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다시 사는 인생 - 246
9월을 지나면서 SHJ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경환의 해외방문 일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호주와 중국, 한국을 거쳐 SHJ타운이 건설 중인 케냐와 터키를 방문 후, 독일과 노르웨이, 영국을 마지막으로 하는 총 18일간의 일정으로 SHJ 창업이래 가장 많은 국가를 단시간에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SHJ타운 건설이 핵 원전 사고로 인해 지지부진한 일본이 빠지고 SHJ와는 큰 관련이 없는 영국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간의 시선은 워싱턴포스트의 또 다른 기사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SHJ테크놀러지에서 개발한 1,024큐빗의 아테나-1이라는 양자컴퓨터의 출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그것이었는데,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D-WAVE SYSTEM이 선보인 양자컴퓨터가 그 성능을 놓고 갑론을박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SHJ의 양자컴퓨터가 어떤 성능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은 갈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기사는 SHJ유니버스와 SHJ매니지먼트를 주사업자로 하는 총 사업비 8백억 불 규모의 저궤도 우주호텔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2015년부터 건설을 시작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사업계획은 우주 여행시대를 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우주를 여행하고 싶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어 기사가 보도된 후부터 문의가 끊임없이 쇄도하고 있었다. NASA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에는 골드만삭스가 250억 불을 투자하는 MOU를 체결했다는 소식과 함께, 미국을 선두로 노르웨이와 독일, 영국, 러시아의 자본과 기술이 투자된다는 발표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경환의 해외방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쏟아지는 기사는 SHJ가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아테나-1의 제원에 대한 보고를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호주로 출발하기에 앞서 경환은 자신의 해외방문으로 생길 수 있는 경영 공백을 메꾸기 위해 전 계열사 사장을 소집했다. 경환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농담으로 회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고 있었다. 앤의 보고를 마치자 경환은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SHJ테크놀러지도 서서히 진가를 보이는군요. D-WAVE ONE이 출시된 만큼 차별성을 가져야 할 텐데, 아테나-1은 어떤 차이를 가졌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D-WAVE ONE은 양자 CPU에서 처리된 연산결과를 외부의 컴퓨터가 읽는 구조 즉, 일반 워크스테이션에 양자 CPU를 보조연산장치로 달아놓아 양자컴퓨터라 불리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큐빗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합니다. 이와 비교해 아테나-1은 1,024큐빗으로 연산속도를 높였고, SHJ퀄컴과 공동 연구로 파동 양자수를 이용해 전자스핀을 일정하게 유지, 큐빗의 제어시간을 극대화해 아테나-1의 수명을 높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NP-HARD(수학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일반컴퓨터보다 1만 배 빠른 성과를 보였습니다.”
경환은 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앤의 말만 믿는다면 아테나-1은 신기에 가까운 물건이란 결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딘가 부족한 점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좋습니다. 너무 어려운 말을 듣다 보니 귀가 다 멍멍하군요. 그럼 앤의 객관적인 시각으로 아테나-1의 단점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너무 어려운 말은 잠을 동반할 수 있으니, 일반인인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말로 해 주세요.”
“하하하.”
경환의 농담에 여기저기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든 제품과 기술이 완전하다고 경환은 생각하지 않았다. 남의 지식을 비평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자신의 지식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경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비판에 인색하지 않아야 피 말리는 싸움에서 돌파구를 찾고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어찌 보면 앤에게는 가혹한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이미 준비가 된 듯 앤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연산장치에 적용할 알고리즘의 부재와 양자컴퓨터에 맞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주위의 환경에 민감해 엉뚱한 계산 결과가 나온다는 것과 이를 보완하기 위해 냉각설비와 방진, 방음 설비의 부착으로 관리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은 상태에서도 출시를 강행한 이유는 D-WAVE SYSTEM을 의식한 건가요? 그리고 어떤 대책이 있는지 설명해 주세요.”
“회장님 말씀대로 아테나-1의 출시를 서두른 이유도 D-WAVE SYSTEM에 쏠리는 이목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프로그래밍 언어와 알고리즘은 현재 SHJ구글과 함께 작업 중이고 외형 설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D-WAVE와의 차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슈뢰딩거 방정식에 기반을 둔 미시적 운동 분석에 적합한 아테나-2를 2년 안으로 선보일 계획입니다.”
경환은 앤의 답변에 만족감을 보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방안까지 마련한 앤의 노련함에 경환의 이 사업의 성공을 점칠 수 있었다. 가격이 3천만 불로 책정한 이유도 판매 목적이 아닌 D-WAVE SYSTEM으로 쏠리는 관심을 SHJ테크놀러지로 빼 오려는 전략이라는 사실에 경환은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NASA와 보잉, MS, 엑손모빌에서 아테나-1을 선 구매를 하겠다는 의사를 보내와 경환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슈퍼컴퓨터를 대체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지만, 예측과 분석 능력은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고, 아테나-1과 인공지능 연구를 결합하는 방안도 검토하세요. 그리고 SHJ시큐리티와 SHJ유니버스는 아테나-1을 구매해 예측과 분석능력을 높이는 작업을 바로 시행하세요.”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구매신청 품의가 올라온 상태입니다. 아테나-1을 먼저 SHJ시큐리티와 SHJ유니버스에 공급하겠습니다.”
SHJ테크놀러지에 이어 우주호텔 건설과 계획과 관련한 보고가 이어졌다. SHJ유니버스를 맡고 마땅한 수입원이 없어 고민하던 찰스 볼튼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8백억 불이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이 투자되는 사업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에 보고하는 내내 찰스의 몸짓엔 자신감이 넘쳐났다. 현재 건설 중인 ISS(우주정거장) 규모를 능가한다는 것과 국가가 아닌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우주개척을 추진한다는 것을 끝으로 장황한 찰스의 보고는 끝이 났다.
“SHJ유니버스의 프로젝트는 바탕이 중요한 만큼, 시간에 쫓기지 말고 차분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금 계획은 마무리되었습니까?”
“골드만삭스에서 250억 불, 영국과 노르웨이가 20억 불, 독일과 러시아가 10억 불, 총 310억 불을 확보했습니다. 현재 일본과 중국, 한국, 프랑스, 호주 등이 참여 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만큼, 자금 확보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한국의 참여는 당분간 보류시키세요.”
“모듈제작을 위해선 가격과 기술 면에서 한국이 가장 적당하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혹시 다른 이유가 있으신지요?”
투자금의 많은 부분을 SHJ가 부담해야겠지만, 건설 기간만 10년이 걸리는 만큼 투자자금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골드만삭스에서 투자된 돈만 하더라도 이 사업에 투자하더라도 남을 정도였다. 한국을 배제하라는 경환의 지시를 찰스는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황태수와 린다는 경환의 노림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노르웨이산 원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모듈제작을 같이 처리할 계획입니다. 한국정부와 한국기업들과의 협상은 중단하시고, 모듈제작을 중국에서 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세요.”
“알겠습니다. 한국과의 협상을 끊고 중국과 모듈제작에 대해 협의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동안 한국에 관대했던 경환의 변화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한국도 마냥 퍼주는 게 아닌 주고받는 관계로 변해야 한다는 점엔 이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경환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경환은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단지, 한국정부와 기업들과 척을 졌을 뿐이지, 한국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인이란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고 이것은 자식인 정우와 희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정우와 희수는 영어보다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먼저 배웠을 정도였다. 이번 해외방문이 끝나면 한국도 다른 길을 걷게 되길 경환은 간절히 바랄지도 몰랐다.
“SHJ가 성장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경영체계도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번 해외방문을 계기로 그룹 경영의 변화를 실험할 계획입니다. 저는 이번 해외방문 기간에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SHJ시큐리티를 제외한 모든 그룹 경영에서 한발 물러나 있을 생각입니다.”
회의장으로 웅성거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경환의 말이 끝나자, 김혜원을 비롯한 비서실 직원들은 그룹 경영혁신 보고서를 빠르게 돌렸고 회의실 정면에 위치한 대형 스크린으로 그룹개편 안이 나타났다. 계열사 사장들의 놀란 눈치와는 다르게 황태수와 린다는 착잡한 심정으로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SHJ그룹은 SHJ자금부문과 SHJ플랜트부문, SHJ무선통신부문, SHJ-IT부문, SHJ미래사업부문 이렇게 다섯으로 분리하고 각 부문은 회장 체제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룹의 총 경영은 황태수 부회장이 맡게 될 것이고, 자금부문은 SHJ홀딩스의 린다 쿡 사장을 회장으로 승진해 운영됩니다. 이어서 플랜트부문은 SHJ엔지니어링의 타케우치 코이치 사장을 회장으로 승진하고, 무선통신부문은 SHJ퀄컴의 어윈 제이콥스, IT부문은 SHJ구글의 래리 페이지, 미래사업부문은 SHJ매니지먼트의 최석현이 회장으로 승진해 맡게 될 것입니다. 승진으로 공석이 되는 계열사 사장은 보고서를 참고하시고, 각 계열사가 다섯 부문으로 분리되는 만큼 혼선을 최소화하시기 바랍니다.”
느닷없이 진행된 그룹개편에 회의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경환의 해외방문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에서 조직개편도 아닌 그룹개편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미 린다를 통해 사전 정지작업은 마무리한 상태였기에 경환은 자신이 휴스턴을 떠나기 전엔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번 그룹개편엔 SHJ시큐리티와 기술연구소가 빠진 이유는 이 두 곳은 그룹 회장 직속으로 앞으로도 자신이 직접 챙길 생각이었다. 수입원이 없고 막대한 투자금이 발생하는 만큼 어디에 끼어들더라도 미운 오리 새끼가 될 확률이 높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천천히 자신의 후대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고, 이런 경환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황태수와 린다 두 사람뿐이었다.
영국 버킹엄셔의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대규모의 유럽식 저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을 들게 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러웠다. 미국의 달러를 발행하는 FRB의 최대 주주이면서도 홍콩 상하이 은행과 런던의 금융중심지인 시티 오브 런던의 주주로 세계 금융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로스차일드 가문의 적자인 제이콥이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회장님, 록펠러 가문과의 합의도 있었는데, 이번 SHJ의 제임스 리의 해외방문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제임스라는 그 친구 참 당돌해. 조용히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도발하라고 대놓고 나올 줄은 몰랐어.”
제이콥은 재밌다는 듯이 슬쩍 웃음을 흘리고는 읽던 책을 손에서 놓았다. 금융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이 투자를 원하지 않는 SHJ에 막힌 후부터 제이콥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빌더버그와 FRB를 통해 어르고 달래봤지만, SHJ는 보란 듯이 정면으로 돌파하고 급기야 제이와 손을 잡고는 가문의 수족인 프레드와 딕 체니까지 제거해 버렸다. 그러나 SHJ가 개발하는 미래기술이 탐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양자컴퓨터와 우주호텔 개발까지 선을 보였습니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그게 오히려 그 친구가 노리는 것일 수도 있어. 제이와 합의를 본 마당에 SHJ는 시기를 두고 요리하는 게 정답이라고 봐. 괜히 제이와의 분란이 다시 생기게 된다면, 우리도 곤란하잖아.”
FRB를 통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획은 제이와의 힘겨루기로 차질을 보이고 있었다. 어렵게 반목을 봉합한 마당에 제이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한 제임스에 위해를 가한다면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많은 형세였다.
“마이클 헤이든이 공작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게. SHJ의 기술이 탐은 나지만, 제이와 합의가 된 만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제임스의 방문에 절대 일을 벌이면 안 되네.”
“알겠습니다. 헨리와 마이클을 최대한 설득하겠습니다. 둘의 감정이 격한 상태라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서가 빠져나가자 제이콥은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지만, 쉽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경환이 바보인지 천재인지 아직은 구분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