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다시 사는 인생 - 261
기대와 우려 속에 51%라는 역대 최저 지지율을 가지고 심석우 정부는 출범했다. 40%의 득표율과 과반수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의석수로 국회 장악력이 떨어지는 신정연으로 인해 초기 심석우 정부는 두 야당의 딴죽걸기와 기득권 세력의 저항 속에 정책 추진에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심석우 정부와 신정연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대통령님, 여야 대표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강 실장. 나가봅시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선 강동원이 심석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다가섰다. 화성산업과 SHJ화성플랜트를 거치면서 강동원은 한우물만 팠다. 경환에게 깨지고 박화수에 의해 다듬어지면서 강동원은 화성플랜트를 키우는 데 일조했고, 박화수가 정치에 뛰어들면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자 강동원은 자신의 운명을 박화수에게 줘 버렸다. 박화수의 충신으로 강동원이 등장하면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고, 그런 강동원의 열정과 성실에 탄복한 심석우는 박화수를 설득해 강동원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경력이 미천하다는 지적이 정부와 여당 내에 많았지만, 심석우는 믿음을 보이며 그런 우려에 개의치 않았다.
강동원의 인도를 받으며 접견실에 심석우가 들어서자, 박화수와 함께 두 야당의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모셨어야 했는데 시기적으로 좀 늦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론 이런 자리를 정례화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들 앉으시지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심석우가 악수를 건네자, 두 야당 대표는 심석우의 손을 가볍게 잡고는 심석우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두 야당 대표의 얼굴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국회 장악력이 떨어지는 정부를 길들일 필요가 있었고, 오늘 만남은 심석우의 항복선언을 받기 위한 자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박화수와는 달리 두 야당 대표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정부가 너무 여론플레이에만 집착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경제부처에서 부자증세를 검토하고 있다고 하는데, 기업의 부담이 커진다면 투자가 위축되고 내수소비가 감소해 결국은 국민경제가 발목 잡힐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가 작년에 시도한 부유세가 실패할 것이란 분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권을 빼앗기고 야당으로 전락한 황국철 대표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대통령의 발언을 기다리지도 않고 선수를 빼앗은 황국철의 거만함에 박화수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심석우는 그런 황국철을 향해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하하하, 먼저 이렇게 치고 들어오시니 제 간담이 다 서늘합니다. 전경련에선 GDP 대비 법인 세액이 크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래서 전임 정부는 기업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부자 감세를 했다는 것도 어는 정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면 상황이 다르더군요. 2000년 대비 2011년의 가계소득은 86% 증가에 그쳤지만, 근로소득 세수는 141%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법인소득은 530%로 대폭 증가했지만, 법인 세수는 151%만 증가했을 뿐입니다. 늘어난 소득에 비해 세수는 그리 크지 않은데, 문제라고 보지 않으십니까?”
“기업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입니다. 이를 통해 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해졌고 한국을 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론을 반영하지 않은 부유세는 실패할 것이고 기업들이 한국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심석우 정부가 들어서며 부자증세를 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건 심석우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지만, 서민들의 기대감과는 달리 고소득자와 기업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었다. SHJ와 연결된 기업들은 조용했지만, 그 외 재벌기업들은 본사를 해외로 이전할 수도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었다. 심석우가 급히 웃음을 거둬들였다.
“떠난다면 잡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본사를 해외를 이전하고도 이전과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업이 있을지 저는 의문이군요. 경제가 우선이냐 복지가 우선이냐 이 문제는 닭과 달걀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도 경제가 위축되지 않는 선에서 세법을 조정해 복지국가의 초석을 다지려는 것입니다. 급격한 변화보단 연착륙을 위한 변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니 정부를 믿어주시길 바랍니다.”
황국철은 입을 닫았다. 심석우의 말처럼 재벌 기업이 본사를 해외로 이전한다면 한국에서의 지위를 누리기는 힘들었고 기술과 자본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공하려다 역공을 맞은 황국철은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화제를 급히 돌렸다.
“정부의 급격한 군사력 증강 정책에 주변국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물론 자주국방의 필요성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속도를 조절하며 먼저 외교력을 발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화수의 기부로 SHJ의 발주에 따라 대현중공업은 록히드 마틴과 합작으로 중형급 이지스함 두 척을 건조하고 있었고, 동해 1함대의 전력증강과 SHJ기술연구소와 합작으로 KFX 사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북한과 중국, 특히 일본이 한국의 군사력 증강에 심한 반발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외교력에만 매달리겠습니까? 외교력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일본 제3 호위함대와 불미스러운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단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하고 동해 1함대는 전멸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최소한 해군 장병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조국의 바다를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 SHJ와의 정경유착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간에는 정부와 여당이 SHJ의 하수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한국 기업도 아닌 미국 기업과 정부의 유착관계가 계속된다면 이번 정부에 국민들은 등을 돌리게 될 겁니다.”
조용히 황국철의 선공을 지켜보던 진보를 대표하는 박원빈 대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치고 들어왔다. 신정연의 등장으로 수도권 세력을 넘겨주고, 대선 이후 증폭된 계파 간의 갈등으로 당의 분열될 위기에 직면한 박원빈은 심석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경환 회장이 제 처남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정부와 SHJ 간의 합작 사업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그러나 SHJ와 정부와의 합작은 과거 문민정부 시절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또한, 참여정부 때 가장 활발하기도 했고요. 그런 SHJ와의 정경유착에서 두 대표님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실 SHJ 입장에서 한국을 통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단지, 이경환 회장의 모국이 한국이란 사실만으로 우린 SHJ의 등골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미국정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방향을 돌리려고 하는 것에는 SHJ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정경유착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구차한 변명보다 정면돌파를 선택한 심석우의 말에 두 야당 대표의 마땅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헛기침만 연신 해대고 있었다. 박화수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을 심석우를 통해 깨닫고 있었다. 이번 청와대 회동으로 얻을 것이 많지 않다는 걸 실감한 두 사람은 서슬 퍼런 정권 초기를 피해 때를 기다릴 필요를 느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빠진 황국철을 대신해 박원빈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신정연 소속 의원들 때문에 머리가 아픕니다. 수험생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회도서관에서 살다 보니, 우리 의원들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출석체크도 하신다면서요?”
“하하하, 그건 제가 아니라 여기 박화수 대표님이 답변하셔야겠습니다.”
굳었던 인상을 핀 심석우가 총대를 박화수로 넘겼다. 공부하기 싫으면 당을 떠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신정연 소속 의원들은 정부정책 연구와 지역개발 정책을 발의하기 위해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정책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상임위원회 활동도 신정연 의원들이 가장 활발했고 국민들은 그런 신정연 소속 의원들에게 새로운 정치를 느껴가고 있었다.
“세금으로 세비를 받는 국회의원이 정책 개발을 위해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회기나 국회 활동에 불참하는 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저버린 파렴치한 행동으로 우리 당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황국철과 박원빈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국민들의 시선이 신정연으로 급속히 쏠리고 있었고, 기존 정치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3년 후에 있을 총선에서의 필패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차기 정권탈환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직감한 두 사람은 당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환골탈태를 선택해야만 했다.
“리 회장님과는 두 번째 만나는 거지요? 급히 모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통령께서 부르신다면 달려와야지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차례 방문한 백악관이었지만, 경환의 위치는 예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엔 힐러리와 함께 이번 정부의 핵심인사들이 모여있었다. 그들 중엔 NSA 국장인 제이 존슨도 눈에 띄었다. 제이와 경환의 입김이 작용한 점도 있었지만, 미국의 안보를 위해 혁혁한 공이 인정되어 힐러리 정부에서도 NSA를 계속 맡고 있었다.
“존 브레넌입니다.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서로 가졌지만, 과거는 잊고 미국의 미래를 위해 서로 고민합시다.”
“CIA를 맡게 되신 거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부탁합니다.”
힐러리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CIA였다. 국장으로 임명된 존 브레넌은 힐러리의 측근으로 합류하면서 SHJ와의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CIA를 수습하고 있었다. 유럽의 각 지부가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 CIA는 SHJ시큐리티의 교묘한 방해공작 속에 힘들게 조직을 재건하고 있었다.
“리 회장님. 과거를 다시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이젠 SHJ가 나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CIA에서 SHJ와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하는 데,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를 높게 평가해 주셔 감사합니다. 그리고 CIA 내부 깊숙이 SHJ를 음해하려는 조직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는 마당에 우리가 먼저 손을 잡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마치 유럽조직이 무너진 이유가 SHJ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더군요. 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 브레넌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가장 강력한 힘을 펼칠 수 있는 정권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경환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CIA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SHJ시큐리티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봤지만, 존 브레넌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SHJ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회장님의 말처럼 불온한 조직이 CIA 내부에 기생한다면 저는 이것을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장님의 말씀 기대합니다. 공동 프로젝트는 그 이후에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제이와 제이콥과 같은 배에 타기로 한 이상, 막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CIA도 함부로 경환을 건드릴 수 없었다. 존 브레넌의 곤혹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두 사람을 바라보는 힐러리의 표정은 밝았다. 앨 고어와 존 매케인을 통해 힐러리는 SHJ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통령 당선도 제이와 경환과의 거래가 없었다면 당내 후보 경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 자. 딱딱한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한국의 심 대통령 방미와 관련해 한국정부에서 결정하지 어려운 요구를 해 왔습니다.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당장 일본의 반발이 예상되는데, 혹시 철벽이란 방어시스템에 한국정부가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힐러리의 날카로운 눈이 경환에게 향했다. 제이 존슨을 통해 힐러리가 자신을 찾은 이유는 알고 있었다. 경환은 속으로 탄도탄 방어시스템을 도둑질한 심석우를 욕하고 있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2천 년 중반부터 한국의 ADD와 공동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건 존 매케인 정부와의 합의를 기반으로 한 사업이었습니다. 미국이 일본과 공동으로 개발한 SM-3의 BMD 시스템과는 별도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는 개념으로 한 연구였고, 기초 기술을 한국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는 다르군요. 한국 정부는 발만 담그고 모든 기술은 SHJ기술연구소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정보가 잘못된 건가요?”
한국의 ADD나 정부기관에서 정보를 빼내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란 사실을 경환은 다시금 깨달았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힐러리의 표정은 마치 승리자의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힐러리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치고 들어왔다.
“심 대통령이 철벽의 공동개발을 제안하면서 미사일 사거리 완전 철폐와 F-22 구매 승인, 항공모함 개발을 요청했습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이 엄청난 반발을 하면서 핵을 개발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를 설득해 주세요. 그리고 SHJ에서 개발 중인 철벽 시스템은 펜타곤과 연구를 해 주시고요.”
욕지거리가 올라오는 걸 경환은 억지로 참았다. 오 년 전이라면 백악관의 엄포에 타협으로 대응했겠지만, 백악관을 오기 전, 한국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자고 제이와 제이콥을 설득한 경환에게 힐러리의 엄포는 통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소소한 일들이 미국 정보기관에 그대로 노출되는 걸 알고 있는데 탄도탄 방어시스템 개발을 대놓고 할 정도로 한국정부가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말씀드리겠는데, 철벽시스템은 한국정부의 기술이 대부분입니다. SHJ는 공동기술 개발로 단지 숟가락만 얹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말지는 백악관에서 결정할 문제지만, SHJ의 경영에 백악관이 나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럼 한국을 버리시든지요. 한국이 군사력 개발에 힘을 쓰는 이유도, 일본의 영토 도발과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미국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고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이 중국과 함께 일본을 견제하려 든다면, 그땐 어떤 대처를 하실 겁니까?”
힐러리와 경환의 기 싸움은 회의에 참석한 정부요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며 오랫동안 지속했다. 철벽시스템이 완료되면 SM-3와 PAC-3는 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정보 분석이 나오면서 백악관은 경환을 통해 쉽게 얻으려 했지만, 예상외로 강경하게 나오는 경환에 서서히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