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다시 사는 인생 - 258
미국과 한국의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경환은 마지막 단추를 채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공화당의 미트 롬니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민주당 상원 의원인 제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힐러리 클린턴에게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경환은 제이와 함께 비밀리에 힐러리와 만나 대선 승리 이후에 일들에 대해 사전 협의를 거쳤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한국은 여야의 대선 후보 경선이 시작되면 구태의연한 네거티브 전략이 난무하며 서로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신정연은 경선 후보 간의 철저한 정책 대결로 심석우를 대선후보로 결정한 상태였다. 이런 정책대결은 TV를 통해 여과 없이 방영되었고 국민들은 인물이 아닌 정책으로 경쟁하는 신정연의 경선방식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미국보단 한국 대선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경환은 얼굴까지 붉히며 황태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환의 질책에도 황태수의 얼굴엔 편안함이 묻어나 있었다.
“회장님, 물이 고이면 썩는 법입니다.”
“SHJ는 아직 고인 물이 아닙니다. 반도 채우지 못한 상태인데 벌써 물을 빼겠다는 부회장님의 말씀에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경환의 고함에도 황태수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경환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황태수도 이번만큼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22년 전, 경환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황태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화성산업이라는 들어보지도 못한 회사의 실장으로 오성건설의 잘나가던 부장인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경환을 황태수는 잊을 수 없었다. 일개 중소기업을 글로벌 기업인 KBR의 파트너로 만든 추진력과 예측력은 도저히 20대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경환이 SHJ란 기업을 만들고 자신에게 내민 손을 잡았을 때에도 황태수는 내심 이를 반겼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껏 느끼고 있었다. 그런 황태수가 자신의 자리를 놓고 싶어 하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 한계는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이콥과의 관계가 정리된 지금, SHJ는 과감한 전략으로 미래를 선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보다는 린다가 적격입니다. 그건 회장님도 잘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누이 말해왔지만, SHJ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기업으로 남아야 합니다. 아직은 조화가 필요하다는 게 솔직한 제 생각입니다. 물론 린다가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린다의 강함은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부회장님이 받쳐주셔야 합니다.”
“린다는 회장님 덕에 강함과 함께 유연함을 이미 갖췄습니다. 충분히 회장님을 보좌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SHJ는 정년이 없다는 게, 제 신조란 걸 모르셨습니까?”
경환은 황태수의 부회장직 사임을 절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황태수의 뜻을 경환도 모르지 않았고, 린다면 충분히 SHJ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태수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혹시 제 사임을 막으시는 이유가 저보다 먼저 쉬시려고 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환이 말을 더듬자, 황태수는 소파에 붙였던 몸을 들어 올려 경환의 코앞으로 다가갔다.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 경환은 연신 헛기침을 해댔고 경환의 약점을 잡은 황태수는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제가 회장님을 모신지 20년입니다. 제 마누라 생각은 몰라도 회장님 생각은 충분히 읽을 수 있지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저는 못 속입니다.”
“이거 부회장님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군요. 어쨌든 부회장님의 사임은 못 받아들입니다. 아니 안 받아들입니다.”
이유도 없는 경환의 강짜에 황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태수는 한번 결정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경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경환을 설득하기 위해 황태수는 마지막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태수의 얼굴은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다.
“사모님께 크루즈 선박을 선물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제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그 대신 그룹 부회장으로 린다를 임명하시고 저는 그룹 고문으로 남게 해 주십시오. 이 정도면 좋은 거래라고 생각하는데요.”
“헉!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최석현 회장입니까?”
경환은 제이콥과의 거래를 성사하고 은밀히 최석현에게 크루즈 선박의 설계를 부탁했다. 황태수에게 그룹 경영을 맡기고 수정과의 약속을 지키려던 경환의 계획은 부회장직 사임이라는 복병을 맞아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비밀을 지킬 것을 최석현에게 다짐받았던 경환은 자신의 뒤통수를 갈긴 최석현을 그냥 놔두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최 회장은 아닙니다. 사모님이 하신 말씀을 제 집사람이 전해 주더 군요. 기대하시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셨답니다. 회장님을 슬쩍 넘겨짚어 봤는데, 최 회장에게 뭔가를 지시하신 것을 보면 제 추측이 맞았나 보군요. 그리고 제 입 아주 쌉니다. 하하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제 뒤통수를 제대로 치시는군요.”
제이콥과의 싸움에도 밀리지 않던 경환은 황태수를 앞에 두고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환은 그런 황태수가 고마웠다. 공격적인 경영을 통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황태수의 말엔 경환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었다. 경환은 때를 알고 물러서려는 황태수가 고마우면서도 야속하기만 했다.
“회장님, 전 죽을 때까지 SHJ 사람입니다. SHJ에 대한 애정이 넘치기에 물러나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회장님의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저보다는 린다가 적격입니다.”
경환은 더는 황태수의 결심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다고 황태수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린다보다는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켜준 황태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결심을 한 경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 집사람을 속일 순 있어도 부회장님을 속일 수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부회장님이 내미신 거래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요. 자리 이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명패만 고문으로 바꾸시고 크루즈 건조를 맡아 진행해 주세요. 이 비밀이 샌다면 그땐 그룹 회장으로 복귀시킬 겁니다.”
“하하하, 비밀이 샐 염려는 없습니다. 크루즈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을 하면 그만이니까요. 저도 오늘부턴 두 다리 쭉 뻗고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SHJ는 황태수를 그룹 고문으로 위촉하고 린다를 그룹 부회장으로 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린다의 강력한 반발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황태수와 경환의 설득에 린다도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수의 은퇴를 지켜본 어윈 제이콥스는 고령인 자신의 은퇴도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경환은 두 개의 중심축이 동시에 무너지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일언지하로 거절해 버렸다.
본격적인 린다 체제로 모양새를 바꾼 SHJ는 제이콥과의 싸움으로 위축되었던 그룹 경영에서 벗어나, 그동안 쌓아놨던 막대한 자금을 통해 M&A 시장을 싹쓸이하는 공격적인 투자로 SHJ테크놀러지와 SHJ유니버스의 기술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했다. 또한, FRB 뉴욕은행 지분을 확보함으로 이사진 구성권한을 받은 SHJ는 20명의 이사진을 파견해 본격적으로 FRB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직 제이나 제이콥이 가진 영향력엔 미치지 못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중간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경환은 핵심 사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경영을 린다와 회장단에 넘기고 있었다.
“너 혼자 컸다고 생각하는 거니? 엄마 마음은 아주 찢어지는데, 너는 뭐가 그리 좋다고 웃는 거니?”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엄만 왜 울고 그래? 내가 너무 과잉보호로 컸다니까.”
대학을 다니기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희수를 수정이 부여잡고 놔주질 않았다. 눈물까지 글썽한 수정과는 달리 희수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보, 얘 말하는 것 좀 봐요.”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경환에게 수정의 날카로운 눈빛이 전해지자, 경환은 움찔했다. 두 모녀 사이에 끼어들어 본전도 찾지 못한 적이 많았던 경환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기로 마음먹었지만, 희수가 떠나는 지금 경환도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희수, 오빠도 그랬고 대학생이 되면 등록금과 생활비는 네가 스스로 벌어야 해. 엄마 맘 상하게 해서 너한테 득 될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읔. 치사하게. 그렇지만, 나에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다는 사실. 음하하하.”
너스레를 떠는 희수를 경환은 수정과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처음으로 손에서 떼어 놓는 아픔에 수정은 희수와 함께 서울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기숙사에 머물게 될 희수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 주고 싶었지만, 희수는 극구 사양하고 혼자서 한국에 가길 원했다.
대학을 선정할 당시 희수는 영악하게도 대학과 직접 거래를 시도했다. 많은 대학에서 희수의 입학을 희망했지만, 희수는 경환의 모교인 한양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장학금과 기숙사, 거기에 생활비를 조건으로 대학과 흥정을 벌였고 대학 측은 희수의 조건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장학금과 기숙사, 생활비를 지원한다 해도 희수의 입학으로 가져올 대외 이미지 향상을 생각하면 절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용돈을 받으려면 엄마한테 잘하라는 경환의 말은 희수에겐 엄포에 지나지 않았다.
“희수 넌 엄마가 슬퍼하는 건 보이지도 않니?”
“희수 쟨 집을 떠나는 게 그렇게 좋은가 봐요. 딸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흑.”
참았던 눈물이 수정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한순간도 희수를 곁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던 수정은 정우와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독립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리 다가왔다는 사실을 수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있잖아. 그리고 며느리 될 제니퍼도 있고. 전화도 자주 하고, 방학하면 꼭 올게.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고마운 사람은 엄마야.”
“희수야.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전화하고, 주말엔 반드시 서산에 내려가고, 힘든 일 생기면 엄마한테 바로 알려 줘야 해. 엄마가 바로 한국으로 갈 테니까.”
수정이 희수를 껴안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당부하는 모습은 경환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신과 SHJ의 미래를 위해 일찍 부모의 곁을 떠나려는 희수를 생각하면 울컥하는 심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경환은 두 모녀의 신파극에 동참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 다 되었다. 지금 들어가야 탑승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야.”
“나 그만 갈게. 그리고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 그때 엄마 부를게.”
“흑, 그래 어서 들어가라. 학교 다니면서 밥 굶으면 안 된다.”
수정을 억지로 떼어 놓은 경환은 희수의 등을 출국장으로 밀었다. 전용기를 이용해 한국에 보내려고 했지만, 희수는 앞으론 자신의 힘으로 성장하겠다는 말과 함께 경환의 제안을 거절했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희수가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다.
“제니퍼! 엄마 잘 부탁할게. 그리고 오빠가 너한테 잘못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그날로 당장 날라와서 네 편들어 줄 테니까.”
“고마워, 건강하고, 메일로 자주 연락하자.”
“네가 내 동생이면 내 편을 들어줘야지. 누가 널 데려갈지 고생문이 훤하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희수가 출국장 안으로 사라지자, 수정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굵은 눈물을 연신 흘리기 시작했다. 제니퍼가 급히 수정의 팔을 부축하며 정우를 노려보자, 머리를 긁적이던 정우가 급히 수정의 다른 팔을 부축하고 나섰다. 그런 정우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경환은 여자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피가 정우에게까지 흘러들어 간 사실을 확인하고는 안타까움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수정이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공항 밖으로 빠져나가자, 알과 카일이 조용히 다가왔다.
“회장님, 한국 지부에서 준비를 완료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희수의 눈치가 보통이 아니니, 절대 조심하라고 지시하십시오.”
“SHJ시큐리티의 한국지사와 호주지사에서 특별히 선발한 인원이고 정식으로 대학에 편입한 만큼, 희수도 쉽게 눈치를 채기는 힘들 겁니다.”
아무리 위험요소를 제거했다고 해도 경환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희수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SHJ시큐리티의 밀착 경호를 지시했고, 카일은 희수와 같은 과에 두 명의 여자 요원을 입학시켰다. 경환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