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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52화 (229/264)
  • #252

    다시 사는 인생 - 252

    새벽에 이뤄진 황태수와의 긴 통화는 경환의 진을 쪽 빼놓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루나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경환의 모습은 그룹 회장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였다. 직원들과 약속된 조식모임에 참석한 경환은 하루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에, 조식 모임을 거절한 하루나에 대한 걱정에 경환은 찐한 커피로 조식을 대신하고 있었다.

    “김 실장. STATOIL은 실무진이 회의를 주관하는 거로 진행하고, 왕실 일정은 SHJ시큐리티와 내가 움직일 겁니다.”

    “알겠습니다. 왕실 일정은 제가 연결을 해 오고 있었기에, 제가 회장님을 수행하겠습니다.”

    김혜원은 수행원 모두 SHJ타운에서 대기하라는 경환의 지시를 수행하면서도 자신까지 대기하라는 경환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독일에서부터 경환의 곁엔 자신이 아닌 하루나가 있었고, 전임 비서실장인 하루나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김혜원은 묵묵히 참고만 있었다. 왕실 방문 일정도 처음부터 자신이 연결고리를 만든 상태에서 경환의 대기명령은 하루나에 대한 질투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이번 왕실 방문은 경호에 어려움이 있다는 SHJ시큐리티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취소할 수도 없고, 수행원을 최소화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인 거니 김 실장은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야마시타 사장은 이미 왕궁으로 출발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루나가 출발했다니요?”

    경환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눈빛으로 알에게 지시를 내렸다. 노르웨이의 어떤 직원도 왕궁에서의 테러 위험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루나가 왕궁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에 경환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김혜원은 경환의 당황한 모습에서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회장님의 왕궁 일정을 협의한다는 말만 남기고 새벽에 오슬로로 출발했습니다. 전 회장님과 이미 상의가 된 줄 알았습니다.”

    “SHJ타운의 출입구를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까! 회장인 제 지시까지 무시하다니, 도대체 일을 어떻게 이따위로 처리하는 겁니까!”

    경환의 불같은 분노에 조식을 진행하는 식당의 분위기는 급격히 얼어붙었다. 직원들 모두 열심히 놀리던 포크와 나이프를 하나둘 내려놓았고, 아랫사람에도 항상 경어를 붙이며 존대하던 경환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김혜원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유럽본사 사장인 하루나를 정문에서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전 출입구가 봉쇄되기 전에 미리 SHJ타운을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알의 보고에도 경환의 노기 띤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하루나의 안전을 위해 밖으로 내몰았던 자신의 결정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왕궁엔 경호팀이 미리 나가 있나요?”

    “사전 점검을 위해 한 개 팀이 나가 있습니다.”

    “신체에 위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루나를 감금하라고 명령을 내리세요. 일정이 끝나기 전엔 하루나와 마주치는 일은 기필코 없어야 합니다.”

    알이 급히 식당을 빠져나가자, 경환은 그제야 자기로 인해 직원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경환이 침체한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지만, 이미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경환은 아침부터 계획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끼고는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하루나의 행방이 오리무중인 가운데 경환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왕궁으로 출발하고 싶었지만, 알에 의해 세워진 경호대책에 따르겠다고 약속한 이상 더디게 가는 시간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하루나는 아직 소식이 없나요?”

    경환의 질문에 알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경환의 조급해하는 모습에서 알은 긴장하고 있었다.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경호대상인 경환의 불안함과 조급함이 자칫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경환이 리무진에 탑승하자 한층 경호가 강화된 경호팀들이 리무진의 앞뒤에서 빠르게 출발했다.

    “독일과 터키의 직원들도 도착했습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왕궁 외곽과 SHJ타운으로 이어지는 도로 경계에 투입했습니다. 노르웨이 정부나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은폐하고 있습니다.”

    모든 준비는 마쳤다. 경환은 자신의 생사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자신이 아니어도 황태수와 린다는 SHJ의 중심축 역할을 할 것이고 정우와 희수가 제 몫을 할 때까진 지켜주리라 믿고 있었다. 경환이 예상치 못한 하루나란 변수에 고민하고 있을 때, 차량은 빠르게 왕궁 정문을 향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리 회장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께서 직접 나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훤칠한 키에 왕족의 기풍이 물씬 배어 있는 하콘 왕세자가 건네는 악수를 잡으며 경환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한국식 예절로 경의를 표했다.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려 했던 하콘 왕세자를 노르웨이 국민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마약과 혼음, 미혼모의 타이틀로 왕실과 국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메테 마리를 하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국민들을 향해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털어놓고 국민들의 동의하에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은 결혼 후, 메테 마리의 헌신적인 내조와 봉사활동에 힘입어 현재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국왕께서 기다리십니다. 같이 가시지요.”

    도열한 근위병들 사이를 왕세자와 같이 걸어가던 경환은 근위병들 끝에 에르나 총리와 함께 서 있는 하루나를 발견하고 급격히 얼굴이 굳어졌다. 경환은 뒤를 쳐다봤다. 알과 함께 단 두 명의 경호원만 있을 뿐이었다. 왕실 경호처와 끝없는 설전을 벌였지만, 경호원들에 대한 총기 소지는 불허되었고, 알을 포함한 두 명의 경호원은 맨몸으로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

    “하루나,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경환은 억지스러운 미소를 띠며 하루나를 잡아채려 했지만, 에르나와 왕세자비의 계속되는 인사에 어쩔 수 없이 알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은 하루나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국왕인 하랄 5세의 입장과 함께, 한 사내를 주목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국왕께서 입장하십니다.”

    경환은 하루나를 뒤에 세운 채, 국왕을 맞이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잡았다.

    힘든 결정이 안드레스 스벤손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통해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지만, 이마로 흐르는 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영국 태생이었지만, 20년 전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하면서 왕실 경호처에 특채되었었다. 영국에서의 특수부대 경력과 성실함으로 지금은 왕실 경호처 부처장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안드레스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젠장, 나도 이젠 나이가 들었군.’

    속으로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안드레스는 권총의 탄알을 확인하며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특수부대 시절 탁월한 성적을 주목한 MI6에 특채되었다. 노르웨이의 북해산 원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 안드레스를 국적까지 포기시켰다. 일주일 전, 수년간 연락이 없었던 비선 루트를 통해 밀명을 전달받은 안드레스는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자신의 조국이 영국인지 노르웨이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노르웨이에서 이룬 가족들은 여행이란 명목으로 영국으로 보냈다. 이젠 실행만 남았을 뿐이었다.

    ‘휴스턴 도착.’

    “전 대원, 정 위치에서 대기. VIP 5분 후 입장.”

    튜브 이어폰으로 타킷의 도착 소식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권총집을 확인한 안드레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시를 내리고는 국왕을 앞서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 문이 열리고 동양인으로는 보기 힘든 훤칠한 키의 타킷이 눈에 들어왔다. 국왕의 뒤로 물러난 안드레스는 국왕과 환담을 나누는 타킷을 시선에서 놓치지 않았다.

    거리 10미터.

    정확한 사격을 위한 거리로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안드레스는 타킷 경호실장의 강렬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경호실장은 타킷에 대한 최적의 저격 포인트를 자신의 몸을 이용해 교묘히 가리고 있었다. 지금의 위치에서 몸을 왼쪽으로 튼다면 포인트를 다시 설정할 수 있었겠지만, 타킷의 옆에 서 있는 왕세자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듣던 대로군. 감이라는 건가?’

    안드레스는 경호실장의 눈빛을 그대로 마주쳤다. 둘 사이의 눈빛이 스파크를 튀기기 시작했다. 첫 사격을 타킷에 명중해야만 했다.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다지만, SHJ시큐리티의 경호팀은 타킷을 몸으로 막을 것이고 왕실 경호처 대원들이 자신을 향해 불을 뿜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왕과의 대화가 끝나가고 있었다. 노환으로 심신이 불편한 국왕이 이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만 했다.

    ‘어떤 미친 자식이 이런 계획을 짰는지, 면상을 후려치고 싶군.’

    빠른 판단을 해야만 했다. 국왕을 경호하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타킷의 경호실장은 쉽게 저격 포인트를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확실한 효과를 위해선 타킷의 머리를 노려야만 했지만, 10미터는 애매한 거리였다. 안드레스는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은 채, 타킷의 흉부를 살폈다. 다행히 방탄조끼는 착용하지는 않은 듯 보였다.

    국왕이 불편한 몸을 이유로 양해를 구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이 안드레스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서도 저격 포인트가 나오지 않는다면 작전을 중단해야만 했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작전 실패의 후유증을 고려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국왕이 타킷에서 벗어나면서 경호실장의 몸이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졌지만, 시선은 여전히 자신에게 향해있었다.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작전 완료까지 1초면 충분했다.

    안드레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여전히 타킷의 머리는 저격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안드레스의 눈에 자신에게 빠르게 뛰어오는 경호실장보다, 타킷에게 뛰어드는 여자의 모습이 들어왔지만, 망설일 수 없었다.

    ‘탕. 탕.’

    권총을 쥔 팔에 묵직한 느낌이 전달되면서 안면에 심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만족스러웠다. 첫 번째 탄환이 여자의 손바닥을 관통해 정확히 타킷의 가슴에 적중하는 걸 확인했다. 왕실 경호처 대원들이 총을 겨눈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망할 놈의 경호실장은 자결할 시간조차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드레스는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다시 안면으로 적중되는 통증에 정신을 놓았다.

    “외곽 대기조! 빨리 진입해!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적으로 간주한다.”

    알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너무 위험한 작전이었다. 안드레스를 제압한 알은 안드레스의 권총을 들고 왕실 경호처 대원들과 대치했다. 하를 5세는 경호원들에 의해 빠르게 대피를 했지만, 하콘 왕세자는 대피를 거부하고 현장에 남아 경호처 대원들과 알의 중간에서 양팔을 좌우로 뻗었다.

    “다들 총 내리세요!”

    하콘은 울부짖고 있었다. 왕실 근위병을 제압하고 빠르게 왕궁으로 진입한 SHJ시큐리티 대원들은 알의 앞으로 나와 왕실 경호처 대원들과 대치를 시작했고, 알은 두 명의 경호원이 몸으로 덮치고 있는 경환과 하루나를 향했다. 하콘은 왕실 경호처 대원들 앞으로 나와 양측의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알의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SHJ시큐리티 대원들은 하콘의 울부짖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회장님! 회장님!”

    알은 급히 경환의 와이셔츠를 젖혔다. 경환의 호흡을 확인한 알은 경환의 옆에 쓰러져있는 하루나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1조와 2조는 회장님과 하루나를 대기 중인 의료팀에 인계하면서 돌발상황에 대비하고, 5미터 앞으로 다가오는 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사전 제압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경환과 하루나를 둘러업은 요원들이 삼엄한 엄호 속에 왕궁을 빠져나가자, 알이 왕실 경호처와 대치하고 있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누구 피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알은 피범벅 상태였다.

    “모두 총 내려.”

    알의 명령이 떨어지자, SHJ시큐리티 대원들의 중화기가 일시에 바닥을 향했다. 그러나 대원들의 검지는 여전히 방아쇠에 놓여있었다. 왕실 경호처 대원들도 하콘 왕세자의 지시에 따라 총을 거둬들였다.

    “왕세자님. 왕실 경호처의 공격에 회장님이 저격당하셨습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중대한 도발로 규정하겠습니다. 지금 막, SHJ타운으로 향하는 외곽 도로에 경찰로 위장한 무장세력을 제압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노르웨이의 처리 과정을 지켜보겠습니다.”

    왕세자는 다른 무장세력이 경찰로 위장해 있었다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을 마친 알은 대원들을 통솔하며 왕궁을 빠져나갔다. 이미 왕궁 외곽은 경찰과 근위병, 경호처 요원들이 얽혀 SHJ시큐리티 직원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지만, 급히 달려 나온 하콘 왕세자에 의해 대치가 풀리면서 경환과 하루나를 실은 경호차량은 200KM 이상으로 속도를 높여 SHJ타운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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