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다시 사는 인생 - 249
SHJ가 오성그룹과 대후그룹, 대현중공업과 사업 전반에 대한 협의를 진행했다는 소식과 SHJ가 정부와 SHJ아시아본사 이전에 대한 의견을 교환해, 2년 동안 검토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은 심석우의 기자회견과 맞물려 신정연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총선의 핵으로 등장한 신정연의 공천을 받기 위해 많은 정치 지망생들이 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정연은 외부 전문가 그룹이 참여하는 인사위원회를 통해 공천이 아닌, 철저한 지역 추천제로 인물을 선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그 이면엔 SHJ시큐리티를 통한 철저한 검증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SHJ아시아본사는 신정연의 위탁을 받은 중형이지스함 건조를 위해 록히드 마틴과 대현중공업에 손을 내밀었고, 보잉과의 합작으로 F-35의 판로에 심각한 영향이 예상된다는 분석에 절치부심하던 록히드 마틴은 한국을 생산거점으로 중형급 이지스함의 건조와 수출까지 고려하는 장기프로젝트로 성장시킨다는 구상으로 SHJ의 손을 잡았다. 존 매케인과의 합의와 제이의 암묵적인 동의에 SHJ는 본격적으로 방산분야까지 사업의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알의 우려에도 경환은 케냐와 터키의 일정을 무사히 소화했다. SHJ시큐리티의 철통 경호 속에 알의 우려는 기우로 끝이 나는 듯했고, 경환은 하루나와의 재회와 함께 독일 총리와의 회담을 끝으로 노르웨이로 향하는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네요. 짧은 시간 속에서도 독일 SHJ유럽본사를 성장시킨 건, 하루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회장님은 여전하시네요. 건강에 항상 유의하십시오.”
사무적이고 냉랭한 하루나의 표정에 경환은 씁쓸한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하루나를 결코 놓치는 일은 없었을 거란 걸 경환은 부인하지 못했다. 40세를 넘긴 하루나는 수정과는 다른 매력으로 경환을 자극하고 있었지만,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너무 두껍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언제 빈말한 적이 있나요? 그나저나 노르웨이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좀 피곤할 거 같은데 일정을 변경할 수는 없겠지요?”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의 특별 요청이 있어 변경하긴 어렵습니다. 오슬로 대학에서의 강연과 STATOIL과의 면담시간을 좀 줄일 수는 있을 거 같긴 합니다.”
“농담입니다. 유럽본사에서 어렵게 만든 일정이니 따라야겠지요. 하루나가 없는 빈자리가 오늘처럼 크게 느껴지긴 처음이네요.”
경환은 아차 싶었지만, 한번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은연중에 경환이 물은 질문은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던 하루나의 마음에 돌을 던진 꼴이었다. 타의에 의해 휴스턴을 떠나 독일에 자리를 잡은 하루나는 마치 모든 걸 잃은 허탈함에 우울증 증세까지 겹쳐 한동안 심적 방황을 해야만 했었다. 유럽의 모든 시선이 30대 후반에 SHJ유럽본사 사장으로 임명된 하루나에 집중된 터라, 그 흔한 정신과 상담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던 하루나는 온전히 혼자서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하루나의 등장에 유럽 사교계는 열광했지만, 하루나는 남은 모든 힘을 일에 쏟아 부었다. 독일과 노르웨이의 SHJ타운을 일주일에도 몇 번씩 왕복하면서 일에 매진했고, SHJ매니지먼트가 관리하는 전용기 중 하루나의 개인 전용기가 가장 힘들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잊으려는 노력이 간절할수록 그리움은 한없이 커진다는 말이 사실이 아니길 빌었지만, 경환의 한마디에 어렵게 쌓은 담벼락이 무너져내리는 울림은, 하루나의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 수밖에 없었다.
“피곤하실 테니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회장님 일정을 실무진과 협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겠네요. 하루나 말처럼, 오랜만의 강행군으로 좀 지치긴 합니다.”
경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하루나의 향수 냄새가 아직 진하게 남아있는 자리를 경환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오슬로 가르데르모엔 공항으로 경환의 전용기가 도착하자, 노르웨이 경찰들과 SHJ시큐리티 직원들은 철통 같은 경호를 펼쳤다. 아직 영국 일정이 남았지만, 대외 공식 일정은 노르웨이가 마지막이었고 SHJ시큐리티 휴스턴 본사와 호주에선 계속해서 유럽 전역에 대한 실시간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 7월 정부청사와 노동당 청소년 캠프에서 발생했던 테러로 91명이 숨지는 사건을 주목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임스 리 회장님.”
“총리께서 직접 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르나 솔레르그는 SHJ타운 유치와 SHJ에너지의 지분을 확보함으로 대체에너지 개발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는 평가 속에 노르웨이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선을 승리를 이끌 수 있었다. SHJ는 에르나에게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뤄준 존재였기에 관례를 무릅쓰고 직접 공항에 나와 경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국왕 전하와 노르웨이 국민들은 SHJ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방문이 좋을 결과를 맺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도 노르웨이와의 협력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선 테러로 희생된 분들에 대해 애도를 하고 싶습니다.”
폭탄테러가 발생했던 정부청사는 아직도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고, 예정에 없었던 경환의 돌발발언에 알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경환과 대화를 나누는 에르나의 감격한 모습에서 경환을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알은 급히 팀원들 일부를 정부청사에 보내 사전 검색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경찰과 SHJ시큐리티 경호 요원들의 안내로 차량이 출발을 시작했고, 자발적으로 인도를 메운 노르웨이 국민들의 환영 속에 경환의 리무진은 정부 청사로 향했다.
“알, 너무 표정이 무겁습니다. 예정된 일정을 벗어나긴 했지만, 노르웨이 정부와의 협력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니 이해해 주세요.”
“회장님, 외람되지만, 회장님 혼자만의 몸이 아니십니다. 저에게라도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비행기 트랙을 내려오면서 떠오른 생각이었어요. 앞으론 알과 먼저 상의를 하겠습니다.”
이번 경환의 해외방문을 수행하면서 알은 하루에 2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경환의 경호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별한 돌출상황은 전혀 없었지만, 알의 동물적인 감각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알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던 경환은 급히 일정을 수정하는 김혜원을 찾았다.
“김 실장, 하루나는 SHJ타운으로 출발했습니까?”
“야마시타 사장은 내일 SHJ타운에서 있을 STATOIL과의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떠났습니다.”
경환은 하루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하루나와 독일 일정을 함께 진행하면서 경환도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SHJ타운으로 먼저 출발했다는 것을 경환도 모르지 않았다.
폭탄 테러가 발생했던 정부 청사는 외벽을 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흉물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처참했던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경환은 꽃다발을 헌화하고 잠시 묵념을 통해 희생자를 추모했다. 통제된 인도에서 경환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르웨이 국민들과 정부 관료들은 그때의 참상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고, 경환을 향해 따뜻한 눈빛을 전달해 주었다.
“노르웨이를 대표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군요. 희생자들의 추모비와 위로를 위해 2백만 불을 기부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죄송합니다.”
에르나와의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경환이 테러현장을 찾은 이유는 희생자를 추모하려는 이유보단 노르웨이 국민들의 마음에 따뜻한 인상을 심어주어 노르웨이 정부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었다. 경환의 예상대로 에르나와의 협상은 물 흐르듯 흘렀고, 북해산 원유와 천연가스 및 셰일가스에 대한 장기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합의를 이뤄낼 수 있었다.
“SHJ그룹의 제임스 리 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노르웨이 정부와의 회의를 끝낸 경환은 서둘러 오슬로 대학으로 향했다. 에르나가 주최하는 만찬 시간까지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빡빡하기는 했지만, 오슬로 대학에서의 강연을 중간 일정으로 잡아 놓은 상태였다. 오슬로 대학의 강단에는 경찰과 SHJ시큐리티의 삼엄한 검문검색에도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 있었다. 사회자의 안내에 강단으로 걸어가는 경환의 모습이 나타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강단으로 퍼져나갔다.
“반갑습니다. 제임스 리라고 합니다. 이렇게 강단에 서게 되어 제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솔직히 제가 가진 지식이 짧아 강연할 처지는 못 됩니다. 그래서 제 짧은 지식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강연이 아닌 여러분들과의 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하하.”
“자 그럼 다들 동의하신 거로 알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할 것은 제 사생활과 가족에 관련된 질문은 삼가 주십시오.”
일방적인 지식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던 경환은 학생들과의 솔직한 대화를 선택했다. 강단에서 벗어나 준비된 의자에 앉아 학생들의 질문을 기다렸다. 한 학생이 손을 들었고 마이크가 빠르게 전달되었다.
“SHJ는 2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똑똑하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아니요. 미래를 읽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생각하지만, 똑똑하다고는 보기 힘들겠는데요.”
“하하하, 변명의 여지가 없군요. 기업을 성장시키고 미래를 이끌어가기 위해선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범람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전 SHJ의 근본을 20만 명이 넘는 직원이라고 생각하며, 같이 SHJ를 성장시켜 왔습니다. 현재의 기업문화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사관리는 실적과 이윤창출로 직원들을 경쟁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경쟁과 이익을 위한 결과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SHJ만큼은 인간이 우선인 인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다는 목표를 세웠었습니다. 그런 결과물이 SHJ타운이고, SHJ 직원의 이직률이 0.3% 미만이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봅니다. 제 경영방식이 옳다고 여러분들에게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이런 경영방식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경환의 긴 답변이 끝나자, 장내는 조용해졌다. 일부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질문한 여학생만은 경환의 답변에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후, SHJ의 미래비전과 노르웨이와의 장기적 협력관계에 대한 질문이 줄지어 이어졌고, 경환은 농담과 진지함을 섞어가며 대화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학생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마이크가 건네지고 경환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SHJ구글에서 자체 개발한 자가복제가 가능한 3D 프린트를 우주 호텔 프로젝트에 투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선에서 쓰일 수 있는 금속부품을 개발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대화의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이었지만, 경환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오슬로 대학의 강연 요청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도 SHJ테크놀러지와의 연결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경환은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제가 연구원은 아니다 보니 기술적인 답변은 드릴 수 없을 거 같군요. 그러나 SHJ구글과 SHJ테크놀러지에서 3D 프린터를 개발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2006년부터 REPRAP(3D 프린터 개발을 위한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스트라타시스를 인수해 3D 프린터의 기술과 라이선스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SHJ유니버스에서 추진하는 우주 호텔 프로젝트에 3D 프린터를 탑재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SHJ는 카이러 교수님이 연구하시는 자가복제 로봇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남극의 해저, 방사능 지역 등 극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학습하고 변신하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카이러는 경환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3D 프린터와 연동해 스스로 자기 부품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SHJ에서 획기적인 3D 프린터 기술을 확보했다는 소식은 카이러의 심장을 뛰게 했다. SHJ의 기술과 자본이 합쳐진다면 자신의 연구도 빛을 보게 될 거란 생각에, 카이러는 경환의 답변을 한 귀로 흘릴 수 없었다.
“긴 시간 자리해 주셔 감사합니다. 다른 일정이 있어, 이만 대화를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뒤로 보이는 메일로 내용을 주십시오. 답변은 아마도 제가 아닌 비서실에서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양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경환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단에 모였던 학생들이 기립해,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일부는 사이보그폰을 꺼내 연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일부는 강단을 벗어나는 경환에게 환호성을 지르며 경환과의 대화에 만족을 표시했다. 경환과 동행했던 SHJ테크놀러지 부사장이 급히 카이러에게 다가서는 걸 확인한 경환은, 준비된 차량을 이용해 에르나가 주최하는 만찬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