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다시 사는 인생 - 255
전 세계가 테러의 공포에 휩싸여있는 상황에서 경환의 전용기는 런던 히스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전 세계는 전날 총상을 입고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환의 개인 전용기가 영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특별보호 속에 전용기에서 누가 내리는지는 철저히 보안 속에 가려져 있었다. 단지, 중무장한 경호차량 속에 리무진 두 대가 장갑차까지 동원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을 벗어났다는 소식만 들릴 뿐이었다.
“웃기는 놈들이군. 자기들이 사주를 해 놓고, 전투기에 장갑차까지 동원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군.”
경환의 전용기가 영국 영공에 들어서자마자, 영국정부는 전투기까지 출격시켜 전용기를 호위했다. 한편에선 경환의 암살을 사주하고 다른 한편에선 경환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경환은 역겨웠다.
“알,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까?”
“무슨 이유인지 한국과 벤 버냉키는 NSA가 개입해 보호하고 있습니다. NSA와의 관계를 생각해 두 곳의 작전은 취소한 상태입니다.”
제이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FRB에서 제이콥보다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제이로서도 이를 계기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속내를 드러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명분을 얻었다 해서 제이까지 적으로 돌릴 힘은 아직 경환에겐 없었다.
“한국이 의외긴 하지만, 일단 NSA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합시다. CIA의 동태는 어떤가요?”
“우리의 기습에 당황한 것 같습니다. 지부를 폐쇄하고 안가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 대한 역습을 계획하리라 봅니다. 그 전에 사태는 종료되겠지만, 역습에 철저히 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심증은 우리를 지목하겠지만, 어디에서도 증거를 확보하진 못할 겁니다. 그래도 역습엔 철저히 대비하고 있습니다.”
차량은 런던 외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제이콥과의 협상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던 경환은 수술이 진행되고 있는 하루나에 대한 걱정은 잠시 잊기로 했다. 경환은 더는 봐 줄 수 없다는 존 매케인의 압력을 염두에 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는 SHJ였지만, 연방정부에 대한 도발을 지속한다면 존 매케인도 칼을 들 수밖에 없다는 걸 경환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번 제이콥과의 담판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SHJ의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경환을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경호차량이 멈추고 경환이 탄 리무진과 경호차량만이 전형적인 유럽식 저택을 향해 정문을 통과했다.
“제이콥도 죽는 건 두렵나 보군.”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수색을 받던 경환은 비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몸수색을 담당한 제이콥의 비서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제이콥의 특별지시만 없었다면, 이 자리에서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경호원들을 저택 밖에 세워둔 채, 알과 단둘이 저택에 들어선 경환은 그 화려함을 뒤로하고 중무장한 제이콥의 경호원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제이콥의 개인 서재에 들어섰다. 커튼으로 방 전체를 둘러친 서재는 낮인지 밤인지 구분조차 힘들었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임스의 모습을 보니 안심해도 되겠군요.”
“그래도 갈비뼈 두 대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제이콥이 건네는 오른손을 가볍게 잡은 경환은 제이콥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첫 만남부터 독기 서린 말이 오가고 있었다. 제이콥은 여유로운 자세와는 달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환의 눈빛이 기분 나빴다. 마음만 먹는다면 경환은 물론이고 밖에 대기 중인 경호원들까지도 살려 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제이콥은 자신의 저택에서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정신없이 바쁠 텐데, 이 먼 영국까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군요. 제임스 리 회장님.”
“제임스라 불러 주십시오. 저도 제이콥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제이콥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건방진 놈이라 생각했다. 사지에 뛰어들고서도 놈의 얼굴에선 긴장감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제이의 뒷배에 올라탔다고는 해도 놈과 함께 SHJ를 날리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었다. 제이콥의 생각을 안다는 듯이 경환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담배를 입어 물고 불을 붙였다.
“이곳은 담배를 피우는 곳이 아닙니다. 꺼 주시기 바랍니다.”
제이콥의 비서가 경환의 흡연을 제지하고 나섰다. 경환은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끌 생각도 없이 비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곳의 개는 훈련을 잘못 받았군. 다시 한 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면, 내가 직접 훈련을 시켜주지.”
경환의 도발에 비서의 얼굴이 붉어지며 오른손이 양복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 제이콥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경환은 비서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입으로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보란 듯이 뿜어내고 있었다. 제이콥의 눈이 작아지며 경환의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제가 죽다 살아난 놈이라서 그런지 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혼자 죽긴 억울해서 이렇게 제이콥을 찾아왔습니다. 같이 살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죽겠습니까? 이게 제 대답입니다.”
“제임스, 듣던 대로 아주 건방지군요. 그런 이유로 여길 찾았다면 제 대답은 간단합니다. 혼자 죽으십시오.”
말을 마친 제이콥이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지만, 경환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담배 연기를 다시 내뿜었다. 겁을 상실한 것인지, 아니면 저격으로 정신이 나갔는지 제이콥은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경환의 행동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비서가 총을 뽑아들고 나서는 것을 제이콥은 더는 제지하지 않았다. 경환은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는 비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 저택을 지키는 개는 똥오줌을 구별하지 못하는구먼. 역시 훈련이 필요하겠어.”
‘퍼 퍽.’
“으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권총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던 비서의 오른손이 몸에서 찢겨서 바닥에 떨어졌다. 비서의 비명에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이 중화기로 무장한 채, 서재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제이콥의 제지에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방탄유리와 커튼으로 가려진 내부를 뚫고 정확히 비서의 손을 노렸다면 경호원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도 전에 자신의 머리가 먼저 터져나갈 것이란 사실을 제이콥은 알고 있었다.
“제이콥, 이제 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겠네요, 안 그렇습니까? 그리고 훈련이 덜 된 강아지는 밖으로 내 보내시지요. 피 냄새가 나서 그런지 담배 맛이 떨어지거든요.”
제이콥의 눈짓에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비서를 경호원들이 업고 사라졌다. 저택 외곽은 며칠 전부터 철저히 수색을 해왔지만, SHJ시큐리티는 그전부터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에 제이콥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의 행동이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어차피 지키지 못할 거라면 동반자는 한 명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 제가 마지막 선물을 잊었네요. 지금쯤이면 올라왔을 텐데, 잠시 제이콥의 노트북을 사용해도 되겠지요?”
경호원들의 총구가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경환의 행동은 여유로웠다. 밖의 경호원들은 서로 총구를 들이대며 대치 중이었고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는 자신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기에 제이콥은 경환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자신의 노트북을 켜고 암호까지 능숙하게 뚫고 들어가자, 제이콥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제야 제이콥은 자신의 주위가 SHJ시큐리티에 의해 뚫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시간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군요. 제이콥도 궁금할 텐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노트북을 제이콥에게 건넨 경환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끄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골절된 갈비뼈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담배로 고통을 잊어야만 했다. 경환이 건넨 노트북을 받아든 제이콥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모르긴 해도 MI6는 전 세계의 지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제이콥은 경환의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력을 이용해 CIA의 유럽지부를 초토화한 것에 비해 MI6에 대한 공격은 이뤄지지 않은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MI6가 스파이를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각 유럽 왕궁과 정부에 심어 놓은 것과 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암살 및 비밀작전 내용, 아일랜드 분리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역 테러작전, 심지어 영국 왕실과 정부의 의사결정에 깊숙이 개입한 내용이 증거 문서와 함께 인터넷에 올라가 있었다.
“제이콥, 이 정도에 놀라시면 어떡합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디에서도 제이콥이 연관되었다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그리고 이 정도는 헤프닝으로 묻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제임스도 알 텐데요.”
“물론 알죠. MI6가 헤프닝으로 몬다면, 더 강한 걸 공개할 생각도 있습니다. 그땐 제이콥도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이 정도도 MI6나 영국정부는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한 걸 공개한다는 경환의 말이 공갈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의 패를 읽힌 상태에서 경환이 가진 패를 읽지 못하는 한 이 게임은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쉽게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유롭게 담배 연기를 뿜고 있던 경환은 제이콥의 복잡한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같이 죽든지, 같이 살든지 그건 제이콥의 몫이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제이콥이 저와 같이 죽기를 다비드가 무지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다비드?”
자신의 가문 중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지파는 프랑스를 근간으로 한 다비드였다. 경환이 무슨 의도로 다비드를 거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이 자리에서 경환과 같이 공멸하게 된다면 최대의 수혜자는 가문의 적통자를 내세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다비드라는 사실은 제이콥도 부인할 수 없었다.
“제이콥, 제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습니까? 가문의 재정에 대한 전권을 제이콥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프랑스의 다비드가 영국의 금융권까지 노리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제이콥이 저라면 누구와 손을 잡겠습니까?”
“흠.”
제이콥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경환은 한가하게 제이콥을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이미 목숨은 유럽방문을 결정한 순간에 놓아버린 상태였다. 지금은 자신의 목숨보다는 SHJ와 가족들을 위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 한국의 위대한 제독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겠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미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제이콥은 각오가 되었습니까?”
경환은 담배를 끄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경호원들이 긴장하며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풀지 않고 있었지만, 제이콥은 경환의 손이 내려가면 자신의 생명도 끝이 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친 자존심으로 인해 제이콥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알, 그동안 곁을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웃으면서 갑시다.”
“아닙니다. 회장님을 모시고 같이 갈 수 있어, 저에겐 오히려 영광입니다.”
경환의 태연한 모습에 제이콥은 긴장했다. 어디에서도 판돈을 높이려는 경환의 블러핑이라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경환의 담배가 마지막 한 모금을 남겨둔 상태였다. 마지막 담배 연기가 경환의 입에서 뿜어진다면, 오른손도 내려갈 것이란 사실에 제이콥은 급히 입을 열었다.
“제임스! 기다리십시오! 같이 살길을 찾아봅시다.”
서두르는 제이콥의 말에도 경환의 오른손은 내려가지 않았다. 경환은 제이콥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물끄러미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제이와 같은 수준의 지분 참여를 하겠습니다. 또한, SHJ와의 불화를 이 자리에서 끝내고 동등한 자격으로 제임스를 대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가문을 걸고 밝힙니다.”
“제이콥, 뭔가를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제이콥보다는 못하지만, 돈이라면 저도 징글징글하게 많습니다. 동등한 자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SHJ의 지분을 일방적으로 갉아먹으려는 시도보다는 좀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 좋습니다. 일단 분위기를 정리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 봅시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를 선사하는 놈이었다. 경환은 죽음을 초월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제이콥보다는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경환의 눈빛을 받은 알이 창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경환의 오른손은 서서히 내려왔다. 뒤를 생각하지 않은, 어쩌면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그런 무모함이 아니었다면 제이콥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양측 경호원을 모두 물린 상태에서 경환과 제이콥 두 사람의 대화는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제이콥의 탄식과 경환의 고성이 서재 밖으로 흘러나왔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경환은 제이와 제이콥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통해 동등한 자격을 얻길 원했고, 제이콥은 제이와 함께 경환을 끌어들여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다비드를 견제할 수단을 만들기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