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다시 사는 인생 - 263
2016년 9월
SHJ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년 9월 린다를 그룹 회장으로 위촉하고 명예회장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선 경환은 각 나라에 건설된 혹은 건설 중인 SHJ타운을 방문하는 일 외에는 모든 그룹 경영을 린다에게 맡겼다. 작년 9월 완료 예정이었던 크루즈 선박이 호주에서의 2차 건조가 늦어지면서 경환의 일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희수는 3년 만에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는 바로 SHJ시큐리티에 입사했다. 호주의 SHJ시큐리티 훈련기지에서 6개월간의 맹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희수는, 중동 SHJ플랜트 공사현장 방어팀에서의 현장근무를 마치고 현재는 서산 SHJ타운에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는 곳은 한국이었다. 방미 이후, 일본의 반발 속에서도 동해 1함대의 증강계획을 발표하고 실행에 들어갔고, 올해 초, 8천 톤 급 이지스함 한 척과 KDX-2급 구축함 두 척이 배치가 완료되었다. 서해함대는 이미 2년 전에 중형 이지스함 두 척이 배치가 완료된 상태로 항모 전단을 꾸리기 위한 기초작업을 착실히 하고 있었다. 공군 또한 SHJ와의 KFX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며, 2017년 실전 테스트를 남겨 놓은 상태였다. 철벽시스템은 중국과 일본의 반발에도 한국과 미국, SHJ의 공동개발로 실전테스트를 성공리에 완료하고 실전배치를 앞두고 있었다. 다탄두 ICBM(대륙 간 탄도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는 버전으로 미국과 한국은 철벽-1과 철벽-2를 극비로 묶어 두 나라 이외의 판매를 사실상 금지했다.
“회장님, 곧 한국영해에 들어서게 됩니다.”
“벌써 한국에 도착했나 보군요. 지루할 틈이 없네요. 접안 시설을 확인되었나요?”
“SHJ아시아본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접안엔 지장이 없다고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32만 톤급 크루즈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은 한국에 없었다. 2년 전부터 SHJ아시아본사는 부산시에 일부 금액을 투자해 국제크루즈터미널을 확장했고 기존 시설물도 보강을 완료한 상태였다. 초대형 크루즈인 크리스털 호의 입항에 SHJ는 물론이고 부산시도 잔뜩 긴장해있었다.
“하하하, 제임스 드디어 한국에 도착을 하나 봅니다. 보면 볼수록 이 크리스털 호는 대단하네요.”
“빌, 제니퍼와 멜린다만 아니었어도, 빌의 승선은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하하, 이거 섭섭한데요? 사돈인 나에게 3백만 불의 승선료를 받고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빌이 너스레를 떨고는 다른 곳으로 급히 사라졌다. 수정에게 선물한 크리스털 호는 지난달 호주에서 진수식을 하고 본격적인 항해에 나섰다. 호화 크루즈 여행에 동참하기 위해 문의가 끊이지 않았지만, 주관사인 SHJ매니지먼트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일반 승객을 모집하지 않았다. 승무원 3,500명과 SHJ시큐리티 보안요원 1,000명을 제외한 승객 11,500명은 SHJ그룹의 장기근속자로 60세를 넘긴,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직원 중에서 선발했다. 3년 동안 전 세계를 일주하고 2기를 선발할 예정인 이 프로젝트는 모든 경비가 무료였지만, 빌 게이츠와 같이 경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승선이 승인된 자들에겐 경제력에 맞게 승선료를 받아 챙겼다. 그런 사람들에는 존 매케인과 노기찬 전 대통령을 비롯해 노르웨이 분데빅 전 총리 등 각 나라의 전임 정부 수반과 경제계의 수장들이 많았다. 승선인원이 밝혀지면서 떠다니는 UN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크리스털 호의 항해에 각 나라는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회장님, 린다가 아주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경환의 뒤로 환한 웃음을 한 황태수가 다가왔다. 상임고문직까지 내려놓고 야인이 된 황태수였지만,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표정이었다.
“자꾸 죽는소리하면 평생 SHJ 회장으로 남게 될 거라고 엄포라도 놓지 그러셨어요?”
“대답할 틈도 없이, 5년 후엔 무조건 자신도 크리스털 호에 승선하겠다는 말만 하고선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린다의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경환은 황태수를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설득에 성공했지만, 경환과 황태수가 떠난 휴스턴에서 홀로 남은 린다의 쓸쓸함과 고독을 경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희수가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는 노련한 린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경환은 SHJ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린다를 승선시킬 수 없었다.
“제가 만들기는 했지만, 이 크리스털 호는 대단합니다. 특히 회장님이 머무시는 이곳은 도저히 배라고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니까요.”
“모두 부회장님 덕분입니다. 제가 인복이 많지 않습니까.”
크리스털 호가 출항한 후, 경환은 처음으로 가까운 인물들을 자신의 거처로 초대해 식사를 같이 나누고 있었다. 집무실과 서재, 저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넘쳤다. 경환의 시선은 황태수를 비켜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알, SHJ퀄컴을 키운 어윈, SHJ플랜트를 은퇴한 최승호 부사장, 대현중공업의 정상길 회장 등이 눈에 들어왔다. 경환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경환에겐 끝이 아닌 시작이었고, 이들은 자신에게 예전이나 지금 큰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었다.
“여보,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어, 당신 왔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꼭 꿈만 같아서.”
“당신도 센티 할 때가 있나 보네요. 엄마하고 아빠까지 모셔줘서 고마워요.”
“무슨 소리야? 다 같은 부모님들이신데. 자기가 내 아내란 사실에, 난 매 순간을 감사하고 있어.”
경환은 팔짱 낀 수정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지치고 힘들 때에도 아무런 내색 없이 자신만을 바라봐준 수정에게 경환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경환은 양가 부모님들을 모시고 크루즈 여행을 함으로써 수정에 대한 고마움과 그동안 못다 한 효도를 대신하고 있었다.
“학교 다니면서 저택 안주인 노릇을 해야 할 제니퍼가 한편으론 걱정이 많아요.”
“제니퍼 똑 부러지잖아. 크리스토퍼가 제니퍼를 잘 도와줄 거야. 그리고 내년이면 희수도 휴스턴으로 복귀할 테니, 그 아이들을 믿어 보자고.”
제니퍼는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정우와 결혼식을 올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는 경환의 제안과 정우와 제니퍼는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고개를 흔들었고, 대학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둘의 결혼을 허락했다. 제니퍼는 수정이 다닌 휴스턴 대학을 선택해 학업에도 충실하며 수정이를 대신해 SHJ타운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꿈은 뭐야?”
“글쎄요. 당신 곁에 이렇게 늘 같이 있는 게 제 꿈이에요. 당신은요?”
“난 자기와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SHJ를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거야. 난 힘들겠지만, 내가 기초를 닦는다면 정우와 희수 때에는 가능하지 않겠어?”
“당신은 충분히 해내실 거예요.”
수정이 경환의 어깨에 기대어오자, 수정의 향긋한 냄새가 경환을 자극했다. 호주의 핵융합실험로는 ITER의 와해를 뒤로하고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했고, 3년 이내엔 상용화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또한, 작년부터 시작된 우주호텔 프로젝트는 일정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경환이 은퇴 아닌 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이와 제이콥의 가문은 최소 150년에서 길게는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길 힘이 SHJ에 없다는 것이 경환의 고민이었다. SHJ의 한계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판단에, 경환은 이런 SHJ의 약점을 국제적인 연결망을 이용해 극복하겠다는 복안으로 크리스털 호를 건조했다. 희수가 그룹경영에 나서려면 최소 10년은 필요했고 경환은 10년 동안 크리스털 호를 이용해 전 세계와 SHJ를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을 생각이었다.
“회장님, 사모님.”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리자, 하루나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아직 치료가 완료되지 않았는지 목발을 짚고 서 있었지만, 하루나의 얼굴은 예전과 비교해 훨씬 밝아 있었다.
“여보, 제가 불렀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아우로 받아들일 생각이에요.”
“사, 사모님.”
“오늘부터라도 사모님이란 호칭은 빼고 언니라고 불러요.”
경환이 나서기 전, 수정은 SHJ메디컬의 최신기재를 크리스털 호로 옮기고 하루나를 승선시켰다. 여자로서 큰 결심을 한 수정이 고마웠지만, 경환은 아직은 하루나에 다가가기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경환은 잡은 수정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하루나를 바라보았다.
“하루나, 의료진의 말로는 일 년 정도면 목발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하더군. 그때까지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
“회장님, 감사합니다.”
“회장님이란 소리 듣기 거북하니, 뭐 다른 좋은 말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나도 하루나를 앞으론 여자로 대할 생각이야. 같이 노력해 보자고.”
경환을 향해 수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환이 하루나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창밖 수평선 너머로 부산항이 세 사람의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 더 올라가야 해요?”
“희수 너, SHJ시큐리티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예전보다 많이 공손해졌다.”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는 것 같아서 그러는 거예요.”
“아빠에겐 추억이 깃든 장소라서 너와 한번 와보고 싶었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장소가 잘 생각나지는 않는구나.”
강원도 깊은 산 속을 경환은 헤매고 있었다. 경환의 팔짱을 끼고 산에 오르던 희수도 험한 산세에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깊은 산 속에 무슨 추억이 담겨 있는지 희수는 경환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다. 알을 포함한 경호팀은 깊은 산 속으로 이동하는 경환 때문에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살피기 바빴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한 끝에 경환은 등을 기댈 정도로 굵고 높게 솟은 나무를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희수야. 아빠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 이곳인 것 같다.”
경환은 희수의 손을 꼭 잡았다. 26년 전, 자신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려 했고, 마몬과의 계약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은 곳이었지만, 경환은 꿈에서라도 이곳을 잊을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의 영혼이 마몬에 귀속된 상태였지만, 희수를 다시 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환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빠, 이곳에 어떤 추억이 있는데요?”
“하하하, 그리 큰 건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고 SHJ를 만들 계획을 했던 곳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희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경환이 볼세라 급히 눈가의 물기를 훔쳤다. 그러나 경환은 나무를 기대고 마지막 소주병을 입에 털어 넣으려 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환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희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희수야. 내가 왜 이곳에 너와 같이 왔는지 알겠니?”
“그, 그건······. 아뇨, 어떻게 알겠어요?”
희수는 말을 얼버무렸다. 경환은 그런 희수를 한참 동안 바라만 보다 희수를 덥석 안아주었다. 경환은 희수가 말 못할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마몬의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었지만, 경환은 희수를 채근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업보가 희수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SHJ는 우리 가족의 것만은 아니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너와 정우가 SHJ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었다면, 난 결코 너희에게 SHJ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어. 희수 넌 SHJ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빠가 제이와 제이콥 가문과 타협을 통해 SHJ의 안정을 이뤘다면, 다음 세대는 그 두 가문을 뛰어넘어 역으로 타협을 강요할 정도의 능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 때문에 아빠가 크리스털 호를 만들었잖아요.”
“네 말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럼 넌 어떻게 할 거니?”
희수의 판단력은 경환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희수는 강한 것은 쉽게 부러진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경환의 질문을 받은 희수는 일 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SHJ시큐리티를 먼저 장악할 거예요. 아빠의 그늘을 벗어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아빠 다음은 저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에요. 그다음은 린다 아줌마의 모든 것을 배울 생각이고요. 아빠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무엇이 제가 부족한지를 십 년 동안 철저히 배우고 고쳐나갈게요.”
“그래, 아빤 너와 정우를 믿는다. SHJ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는 너희 둘에게 달려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의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있다. 이걸 명심하고 절대 소홀하면 안 된다.”
“배워갈게요. 엄마가 기다리니, 이젠 내려가요.”
“그러자. 네 고모부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엄마와 같이 청와대에 들어가 봐야겠다.”
희수의 손을 잡은 경환이 발걸음을 돌렸다. 나무 밑으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서너 병의 소주병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도 찾지 않을 이곳에 소주병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하는 경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 순간이 현실이든 꿈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경환의 다시 사는 인생은 겨우 반을 지났을 뿐이고,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환이 믿는 것은, 자신과 희수의 등 뒤로 지는 태양이, 내일이면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