝 끊겼다. 미처 다 자라지 못한 검은 난의 균형이 불안정하게 일그러졌다.
“집사가 그러던?”
“네? 아니요. 집사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그냥 제 나이를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다들 하나둘 벌써 가는걸요.”
“오라는 남자는 있고?”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 하나 받아 줄 남자가 없으려고.”
아기씨는 맞다고 수긍하며 빙글 웃으셨다.
작년인가에, 아기씨가 내가 청수랑 만났다고 경을 치신 적이 있어서 청수 얘기는 꺼내지 않은 것이 역시나 옳은 선택이었다. 뭐, 이제 기억도 못 하시겠지마는. 나중에 말씀드려야지, 확실하게 정해지면. 근데 그때는 왜 화를 내셨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치고 잠에서 깨어나니 청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뭔지 청수의 가족까지 전부 어딘가로 팔려 갔다고 했다. 집사님께 어디로 갔는지 듣긴 했는데 생전 처음 듣는 지명이라 한 번 들은 걸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종일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얼떨떨한 채로 그 밤, 계희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왜 붙잡는 건지 물을 새도 없었고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제는 그냥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너……! 너 때문에……!”
이년은 청수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도 내 탓을 하더니 이제는 청수가 팔려 간 것도 내 탓이다. 머리가 뜯기든 말든 헛소리를 하는 입을 거세게 후렸다. 계희의 몸이 타격에 휘청거리면서 내 머리카락도 같이 당겨졌으나 아픔보다는 시원함이 더 컸다.
방바닥에 침을 퉤 뱉은 계희가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손아귀로 내 목을 잡으려고 하길래 발을 들어 배를 차려고 했는데, 차기 전에 내 다리를 잡은 계희가 그대로 나를 넘어트렸다.
“악……!”
둔탁한 통증이 등허리를 강타했다. 아프다고 할 새도 없이 내 위를 올라탄 계희가 내 뺨을 세차게 후렸다. 입가에 피가 터졌는지 날카로운 소리에 질척임이 섞였다.
팔을 휘둘러 주먹으로 계희의 가슴팍을 세게 쳤다. 컥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허리를 단단히 조이고 있던 허벅지의 힘이 약해진 걸 느끼자마자 머리채를 잡아 내렸다.
잽싸게 자세가 무너진 몸 위에 올라타서 목과 턱을 짓눌렀다. 그러자 그 전까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기만 하던 자언이가 내게 손을 뻗으려 했다.
“건드리지 마!”
사납게 소리치고 계희를 노려봤다. 이제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너 나한테 왜 자꾸 이래. 왜 이유도 없이 못살게 구느냔 말이야!”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지. 이유가 왜 필요해?”
그렇게 처맞고도 이년은 아직도 비웃는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할 수 있으니까 한다고? 그럼 이제 못 하게 해 줘야지.
결심을 했으니 이제 몸을 쓸 필요가 없었다. 짓누르던 힘을 풀어 주고 입을 뗐다.
“너 아기씨가 무섭지도 않니? 이제까지 괜히 아프신 아기씨 신경까지 번잡스럽게 할까 봐 참은 거지, 네가 나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거 뭐, 네가 무서워서 말 못 한 줄 아니?”
“하하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계희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배를 잡고 굴렀다. 그러다 맞은 데가 쑤신지 잠깐 콜록대다가 다시 웃는 모양새가 그냥 딱 미친년 같았다.
“미친년. 실성했어?”
“말해.”
“뭐?”
“가서 말하라고. 아기씨한테 가서 계희 그 악독한 년이 저를 이렇게 때렸어요, 하고 이르라고.”
기묘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뻗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실실 웃던 낯이 단박에 일그러지더니 또 소리를 꽥 질렀다.
“너 땜에 청수가 팔려 갔잖아! 거기가 어디라고, 대체 거기가 어디라고……. 내가 너랑, 너랑 엮이지 말라고 그렇게……. 개새끼. 그런데 나한테 투기하지 말라고…….”
계희는 엎어져서 부들부들 떨더니 머리를 들어 시퍼렇게 뜬 눈만 보이고는 말을 걸었다.
“얘, 복향아. 그거 기억나니? 내가 처음 네 머리 후렸을 때 말야. 네가 내별당 담당으로 갔을 때. 나는 내가 키도 더 크고 발도 빨라서 그 자리가 딱 내 자리라고 생각했지 뭐야. 근데 네가 뽑혔잖아. 그래서 성이 나더라고. 그런데 둥그런 뒤통수가 아기씨 모시러 간다면서 내 눈앞에서 요리조리 움직이는 것 아니겠어?”
어린 내가 움직이는 것을 흉내 내듯 검은 눈동자가 흰자위 위에서 뒤룩거리며 왔다 갔다 굴렀다. 뭐에 씐 듯한 모습에 섬뜩함까지 몰려왔다.
“그래서 몇 대 때렸지. 아무도 모르게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이게 무슨 일인지 저어기에서 아기씨가 나를 지켜보고 계시더라고. 아, 나는 딱 죽었다. 오늘이 종아리 터지는 날이다 싶었지. 근데 말이야.”
계희가 목을 쑤욱 들어 올렸다. 드러난 입에는 미소가 가득 걸려 있었다.
“너, 내가 종아리 터진 적 있었니?”
되바라진 웃음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더 들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으나 제대로 사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계희가 하는 말은 이미 아기씨가…….
“그 후로도 몇 번 걸렸나? 한 번도 혼난 적 없다. 네 머리카락을 한 움큼 뜯은 날도 잔소리 한번 들은 적 없어. 야, 복향아. 이 혼자 똑똑한 줄 아는 멍청아. 여기 내가 너 괴롭힌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냐? 근데 그게 아기씨 귀에 한 번도 안 들어갔다고?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높은 산에 올라간 것도 아닌데 귀가 먹먹했다. 자언이를 쳐다보는데 얼굴에 당황한 기색뿐이었다. 계희가 거짓말을 한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뒤통수에 달고 밤공기 속을 달음박질쳤다. 아니다. 아니야. 나는 안 믿어. 믿을 게 따로 있지 계희를 믿나.
숨이 턱에 걸릴 때까지 달려 내별당 아기씨 방문에 다다랐다. 그 언젠가 아기씨가 말했던 것처럼 방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네가 언제 찾아와도 절대 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늘 깨어 있다고.
새삼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아기씨는 왜 늘 깨어 계실까?
어물거리는 그림자가 순식간에 커지더니 문이 열렸다.
“누구니, 복향이야?”
끔찍하게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
“이 밤중에 무슨 일이니?”
아기씨는 이 늦은 시간에 말도 없이 찾아온 내가 몹시 반갑다는 듯이 화색을 띠며 물으셨다. 달빛에 비친 말간 얼굴이 더없이 순결해 보였다. 그 어떤 죄도 지어 본 적 없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진정으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분간키 어려웠다.
“복향아? ……아니,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평소와 다른 내 행동에 의문을 품고 다가오던 얼굴이 곧 경악에 찼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죄 헝클어졌고, 입이며 뺨이 욱신거리는 것이 시뻘건 색으로 퉁퉁 부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옷도 매무새를 정리하고 온 적이 없으니 아주 너저분할 테다.
그러나 내가 무슨 몰골인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기씨.”
“응.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이랬어?”
“계희가, 계희가 그랬어요.”
“계희? 너랑 방을 쓰는 그 계집종? 걔가 너한테 왜 이런 짓을 했대? 성질머리가 아주 몹쓸 애구나.”
“계희가 청수가 팔려 간 게 제 탓이래요. 정말인가요?”
“걔 참 말을 이상하게 한다. 그게 왜 네 탓이야? 보낼 만하니 보냈겠지. 아, 속상하다, 정말. 이 예쁜 얼굴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놨대? 어서 들어와. 약이라도 바르자, 응?”
아기씨는 안타까워 아주 몸이 단 모양새로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가 혹시 건드리기만 해도 아플까 봐 다시 손을 거두는 것을 반복했다. 예전 같았으면 과분한 관심이라고 몸이 비비 꼬였을 텐데 이상하게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기씨는 안절부절못하다 그나마 멀쩡한 내 왼손을 잡고 방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 발에 힘주고 물었다.
“아기씨. 제가 이렇게 되어서 마음이 아프세요?”
“안 그러면? 나는 심장이 딱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럼 계희를 벌하실 거예요? 근데 저도 계희를 많이 때렸어요.”
“벌주려면 둘 다 주라는 소리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내가 너를 어찌 계희와 같이 벌해. 나는 아무래도 속이 옹졸한갑다. 계희 그 계집애만 빨리 잡아다 회초리를 치고 싶은 걸 보니.”
“정말이세요?”
“정말이고말고. 근데 아까부터 왜 그리 묻는 거야? 나는 항시 우리 복향이 생각뿐인데 그걸 몰라주니 섭섭하다.”
아기씨는 눈꼬리까지 추욱 늘어트리며 나에 대한 정을 말했다. 말귀 하나하나가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내가 긴 시간 바라 왔던 말들이 내 머리 위로 흘러 내 눈과 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너무나 따뜻하고 평안하여 숨조차 쉬기 싫었다. 이대로 이 순간과 함께 박제되고 싶은 마음이 발끝까지 쏟아져 내려 그림자처럼 굳었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것들을 쥐어뜯어 내고 입을 열었다.
“계희는 아니라던데요.”
“응?”
연갈색 눈동자가 무구하게 반짝였다. 그냥 속상한 일이 있었다고 눈물을 줄줄 쏟아 내며 그 빛에 매달리고 싶었으나 아직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
“계희는 아니라고 했어요. 자기가 내 머리칼을 한 움큼 뜯은 날에도 혼나지 않았다고.”
“뭐? 그런 일이 있었어? 어찌 내게 말하지 않은 거야? 안 되겠다. 내가 지금 당장 가서 똑같이 머리를 뜯어 줘야 속이 좀 풀리겠다.”
“알고 계시지 않았어요?”
“내가?”
“네.”
“그럴 리가 없잖아.”
숫제 간절하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얼핏 보면 제 순정을 믿어 달라고 애원하는 사내 같았다.
“계희가 말하길, 아기씨가 다 알고 계셨대요. 제가 괴롭힘당하는 것을요.”
“허튼소리. 너는 너를 그렇게 못살게 군 계집애 말을 믿니?”
“아기씨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제가 멍청이래요. 자기가 저를 괴롭히는 걸 아기씨가 몇 번이나 봤대요.”
“그런 적 없어.”
말을 주고받을수록 염려와 애달픔 대신 서늘한 부정이 그 자리를 메웠다. 나는 그것이 긍정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야 했다.
“아기씨. 청수는 왜 떠나야 했나요?”
“내일 날이 밝으면 집사한테 물어볼게. 이제 방으로 가자.”
“아기씨.”
“응.”
“예전에, 제가 청수랑 마주쳤을 때 화내셨잖아요. 제가 그때 청수랑 만난 것을 어찌 아셨어요?”
아기씨의 손에 잡힌 손가락이 강한 악력에 허옇게 질렸다. 가느스름하게 뜨인 눈이 나를 가늠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얼 말하려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슴이 아팠다.
“제가 청수에게 댕기를 받은 것, 아시죠? 그때 지켜보고 계셨잖아요. 계희에게 얻어맞는 것까지.”
“그래서?”
이제까지의 단정하고 고운 음색이 아니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나를 깔아뭉갰다.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입이 벌어지는 걸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아기씨 목소리인 줄도 몰랐을 테다.
“너, 너 뭘 잘했다고 따지고 들어? 내가 그놈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너도 그놈한테 아무 관심도 없다더니 나 몰래, 내 뒤에서 둘이 아주 재미 좋더라? 관심 없다고 해서 놔둔 건데. 그냥 동무 같은 건가 싶어서 놔둔 건데, 네가 나를 배신했잖아.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로 만들어 놓고서는 혼인할지도 모른다고 나한테! 나를 두고, 내 앞에서!”
“정말……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계희 말이 다 진정이었어요?”
아기씨는 나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보고 배신자라고. 그러면…… 그러면 나는 무얼 느껴야 하지? 지금 나를 덮치고 있는 건 대체 뭐지?
이유도 모른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
“왜요? 대체 왜요? 왜 모른 척하셨어요? 왜 잘해 주신 거예요? 그냥…… 그냥 다 같이 저를 놀리는 것이었나요? 네?”
“아니야.”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아기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저것은 진정일까? 진정 내 눈물을 보고 괴로운 것일까? 나는 이제까지 무수하게 속아 왔기에 그 무엇도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구박데기 종년 주제에 아닌 척 구는 거 보는 게 아주 우스우셨겠어요.”
“그런 거 아니야.”
“제가 가면 계희랑 같이 저를 비웃으셨어요? 오늘 쥐어뜯긴 년이 아닌 척 굴다가 엿 하나 주면 실실 웃으며 좋아한다고? 어디까지 해야 질질 짜면서 쟤가 나 괴롭혔으니 혼내 달라, 그렇게 말할지 내기하면서?”
“아니야!”
“뭐가 아닌데요? 그럼 맞는 건 뭔데요? 대체 뭐가, 무엇이…….”
말을 하면 할수록 숨이 가빠 오고 속이 답답했다. 무언가 단단히 걸린 느낌이라 손가락으로 가슴을 쥐어뜯어도 안 되길래 주먹으로 퍽퍽 쳤다.
몇 번 치기도 전에 거센 손길이 내 양손을 잡아챘다.
“뭐 하는 거야!”
“아기씨야말로 대체 뭐 하시는 건데요!”
“이러지 마, 울지 마.”
붙잡힌 손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빼낼 수가 없었다. 애초에 힘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어떤 힘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아는데 피할 곳이 없었다. 그런 막막함이었다.
“복향아, 향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런 생각을 담아 아기씨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내 의사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기씨는 내 분한 기색을 알아챘음에도 짚어 주듯 다시 나를 불렀다.
“향아. 나는…….”
듣기 싫었다. 왜, 왜 나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건데. 왜. 다들 자기들 멋대로 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나를 가지고 놀고, 나를 짓뭉개고…….
사지를 뒤틀며 반항했다. 복향아! 소리치는 음성이 간절했으나 나는 그 간절함이 꺼림칙했다. 아주 쳐다보기도 싫었다. 울며 도망가고 싶었고 도망갈 곳이 없어 울고 싶었다.
“향아, 향아. 나를 봐, 나 좀 봐봐.”
그악스러운 힘에 끌려갔다. 나를 부둥켜안은 아기씨는 주먹 쥔 내 손을 살살 펴며 달랬다. 맞닿는 모든 부분을 태워 버리고 싶은 눈빛으로 쳐다봤으나 아기씨는 뭐가 그리 급한지 그것도 모르고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나를 봐, 나를.
강제로 붙들려 간 손이 아기씨의 이마에 닿았다. 콧대의 곡선을 타고 내려왔다가 매끄러운 뺨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이끌고 있는 순서임에도 아기씨는 희열에 찬 표정이었다. 연인을 끌어안고 있는 듯 그렇게 달큰했다.
턱선을 지나 내 손에 목을 내어 준 아기씨는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낯으로 잠시 멈추었다. 졸라서 죽여 달라는 것인지 보드랍게 쓰다듬어 달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좋아.”
말을 내뱉을 때마다 진동하는 목울대 아래로 손이 미끄러졌다. 빗장뼈를 지나 옷깃 사이로…….
질겁하고 손을 빼내려고 했다.
“놔 주세요!”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더 봐.”
애타는 목소리와 다르게 다시 내 손을 끌어오려는 힘이 거셌다. 내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자 아기씨는 한 손으로는 내 팔뚝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가 입고 있는 저고리를 뜯었다.
무슨,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관절 무엇을 보라는 건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뜯긴 저고리 사이를 누볐다.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리는데 살갗에 닿는 감각이 너무나 이상했다. 우글거리거나 거칠다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캉거리며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젖가슴이 있어야 하는 부분이 그저 납작하고 딱딱했다. 단순히 빈약하다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건, 이 몸은…….
“나를 좋아하잖아.”
혼곤한 정신을 붙잡고 아기씨를 올려다봤다. 나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벌벌 떠는데, 아기씨는 고백하는 청년같이 수줍은 얼굴이었다. 아니, 같이가 아니지. 눈앞에 있는 것은 사내였으니.
“나도 널 좋아하고. 나를 봐. 우리 사이에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어. 늘 그랬던 것처럼. 계속. 그거면 되잖아. 혼인, 나도 할 수 있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만, 청수 그놈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저를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항상, 언제나, 늘.
그 누구보다.
아기씨는, 아니, 눈앞의 남자는 그것이 못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를,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좋아하면서도 계희가 하는 짓거리를 묵과했다고. 내가 천덕꾸러기 신세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차라리 나를 증오한다고 대답했다면 이렇게 무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사무치진 않았을 것이다.
“……제 어디가 좋으신데요?”
“너는 나랑 같으니까.”
“무엇이요?”
무엇이 같을까. 나는 이 남자와 같은 게 없었다. 비단 성별이나 신분이 아니더라도, 성격이나 버릇 따위를 헤아려 보아도 같은 것은커녕 비슷한 것도 찾기 힘들었다.
나는 이따금 그런 깨달음에 홀로 상처받았다. 가진 것이 적어 그런 것일까 봐 그랬다. 결핍이 또 다른 결핍을 부른 것일까 봐. 그리하여 나는 영원히.
“불쌍한 것이.”
너랑 나, 불쌍한 것이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