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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54화 (23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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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54

    원전 폭발로 방사능 피폭지역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각정보조사실은 한반도 담당 부서 팀원의 전원 사망에 자원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믿었던 CIA의 이중적인 태도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일본에게 있어선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어렵게 약속한 CIA 일본 지부장과의 만남에서 뭐라도 건져야만 했다.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건가?”

    “죄송합니다. 계속 연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 공작을 담당한 팀원의 몰살로 입지가 좁아질 대로 좁아진 가네모토 토시모리 실장은 경찰청 공안부 시절부터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다무라 다카시 국제부장을 닦달하고 있었다.

    “다카시, 이번 이경환 회장의 저격사건에 CIA가 연루되었다는 첩보는 없나?”

    “심증만 갈 뿐입니다. 노르웨이 왕궁에서 작전을 벌일 정도로 대담한 조직은 몇 개 없으니까요.”

    토시모리는 CIA의 꼬임에 넘어간 자신을 책망하고 후회했지만, 자신이 아니더라도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만한 배포를 가진 인물은 없었을 거란 말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다. 총리도 모르는 비밀작전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SHJ가 CIA의 눈 밖에 난 상태라면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노르웨이 사건도 CIA의 작품이란 걸 토시모리는 확신했다.

    “실장님, 이번 노르웨이 저격사건으로 내각이 추진하는 SHJ타운 유치가 물 건너갔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원전 폭발로 인해 살아나려는 일본 경제는 다시 한 번 큰 타격을 받고 있는데 돌파구를 한국과 북조선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총리의 다케시마 발언도 국민의 시선을 한국과의 마찰로 돌리려는 전형적인 물타기지, 원전 폭발이 어쩌면 쓰러지는 일본에 큰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지금 연합정당은 오래가지 못해. 내년이면 우파정권이 들어설 수밖에 없는 정국이니까.”

    하루가 다르게 군사대국으로 치닫는 중국과 경제적으로 일본을 압박하는 한국으로 인해 일본은 사면초가에 빠졌다고 토시모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기댈 수 있는 곳은 미국밖에 없었고, 미국은 현 상황을 이용해 일본의 목줄을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SHJ와 중국이 내놓은 미국 국채의 일부를 매입하라고 강요하고 있었고, 내각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강한 내각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에 토시모리는 반대하지 않았다.

    “더 늦어졌다가는 총리와의 만남이 늦어지게 되네. 아직도 연결되지 않고 있는 건가?”

    꼴 보기 싫은 놈이긴 했지만, 약속 하나는 철저히 지키는 놈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카시의 표정을 봐서는 아직도 연결되지 않는 듯 보였다. 정보기관끼리의 핫라인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두 가지 이유밖에는 없었다.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거나, 아니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토시모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할 때, 사색이 된 다카시가 다가왔다.

    “실장님, 마이클 헤이든의 차량이 폭발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뭐야? CIA 일본지부가 연결이 안 된다는 건 그쪽도 이미 당했다고 봐야 할 거야. 어서 서둘러 돌아가세.”

    믿을 수 없었다. CIA 국장을 대놓고 암살할 수 있는 조직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제부터 피 말리는 정보조직 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란 것을 직감했다. 일본의 이득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했던 토시모리는 급히 요정을 나왔고, 경호원들이 그의 주위를 감싸며 승용차의 뒷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퍽, 퍽.’

    “저격이다! 어서 실장님을 보호해!”

    경호원들의 외침이 사방으로 퍼지며 토시모리를 에워 싸고 있었지만, 정확히 이마 한가운데가 터져나간 토시모리와 다카시의 사지가 뒤로 넘어간 후였다.

    헨리 키신저는 급히 자신이 머물던 저택을 빠져나와 자신의 안가 역할을 하는 10층 건물의 펜트하우스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제이콥, 자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자네에 대한 우호를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거야.”

    헨리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이클의 폭사를 확인한 후부터 경환의 암살에 대한 SHJ시큐리티의 반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은밀한 작전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SHJ시큐리티는 차량 폭발이라는 과격한 방법을 동원할 정도로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걸 은연중에 과시함으로 극도의 공포를 자신에게 주려 한다는 것을 헨리도 모르지 않았다. 제이콥이 도움을 거절했더라도 자신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전 세계 외교와 금융, 방산업체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며칠만 견뎌낸다면 충분히 반격을 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반격이 힘들더라도 적어도 거래를 통해 자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경호원과 중무장한 용병들이 즐비한 이곳은 철옹성과 다름없었다.

    “제이콥, 이 쥐새끼 같은 자식. 그 자리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가문의 수장이긴 했지만, 가문에 대한 영향력은 제이의 그것에 비해 제이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이번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면 가문의 다른 조직들을 설득해 제이콥을 왕좌에서 물러나게 할 자신이 있었다.

    “헨리, 1층에 소피아가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돌려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CCTV 모니터를 힐끗 쳐다본 헨리는 불안했던 얼굴이 가시고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극도의 공포감을 억누르기 위해선 섹스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헨리는 자신의 거처로 소피아를 급히 불러들였다.

    “올라오도록 해. 내가 부른 거니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들어온 보고로는 일본 내각정보조사실장과 부장이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흠. 미쳐 날뛰고 있군. 결국은 제 발등을 찍게 될 거야. 젠장.”

    헨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정보수장까지 목이 달아난 마당에, 다음 차례는 자기란 사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신의 남성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여자는 소피아밖에 없다는 게 헨리를 주저하게 하고 있었다.

    “소피아의 뒷조사는 이미 할 만큼 했고, 이곳을 들락거린 지도 6개월이 넘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밖의 경호인력을 몇 명 더 붙이겠습니다.”

    문밖으로 소피아의 항의 섞인 목소리가 들렸지만, 헨리는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온몸을 검색하느라 알몸이 되었을 소피아의 모습을 상상하자, 헨리의 남성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흑흑, 헨리, 제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요? 오늘은 돌아가겠어요.”

    입구에서부터 거실을 통과할 때까지 철저한 검색을 당한 소피아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수치심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소피아는 침실에 들어서자, 얼굴을 감싸고 울음부터 터트렸다.

    “소피아, 테러 위협이 있어 경호원들이 긴장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해. 그 대신 내가 큰 선물을 줄 테니까 말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제가 창녀 대접을 받는다는 게 너무 수치스러워요.”

    소피아를 알게 된 건, 헨리에게 있어서 행운이었다. 조지타운 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에 있는 소피아는 대학 강연회에서 알게 되었다. 청초한 외모와는 달리 침대에서만큼은 자신을 리드하며 잃었던 남성을 다시금 깨워주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이긴 하지만, 헨리는 소피아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이미 대학 학자금 대출과 졸업 후 상원 의원 보좌관 자리를 약속했지만, 헨리는 전혀 돈이 아깝지 않았다. 헨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소피아의 곁에 다가가 봉투를 건넸다.

    “헨리! 제가 돈을 보고 헨리를 만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소피아, 오해하지 마. 이건 내 여자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거지,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라고. 소피아의 눈물을 보니 내가 참을 수가 없어. 어서 침대로 가자고.”

    봉투 안에 들어있는 10만 불짜리 수표를 힐끗 바라본 소피아는 헨리의 코앞에서 천천히 옷을 벗어 내렸다. 급했던지 헨리는 이미 속옷까지 모두 벗어버린 상태였다. 소피아의 브래지어가 흘러내리며 터질 것 같은 가슴이 드러나자, 참을 수 없었던 헨리는 급히 자신의 얼굴을 소피아의 가슴에 묻었다.

    “헨리, 오늘 왜 그래요? 침대에 누우세요. 그리고 저한테 맡기세요.”

    소피아의 속삭임에 흥분한 헨리가 침대에 대자로 눕자, 소피아는 헨리의 남성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소피아의 현란한 입놀림을 느끼기 시작한 헨리의 남성이 서서히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피아의 혀가 남성을 벗어나 자신의 가슴과 목을 타고 올라와 자신의 입술에 다가오고 있었다.

    “헨리, 좋아요?”

    “흠, 소피아는 언제나 환상적이야.”

    “호호호, 그런가요? 내가 이 볼품없는 걸 6개월씩이나 물고 있었다는 게 기가 막히네요.”

    “뭐, 뭐라고? 컥!”

    헨리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소피아의 두 손이 헨리의 목을 사정없이 꺾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헨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외투만 급히 걸친 소피아는 3개월 전 천정의 몰딩으로 위장시켜 놓은 파이프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몰딩 사이로 둥근 금속물체를 꺼낸 소피아는 베란다로 나가 금속물체를 고정하고는 밑을 향해 뛰어내렸다. 검은색 외투는 외벽과 조화를 이루며 와이어를 이용해 빠르게 내려간 소피아는 대기 중인 검은색 밴에 올라타고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하루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건가?”

    존 매케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경환의 저격사건부터 마이클의 폭사와 방금 들어온 헨리의 사망까지, 단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존 매케인의 호출에 급히 백악관을 찾은 제이 존슨은 담담히 보고를 이어나갔다.

    “마이클을 시작으로 일본과 호주, 영국, 독일의 CIA 지부가 와해하는 수준의 피해를 봤습니다. 한국은 CIA 요원들을 NSA로 이동시켜 피해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정부수장까지 암살을 당해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허, 임기 중간이었다면 이 자리도 지키지 못했겠구먼. 예상대로 SHJ시큐리티가 움직인 건가?”

    프레드의 자살로 자신의 레임덕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최강의 정보조직인 CIA의 해외지부가 와해를 걱정할 정도로 피해를 봤다는 건, 너무도 심각했다. 존 매케인도 SHJ와 CIA의 갈등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치열하게 전개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SHJ라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임스의 저격이 발생하고부터 모든 사건이 진행된 것으로 봐서는 SHJ시큐리티가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 해도, 연방정부 요원을 그것도 본토에서 암살했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야. FBI를 통해 전말을 파헤치고 SHJ의 개입이 사실로 드러나면, 제임스뿐만 아니라, SHJ까지 날려야겠어.”

    경환과의 협력이 8년 동안 백악관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엄연히 미국 대통령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연방정부에 대한 도발은 용납해서는 안 되었다. 제이 존슨은 백악관을 찾기 전, 제이와의 연락을 통해 존 매케인을 최대한 설득하라는 요청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통령님, 연방정부에 대한 도발은 당연히 강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국가의 이익에 무엇이 부합되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이 존슨은 특급 비밀이라고 적혀있는 보고서를 존 매케인에게 건네고는 말을 이어갔다.

    “발신자 추적에 실패한 자료이긴 하지만, CIA와 MI6, BND가 결탁해 제임스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자료입니다. 아마 이 자료는 SHJ시큐리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부에서 SHJ를 향해 총구를 돌린다면, 연방정부가 암살을 모의했다는 자료가 세상에 알려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마이클과 헨리가 이 모의를 주동한 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존 매케인은 자료를 넘기며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승인한 적이 없는 작전이 마이클과 헨리에 의해 전횡되고 있다는 사실에선 분노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을 그냥 넘긴다면 대내외적으로 연방정부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SHJ시큐리티의 정보수집 능력을 자신이 직접 확인한 상태에서 SHJ가 사생결단으로 나왔을 때의 후폭풍도 염려해야만 했다.

    “NSA의 의견은 어떤 건가?”

    “SHJ홀딩스의 국채 매도도 FRB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도 판단되는 만큼, NSA가 나서 SHJ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은, SHJ를 먼저 공격한 건 CIA이고 SHJ는 보복을 가한 것입니다. 언론에서 냄새를 맡기 전에, 이번 암살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사건 내용을 조작하잔 말인가?”

    “사실을 밝힐 수도 없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언론과 의회가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긴 시간 동안 존 매케인과의 독대를 마치고 나온 제이 존슨의 얼굴엔 피곤함이 묻어있었다. 자신도 SHJ시큐리티가 이 정도로 과격하게 대응할 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경환이 영국으로 날아가고 있는 지금, 경환과 제이콥 두 사람이 원만한 타협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이 존슨의 머릿속엔 이슬람 과격 테러그룹의 이름이 무수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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