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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50화 (227/264)
  • #250

    다시 사는 인생 - 250

    경환이 자리를 비운 휴스턴은 겉으로 보이기엔 평온했지만, SHJ시큐리티는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테나-1이 정보분석팀에 배정되면서,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작업은 확실히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슈퍼컴퓨터를 대체할 정도의 월등한 성능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SHJ테크놀러지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었다.

    “잭슨, 이걸 좀 봐야 하겠는데?

    “지금 나도 정신없는 거 안 보여? 웬만하면 자기 일은 각자 알아서 하자고.”

    계속되는 비상대기 상태가 풀리지 않아 자의에 의해 지하에 갇혀있는지 이미 일주일이 넘었다. 면도할 시간조차 없었던 잭슨은 자신을 찾는 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업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주요인물들에 대한 감청자료와 위성자료를 아테나-1이 예측한 결과물인데, 내 선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 그래.”

    특정지역에 한해서는 NSA의 감청 시스템을 능가한다는 자체 평가 속에 휴대폰과 IT의 감청을 담당하는 폴은 미심쩍은 아테나-1의 결과물에 열 번 이상 같은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주변 환경과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아테나-1은 폴의 간절한 바람도 무시한 채, 같은 결과물을 지속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인 폴이 계속해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에 잭슨은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내용인데? 자료를 줘봐.”

    대수롭지 않게 자료를 건네받은 잭슨은 자료를 넘기면서 급격히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안경을 다시 고쳐 쓰고 자료를 되넘기던 잭슨은 폴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시 한 번 예측 분석을 해 보자고. 만약 결과가 똑같이 나온다면, 이건 우리 선에서 해결할 문제는 분명 아니라고 봐. 우선 정확한 분석을 위해 내가 추가 데이터를 확보할 테니,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봐.”

    “너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추가자료를 빨리 확보해줘.”

    잭슨은 자신이 관리하는 데이터와 함께 각 팀에서 관리하는 자료를 서둘러 넘겨받아 대기하고 있던 폴에게 건네주었다. 추가 자료를 업데이트하자, 아테나-1은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린 분석결과를 집어든 폴의 얼굴은 사색으로 변해 있었다.

    “맙소사. 잭슨, 같은 결과야.”

    “자료를 이리 줘 보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잭슨은 아테나-1의 분석이 끝나기도 전에 카일에게 연락을 취했고, 카일은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급히 분석실로 발걸음을 옮겨 왔다. 뺏다시피 자료를 건네받은 카일은 아테나-1이 분석한 내용에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확인작업은 확실히 한 자료인가?”

    “이미 열 번 이상 확인한 내용입니다. 데이터를 추가해 나온 자료가 지금 보시는 거고요.”

    경환의 경호엔 만약이란 말은 없었다. 일단 위험이 감지되면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란 생각을 카일은 하고 있었다. 케빈까지 급히 분석실에 들어오자, 카일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아테나-1의 분석을 근거로 모든 자원을 투입하도록 하게. 케빈은 새로 투입한 인원들을 동원해 모든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잭슨과 폴은 범위를 최대한 좁히도록 해. 그리고 유럽에 나가 있는 현장 요원들을 급히 이동시키고. 서둘러!”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란 생각에 카일은 조급해지고 있었다. 직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카일은 급히 자료를 집어들고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에르나가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경환은 SHJ타운으로 향했다. 오슬로 50KM 외곽에 건설된 SHJ타운까지의 도로는 한적하기만 했다. 경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달리는 차 안에선 영국에서 만나게 될 제이콥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지를 놓고 경환은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회장님, 5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그래요. 제가 좀 딴생각을 했나 봅니다. 늦은 시간이니 직원들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내일 조식을 직원들과 같이하면서 대화를 나눌 생각입니다.”

    일행의 차량이 SHJ타운에 도착하자, 정문부터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리 SHJ시큐리티가 비상체제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중화기까지 무장한 모습은 어딘가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루나,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어딘가 분위기가 좀 달라졌군요.”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SHJ시큐리티에서 경계 병력을 증가시킨 거로 알고 있습니다. 독일과 터키에 있는 필드 요원들도 현지를 출발해, 내일 오전까지 합류시키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경호 인력과 노르웨이 SHJ타운의 병력만 해도 만만치 않은 숫자였지만, 독일과 터키의 요원들까지 합류한다는 것이 경환은 마음에 걸렸다.

    “회장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휴스턴에선 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세요. 전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용이 확인되면 바로 보고해 주세요.”

    급히 사라지는 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경환은 방향을 돌려 준비된 숙소로 향했다. 독일 SHJ타운의 지사 역할을 하다 보니 노르웨이 SHJ타운은 규모 면에서 빈약하다고는 하지만, 오슬로의 특급호텔에 버금가는 게스트 하우스를 보유하고 있어 경환이 묵기에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다.

    “회장님, 쉬십시오.”

    “하루나, 알의 보고를 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술 한잔 같이할 수 있을까요?”

    이미 김혜원은 자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경환을 마주 보고 있는 하루나의 손에 힘이 가해지며, 파르르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발은 뒤돌아서려는 하루나를 잡아끌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하루나의 귓전을 때리자 하루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미 자신의 손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일정이 만만치 않습니다. 알이 올 때까지 가볍게 목을 축이는 정도가 좋으실 것 같습니다.”

    경환은 하루나가 건넨 술잔을 받고선 단번에 입에 부어버렸다. 잔을 다시 채우려 손을 뻗었지만, 경환에 앞서 하루나가 먼저 빈 술잔에 잔을 따라 부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있지만, 경환이 느끼는 거리감은 너무도 멀었다.

    “하루나, 미안합니다.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나 이해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속에 짐이 남아 있다면, 그건 하루나일 겁니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술잔을 바라보고만 있던 하루나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가 뜬 하루나는 술잔을 들어 거침없이 술을 입에 따라 부었다. 연거푸 석 잔을 마실 동안 경환은 아무런 말로 꺼내지 않았다.

    “처음 긴자의 하키라에서 회장님을 뵙고, 전 다시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게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단지, 회장님 곁에서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밖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희망이 점점 커지면서, 회장님과 사모님을 힘들 게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회장님께서 미안해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 생활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급하게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하루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경환은 하루나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빠져들 것 같은 하루나의 깊은 눈을 바라본다면,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을 내던져버릴 것만 같았다. 경환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나를 여자로 느끼면서 갈등이 없었다면,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보다도, 지켜야 할 신념이 내 발목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는군요. 혹시라도 다른 시간대에서 하루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가 먼저 하루나에게 다가가겠습니다.”

    경환은 떨리는 하루나의 눈동자를 느낄 수 있었다. 경환의 시선을 바라볼 수 없었던 하루나는 경환의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궜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제가 회장님께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루나는 떨리는 음성을 다 잇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루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경환 앞에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회장님이 아닌 남자로 저를 대해 주세요. 더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하루나의 고개가 들려지면서 경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는 블라우스의 윗단추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하루나를 바라보는 경환은 이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 전체를 통제하며 경환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경환은 소파에서 일어나 서서히 하루나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똑. 똑.’

    “회장님, 알입니다. 급하게 보고드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급작스런 알의 방문은 경환과 하루나의 감정을 뭉개버리고 말았다. 풀린 블라우스의 단추를 급히 닫은 하루나가 긴 한숨과 함께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들, 들어오세요.”

    경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으로 들어선 알은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감지했으면서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감정은 알고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전 나가 보겠습니다.”

    “아닙니다. 야마시타 사장도 상황을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는 황태수 부회장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자리를 피하려던 하루나는 일정을 모두 취소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일정까지 취소한다는 것은 경환에 대한 심각한 위해가 예상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암호화된 보고서를 해독한 서류를 읽던 경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어느 정도 제이콥이 통제해주길 바랐지만,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양상으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나, 잠시 나가 있겠어요? 알과 둘이 얘기를 좀 해야겠네요.”

    “전 SHJ유럽본사 사장이고 여긴 제 관할 지역입니다. 비상상황이 유럽에서 발생했다면, 사장인 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나! 나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건 SHJ 회장인 내 명령입니다!”

    하루나의 주먹 쥔 손이 떨리는 모습에도 경환의 단호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글썽이는 눈으로 고개를 숙인 하루나가 방을 빠져나갔다. 경환은 보고서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리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알, 부회장님은 제가 따로 연락할 테니, 내일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합시다.”

    “회장님! 너무 위험합니다. 결정적으로 그곳은 SHJ시큐리티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이번만큼은 회장님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알은 경환의 이번 해외방문 내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있었다.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은 내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환을 휴스턴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경환을 경호하면서 경환의 지시는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던 알은 처음으로 경환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절하고 나섰다.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SHJ의 상황은 제이의 하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현재 제이와 제이콥은 협력을 선택했고, 우리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둘의 관계에 흠집을 내고 SHJ가 동등한 자격을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명분입니다.”

    “아무리 명분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이건 너무 무도한 시도라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됩니다. 이 자료를 제이콥에 전달해 사전에 막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료를 전달하면 막을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린 먹이사슬의 최 하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미 저들의 계획을 알고 있는데, 상황을 우리가 유리하게 만들어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안으로 축적한 SHJ시큐리티의 능력을 이젠 밖으로 표출시켜야 할 때이기도 하고요.”

    알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한번 뜻을 세우면 경환의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는 걸 알도 모르지 않았지만, 이건 아니란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을 미끼로 제이콥과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고 동등한 자격을 얻을 명분을 가지려는 계획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경환의 말처럼 제이와 제이콥이 협력한다면, SHJ는 먹이사슬의 하단부에 놓여 그들에게 피를 빨리게 될 처지란 사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알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알, 내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읍시다. 내일을 계기로 SHJ시큐리티에서 중단했던 작전을 준비시키세요. 이쪽에서 먼저 상황이 발생하면 동시 다발적으로 대응해야 할 겁니다.”

    “한 가지 약속해 주십시오. 내일 하루는 어떠한 경우라도 제 지시를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정은 저와 SHJ시큐리티 직원들만 동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모든 수행원은 SHJ타운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하세요.”

    이후, 알은 경환과 내일 있을 일정에 대한 경호방안과 경환이 따라줘야 할 내용에 대해 장시간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문밖으로 둘의 대화를 듣던 하루나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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