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56화 (23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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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56

    경환의 전용기는 휴스턴이 아닌 워싱턴D.C 외곽의 공군기지에 착륙했다. 휴스턴으로 향하던 경환을 존 매케인이 급히 불러들인 이유보다는 CIA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정리할 때라는 걸 경환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SHJ시큐리티의 기습에 속절없이 당해야만 했던 CIA도 복수를 위해 이빨을 갈고 있었고 아무리 앞선 기술과 무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공권력을 상대로 오랜 싸움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는 게 경환의 생각이기도 했다.

    공군기지에 내린 경환은 백악관 경호팀들의 삼엄한 경호 속에 백악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곁엔 여전히 알이 지키고 있었고, 언론의 눈을 피해 경환의 차량은 비밀 출구를 통해 백악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제임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한번 말해 보세요.”

    경환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존 매케인의 격앙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세계를 아우르는 미국의 대통령인 존 매케인도 CIA와 SHJ시큐리티의 싸움에 희생자일 수밖에 없었다. 여론을 등에 업은 민주당은 테러를 막지 못한 백악관을 공격하며 차기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고, 공화당은 존 매케인과 선을 긋기 시작했다. 사면초가인 존 매케인은 참았던 분노를 경환에게 풀고 있었다.

    “대통령님, 저는 알다시피 피해잡니다. 도대체 무얼 바라시는 겁니까? 이번 저를 공격한 배후에 MI6가 있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 국민인 저를 영국 정보기관이 나서 암살을 부추겼는데 백악관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알고 싶군요.”

    “이 모든 것에 SHJ시큐리티가 있었다는 걸, 내가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저도 모르는 걸, 대통령께서 알고 계시다니 참으로 놀랄 뿐입니다. 말보다는 증거로 저를 이해시켜 주십시오.”

    경환은 존 매케인과의 기 싸움에 져줄 생각이 없었다. MI6의 기밀문서가 인터넷으로 퍼지자, MI6와 영국정부는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인적 피해를 본 CIA에 대한 기밀문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개되지 않았다. 존 매케인은 CIA에 대한 목줄을 쥐고 있는 경환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심증으로 경환을 몰아세우고 있었지만, SHJ시큐리티가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존 매케인은 한발 물러서기를 선택했다.

    “여기서 그만 멈춰야만 할 겁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걸, 누군가는 알아야 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번 CIA에 대한 공격에 이슬람 테러집단이 관련되었다고 들었습니다. SHJ가 힘이 될 수 있다면, 국가안보를 증가할 수 있도록 NSA와 펜타곤과의 합작을 늘릴 생각입니다.”

    병 주고 약 주겠다는 경환의 대답에 존 매케인은 분노를 참아야만 했다. NSA에 의해 테러의 배후로 이미 이슬람 과격 테러집단을 지목하고 나섰고, 미국의 모든 공권력은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 투입된 상태였다. 경환이 내민 화해의 손을 존 매케인은 뿌리칠 수 없었다. SHJ시큐리티의 감청시스템과 전용기에 설치된 암호체계는 NSA와 펜타곤의 방어능력을 높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른 경환의 모습에 존 매케인은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FRB가 미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시스템이 옳지 않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처음 제임스를 만났을 때만 해도, FRB와 대립각을 세우는 SHJ를 심정적으로 응원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SHJ가 FRB 시스템에 참여한다는 정보를 받고 적잖게 실망했습니다.”

    제이의 입김이 작용하는 NSA를 통해 존 매케인에게 정보가 흘러들어 갔음을 경환은 직감했다. 경환은 제이콥과의 협상을 통해 FRB 시스템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의 지분 중 일부를 300억 불에 넘겨받았다. 제이콥은 제이가 관장하는 시티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지분도 같은 조건으로 넘기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제이로서는 자신의 하수인으로 생각한 경환이 오히려 제이콥을 이용해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문의 수장으로 등극한 상태에서 대결보다는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께서는 뭔가 착각을 하셨나 봅니다. 저는 미국경제까지 책임질 인물은 아닙니다. 단지, SHJ를 위한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FRB에 의해 미국경제 아니 세계경제가 좌지우지되고 있는 현실은 저도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 후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저도 지금은 알 수 없군요. 제 능력은 여기까지입니다.”

    “제임스는 세상 다 산 사람 같습니다. SHJ의 후대는 지금과는 다를 것이란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경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한 웃음만을 남겼다. 제이와 제이콥과의 관계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문제였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를 시기가 필요했다는 걸 경환이 모를 리 없었다. SHJ의 기술이 상대적으로 앞섰고 막강한 SHJ시큐리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제이와 제이콥의 영향력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나 경환은 믿는 구석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과는 달리, 희수와 정우가 이끌게 될 SHJ는 분명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란 걸 경환은 굳게 믿었다.

    “심석우를 제임스가 뒤에서 지원하고 있다는 정보를 얼핏 본 기억이 있고, SHJ기술연구소에서 만든 무기가 한국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기도 합니다. 교통정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께서는 분명 저와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SHJ에너지의 지분 참여를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SHJ기술연구소의 무기개발과 판매에 대해 승인을 받은 기억이 있군요. 대통령께서 말을 바꾸신다면 저도 법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아직 된장인지 똥인지 구분을 하지 못하는 존 매케인에게 경환은 일침을 가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자신의 사인이 들어가 있는 계약서를 무시할 수 없었고, 자신의 적대세력이었던 제이콥마저 아군으로 만든 경환을 강압적으로 이길 방법은 없었다.

    “동북아시아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란 걸, 제임스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신무기로 개발로 균형 축이 한국으로 기울게 된다면 우선 일본이 크게 반발할 겁니다.”

    “대통령께서는 일본이 미국의 방패라면 한국은 창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창이 무뎌지면 아무리 방패가 튼튼한들 깨지기 마련입니다. 태평양으로 고개를 내미는 중국을 일본 혼자서는 막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한국을 무턱대고 밀어줄 생각은 없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한국보단 SHJ의 이익이 제겐 더 중요합니다.”

    우선은 존 매케인을 달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심석우와 박화수가 이끄는 신정연이 총선의 핵으로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미국이 물밑에서 장난을 칠 경우도 경환은 가정의 수에 포함해야만 했다.

    “좋습니다. 이번 SHJ와 보잉이 공동으로 개발한 전투기가 펜타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 몇 차례 테스트를 더 거쳐야겠지만, F-35와 비교해 절대 밀리지 않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전투기를 FMS(대외군사판매방식) 시스템에 넣어도 상관없겠지요?”

    “뭐 그렇게 하십시오. DCS(상업구매방식)로 재미를 좀 보려고 했는데, 정부에서 관리해야겠다고 한다면 제가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가격이나 제대로 받아주십시오.”

    미국정부가 판매의 중간상인 역할을 하는 FMS 방식은 한마디로 정부의 허가가 없이는 해외판매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지만, 경환은 순순히 존 매케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존 매케인은 김이 빠져버렸다. 경환의 반발을 예상하고 주도권을 쥐려 했지만, 경환은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 전투기 사업을 아무렇지 않게 던짐으로써 존 매케인의 입을 막아버렸다. 보잉과의 합작으로 전투기 제작에 대한 노하우는 이미 확보를 했고, 심석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SHJ기술연구소를 통해 KFX 사업에 참여한다면 본전은 충분히 뽑고도 남는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럼 한국에 있는 SHJ기술연구소는······.”

    “그만 좀 합시다.”

    경환은 존 매케인의 말을 잘랐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기본이었지만, 무조건 달라고만 하는 존 매케인의 행태에 경환은 더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존 매케인은 경환의 고성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레임덕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경환의 날카로운 눈이 존 매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MI6에 의해 미국국민이 암살을 당할뻔했는데, 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죽음에서 살아나온 사람의 주머니를 털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논의된 모든 내용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SHJ는 본사 이전을 포함해 법적으로 모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한번 끝까지 가 보시겠습니까?”

    “미국의 안보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게, 대통령인 내 지론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원한 FMS 시스템에 SHJ가 투자한 전투기를 포함하자는데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SHJ기술연구소까지 넘본다면, 저도 더는 참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금부터라도 MI6와 CIA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라크 전쟁을 포함해 프레드 톰슨이 백악관의 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되었었다는 소문도 파헤쳐볼 생각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생사를 건 싸움에서 제이와 제이콥과의 타협을 성공시킨 경환은 영원히 호구로 남을 생각이 없었다. MI6를 파렴치한 조직으로 만들었음에도 CIA와 백악관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도 오늘 이 자리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저물어가는 존 매케인의 자리는 더는 경환에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경환의 위협에 존 매케인은 퇴임 후를 걱정해야만 했다. 너무도 커져 버린 경환의 모습에 존 매케인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제가 십 년은 더 늙었습니다.”

    경환은 황태수의 너스레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존 매케인과 선을 그은 경환은 제이를 만나 제이콥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제이가 가지고 있는 연방준비은행 뉴욕은행의 지분을 제이콥과 같은 조건으로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SHJ가 나서 자신과 제이콥의 완충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경환의 설득이 한 몫 거들긴 했지만, 사생결단을 통해 제이콥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제이를 결정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큰 위기를 벗어났다고 해서 안심해선 안 됩니다.”

    그룹 회장단을 모두 소집한 경환은 감회에 젖었다. SHJ를 위협하는 적대세력을 분쇄하는 데 성공했더라도, 이 자리에만 머문다면 언젠가는 다른 위협이 SHJ를 집어삼킬 수도 있는 문제였다. 아직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번 제이콥과의 합의로 우리가 FRB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제이콥은 SHJ유니버스의 우주호텔 사업에 100억 불을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우주호텔을 제이와 제이콥에 던져주고 우린 우주를 개척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제이콥의 MOU 초안이 도착했습니다. 검토를 마치면 제가 직접 영국으로 넘어가 계약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린다라면 충분히 잘해내실 겁니다. SHJ테크놀러지의 지분 5%를 넘기는 조건으로 제이콥이 토해낸 것은 당분간 SHJ를 지키는 밧줄이 될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가져온 것은 짧게는 십 년, 길게는 이십 년의 평화일 뿐입니다. 그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그에 맞는 장기 대책을 수립해 놓으세요.”

    한순간 제이나 제이콥과 같이 가문을 일으킬 생각도 해 봤지만, 경환은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SHJ는 가문이 아닌 가족 같은 직원들의 힘으로 지키길 원했다. 물론 혈연에 의해 맺어진 관계가 아니다 보니, 몇 세대가 흘러간다면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SHJ도 사양길에 접어들 수도 있었지만, 그게 순리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전에 SHJ타운을 전 세계에 뿌리내려 SHJ타운끼리의 상호 협력관계를 만들어 놓을 계획이었다. 경환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시선을 최석현에게 향했다.

    “최 회장님, 하루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열다섯 시간에 걸친 수술을 잘 견뎠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SHJ의 미래사업부문을 책임지는 최석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경환의 말을 받았다. 경환의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하루나로 인해 경환의 굳은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고 있었다.

    “최고의 의료진이 가 있다고는 하지만, 노르웨이 SHJ타운은 열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휴스턴으로 이송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루나를 이송하기 위해 전용기를 개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리라는 것이 의료진의 의견이고 빠르면 일주일 후에 이송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고해 주세요. SHJ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하루나를 사고 이전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재활시설을 포함한 세계 최고의 의료시설을 휴스턴과 호주에 세우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최석현은 하루나의 하반신이 마비될 수도 있다는 의료진의 의견을 경환에게 보고할 수는 없었다. 하루나로 인해 그늘진 경환에게 다시 짐을 지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장단과의 회의를 짧게 마친 경환은 무거운 발걸음을 가족이 기다리는 저택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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