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62화 (23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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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62

    경환이 백악관을 방문한 이후 힐러리 정부는 심석우의 방미를 놓고 갑론을박에 휩싸였다.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일본 정부의 집요한 로비에도 대체에너지와 신무기 개발, 우주개발과 연결된 한국의 이탈은 미국에도 큰 부담일 수 있다는 지적과, 미국의 답변이 늦어지는 것에 불만을 보이는 한국 정부가 중국과 군사교류를 추진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암암리에 가해지는 SHJ의 압력에 미국 정부는 심석우의 방미를 통해 직접협상을 추진한다는 계획으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큰 기대감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심석우는 역대 정부와는 다르게 미국 정부의 환대를 받았지만, 실무 협상에선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심석우가 요청한 모든 제안에 제동부터 걸고 나선 미국 정부의 진 빼기 전략에 심석우는 약소국의 설움을 처절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와 SHJ기술연구소가 추진하는 모든 무기 개발에 미국의 참여와 통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원론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카일의 보고로 전해 들은 경환은 백악관에 압력을 다시 행사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심석우의 대범한 시도가 힐러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실무진들의 모든 협상을 중단시킨 심석우는 힐러리와의 단독 회담을 통해 철벽시스템을 단독으로 개발하겠다고 통보해 버렸다. 또한, 전작권을 예정대로 환수하고, 중국과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강화해 주변국의 영토야욕을 분쇄하겠다는 강성발언으로 힐러리를 분노케 하였다. 경제 제재를 할 수도 있다는 힐러리의 엄포에도 심석우는 하려면 하라는 식으로 버텼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경환도 심석우의 강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젊으시니 그 추진력을 제가 따라가질 못하겠군요.”

    “하하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을 상대하느라 제 머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내일이면 워싱턴을 떠나 뉴욕과 LA의 교민들을 위문하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결론이 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힐러리는 힐러리대로 심석우는 심석우대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통령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사일 사거리가 철폐되면 가장 먼저 반응할 곳은 일본입니다.”

    “그 점 동감합니다. 그러나 일본도 내부적으론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대만도 미사일 사거리를 파기하고 사거리 3,000KM 탄도탄을 실전 배치한 상태입니다. 한국만 제한조치를 가지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중동지역보다도 동북아의 군사력 팽창이 매우 심각하다고 봅니다. 한국이 시작하면 일본이 뛰어들 것이고 동북아 지역이 화약고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동북아 지역은 화약고가 된 지 오래전입니다. 북한만 하더라도 탄도탄을 보유하고 있고 일본도 사거리 3,000KM의 지대지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미국의 앞마당인 태평양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란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한국의 도움 없이는 결코 태평양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일본의 이지스함엔 SM-3가 배치되었고, 한국엔 겨우 쓸모도 없는 SM-2가 배치되었을 뿐입니다. 북핵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해군력을 증강을 통해 주변국과 같은 군사력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우린 미국의 동의가 없더라도 철벽시스템은 개발합니다.”

    채찍과 당근을 통해서는 심석우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힐러리를 당혹스럽게 했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한국을 예전과 같이 강압적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심석우의 뒤에 버티고 있는 SHJ가 힐러리에게도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막강한 로비력도 제이와 손을 잡은 SHJ의 전방위로 퍼붓는 로비엔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힐러리는 보채는 심석우를 달래야만 했다.

    “좋습니다. 미사일 사거리는 1,000KM로 조정하고, F-22의 일본 판매를 보류하겠습니다. 철벽이 개발되기 전엔 SM-3와 PAC-3를 저렴한 가격에 올해부터 한국에 판매하겠습니다. 또한, 일본의 영토 분쟁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이 정도가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상입니다.”

    “대통령의 고민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한국보단 일본의 손을 들어주시는군요. 한국이 핵을 개발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전력을 갖추겠다는 겁니다. 다음 달 중국을 방문하는 제 손에 선물이 들려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대통령께 다시 하겠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 심석우에 힐러리는 질려가고 있었다. 한국이 너무 커버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힐러리는 한국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국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군사적으로 미국을 위협할 수준에 도달하고 있는 중국을 최전방에서 견제하고, 혹시 모를 중국과의 전쟁을 국지전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한국이 반드시 필요했다. 더욱이 한국을 밀고 있는 SHJ는 자신도 건드릴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힐러리를 고민에 빠트리고 있었다. 우경화로 한국을 자극한 아베 신조를 힐러리는 씹어버리고 싶었다.

    “미사일 사거리 1,500KM, 철벽시스템의 공동 개발 이것이 제 마지막 제안입니다.”

    1,500KM면 북경과 동경을 사거리에 둘 수 있는 거리였다. 심석우는 아직은 미국을 이길 힘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이런 조건도 경환의 압박을 염두에 둔 힐러리의 꼼수였지만, 자신이 바라는 조건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도 일부 양보하겠습니다. 미사일 사거리는 2,500KM, 삼 년 후 재조정하기로 하고, 철벽시스템과 신무기 개발에 미국의 공동참여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일본과 같은 핵연료재처리와 고체연료 로켓개발을 인정받아야겠습니다. 저도 이것이 마지막 제안입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힐러리의 놀란 표정에도 심석우는 꿈쩍하지 않았다. 원자력 잠수함과 항공모함 개발 등은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박화수가 정권을 이어받아 건조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을 만들기만 하면 충분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미사일 사거리 철폐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시간을 초과하며 두 사람의 회담은 계속되었다. 모든 합의를 마치고 공동발표를 하는 자리에서 심석우의 밝은 표정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여보, 아가씨가 참 예쁘게 나오네요.”

    “무슨 소리야? 비쩍 마른 게 뭐가 예쁘다고 그래? 내 눈엔 당신이 가장 예뻐.”

    “호호호, 요샌 아부도 많이 늘었네요. 그래도 듣기 싫지는 않네요.”

    대통령 전용기에서 교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트랙을 내리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심석우의 손을 잡고 내리는 정아는 교민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고 있었다. 정치인의 아내로 살면서 모든 행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정아에 경환은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영부인이 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 잘 만나 영부인 소리도 듣고 아가씨가 부럽네요.”

    “지금이라도 정치에 뛰어들까? 청와대가 아니라, 백악관 안주인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말만 해. 지금이라도 당장 SHJ 때려치우고, 정치판에 뛰어들 테니까.”

    “아이고, 무슨 말을 못하겠네요. 그냥 난 이대로가 좋아요.”

    인생의 반이 꺾인 지 오래였다. 경환은 수정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인생의 반을 함께한 수정은 경환에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지금의 SHJ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수정의 기다림과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걸 경환이 모를 리 없었다.

    “지금까지 날 믿고 기다렸는데, 딱 2년만 더 기다려. 그땐 귀찮을 정도로 당신 옆에만 있을 테니까, 구박이나 하지 말고.”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2년쯤 못 기다리겠어요? 황 고문님이 한국에 가신 것도, 그 일 때문이라면서요?”

    누가 말을 해 줬는지, 수정도 2년 후의 일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크루즈 건조에 매달리던 황태수는 대현중공업에 발주한 크루즈 건조를 현장에서 직접 감독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크루즈인 22만 톤 급 규모의 OASIS OF THE SEAS 호를 간단하게 누를 정도로 규모나 시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32만 톤 급으로 건조되는 가칭 SHJ 호는 선박 길이 430미터에 폭 75미터로 승무원을 합쳐 총인원 만 오천 명의 탑승이 가능하게 설계되었다. 최상부 데크는 하나로 연결해 설계도에도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 특수지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건조가 완료되면 대형 도크가 있는 호주로 옮겨져 최상부와 특수 공간에 대한 추가 제작을 SHJ 그룹이 단독으로 할 예정이었다.

    “당신이 알고 있었다니 김빠지는데? 배 이름이 뭔지 알아?”

    “아뇨, 배 이름이 뭔데요?”

    “비밀이야. 하하하.”

    “치, 그런 게 어딨어요?”

    경환의 가슴을 때리는 수정의 손을 잡고 경환이 수정의 입술을 찾았다. 느닷없는 기습에 놀라긴 했지만, 수정도 경환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수정과 깊은 입맞춤을 나눈 경환이 수정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여보, 내년이면 제니퍼도 졸업해요. 이젠 두 아이 결혼을 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멜린다도 결혼을 서둘자고 하고 있고요. 정우 짝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아요.”

    “빌에게 어떻게 제니퍼 같은 딸이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두 아이가 서로 좋아한다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어. 그 일은 당신이 알아서 진행해.”

    “알았어요. 그리고 하루나의 재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네요.”

    “나도 소식은 들었어. 재활에 큰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수정으로 인해 하루나의 호주행이 결정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경환은 애써 모른척했다. 수정이 인정했다 해도 아직은 하루나를 마음에 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품 안에 있는 수정과 다시금 깊은 입맞춤을 하고선 저택을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카일, 이번 심석우의 방미에서 새로운 정보는 들어온 게 없습니까?”

    “미사일 사거리를 2,500KM로 조정하고 핵연료재처리와 고체연료 로켓 개발을 묵인한다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예상외로 심석우의 배짱에 백악관이 백기를 들었다는 분석입니다. F-22 구매와 항공모함 개발에 미국을 참여시키겠다는 요청은 관철하지 못했지만, 대체로 한국정부가 이번 회담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22는 KFX 사업으로 따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겁니다. 항공모함도 마찬가지고요. 그나저나 심석우의 강짜에 우리가 머리 아프게 생겼습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만드셨으니, 그 책임도 회장님이 지셔야지요. 심석우가 강짜를 부린 배경엔 우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경환의 우는 소리에 린다가 뾰로통하게 받아쳤다. 한국에서 건조하는 크루즈가 무슨 용도로 사용될지 린다는 알고 있었고, 자신만 남겨두려는 경환에 린다는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경환은 째려보는 린다의 눈을 애써 외면했다.

    “린다에게 오랜만에 혼나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아테나-2의 개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데, 린다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아테나-2는 아테나-1과는 기능과 성능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괴물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슈퍼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다는 분석과 함께, 상용화에도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인공지능을 탑재한 아테나-SP가 곧 완료된다는 점입니다. 이 기술은 당분간 SHJ 내에서만 독점으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SHJ테크놀러지는 아테나-2 개발과는 별도로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를 접목한 아테나-SP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모든 시스템 운영을 계산에 따른 수동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자가학습을 통해 능동적 사고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SHJ테크놀러지에서도 개발에 참여한 정우와 핵심 인력만 알고 있을 정도로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고, 당분간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물건이기도 했다.

    “크루즈 건조가 완료되고 호주로 이동되면 크루즈 시스템 운영을 아테나-SP에게 맡겨볼 생각입니다. 이 기술은 절대 외부로 노출되면 안 되니, SHJ시큐리티는 특별히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크루즈 운영으로 확실한 판단이 서면 SHJ타운으로 천천히 확대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으십시오.”

    “알겠습니다. 개발이 완료되더라도 검증에 시간이 필요하니, 크루즈 건조에 맞춰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내년이면 호주에 건설 중인 핵융합실험로도 테스트를 거쳐 본격가동 체제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경환은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총탄을 가슴에 맞았을 때부터 자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마지막 단추를 채우기 위해 버틸 수밖에 없었다.

    “크루즈 건조가 완료되면 SHJ는 린다를 회장으로 추대해 그룹경영을 맡길 겁니다. 그러나 SHJ시큐리티는 계속해서 제 직속으로 남게 됩니다. 린다와 카일은 업무 협조체계에 대해 연구해서 보고하세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린다도 경환과 함께 크루즈에 탑승하고 싶었지만, 희수와 정우가 SHJ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 도와달라는 경환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한, 완전한 은퇴가 아닌 크루즈를 통해 SHJ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퍼트리려는 경환의 계획에 린다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SHJ는 경환의 후계자를 기다리며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숨 고르기에 들어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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