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45화 (22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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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45

    경환이 한국과 호주, 독일과 노르웨이의 SHJ타운을 방문한다는 계획이 빠르게 퍼져가면서 각 지사는 물론 해당 국가의 정부기관도 SHJ와의 사업확대를 위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접촉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CIA를 포함한 각국의 정보기관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SHJ시큐리티의 활동도 증가하고 있었다.

    학교의 무지막지한 테스트를 모두 통과한 희수는 10학년이 아닌 12학년 입학이 결정된 상태였다. 정우에 이어 희수까지 월반한다는 소식은 휴스턴을 넘어, 전 미국으로 퍼졌고 170이 넘은 키에 동양적 아름다움을 가진 희수의 사진이 연예지에 오르면서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에게 절망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생활을 하겠다는 희수의 생각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한국의 각 대학은 아직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희수를 잡기 위해 대학 총장까지 나서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빠, 요즘 바쁘다며? 제니퍼가 오빠 얼굴 보기 힘들다고 울상이더라. 하긴, D-WAVE SYSTEM에 뒤통수를 맞았으니 정신이 없긴 하겠네. 분발 좀 해.”

    “누가 뒤통수를 맞았다고 그래? 그런 쓰레기하고 비교할 생각 없어.”

    연구실에서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온 정우는 희수의 놀림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응했다. 지난 5월 D-WAVE SYSTEM은 128큐빗(양자 비트)의 D-WAVE ONE이라는 양자컴퓨터를 천만 불의 가격표를 달고 시장에 공개해, SHJ테크놀러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D-WAVE ONE에 대한 테스트와 논문이 없는 상태에서 SHJ퀄컴을 통해 두 대를 구매해 직접 테스트를 할 수밖에 없었다. 테스트 결과는 기존 슈퍼컴퓨터를 대체할 정도의 성능은 없다는 결론이 나긴 했지만, 첫 시작을 D-WAVE SYSTEM에 뺏겼다는 사실에 정우는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SHJ테크놀러지가 개발하는 1,024큐빗의 시제품이 나오면 상황은 역전되겠지만, 그래도 상용화에 성공한 양자컴퓨터의 시초가 D-WAVE ONE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이 바뀌지는 않잖아.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생각은 좋지만, 분명 SHJ테크놀러지의 전략은 실패했다고 생각해.”

    “그런 쓰레기를 내놓고 상용화에 성공한 최초라고 떠드는 게 더 웃기는 거야.”

    정우는 상처 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D-WAVE ONE을 쓰레기로 비유했지만, 희수의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D-WAVE SYSTEM이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듣고 있었지만, 성능을 떠나서 이렇게 빨리 시제품을 선보일 줄 예상하지 못했었다. 정우의 난감한 표정에 희수의 카운터펀치가 날아들었다.

    “정보가 이래서 중요한 거야. 그리고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거니까. 앤 언니도 느끼고 있겠지만, 올해가 지나기 전에 SHJ테크놀러지의 시제품이 나와 D-WAVE SYSTEM의 싹을 잘라야 해. 그쪽에선 벌써 512큐빗을 준비 중이란 소문이 있으니까.”

    “한번 당한 거로 충분해. 우리 제품이 나오면 D-WAVE뿐만 아니라, 기존의 슈퍼컴퓨터는 모두 우리 제품으로 대체 될 테니까.”

    정우는 자신이 있었다. 슈퍼컴퓨터를 대체하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린 D-WAVE는 성능에 대한 의구심으로 SHJ퀄컴과 록히드마틴 단 두 곳에만 판매가 이뤄졌다. 그러나 기술은 항상 진보하기에, 서둘러 D-WAVE SYSTEM을 추월해야 한다는 희수의 말을 정우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경영에 대한 시각으로 접근하는 희수를 보며, 정우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선수를 뺏기긴 했지만,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해. D-WAVE SYSTEM 덕에 오빠나 SHJ테크놀러지도 두 번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아버지의 유럽방문을 넌 어떻게 생각하니?”

    사소한 일이라도 경환은 식구들과 토론을 통에 서로 교감을 나누는 걸 즐겼지만, 이번 유럽방문에 대한 일은 무슨 이유인지 말을 아끼고 있었다. 특히 해외를 방문할 때면 가족 모두를 동반하거나 적어도 수정만큼은 동행하게 했지만, 일정이 빡빡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번 유럽방문은 가족들의 동반을 계획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희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빤 아마 중대한 결심을 한 거 같아. 록펠러 가문과 손을 잡은 이유도 그렇고, SHJ시큐리티의 비상대기 상황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이유도 어딘가 석연치 않잖아.”

    “중대한 결심이란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난 아버지가 많이 걱정된다.”

    “그건·····. 내가 어떻게 알겠어?”

    정우는 희수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도 평소와 달리 주위를 정리하려는 경환의 모습에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 희수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다 사라진 걸 정우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가 알아서 잘하실 거라고 난 믿어. 아빤 록펠러 가문과 손을 잡은 걸 치욕으로 생각하면서도 SHJ의 현재 상황과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시고 계실 거야. 그러니까 아빠가 받은 치욕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빠와 내가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해.”

    “양자컴퓨터가 시판되고 인공지능 연구가 본 궤도를 찾는다면 SHJ도 변신할 거라고 난 믿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대체에너지 사업이 자리를 잡고 우주개발 사업으로 뒷받침되어야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거야. 이런 걸 보면 아빤 정말 대단한 분이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걸 미리 준비하고 계셨으니까.”

    SHJ테크놀러지 하나만 보고 있는 자신에 비해, SHJ 전체를 살피는 희수의 분별력과 판단력에 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연구가 아닌 경영을 선택했다면, 희수의 분석력을 능가했겠느냐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우의 굳어지는 표정을 힐끗 바라보던 희수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제니퍼가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하던데, 둘이 무슨 일 있어?”

    “무,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는 거야? 대학을 가고 말고는 제니퍼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인데 우리가 간섭할 이유가 없잖아.”

    희수의 눈이 작아지며 의혹의 눈초리로 정우를 바라봤다. 정우는 제니퍼와의 찐했던 첫 키스와 스킨십이 떠올라 자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여졌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제니퍼가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서란 걸 정우도 모르지 않았고 사실 자신도 그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물건을 훔치다 틀긴 사람처럼 정우는 헛기침까지 하며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희수의 매서운 눈초리는 정우를 가만 놔주질 않았다.

    “제니퍼 아직 15살인 거 잊지 마. 둘이 같이 있고 싶은 건 알겠지만, 빌 아저씨도 생각해 줘야지. 대학은 보내고 결혼해도 되잖아.”

    “야! 너도 15살이거든? 가시나가 말하는 것만 보면 아줌마 저리 가라야. 너나 잘해.”

    “아이고 그러세요? 그럼 이 아줌마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리고 둘이 부둥켜안고 있으려면 안 보이는 곳에 가서 좀 해라. 엄마,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뒤로 쓰러지시니까.”

    “야! 이희수 너.”

    정우의 고함에도 희수는 쌩하니 정우의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정우는 돌아선 희수의 쓸쓸한 눈빛을 미쳐 발견할 수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털면서 나오는 경환에게 수정이 사발에 담긴 시커먼 한약을 건네주었다. 쓴 한약이 입에 맞지 않는 경환이 인상을 써봤지만,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수정의 강압에 경환은 코를 막고 한약을 단숨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스테미너를 걱정해야 할 나이는 아직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수정은 요새 들어 경환의 체력을 걱정하며 한국과 일본, 중국지사를 통해 한약재를 구하고 있었다. 바쁜 지사직원들을 이런 일에 동원하지 말라고 몇 번 주의를 시켰지만, 수정은 이 일만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여보, 많이 피곤해 보여요. 일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 걱정이 많네요.”

    “내가 그렇게 보였어? 나 아직 밤일도 거뜬하다고 생각했는데, 여자가 40을 넘으면 활활 타오른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봐. 하긴 최석현 사장은 케이티가 샤워하는 소리만 들려도 잠든 척을 한다는데, 난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이는 못하는 소리가 없어.”

    빈 약사발을 건네받은 수정이 눈을 흘기며 경환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경환은 아픈 시늉을 하면서도 수정을 감싸고는 가볍게 입맞춤을 건넸다. 20년 넘게 자신의 곁을 지켜주며 집안의 대소사를 일일이 챙긴 수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공은 신기루에 불과했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은 SHJ타운을 넘어 휴스턴과 텍사스 주 정부에서 진행하는 복지프로그램에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사람도 수정이었다. 하루나로 인해 잠시 마음이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수정은 경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줘. 같이 세계여행이나 하자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돈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돈이 인생 전부는 아니지. 그렇지만 나를 바라보는 20만 명이 넘는 직원들과 정우와 희수가 있잖아. 이 문제만 해결하면 크루즈 선박이라도 만들어서 자기한테 선물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줘.”

    “크루즈요? 말만 들어도 좋네요.”

    그동안 말로만 그친 적이 없다는 걸 수정도 모르지 않았지만, 경환이 일을 손에서 놓고 한가하게 세계여행을 다닐 형편이 못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도 자신만을 바라봐 준 경환이 수정은 고마웠다. 그러나 경환의 얼굴 한편에 그늘을 발견한 수정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여보, SHJ시큐리티의 경호원도 많아지고, 제가 진행하는 복지프로그램도 참가하지 못하는데, 무슨 일 있는 거죠? 그리고 저도 유럽방문에 동행하고 싶어요.”

    “그냥 의례적인 수준이야. 외부활동은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 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경환은 수정의 유럽방문 동행 요청에 답을 회피했다. 위험이 존재하는 이번 방문에 가족을 노출한다는 건 볏짚을 짊어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었기에 수정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경환은 대답을 회피하고 수정을 안아주는 거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여자의 감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했다. 경환의 품을 벗어난 수정이 반강제로 경환을 소파에 앉히고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하고 산 지가 20년이에요. 눈빛만 봐도 당신이 뭘 원하는지, 뭘 생각하는지, 난 느낄 수 있어요. 이번 방문 위험한 건가요?”

    “SHJ가 커지고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니 위험은 항상 존재하잖아. 그걸 막기 위해 SHJ시큐리티가 있는 거고. 호주와 한국을 거쳐 유럽까지 여유 있는 일정을 짤 수가 없었어.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 사이로 이동해야 해서 강행군이 될 거야. 가뜩이나 몸도 약한 자기가 소화할 일정이 아니라서 그런 거야.”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요?”

    “당연하지. 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 일정을 줄이기 위해 잠도 전용기 안에서 해결할 생각인데. 자기가 옆에 없으면 잠도 잘 못 자는 거 자기도 알잖아.”

    장황한 설명이 오히려 수정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걸 경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은 경환을 몰아세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동행해 경환의 일에 지장을 주거나 경환의 불안감을 높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밀려오는 불안함에 수정은 떨어졌던 경환의 품을 파고들었다.

    “알았어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 믿을게요. 그렇지만,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견디기 힘들 거예요.”

    “걱정하지 마. 활활 타오르는 자기 혼자 놔둘 생각 없으니까. 자기 몸을 보면 누가 애 둘 낳은 아줌마라고 하겠어?”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나이트가운 속으로 훤히 비치는 수정의 몸매는 경환을 아직도 아찔하게 만들었다. 경환의 손이 수정의 나이트가운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볼륨 있는 몸을 쓰다듬었다. 풍만한 수정의 젖가슴에서 경환의 손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행복을 경환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삶은 경환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전생에서 쌓았던 경험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고, 오로지 감만이 남아 근근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경환의 머릿속엔 유럽방문이 무사히 마치고 남은 인생을 수정과 자신을 위해 쓰고 싶었다.

    “매제를 보니까 늦둥이에 푹 빠져 살던데, 오늘 우리도 늦둥이 한번 볼까?”

    “크루즈 선박을 만들어 세계여행 시켜준다는 사람이 셋째를 가지자는 소리나 나와요? 좀 있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 들을 수도 있어요.”

    정우와 제니퍼의 관계가 수정의 귀에도 들어간 듯했다. 경환도 더는 정우와 제니퍼의 관계를 떨어트릴 생각이 없었다. 빌의 마지막 한 수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환은 제니퍼라면 기꺼이 당해줄 생각이었다. 경환의 입술이 수정의 입술을 덮치며 둘의 뜨거운 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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