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다시 사는 인생 - 244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조지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백악관 입성을 시도했던 딕 체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워싱턴 정계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70세의 고령인 상태에서 무리한 운동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진단이 나왔고, 일부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자는 의견은 시신을 욕보이지 않겠다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경환은 딕 체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황태수가 이끄는 조문단을 파견했고, 가족들이 추진하는 딕 체니 재단설립에 천만 불을 기부해 딕 체니가 관리하던 정치 인맥에 눈도장을 찍었다.
뉴욕 미드타운의 중심에 위치한 록펠러센터는 19개의 고층빌딩으로 이뤄진 복합단지로 록펠러플라자 56층은 록펠러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록펠러 재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00년 록펠러프라자를 포함 9개의 건물을 매각하며 록펠러 가문의 자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촌,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집니다.”
“오, 제이. 네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만나는 것도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록펠러 가문의 수장이 데이비드란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실상은 골드만삭스를 통해 JP모건과 록펠러 재단의 운영까지 제이로 넘어오면서 가문의 권력은 서서히 제이에게도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권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골드만삭스가 피해를 피해갔던 반면 JP모건이 막대한 손해를 입으면서 JP모건의 운영권은 자연스럽게 제이에게 넘어갔고 데이비드의 추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위에선 우리가 심각한 자금위기를 겪는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렇겠지. 가문의 상징인 록펠러센터까지 매각하고 지금 이곳도 임차비를 내고 사용하는 형편이니까. 대중의 눈을 속일 필요도 있다고 본다.”
제이는 반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수하게 번지는 음모론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의 가문이 있었다. 가문의 영향력이 금융과 석유, 정부기관에 손을 뻗치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음모에 음모가 꼬리를 물고 다니는 건 여전히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자금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기에 대중의 눈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라도 가문의 상징인 록펠러센터의 매각은 현명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삼촌과의 오랜 반목을 끝내고 싶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습니까? 내년 정계를 은퇴할 생각입니다. 이젠 가문의 일에 전념하고 싶기도 하고요.”
데이비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30년 동안 제이와의 갈등으로 인한 집안싸움에 수없는 소모전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300명이 넘는 가문의 일원들이 제이를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는 건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권력과 가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건 90세를 훨씬 넘긴 데이비드로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프레드 톰슨에 이어 딕 체니까지도 제거되었더구나. 이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
“제거라니요? 자살과 심장마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유럽과도 연을 맺고 있어 온전히 삼촌의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데이비드도 제이의 말엔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었다. FRB와 빌더버그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는 하지만, 두 곳은 자신의 가문보다는 유럽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었다. 유럽 가문의 수장인 제이콥과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자신과 비교해 제이는 공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프레드와 딕이 자신보다 유럽과 가까운 사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마이클 헤이든이 몸을 사리고 있다는 소식이 있더구나. 다음은 마이클인 게냐?”
“전 삼촌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CIA가 예전과 달리 변했다는 건 분명 마이클 헤이든의 책임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존 매케인이 알면 허탈했겠지만, NSA와 CIA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NSA에 대한 입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만, CIA에 대한 입김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데이비드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 난 우리 가문을 지키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너와 반목을 했다고는 하지만, 위기 상황에선 가문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점엔 변함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네가 SHJ를 쓰고 버릴 칼로 이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보는 제임스 리란 인간은 여전히 칼을 숨기고 있고, 언젠가는 가문에 위협이 될 존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구나.”
“쓰고 버린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주인을 물지 않는 충실한 사냥개로 키워볼 생각입니다. 물론 제임스 본인이야 사냥개가 아닌 같이 사냥하러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요.”
데이비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이는 경환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딕 체니와 CIA의 공작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이유도 시간이 지나면 SHJ가 가문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지금 가문을 위해서라도 빠른 결정이 필요했다.
“SHJ는 항상 한발 앞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지금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집행하고 있기도 하고. 난 그 개발이 성공할 것으로 본다. 그때가 된다면 사냥개가 주인을 물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거다.”
평소와 달리 차분한 데이비드의 말에 제이는 눈을 반짝였다. 평소의 성격이라면 자신을 문전박대했거나 권력에 강한 집착을 보였을 거지만, 지금의 데이비드는 힘 빠진 노인네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삼촌의 충고 잊지 않겠습니다. 워런 버핏과 골드만삭스를 통해 SHJ에 발을 담근 이상, 천천히 지분을 넓히며 통제권에 들어오게 할 생각입니다. 저와의 반목을 중단하실 생각이신가요?”
“많은 고민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가문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네가 한 가지 조건을 수락한다면, 가문에 대한 모든 관리와 운영을 네게 넘길 생각이다.”
30년을 넘긴 지루한 반목을 접는 순간이었다. 제이는 데이비드의 조건이 과하지 않다면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과한 조건이라도 들어줘야만 했다. 가문의 분란이 오래된 만큼 이젠 미래를 대비하며 뭉칠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저도 가문의 미래를 위해 이젠 뜻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흠, 내 조건은 마이클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SHJ가 헨리와 벤을 건드리지 말라는 거네. 유럽 애들과는 대결보단 타협이 필요한 시기기 때문이야. 이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닌 가문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네.”
제이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경환과 손을 잡으면서 암묵적인 동의를 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최대한 설득을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유럽 애들은 SHJ를 분해해 필요한 걸 손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삼촌도 아시겠지만, SHJ의 기술이 유럽에 들어간다면 우리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 있습니다. SHJ가 우리의 통제권에 들어오기 전까지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를 만나기 전, 제이콥과 입을 맞춘 상태였다. 자신의 권력을 제이에게 넘겨준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가문은 계속 나아가야만 했다. 모든 걸 내려놓은 데이비드는 자신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허탈함이 밀려오며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경환의 집무실의 내부는 비서실 직원들도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황태수, 린다와 함께 SHJ시큐리티의 카일과 알, 케빈까지 모인 자리는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와의 전화를 마친 경환이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이유를 묻지는 못했다.
“제이가 여기서 중단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눈을 감은 상태로 독백처럼 내뱉는 경환의 말에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프레드와 딕의 처리방식이 제이가 알고 있다는 거보다는 SHJ에 대한 간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심증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우리에 대한 증거는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 작전이 노출되지 않을 거란 자신감에 카일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 작전을 위해 투자된 시간과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대변하듯 카일은 넥타이까지 풀어헤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회장님, 심증이 물증을 만드는 거라 봅니다. 그렇지만, FRB와 빌더버그가 중심이 돼, 법무부 독점금지국을 움직이려 한다는 정보가 있는 만큼,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마이클 헤이든이 몸을 사리는 것도 수상하고요.”
SHJ의 자금을 담당하는 린다가 경제계로 퍼지는 SHJ에 대한 반독점법 제재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우려 섞인 목소리로 전달했다. SHJ에 대한 기소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은 없다손 치더라도 정부와 지루한 법적 싸움을 이어간다면 지쳐 떨어져 나가는 건 SHJ일 수밖에 없다는 게 모인 사람들의 고민이었다.
“저는 그런 움직임도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제이의 간섭이 오히려 더 걱정입니다. 한번 들어주기 시작하면 요구는 점점 더 커지고 결국엔 요구가 아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른 시각으로 사태를 분석하는 황태수의 말에도 경환은 반응이 없었다. FRB와 빌더버그는 SHJ가 IT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 왔었다. 딕 체니와 앨 고어와의 대결구도도 사실은 그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스위스 모임의 주도자가 헨리 키신저와 벤 버냉키로 밝혀지면서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외나무다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제이의 간섭도 분명 경환에겐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고민을 끝낸 경환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제이는 제가 체스판의 말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따라 줄 생각입니다.”
“회, 회장님. 그건 제이가 원하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겁니다. 그러나 헨리와 벤은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판을 우리가 짭시다. 헨리와 벤의 뒤에 제이콥이 있는 만큼, 제이와 제이콥이 힘을 합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경환의 말처럼 록펠러 가문을 통합한 제이가 제이콥과 손이라도 잡는다면 SHJ는 좋은 먹잇감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수백 조 불을 움직이는 두 가문이 SHJ를 먹자고 달려든다면 SHJ는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게 경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중단했던 유럽방문을 다시 검토하도록 하세요.”
“회장님!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이미 CIA와 MI6, BND가 모종의 공작을 꾸미고 있다고 확인된 만큼, 회장님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너무 높습니다. 절대 불가합니다.”
“그걸 노리는 겁니다. 제이가 이런 요청을 했다는 건, 이미 제이콥과 일정 부분 합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둘 사이를 갈라놓고 우리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절대 회장님께서 유럽을 방문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카일을 시작으로 경환의 유럽방문 계획을 모두 반대하고 나섰지만, 경환의 얼굴은 오히려 담담하기만 했다. 자신의 손으로 이루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경환은 자신의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게 SHJ를 위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판단 내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덤으로 사는 인생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오더라도 적어도 SHJ와 가족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자신이 안고 가야만 했다.
“제가 죽기라도 한 답니까? SHJ시큐리티의 능력을 전 믿습니다. 이 기회는 오히려 우리가 남는 장사라고 봅니다. 이익이 눈앞에 있는데 그걸 모른척한다면 그건 장사꾼이 아니지요. 일정을 다시 짜 보세요.”
“회, 회장님!”
경환의 확고한 결심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제안처럼 둘을 상대하는 거보단 하나씩 각개전투를 벌이는 게 SHJ에 유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의식한 경환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케빈, 조용하게 내가 유럽방문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세요. 그럼 몸을 사리던 마이클 헤이든도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제이와 제이콥도 주판알을 두들기기 바빠질 테고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금부터 감시체계를 강화하겠습니다.”
“린다는 그룹 운영을 위기에 빠르게 대처하는 방안으로 검토해서 보고해 주세요.”
자신을 단순히 미끼로 던지려는 경환의 계획에 린다는 울컥하며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평소와 달리 긴장된 얼굴로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경영진들의 모습에 김혜원을 포함한 비서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혜원은 집무실에 들어섰지만,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경환의 모습에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