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51화 (228/264)
  • #251

    다시 사는 인생 - 251

    “후, 저는 회장님의 결정을 지금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장시간의 걸친 경환과의 통화를 마친 황태수는 수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긴 탄식을 내뿜었다. 부회장실에 모인 린다와 카일은 명분을 위해 자신을 미끼로 활용하려는 경환에 울분을 토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회장님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이 위성전화를 꺼내 들었다. 새로 투입된 인원들과 함께 전방위적으로 해킹을 시도한 케빈은 아테나-1의 분석을 뒷받침해줄 물증을 확보한 상태였다. 수화기 버튼을 누르려는 카일은 황태수의 고성에 뜻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만두세요! 한번 결심한 건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 회장님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다. 모든 건 알에게 맡기고 우린 우리의 일을 점검합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SHJ의 중심축은 회장님입니다.”

    카일은 참을 수 없었다. SHJ시큐리티는 경환과 SHJ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조직이었고, 조직의 수장인 경환의 무모한 계획은 카일을 절망 속에 빠트렸다. 황태수는 카일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침착해야만 했다.

    “카일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우린 절벽 위에 놓인 통나무를 걷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깊은 나락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란 말입니다. 회장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냉정해야만 합니다. 린다, SHJ홀딩스는 준비되었나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던 린다가 한숨과 함께 감았던 눈을 떴다. SHJ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던진 경환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나 냉정해야 한다는 황태수의 말엔 자신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SHJ홀딩스는 FRB를 상대하게 되겠지만, 뿌리가 깊은 만큼, 우리만으로는 FRB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격으로 FRB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 일부 뮤추얼 펀드의 동참하고, 만약 제이가 우리의 뜻에 가담한다면 FRB도 심각한 타격이 예상됩니다.”

    “백악관이 나설 확률이 높은데, 그 점은 고려되었나요?”

    “미국 경제에 직접적인 여파가 가기 때문에, 백악관은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될 겁니다. 그러나 제이콥의 몸에 생채기를 내기 위해서는 백악관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틸 생각입니다.”

    “그건 린다가 전권을 가지고 있으니 진행사항과 결과만 보고해 주세요. 그리고 SHJ시큐리티의 작전상황은 진행하고 있습니까?”

    울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는지 카일은 황태수의 질문에도 입을 굳게 닫은 채, 굳은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카일! 이번 계획에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할 수장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회장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겠습니까? 냉철한 판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란 걸 모릅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노르웨이로 달려가 경환을 뜯어말리고 싶었던 카일은 황태수의 질책에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죄송합니다. SHJ시큐리티는 일 년 전부터 계획을 준비하였고 이미 작전을 수행할 팀들이 대기 중에 있습니다. 미국은 3개의 팀이 작전을 진행하고 있고, 영국과 독일이 각 2개 팀, 일본과 한국, 호주에 각 1개 팀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휴스턴의 별도 작전은 미셸이 직접 이끌게 될 것입니다.

    “총 11개 팀이 대기 중이란 말이군요. 백업은 문제가 없겠지요?”

    “직원들의 탈출 경로와 작전실패를 대비한 비상대기 공간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작전인 만큼, 지휘체계가 붕괴하지 않게 다시 살펴보시고, 각국 정보조직에 우리가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 후속 대비도 철저히 준비하세요. 가장 중요한 건 직원들의 안전입니다. 안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작전은 바로 중지하세요.”

    정신을 차린 카일은 황태수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반 대중은 그 진상에 대해 알 수 없겠지만, 각국의 정보조직 특히 CIA나 NSA, MI6, 모사드는 SHJ시큐리티가 이번 작전의 주체란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건 경환과 SHJ시큐리티의 의도이기도 했다. 정보조직들 사이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지만, 먼저 피해를 보는 SHJ 입장에서 확실한 방법으로 실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십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SHJ시큐리티는 이번 한 번의 작전을 위해 피나는 인고의 시간을 감내해 왔었다.

    “십 년을 넘게 훈련한 베테랑으로 팀을 꾸렸습니다. 아테나-1의 분석으로도 90% 이상의 성공을 예측하고 있고, 지휘 본부 역시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으로 예상되는 외부의 사이버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휴스턴 작전을 검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회장님의 가족들 일정은 모두 취소했겠지요? 저도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희수의 의견을 무시하기엔 너무도 사실적이더군요.”

    아테나-1의 예측자료에는 노르웨이에 대한 위험과 더불어 경환의 가족에 대한 위험도 함께 경고하고 있었다. 내일 오전에 있을 정우의 박사학위 취득일정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미셸이 급히 카일을 찾았다. CIA에 고용된 용병들의 공격 지점과 방법, 시간까지 정확히 명시된 자료에 카일은 미셸을 독촉했고, 그 자료가 희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카일은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희수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사실관계는 나중에 확인해도 된다는 판단에 미셸이 이끄는 작전팀으로 희수가 지적한 공격 지점을 역포위하도록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회장님 가족들의 일정은 모두 취소했지만, 외부에 알리지는 않았습니다. 적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 차량은 정상적으로 그 지점을 통과하게 될 겁니다.”

    “회장님 가족들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SHJ타운 밖을 나서지 못하게 하십시오. 강압적인 방법도 허용하겠습니다.”

    “희수가 중심이 돼서 가족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저는 이 자리가 부끄럽습니다. 회장님은 본인이 직접 사지로 뛰어들었는데, 회장님을 보필해야 할 제가 할 일 없다는 게 너무 힘들군요. 그러나 내일은 우리 SHJ에 가장 중요한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SHJ는 인내하며 울분을 삼켜왔지만, 이젠 돌아올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일은 SHJ의 모든 것을 걸고 단 한판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다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비장한 각오를 밝힌 황태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작전을 위해 카일이 먼저 자리를 빠져나가자, 부회장실엔 린다와 황태수, 둘만 남게 되었다.

    “제가 짊어진 짐의 무게가 저를 너무 힘들 게 하는군요.”

    “그래도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회장님도 부회장님을 믿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황태수는 안경을 벗고 눈을 지그시 눌렀다. SHJ의 모든 것을 건 이번 도박의 성공 여부가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게 자신의 정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린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잔에 술을 따랐다.

    “한잔하세요. 저도 한잔 마시고 싶네요.”

    “제 모든 걸 이번 일에 걸었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회장님 멱살을 잡아서라도 제 뜻을 이룰 겁니다.”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회장님은 쉽게 부회장님을 놔주질 않을 겁니다.”

    “고이면 썩습니다. SHJ가 미래를 위해 달려가려면, 제가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도 제가 기쁜 마음으로 결심할 수 있었던 건, 린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뒤를 잘 부탁합니다.”

    황태수의 진심에 린다는 숙연해졌다. SHJ에 합류한 후부터, 린다는 황태수를 넘어야 할 경쟁상대로만 인식해 왔었다. 그러나 자신의 보이지 않는 도발에도 황태수는 언제나 여유롭고 태연하게 자신을 대할 뿐이었다. 경환은 그런 자신과 황태수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갔고 결국 린다도 경쟁자가 아닌 상생의 입장에서 황태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황태수가 미련없이 자리를 자신에게 주겠다는 말에 린다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화끈거렸다.

    “그건 회장님이 결정하실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정우를 회장님의 후대로 생각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희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를 물린다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린다는 정우와 희수의 성장을 보면서 그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적어도 10년은 린다가 그 두 아이의 뒤를 봐줘야 할 겁니다. 희수가 예상외로 놀라운 능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선택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희수의 놀라운 잠재적 능력이 나타나면서, 황태수의 저울추도 급격히 희수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러나 황태수는 이런 판단은 자신의 몫이 아닌 경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SHJ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몸도 아낌없이 던지는 경환의 성격상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SHJ를 물려주진 않을 것이란 걸 황태수는 믿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휴스턴의 밤도 두 사람을 잠들게 하진 못했다.

    “자네 일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든 건가? 자네의 통제가 미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자네의 생각이 반영된 건지 알아야겠네.”

    “헨리와 마이클의 독단적인 행동이지만, 저도 이 계획엔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가문의 미래를 탄탄히 하고 제이의 오만함에 경고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뒤늦게 헨리와 마이클의 계획을 보고받은 제이콥은 자신의 지시에 수긍하지 않은 두 사람의 행동에 그들을 통제하지 않은 비서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계획을 중단시킬 힘이 있었지만, 제이콥은 쉽게 중지를 명하지 않고 있었다.

    “SHJ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일정을 취소했다거나 변경했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SHJ시큐리티의 능력이 과장되었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라고 봅니다.”

    “자넨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질 못하는군. 일부러 불 속에 뛰어드는 제임스가 그 정도 예상을 못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아마도 이번 일을 기점으로 칼을 뽑아 들으려 할 거야. 자넨 터키와 독일에서 SHJ 전용기가 급히 출발했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나?”

    비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SHJ 전용기가 두 곳에서 출발했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제이콥이 자신이 모르는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있고, 모든 초점을 SHJ에 맞추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보고하기 전에 헨리와 마이클의 계획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허리로 굵은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헨리와 마이클에게 정보를 전해 주고 작전을 중단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놔둬. 멍청한 두 놈의 계획은 이미 제임스의 귀에 들어갔을 거야. 두 놈은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SHJ시큐리티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제이콥의 이중적인 모습에 비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작전이 노출되었다면 작전을 변경하거나 적어도 중단시켜야 했지만, 제이콥은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

    “자네를 용서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란 걸 알아야 할 거야.”

    “죄, 죄송합니다. 제이의 반발이 예상되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미리 언질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이가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상황을 지켜보며 가장 큰 이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을 테니까. 제이와의 문제는 제임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본 후에 천천히 결정할 생각이야.”

    등허리에서 시작한 식은땀은 이미 비서의 이마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행동도 결국엔 제이콥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가문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비서는 제이콥을 상대하려는 경환이 타 죽을 걸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제이콥의 입이 열리면서 비서를 다시 긴장시켰다.

    “SHJ가 과연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갈지, 자넨 짐작할 수 있겠나?”

    “SHJ시큐리티를 통해 헨리와 마이클을 거기에 벤까지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미국의 공권력을 상대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 자칫 SHJ가 공권력의 역풍에 사라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들을 희생시키고 SHJ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야. 뭔가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내가 경험한 제임스란 친구는 우리의 예상범위를 항상 벗어났었어. 자넨 지금 즉시 SHJ의 전략이 무엇일지에 대한 예상치를 작성해서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일이 꼬이고 있었지만,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제이콥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가고 있었다. 작전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크게 중요할 것은 없었다. 단지, 물에 빠져 허둥대는 경환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가 제이콥은 궁금할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