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42화 (219/264)

#242

다시 사는 인생 - 242

경환이 워싱턴 방문을 끝내고 돌아온 후, SHJ구글에 대한 IPO 신청은 단순히 검토만 한 사항이라는 공식발표가 SHJ홀딩스를 통해 확인되면서, 월가와 투자회사들은 입맛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 SHJ구글과 엑손모빌과의 지분교환과 SHJ구글, SHJ에너지, SHJ테크놀러지와 골드만삭스와의 투자협정이 체결되면서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총 천억 불에 상당하는 거래규모도 놀라웠지만, 기업공개에 소극적인 SHJ가 빗장을 풀었다는 점에서 시장은 이번 거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선 기업 규모와 비교해 정치적 영향력이 부족한 SHJ가 골드만삭스와 손을 잡으면서 정치적 로비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자원시장에 발을 들여놓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도 있었지만, 그런 의혹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테러의 증가와 풀리지 않는 경제로 인해 이미 레임덕이 시작되었다는 여론의 질타가 거듭되면서 백악관은 초긴장 상태였다. 급기야 공화당 일부 의원들까지 등을 돌리고 있어 백악관이 추진하는 복지와 경제 정책은 민주당이 아닌 내부의 복병에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럽게 안 풀리는군. 제임스, 이 박쥐 같은 자식이 제이와 손을 잡다니. 정말 예상을 할 수 없는 인간이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과음을 했는지 프레드 톰슨은 깨질 듯이 욱신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누르면서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아스피린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통령의 일정을 살피던 프레드는 빽빽한 일정에 도저히 짬을 낼 수 없을 거 같았다. 긴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마시려 자리를 일어나려는 순간, 책상에 놓인 조그만 카드가 시선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카드를 집어든 프레드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어떤 미친 자식이!’

보안이라면 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철저한 백악관에 정체불명의 카드가 자신에게 배달되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카드 속의 내용이 프레드를 거칠게 만들었다.

‘ENJOY!'

즐기라는 짤막한 내용에서 오는 중압감이 프레드의 전신을 감싸 휘돌았다. 백악관 깊숙한 곳까지 메시지를 전달할 정도라면 웃고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한 마음에 전화기를 잡은 프레드는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실장님, 인터넷을 확인하셔야겠습니다. 개인 블로그를 통해 실장님에 대한 루머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무슨 루머가 퍼진다는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 보란 말이야!”

“저, 그게.”

비서실 직원은 프레드의 재촉에도 진땀만 흘릴 뿐,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프레드는 급히 구글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써 엔터키를 눌렀다.

“도대체 이, 이게 뭐야?”

“기자들까지 냄새를 맡고 사실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일단, 조작된 루머라고 해명하고는 있지만, 대책을 세워야 할 거 같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조작하던 프레드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선명한 자신의 모습이 사진과 동영상에 드러나 있었다. 도심 외곽에 위치한 콘도형 호텔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자신의 욕정을 해소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곳이기도 했다.

“이, 이건 조작이야. 모략이라고.”

전라의 여성들과 몸을 섞는 사진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코카인을 흡입한 적은 없었다. 사진과 동영상엔 유리 탁자에 코를 밀어 코카인을 흡입하는 장면을 프레드는 인정할 수 없었다. 순간, 매춘부가 건네준 술을 마신 후부터 기억이 조각나 있다는 걸 깨달은 프레드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프레드! 잠시 나 좀 보지.”

상기된 존 매케인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프레드는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는지 머리를 굴려봐도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존 매케인의 불호령에도 프레드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뚜벅뚜벅.’

신주쿠 가부키초를 걷던 곤스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을 비쳤다. 50세가 넘도록 앞만 보고 달려왔다. 정보원이란 힘든 삶은 가족까지 속여야 했지만, 국가에 충성한다는 사명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승진을 마다하고 필드 요원으로 남은 이유도 자신의 힘으로 일본의 화려했던 시절을 되살리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행동반경이 감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행과 감시가 몸에 익었지만, 지금의 느낌은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어디에서도 자신이 감시되고 있다는 걸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곤스케를 긴장하게 했다.

‘오늘은 끝장을 보자고.’

잠시 쇼윈도에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곤스케는 가부키초의 환락가 깊숙이 걸음을 옮겼다. CCTV의 위치는 이미 머릿속에 암기되어 있었다. 곤스케의 행동반경은 철저히 CCTV의 반경을 계산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 자신이 다니던 동선에서 벗어나 복잡한 가부키초를 택한 이유도 상대의 허점을 유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야! 저기 있는 애들 한국여자들이겠지? 몸매 죽이는데?”

“저것들이 겁도 없이 돌아다니는데, 어때? 오늘 한번 작업 좀 해 볼까?”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국 여성들을 희롱하려는 모습에 곤스케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들이 힘이 약해 나라를 빼앗겼던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본을 향해 징징거리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국을 일본의 통제권에 놓아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없었지만, 일본땅에서 한국여성을 희롱하는 양아치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양아치들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겠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양아치들을 지나쳐 발걸음을 옮기던 곤스케의 등으로 무엇인가가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어이, 곤스케. 죄는 저 세상에 가서 빌라고.”

“너, 너.”

곤스케 허파가 조여오는 느낌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역감시하던 부하들이 무슨 이유인지 나타나질 않았다. 양아치라 생각했던 사내의 부축에 곤스케는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바닥에 쓰러질 수 없었다.

“부하들 찾나 본데. 자네보다 먼저 보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뭘 잘못했는지는 죽으면서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CCTV에 대한 기대도 버려야 할 거야.”

후미진 골목길에 몸을 눕힌 곤스케는 자신이 죽어가는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대북 작전을 실패한 거 외엔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워싱턴에서 돌아온 경환은 그룹경영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황태수와 린다는 부족함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제이와의 합작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SHJ시큐리티도 본격적으로 작전반경을 넓히며 그동안 안으로 축척 시킨 역량을 밖으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엔 경환이 있었다.

“결과 보고서와 진행 중인 작전 내용입니다.”

카일이 건넨 서류를 보는 경환의 모습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뒷배를 준비했으니, 그동안 당했던 계산서를 돌려줄 차례였다.

“프레드 이 친구 간덩어리가 큰 친구는 아니었군. 막 시작했을 뿐인데 말이야.”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지만, 자살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자택에서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 프레드의 비참한 사진을 보는 경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람이 죽었다는 아쉬움보다는 프레드를 위한 준비된 계획을 다 실행하기도 전에 죽어버린 프레드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 경환은 스위스 비밀모임에서 찍힌 프레드의 사진과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레드의 사진을 교차하며 이를 갈았다.

“에릭에 대한 복수로는 시원치 않네요.”

에릭을 모임에 주선하고 협박을 했던 프레드의 자살로도 경환은 만족할 수 없었다. 철저히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프레드는 그런 경환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 일찍 떠나버렸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하게 내뿜는 경환의 살기에 카일의 몸이 움찔거렸다.

“일본도 긴장을 했겠지요?”

“회장님의 방북을 사주하고 실행했던 대북 협상팀 전원을 사살했습니다. 현재 내각정보조사실 전체에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배후를 놓고 혼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작전을 수행한 직원들은 모두 귀환했습니까?”

“철저히 준비된 작전이었습니다. 직원들 모두 일본을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2차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직원들이 대기 중입니다.”

일본 전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CIA에 협조해 자신의 암살을 모의한 내각정보조사실만큼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수족이 잘린 머리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이 모두 비명횡사한 마당에 이번 작전을 계획했던 우두머리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 뻔했다. 경환은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길 원했다.

“계산은 확실하게 할 생각입니다.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이자도 듬뿍 안겨줘야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딕 체니에 대한 작전은 잠깐 보류하세요.”

“이미 직원들이 대기 중입니다. 혹시 딕 체니에 대한 작전을 포기하실 생각이십니까?”

경환은 자신에게 첫 번째 굴욕감을 안기고 수정을 암살하려 했던 딕 체니를 잊지 않고 있었다. 카일은 최우선으로 딕 체니에 대한 작전을 실행했고 결정만 남은 상태에서 경환의 보류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하는 경환의 성격상 딕 체니를 용서한다는 건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위해 영혼까지 판 놈인데, 딕 체니를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작전을 실행하기 전, 딕 체니의 면상이라도 한번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작전은 그 이후에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곧, 텍사스를 방문할 예정이니 딕 체니와의 만남을 주선해 놓겠습니다.”

카일은 영혼까지 팔았다는 경환의 말을 극도의 분노를 표현하는 비유법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딕 체니에 대한 작전을 준비하면서 카일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력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더라도 네오콘을 움직이는 딕 체니는 SHJ시큐리티엔 부담되는 상대였다. 경환의 만남으로 작전이 노출될 위험이 증폭되겠지만, 카일은 경환의 지시를 거절할 수 없었다.

“제가 알아야 할 특이사항이라도 있습니까?”

“두 가지 일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는 프레드의 자살 이후, 우리에 대한 CIA의 활동이 극히 줄어든 점입니다. 심증적으로나마 이번 일의 배후에 우리가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던 마이클 헤이든이 두문불출하는 이유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독일정부와 노르웨이 왕실이 계속해서 회장님의 방문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중하게 거절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명목은 일정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은 보안과 경호의 문제가 있다는 분석에 따른 거절이었습니다. 일정 조정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경환은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하루나가 유럽 사장으로 부임한 후, 유럽 본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독일 기업들과의 합작으로 SHJ유니버스와 SHJ테크놀러지가 부족한 기술을 공급하는 창구 기능을 수행했고, STATOIL과의 합작으로 이미 유전 개발사업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유럽 본사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도 아니 하루나를 지원하기 위해서도 유럽 방문을 더는 미룰 수 없었지만, 시기가 좋지 못했다.

“우선 딕 체니와 마이클 헤이든에 대한 계산이 종료되면, 다시 검토하는 거로 합시다. 그때까진 유럽 방문은 미루세요. 그리고 NSA와 CFR이 지원사격을 해 주기로 했으니, 마이클 헤이든 만큼은 확실히 손을 봐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CIA도 우리에 대한 작전을 필 우려가 있으니 회장님과 경영진들의 경호는 한 단계 급을 올리겠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경환은 카일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사태를 관망할 CIA가 아니란 걸 경환도 느끼고 있었다. 작전 능력만큼은 NSA도 CIA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SHJ시큐리티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CIA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셔야 합니다. 두 번 다시 우리가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이 측에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김상현을 통해 해왔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고급기밀도 상당수 확보한 거 같았습니다.”

“우리가 제이와 손을 잡았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제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말을 바꿔 탈 수도 있으니까요. 언젠간 우리가 제이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반드시.”

칼은 이미 빼 들었다. 달라는 거 다 주고 SHJ의 생명줄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결정 하나에 15만 명을 넘어 20만 명에 가까운 직원들의 생명줄이 걸려 있었다. 하수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맞서 동등한 자격을 얻을 것인지 잔인한 선택을 강요받았고 경환은 후자를 선택했다. 후회할 생각은 없었다. 경환은 자신이 당한 거 이상으로 돌려줄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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