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57화 (234/264)

#257

다시 사는 인생 - 257

“여보, 어서 오세요. 고생하셨어요.”

저택에 들어서는 경환을 집사인 크리스토퍼에 앞서 수정이 먼저 달려와 안겼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기도 전에 입맞춤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맞잡고 거실로 향했다.

“아이들이 안 보이네?”

“정우는 연구소에서 살고 있어요. 희수는 곧 들어올 시간이고요.”

아직 가슴에 남은 통증을 수정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경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수정은 경환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다시는 혼자 어디 다닐 생각 말아요. 앞으론 껌딱지처럼 딱 붙어 있을 거니까요.”

“이거 자기 무서워서라도 혼자 다니면 안 되겠네.”

“가슴은 아직도 많이 아파요?”

“괜찮아. 살짝 금이 간 게 전부야. 며칠 쉬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 거니까.”

수정은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경환의 모습에 그늘이 져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차마 그 의미를 묻을 수는 없었다. 하루나의 행동을 들은 수정은 고마움보다는 경환의 옆에 자신이 있지 못했다는 것에 심한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루나의 수술이 성공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차마 하루나에 대한 얘기를 경환 앞에서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저, 여보. 하루나가 당신을 대신해 총탄을 몸으로 막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수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향한 경환의 사랑이 식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정이든 안타까움이든 경환의 마음에 하루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걸 확인하려 하는 자신이 수정은 너무 힘들고 싫었다.

“내가 방탄조끼를 입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야. 최석현 회장은 말해주지 않지만, 수술이 성공했어도 장애는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

“장, 장애요?”

하루나가 장애를 갖게 될 거란 말에 수정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수술이 성공했다는 소식에 맘을 놓고 있었던 수정은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한 사람만 바라보던 하루나를 유럽으로 보낸 건 자신이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은 그때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었다. 하루나가 장애를 갖게 될 거란 소리에 수정은 심한 자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나를 그대로 놔두실 건가요?”

“휴스턴과 호주에 재활시설과 함께 의료시설을 지을 생각이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래대로 돌려주고 싶어.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수정은 아무 말로 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경환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경환의 마음 한구석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하루나를 수정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하루나에 대한 동정이기를 수정은 바랄 뿐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침묵은 거실로 들어서는 희수로 인해 깨져버렸다.

“아빠!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그랬니? 아빠 이렇게 멀쩡하잖아. 우리 예쁜 딸 좀 안아보자.”

가방을 소파에 내 던지고 희수가 경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정확히 왼쪽 가슴을 파고드는 희수로 인해 경환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지만,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볼에 입을 맞추느라 통증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수정과 제니퍼는 두 부녀의 애정행각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머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래, 제니퍼 얼굴을 보니 아저씨도 아주 반갑구나. 그런데 어머님이라니?”

경환은 희수를 품 안에 둔 채, 수정과 제니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직 고등학생인 제니퍼의 입에서 어머님이란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자 경환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니퍼가 휴스턴에 머문 지도 꽤 오래되었잖아요. 정우와 제니퍼도 서로 좋아하는 것 같고요. 인정하기로 했어요.”

“엄마! 아빠도 사실은 알아야지. 아빠, 사실은 오빠와 제니퍼가 키스하는 걸 엄마가 봐 버렸어. 멜린다 아줌마가 놀라긴 하셨지만, 두 사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로 했어.”

“정, 정우가? 오냐 오냐 키웠더니, 이 자식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먼.”

희수의 고자질에 제니퍼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졌다. 경환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수정을 외면하고는 정우에 대한 실망감을 그대로 표현했다.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정우의 행동이 괘씸하게 느낀 경환은 눈물까지 글썽이는 제니퍼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르기 시작했다.

“제니퍼, 나를 포함해서 남자들은 다 늑대란 걸 잊으면 안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무런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내가 나서 두 사람을 결혼시킬 테니까, 그때까진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할 거야. 정우가 징징거린다고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정우 오빠 혼내지 마세요.”

제니퍼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었다.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면 2년을 넘게 기다려야 했고, 정우는 하루가 다르게 진한 스킨십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직 가장 소중한 것은 정우에게 주지 않았지만, 이미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였다. 경환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제니퍼는 보챌 정우를 어떻게 달랠지를 고민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제니퍼의 난감한 표정을 뒤로하고 경환이 수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희수와 할 얘기가 있는데, 당신 제니퍼와 잠시 시간을 보내줄 수 있어?”

“무슨 일이신데요?”

“큰일은 아니고, 내년이면 희수도 장래를 선택해야 하잖아. 내가 개인적으로 희수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알았어요. 제니퍼 우리 잠시 나갈까?”

수정이 제니퍼의 손을 잡고 거실을 빠져나가자, 희수는 긴장한 듯 경환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환은 크리스토퍼에게 아무도 서재에 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희수와 함께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도착한 경환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희수를 바라보았다.

“요즘 네가 세운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니? 월반해서 많이 힘들 텐데.”

“힘든 건 없어. SAT도 2,370점을 받았고 AP도 5점을 받았거든. 그런데 월반을 해서 인턴십과 과외활동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야. 뭐, 미국에서 대학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이 정도면 한국 대학에서 공부할 실력은 된다고 생각해.”

희수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겠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고, 희수의 천재성이 드러나자 희수를 한국 대학에 빼앗기면 안 된다는 여론과 함께 하버드를 시작으로 스탠퍼드와 시카고대학까지 희수의 입학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수의 생각이 요지부동이란 것을 확인한 경환은 조심스럽게 다음 질문을 꺼내 들었다.

“정우의 박사취득 행사에 참석하려는 엄마와 오빠를 희수가 막았다는 것을 듣고, 아빤 많이 놀랐다. 혹시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니?”

경환은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조심스러웠다. 희수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고 있다는 걸 확인한 경환은 태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자신에 이에 사랑하는 희수까지 영혼이 팔렸다면 경환은 죽어서도 마몬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회귀의 목적이 희수였던 만큼 희수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희수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있었다.

“아빠. 카일 아저씨가 위험하다고 해서 그랬던 거야. 엄마나 오빠가 섭섭하긴 했겠지만, 아빠도 없는데 사고라도 당하면 안 되잖아.”

“희수야. 네가 어디서 공격을 당할지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알고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거니?”

“그, 그건, 집에서 라이스 대학까지의 도로를 구글맵을 통해 살펴보다가 내가 적이라면 가장 좋은 공격장소가 어디일지를 생각하다가 그 장소를 카일 아저씨한테 알려준 것뿐이야. 사실 나도 그 장소가 맞을지는 전혀 몰랐었어.”

거짓말을 할 때면 희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는 걸 경환이 모를 리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키워 온 희수의 모든 동작은 경환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용서를 빌었던 희수가 더는 묻지 말아 달라는 듯이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경환은 답답하기만 했다.

“희수야, 아빤 이 세상에서 널 가장 많이 사랑한단다. 어쩌면 엄마나 오빠에 대한 사랑과는 다를 수도 있어. 하나만 기억해 주렴. 아빤 어떤 상황에서도 희수 네 편이란 걸 말이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마몬이란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니?”

“아, 아니. 처음 듣는 이름이야.”

“그래, 더는 묻지 않을게. 아빤 항상 널 믿으니까.”

희수의 눈동자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경환은 분노를 넘어 허탈함과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당황하는 희수의 몸짓에서 희수도 자신만의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경환의 슬픔을 참을 수 없었던지 희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빠,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를 속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야.”

경환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희수를 끌어안았다. 희수에 대한 애틋함에 참았던 눈물이 한두 방울 흘러내렸다. 경환은 한동안 희수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2012년이 오면서 한국의 모든 시선은 총선과 대선으로 향해 있었다. 지난 4월에 실시한 총선은 진정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소 충격적인 결과를 국민들에게 안겨 주었다. 심석우와 박화수가 이끄는 신정연은 계획했던 80석에 한 석이 빠진 79석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고, 신정연의 돌풍에 휘말린 여당은 108석, 야당은 96석, 진보정당과 무소속이 17석을 획득했다. 심석우와 박화수는 비례대표 순위를 버리고 지역구를 선택해 압승을 거뒀고, 신정연의 약진에 대선 정국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안개에 휩싸였다.

“박 대표님, 정부 여당과 야당의 밥그릇 싸움이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계파 싸움에서 밀린 세력을 흡수해 세를 넓히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대선 후보 경선이 치르고 나선 이탈하는 세력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썩어빠진 계파 정치에 신정연이 물들 수도 있습니다. 우린 철저히 국회의원 개인의 의견과 정책을 존중하는 정당으로 남아야 합니다.”

일부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정연은 정책으로 승부를 건다는 당론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다. 신정연의 의원들은 정부 여당과 야당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지역구에 맞는 정책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선 하나의 정책을 놓고 신정연 소속 국회의원들끼리 자신의 소신에 따라 난상토론을 벌이는 일도 흔했다. 여야 의원들은 신정연 소속 의원들을 박쥐라고 표현하며 깎아내렸지만, 국민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신정연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에 승리한다 해도, 결국 국회에 발목을 잡혀 제대로 된 정책을 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기존 정치인들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들은 신정연을 버리게 될 겁니다.”

“결국, 과도기는 제가 거치고, 박 대표님은 쉽게 차기를 노리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박화수는 묵묵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심석우의 투정을 받아줄 생각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심석우의 지적은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국회가 세 곳으로 찢어진 상태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은 번번이 벽에 가로막힐 확률이 높았다. 이탈 세력을 받아들여 과반수를 넘긴다면 자신이 생각한 정책을 펼 수 있겠지만, 박화수의 말대로 신정연은 구태의연한 정치에 물들 수도 있었다.

“농담입니다. 신정연을 통해 한국 정치를 먼저 바꿔야겠지요. 대선 전략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다음 주엔 받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헛말이 난무하는 공약이 아닌, 실질적으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공약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관건은 TV토론을 통해 지지도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미 SHJ시큐리티와 SHJ홀딩스가 여야의 대선공약 허점을 철저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아직 여야의 대선 후보 경선이 치러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약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심석우는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도 SHJ의 철저한 계획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SHJ는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오성과 대현, 대후그룹을 아우르며 물밑에서 신정연을 지원하고 있었다. 물론 밥그릇을 챙기려는 기업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SHJ는 모든 경제적 이익을 SHJ와의 합작으로 떠안는 강수를 통해 신정연으로 향하는 정경유착을 사전에 방지했다.

“제가 만약 대선에 실패한다면, 형님은 과연 한국을 떠날까요?”

“회장님의 성격으로 봐선 분명 한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실 겁니다. SHJ는 이미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목맬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북한을 위에 두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허덕이는 한국을 변모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번 대선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주변국의 도발에도 기침 한 번 크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경환의 꼬붕 노릇을 한다 해도 당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대선 일자가 빠르게 다가올수록 심석우는 긴장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