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43화 (220/264)

#243

다시 사는 인생 - 243

대통령 비서실장의 추문에 의한 자살로 존 매케인의 레임덕은 그 속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담당하던 필드 요원 전체가 사망함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우며 배후를 찾기 위해 내각정보조사실의 자원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지만, 워낙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고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아 내각정보조사실은 한마디로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또한, 믿었던 CIA 일본지부에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원활하게 교환되던 정보가 차단된 상태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진을 동반한 쓰나미가 일본 북동부를 덮친 데 이어,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로 이어지자 내각정보조사실의 움직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SHJ 일본지사는 5백만 불의 지원금과 함께 위로를 일본정부에 전달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MOU가 체결된 SHJ타운에 대한 본 계약은 위험성 해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들어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고 있었다. 일본 내각에선 SHJ가 방사능 위험을 들어 SHJ타운 건설계획을 전면 취소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SHJ타운이 취소되었을 시, 외국자본이 급속도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분석에 전담팀까지 구성, SHJ를 설득하고 있었다.

SHJ타운에서 두문불출하던 경환이 휴스턴 외곽의 한 고급저택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장 차림의 경환이 저택에 들어서자, 준비되어있었는지 집사가 빠르게 경환을 서재로 안내했다. 오랫동안 경환을 짓누르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 경환의 얼굴은 경색되어 있었지만, 서재 문이 열리는 순간 경환은 급히 분노를 삭이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하, 이게 누구 신가? 자네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듣고 있었다네. 제임스.”

“저도 딕의 소식은 듣고 있었습니다. 그새 10년이 훨씬 넘었군요. 건강해 보여 안심했습니다.”

아직도 네오콘의 실질적인 수장역할을 하고 있던 딕 체니는 과장된 동작으로 경환을 맞이했고 경환도 딕이 내미는 악수를 거절하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자면 오랜 친구 이상으로 보였겠지만, 서로 잡아먹으려는 듯 매섭게 빛나는 두 사람의 눈매는 예전과는 달라 있었다. 딕의 손짓을 따라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경환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딕이 건넨 술잔을 받아들었다.

“좋은 술이군요. 오래전 딕의 선물을 받고도 제가 준비되질 않아 항상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빚을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보니, 오늘 이 자리가 제게는 참 의미가 깊습니다.”

경환이 술의 향을 맡기 위해 시선을 술잔으로 돌릴 때에도 딕의 눈매는 경환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도발적인 경환의 말에 딕의 입 주위가 씰룩거렸다. 그러나 딕의 정치적 연륜이 증명하듯 노련했다.

“하하하, 그런가? 어떤 선물을 줄지 기대가 되는군. 제이와 손을 잡아서 그런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네.”

“저도 딕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좋습니다. 텍사스 군수복합업체들과는 얘기가 잘 되셨나요? SHJ기술연구소와 합작을 원하는 업체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예전처럼 무턱대고 기술을 달라고 덤벼서는 안 될 겁니다.”

경환과 제이의 합작은 딕을 긴장시킬 정도로 뜻밖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석유와 함께 미국의 금융과 방산업체는 제이와 데이비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경환과 제이의 거래는 서서히 그 효과를 보고 있었다. 엑손모빌과 SHJ구글의 지분교환과 SHJ에너지의 지분 5%를 골드만삭스에서 인수하면서 SHJ는 노르웨이에서 생산한 원유와 셰일가스의 판로를 자연스럽게 확보하게 되었고, 제이의 입김에 SHJ기술연구소와 손을 잡으려는 방산업체들이 물밑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관리하던 방산업체들이 이탈 조짐을 보이자, 딕은 서둘러 텍사스로 향해야만 했다. 그러나 텍사스 지역의 방산업체들은 이미 경환의 손때가 묻었다는 걸 딕은 알지 못했다.

“제임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군. 제이가 자넬 언제까지 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이도 손대지 못하는 곳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딕의 충고는 항상 고맙게 받고 있습니다. 뭔가 오해를 하시나 본데, 저보다는 딕 자신을 먼저 걱정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제가 많이 크긴 했나 봅니다.”

경환의 날카로움이 점점 딕을 자극하고 있었다. 경환은 딕을 쳐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경환은 군수복합업체와 딕의 사이에 틈을 만드는 거부터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는 걸 딕은 알지 못했다. 웃음기 거둔 눈빛으로 경환을 쏘아붙였지만, 경환은 태연하게 딕의 눈빛을 흘려보내 버렸다.

“딕, 이거 압니까? 보잉과 합작으로 개발 중인 전투기와 SHJ기술연구소에서 개발하고 있는 대함미사일에 펜타곤이 많은 관심을 보이더군요. 특히, 항모 잡는 대함 탄도탄으로 펜타곤을 긴장시키고 있는 중국의 동풍-21D보다 월등하다는 평가를 했다는군요. 아직 줄이 있으니 딕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한국 국방부와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SHJ기술연구소는 설계까지 마쳤다는 소리가 있더군. 한국은 미사일 사거리 제한조치로 묶여있는 나라인 건 자네도 모르지 않겠지?”

경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썩어도 준치라고 펜타곤과 협의하는 내용은 딕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물론 그건 경환이 바라던 바였다. 딕의 말처럼 개발 중인 대함미사일은 사거리가 1,500KM 이상으로 300KM라는 사거리 제한에 묶여있는 한국은 개발하고도 손에 쥘 수 없는 처지였다.

“사거리 제한, 그거 중요하죠. 그래서 패키지로 탄도미사일 요격시스템을 같이 개발하고 있다는 건 들어 보셨나요? 아마 개발이 완료되면 패트리어트 체제가 바뀔 수도 있을 겁니다. 펜타곤도 사거리를 좀 높여주는 선에서 요격시스템과 거래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뭐 천천히 진행할 생각입니다.”

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SHJ기술연구소가 요격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는 건 자신도 듣지 못했었고 더욱이 최고의 비밀을 요하는 무기개발 상황을 당당하게 자신에게 밝히는 경환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 딕을 향해 경환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랬습니까? 저를 향한 총구라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가족을 건드린 건 용서가 안 되네요.”

“내가 가족을 건드렸다니,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군.”

경환의 한쪽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퍼붓는 소나기를 잠시 피해가려는 딕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경환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술로 타는 목을 축였다.

“뭐 좋습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에서 사라졌나 봅니다. 에릭 프린스와 니키 헤이거란 인물에 대해 부정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네요. 딕, 항상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제가 딕이 가지고 있는 자리에 올라설 때까지는요.”

“지켜보겠네. 그리고 자네도 항상 건강해야 하네. 사람 일이라는 게 내일을 모르는 게 아닌가.”

딕은 미소를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경환의 싸늘한 눈빛이 자신을 옭아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전과 달리 자신 앞에서도 거침없이 몰아치는 경환의 태도에 딕의 주먹에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SHJ시큐리티의 공작으로 백악관 입성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앨 고어를 통해 전해 들었을 때, 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돈줄로만 하찮게 생각했던 경환이 자신의 목줄을 잡아챘다는 사실에 딕은 주위의 만류에도 경환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을 죽이는 거로 복수를 대신할 생각이었다. 니키 헤이거를 회유하는데 쏟아부은 돈도 아깝게 생각하질 않았다.

계획이 실패하면서 딕의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SHJ시큐리티의 보안능력만 키워준 꼴이었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원하던 세력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얻은 것보단 잃어가는 게 많아지면서 멀어지는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몸부림치던 자신 앞에 당당하게 나타난 경환은 꺼져가는 복수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웃고 있는 경환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경환이 한 수 빨랐다.

“딕,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십니까? 혹시 문밖에 대기 중인 용병들이라도 부르고 싶은 건가요? 제가 오늘 명줄이 끊어지나 봅니다. 하하하.”

“입 함부로 놀리지 말게. 여긴 SHJ타운이 아니란 걸 잊었나 보군.”

딕의 입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경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시 키우고 SHJ를 예전처럼 돈줄로 만들려던 계획은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지금은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피 말리는 싸움이었다. 제이와 손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경환이 자신의 우위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딕은 경환의 도발은 단순한 엄포에 지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다시 폈다.

“제가 마지막 제안을 할까 합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조용히 말년을 보낸다면 과거의 일은 접겠습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를 먼저 받아야겠지만요. 결정은 딕이 하십시오.”

“자네야말로 제이가 던져주는 떡이나 받아먹으며 조용히 지내야 할 걸세. 너무 나대다가 명줄이 짧아진 사람을 내가 많이 봤거든. 내 마지막 충고네.”

“하하하, 아직 정정한 딕의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다 편안해집니다. 그럼 전 밖의 용병들이 무서워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오래 사십시오.”

“뭐야?! 당장 나가, 이 자식아!”

경환의 비아냥에 딕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경환은 술잔을 들어 남아있던 술을 천천히 바닥에 버린 후에 딕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천천히 서재를 빠져나왔다. 딕의 고함에 무장한 경호원이 뛰어들었지만, 총을 뽑을 수는 없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레이저 불빛이 정확히 자신들의 가슴과 딕의 이마를 향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의 도발이 있는 후, 딕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해 경환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 했지만, 쉽게 그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제이와의 합의를 통해 딕의 배경이 될 만한 연줄을 이미 끊어 놓은 경환의 전략에 딕은 속수무책이었다. 믿었던 석유카르텔과 군수복합업체들도 제이의 눈치를 보며 서서히 발을 뺄 궁리를 하는 형편이었다.

“회장님, 기온 차가 심한데 오늘은 조깅을 건네 뛰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어. 제임스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지만, 단지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해. 다시 내 손에 기회가 돌아올 때까진 운동을 게을리할 순 없지. 준비하게.”

비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딕은 모자까지 눌러쓰고 저택을 나섰다. 나이에 비해 정력적인 활동을 보이는 것도 운동을 거르지 않아서라고 생각한 딕은 가벼운 스트레칭에 이어 저택 주위의 숲을 향해 서서히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회장님, 오늘 저녁 모임에 앤더슨 상원 의원이 참석하겠다는 통보를 했습니다.“

“그래? 그거 잘 됐군. 프레드의 자살에 SHJ가 개입했다는 정황은 아직 인가?”

“어디에서도 SHJ의 개입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백악관을 뚫고 들어올 실력이라면 NSA나 SHJ시큐리티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아니면 그 둘의 합작품일 수도 있고요.”

비서와 나란히 하며 뛰고 있는 딕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앤더슨 의원의 참석에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의회조사국을 움직일 힘이 있는 앤더슨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프레드의 자살과 함께 SHJ기술연구소의 비밀연구를 조사할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딕은 뛰는 속도를 높여 비서와 경호원을 앞서 가기 시작했다.

‘타킷 이동 중. 거리 900M, 시야 확보 200M 전. 작전 승인 요청.’

“작전 승인. 엄폐 유지.”

SHJ시큐리티 작전실로 위성에서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화면이 전송되고 있었다. 작전을 승인하는 카일의 지휘를 경환은 무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는 SHJ기술연구소에서 개발된 새로운 병기를 처음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시야 확보. 작전 개시 30초 전.’

화면으로 빠르게 이동하던 세 사람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며 한 사람을 두 사람이 에워싸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작전 성공. 철수 승인 요청.’

“철수 승인. 무사 귀환 바람.”

작전 종료를 확인한 카일이 헤드셋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이번 작전은 SHJ시큐리티에서도 극소수만이 참여할 정도로 비밀유지에 만전을 기한 작전이었다. 이번 작전이 외부로 새나간다면 SHJ는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위험스러운 작전이었지만, 경환을 비롯한 누구도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았다. 위성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경환을 향해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회장님, 작전 성공입니다. 누구도 딕의 자연사를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고했습니다.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시고 작전에 참여한 팀원들은 잠시 이동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사용된 무기는 철저히 비밀에 부치십시오.”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호주로 이미 발령을 낸 상태입니다.”

경환이 딕을 처단하는 데 사용한 무기는 NSA와의 사이버전을 통해 수집한 음파를 이용한 무기로 SHJ기술연구소는 초 저음파탄과 초 고음파탄을 개발을 완료했고 이번 작전엔 흔적이 남지 않는 초 고음파탄을 사용했다. 펜타곤에서 개발한 음파 무기에 한참 앞선 기술인만큼 최대한 숨겨야만 했다.

“카일, 숨돌릴 틈이 없습니다. 별도의 지시가 없더라도 계획대로 진행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딕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속도를 맞추겠습니다.”

자신의 명령으로 한 생명이 사라졌음에도 경환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키지 못하면 뺏기는 처절한 싸움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많은 죽음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해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경환은 기꺼이 그 짐을 짊어질 생각이었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흘린 경환이 작전실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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