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다시 사는 인생 - 248
“형님 오랜만입니다.”
저택을 들어선 경환 앞으로 심석우가 너스레를 떨었고, 심석우 옆에서 무거운 얼굴을 한 박화수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했던 경환은 저택에 마련된 접견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두 사람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특히 박 의원님은 제게 감정이 많으셨죠?”
“아닙니다.”
단답형으로 말을 자르는 박화수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머리로는 경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아직 가슴 속에 남은 멍울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듯 보였다. 여전히 굳어있는 박화수의 표정에 경환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형님, 이번 서산 방문을 언론을 포함한 경제계와 정치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SHJ타운 입구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기도 하고요.”
“그렇겠지. 거의 십 년 동안 심 의원 자네와 SHJ와의 관계는 한마디로 최악이었으니까.”
청와대의 긴급 회담 요청과 여야 중진 정치인들의 방문 요청을 모두 거절한 경환이 매제인 심석우와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려고 한다는 소식은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청와대와 기존 정치인들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미국을 포함해 각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SHJ의 영향력에 눌려 속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살얼음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한 발만 잘못 내딛는다면, 신정연은 쉽게 와해될 것입니다. 정치권에선 오늘의 만남을 정경유착으로 호도해, 여론몰이를 시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저도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SHJ의 모든 사업을 포함, SHJ아시아본사의 호주 이전을 한국정부가 피부로 느끼게끔 진행한 것입니다. 만약 한국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전 미련없이 이 계획을 실행할 생각입니다.”
경환의 단호한 말에 박화수와 심석우는 긴장했다. 단순히 신정연의 정치능력을 높이기 위한 경환의 퍼포먼스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SHJ아시아본사는 오성그룹과 함께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큰 축으로 성장한 만큼, SHJ가 한국에서의 모든 사업을 접고 이전을 결정한다면 외환위기 이상의 경제적 한파에 한국이 휘청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 형님. 아무리 그래도 SHJ가 한국을 포기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국은 엄연히 형님의 조국 아닙니까?”
심석우가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경환을 만류했지만, 경환의 표정엔 어떠한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심석우는 싸늘한 경환의 눈빛에 오금을 저려야만 했다.
“그러니까 네가 잘하란 말이야. 난 한국보단 SHJ와 내 가족들이 더 중요한 사람이야. 어쭙지않게 조국이니 포기하면 안 된다는 신파극에 더는 흘려줄 눈물이 남아있지 않아. 분명히 말하겠지만,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면, 미련없이 손을 털게 될 거야. 그러니 개인적인 야망을 이룬다는 생각보단,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해 봐야 할 거야.”
“형님은 제가 아직도 예전의 심석우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저도 머리가 있는 놈입니다. 여기 박 대표님이나 SHJ시큐리티를 통해 저를 관리하고 있다는 것쯤은 예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형님의 뜻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 이룰 생각도 없습니다. 단지 박 대표님에게 넘겨줄 토대를 잘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심, 심 의원님.”
박화수가 놀란 눈으로 심석우를 바라봤다. 일류대를 졸업하고 정치 물을 먹어서인지, 심석우의 머리는 아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심석우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보다는 진정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SHJ시큐리티를 통해 심석우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받고 있었던 경환은 심석우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야.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줄 때에는 나도 큰 용기를 냈다는 것은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거야. 내 기대가 헛되지 않게 자네가 잘하리라 믿어.”
“회장님, 제가 정치판에 남으면서 저에게 약속했던 것을 받아야겠습니다.”
“드려야지요. 박 의원님껜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오늘 이 자리는 심석우보단 박화수를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정치판에 밀어 넣고, SHJ의 지분까지 강압적으로 매각하게 한 것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미안한 일이었다. 박화수가 정치판에 남는 조건으로 제시한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경환은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보잉과 추진하고 있는 전투기 사업이 곧 테스트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년에 시작하는 3차 FX사업은 보잉과 록히드 마틴의 싸움이 되겠지만, KFX(한국형 전투기) 사업은 이번 정권이 KDI(개발연구원)를 통해 ‘타당성 없음’으로 결론 내려, 좌초위기에 놓였습니다. SHJ가 보잉과의 합작으로 전투기 개발에 대한 기술을 확보했으니, ADD(국방과학연수소)를 통해 지지부진한 KFX 사업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리고 막혀있는 미사일 사거리 제한을 풀어 주십시오. 이것이 제 조건입니다.”
“허, 이거 참. 어려운 조건으로 제 발을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드시는군요. 좋습니다. 박 의원님에게 약속한 거니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단, 내년 총선과 대선에 승리해야만, 제 약속은 지켜지게 될 겁니다. 불만 없으시지요?”
개발비 6조 원, 양산비 11조 원, 총 사업비 17조 원으로 책정, 2002년 확정된 KFX 사업은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수백 대 규모의 미디엄급 국산 전투기를 개발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국제정세와 정치논리에 휘말리며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었다. 경환이 보잉과의 합작으로 전투기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단순히 한국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 우주개발과 엮어 미래형 비행체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박화수는 그런 경환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박화수는 단순히 SHJ를 한국에 묶어두려는 것이 아닌, SHJ와 한국을 묶어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얘기를 마쳤으니 나가서 식사라도 합시다. 아까 커피를 가져다주는 정아의 눈초리가 아주 예사롭지 않더군요. 아주 작정을 하고 덤빌 기세라서, 빨리 나가 그동안 못했던 오빠 노릇, 외삼촌 노릇 좀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하긴 집사람이 벼르긴 했습니다. 형님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저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집사람이거든요. 벌은 형님 혼자 받으시고, 저와 박 대표님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급한 일도 없는 데 왜?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회포 좀 풀려고 했더니만.”
“이 방문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으니, 너무 오래 머물면 의혹이 깊어집니다. 대선에 승리해 청와대로 모시겠습니다.”
경환은 심석우의 의견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서둘러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한 경환은 정치 놀이의 희생양이라고 느끼는 정아의 따가운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며 정아를 피해 급히 조카들을 안아 들었다.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서산을 방문하고 돌아온 심석우가 신정연 당사 기자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심 의원님, 그동안 SHJ와의 반목이 정치적 쇼라는 여야 의원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경환 회장과는 군대 동기이면서도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다 보니, 그런 의견이 있는 줄 압니다. 저는 밤마다 눈물짓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내의 마음을 병을 회복시키기 위해 서산을 방문했지만, 이경환 회장과의 만남은 철저히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입장에서 의견을 교환했을 뿐입니다.”
심석우의 옆을 지키는 박화수는 기자들을 성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었다. 국민들의 시선이 심석우와 신정연에 쏠리는 이상으로 언론은 신정연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신정연을 입에 가시처럼 여기며, 각자의 입맛대로 여론을 몰아가려 했지만, SHJ와 오성그룹이 튼튼히 뒤를 받치고 있어 점차 신정연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도 늘어가고 있었다.
“SHJ가 호주로 이전한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견을 교환하셨습니까?”
“그런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이경환 회장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결정은 SHJ의 미래를 위한 준비작업이기에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을 뿐입니다.”
기자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SHJ아시아본사의 이전이 경환을 통해 사실로 드러난 만큼, 한국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계산하며 빠르게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기자들의 반응을 살핀 심석우가 말을 이었다.
“저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SHJ의 이전을 재고할 것을 건의했고, 2013년까지 이전 문제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아 냈습니다. 또한, SHJ가 추진하는 몇 가지 사업에 한국의 참여를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내야만 했다. 어설프게 자랑만 늘어놨다간 오히려 언론과 정치권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말을 끝낸 심석우는 뜸이 들기를 기다렸다.
“어떤 사업을 말씀하시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 세 가지 사업입니다. 하나는 SHJ유니버스의 우주 호텔 프로젝트에 들어갈 모듈제작에 한국기업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다른 하나는 SHJ에너지와 합작으로 북해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한국에 공급하는 것을 협의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는 SHJ는 보잉과 합작으로 전투기 제작에 대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지부진한 KFX 사업에 SHJ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고 이경환 회장의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 냈습니다.”
“긍정적인 검토나 협의를 하겠다는 것이지 뭐하나 확실하게 결정된 건 없지 않나요?”
기자의 질문에 주위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창하고 장황한 심석우의 설명에는 뭔가 확실히 끊고 맺는 게 없었다. 사업은 모두 한국에 반드시 필요한 굵직했지만, 결론은 나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심석우는 예상했던 질문이란 듯이 굳게 닫은 입을 다시 열었다.
“SHJ가 제 뒤를 봐준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려온 사람입니다. SHJ는 철저히 이익을 취하는 민간기업입니다. 저는 이번 서해 2함대에 기증한 이지스함 2척에 대한 시행을 SHJ에 주고 이런 합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저는 정치가이지 사업가는 아닙니다. 또한, 정부나 기업이 추진하는 사업에 영향력을 줄 만한 여건도 되질 못 합니다. 이후의 일은 응당히 정부나 기업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저는 뒤에서 이 사업이 성공하게끔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에,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준비된 발언이긴 했지만, 심석우는 강한 어조로 국민들을 설득해 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를 내포하는 심석우의 발언은 기자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대선 주자로 자신을 부각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정부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SHJ의 문제를 신정연과 심석우가 물꼬를 텄다는 것은, 정부와 관련 부서의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나게 만든 효과와 함께, 공을 다시 정부와 여당에 던짐으로써 총선에 사용할 이슈를 남겨 놓았다.
“심 의원이 이젠 정치인다운 모습을 보여주네요.”
“박화수 의원의 힘이 컸다고 봅니다.”
식사하는 동안 경환은 정아에게 시달리며 제대로 밥을 입에 넣지도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고 정아는 심석우를 사탕발림해 정치에 입문을 시켰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라는 말로 경환은 압박했다. 종일 정아에게 시달린 경환은 머리도 식힐 겸, 잭의 사무실을 찾아 심석우의 기자회견을 같이 시청하고 있었다.
“오성그룹과 대현중공업과는 내일 모임을 하기로 하셨다죠?”
“네, 회장님. 신정연의 창당에 오성과 대현, 대후의 지원이 있었던 만큼, 우리도 보상해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오성과는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 사업 참여를 협의하고 대현중공업과는 이지스함 건조, 대후그룹과는 우주 호텔 모듈 제작과 대체에너지 참여를 협의할 예정입니다.”
“우리도 이젠 협력을 통해 사업을 안정시켜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오성과 대현, 대후를 파트너로 삼은 건 좋은 판단이라고 봅니다. 본격적으로 신정연에 힘을 실어 주도록 하세요. 모든 사업은 총선의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확실하게 못을 박으셔야 합니다.”
“박화수 의원에겐 정보 동향 보고서를 꾸준히 보내고 있습니다. 총선과 대선 결과에 따라 사업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잭이 건네는 소주를 마시던 경환은 울려대는 전화기의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액정으로 뜨는 정아의 이름을 확인한 경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배터리를 분리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