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41화 (218/264)
  • #241

    다시 사는 인생 - 241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워싱턴의 한 고풍스러운 유럽풍 건물 입구로 SUV의 호위를 받는 리무진 한 대가 빠르게 정차했다. 리무진의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경환이 차에서 내려, 5층 높이의 건물을 훑어 내렸다. 메트로폴리탄 클럽. 링컨 대통령을 포함,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이 회원이 될 정도로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클럽이기도 했다. 미국 내 최상위 5%만을 위한 비밀스러운 장소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다른 클럽에 비해 정치색이 강한 클럽이라는 비판에도 회원자격을 얻기 위해 2년 동안 대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클럽의 문이 열리고 턱시도 차림을 한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경환을 향해 빠르게 내려왔다.

    “제임스 리 회장님 되십니까?”

    “제가 제임스 리입니다. 상원 의원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송하지만, 회장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의 입장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전화는 사용이 금지되며, 식사 시엔 양복 상의를 벗지 말아 주십시오.”

    “기본은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안내를 서둘러 주십시오.”

    관리인의 주절거리는 설명에 경환은 미간을 급히 좁혔다. 동양인에게 문호가 개방된 클럽이긴 했지만, 관리인의 위풍당당한 모습엔 은근히 동양인을 조롱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클럽에 가입할 생각도 없었고, 두 번 다시 마주 볼 생각이 없었던 경환의 대답은 싸늘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외로 경환의 매서운 시선이 자신의 눈에 꽂히는 걸 느낀 관리인은 급히 시선을 돌려 경환을 클럽 안으로 인도했다.

    겉모습과는 달리 클럽의 내부는 화려했다. 탁자와 의자, 심지어 벽에 걸린 그림까지도 어디 하나 흠 잡을 곳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관리인을 따라 2층 계단을 오르는 중 경환은 어딘가 모를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붐벼야 할 클럽의 내부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을 정도로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똑, 똑.’

    “들어가십시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관리인의 말을 뒤로하고 열린 문 사이로 경환이 몸을 밀어 넣었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 경환은 5년이란 시간을 준비하며 기다려왔다. 이번 만남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SHJ의 앞날은 험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생각을 했음에도 긴장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에 경환은 얼굴에 미소를 띠였다.

    “반갑습니다. 상원 의원님. 제임스라고 불러 주십시오.”

    “반갑네, 제임스. 자네도 제이라고 불러 주게.”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악수를 건넨 경환은 70세를 넘긴 노인의 손에 자신감이 배어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과의 만남은 잘 끝내고 온 건가?”

    “만남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대북 특사를 맡아 준 것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의 초청이었다는 건 제이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긴장해서 그런지 목이 많이 타네요. 좋은 술이 있으면 한잔 주십시오.”

    넉살 좋게 자신의 선공을 비껴가는 모습에 제이는 웃음으로 화답하며 와인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경환에게 건넸다. 술잔을 건네받은 경환은 빠르게 주도권을 잡아 올 것인지, 아니면 제이에게 주도권을 넘겨 빈틈을 파고들 것인지를 놓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는 경환의 고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 데이비드 킴의 일은 내가 먼저 사과를 하겠네. 내 뜻과는 다르게 진행된 일이었다네.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라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덕분에 보안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아군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적군이 될 것인지 경환에겐 이번 만남이 SHJ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지만, 제이에겐 그런 절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 사이로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제이는 간혹 경환의 얼굴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그 침묵을 제이가 깨고 나섰다.

    “난 자네가 퀄컴을 인수할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네. 단지, 투자 대상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자넨 내 기대를 넘어 SHJ구글로 IT를 점령하더니, SHJ시큐리티의 막강한 화력으로 중국과 NSA와의 사이버전을 승리로 이끌더군. 지금은 대체에너지와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개발까지 추진하며 우리 가문의 뒷목을 간지럽게 하고 있지 않나. 내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된 걸세.”

    “제이의 고민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 인수와 워런 버핏과의 주식교환, 보잉과의 기술합작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저를 파트너로 인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내가 자네를 파트너로 인정했다고? 자네가 날 웃게 하는군.”

    제이의 웃음이 경환의 모멸감을 자극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경환은 상처 난 자존심을 숨기기 위해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제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사실 워싱턴포스트의 인수는 제이의 사인이 없었다면 자금으로 무장한 SHJ라는 신생기업이 넘볼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경환은 워싱턴포스트의 인수 추진을 제이의 의사타진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굳이 SHJ가 언론에 진출할 의사가 있었다면, 지분구조가 복잡한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기보단 SHJ구글을 이용한 전자신문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었다. 한참을 웃던 제이는 인자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네의 경영철학이 참 독특하더군. 한 푼의 차입금도 없이 SHJ라는 거대한 성을 구축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네. 무선통신에 이어 IT, 에너지와 인공지능까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자네의 모습을 보면 미래를 알거나 적어도 경험해 본 사람이란 생각이 자꾸 든단 말이야. 설명해 줄 수 있나?”

    “제 배경은 이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일푼으로 시작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지금 이 자리에 왔습니다. 막강한 가문을 가진 제이와는 다른 삶을 살다 보니,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말씀하신 연구들도 제가 시작한 건 아닙니다. 단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연구를 제가 이어갈 뿐이지요. 그리고 남의 돈으로 성공한다 해도, 결국은 내 밥그릇을 빼앗기게 될 뿐이지요. 제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하하하, 그런가? 내가 오해를 했군.”

    경환의 보이지 않는 도발에도 제이의 평정심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환의 평정심이 한계를 드러내며 폭발 일보 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리를 조아리더라도 파트너의 자격을 얻고 싶은 거지, 비굴하게 제이의 구두를 핥을 생각은 경환의 머리엔 들어있지 않았다. 경환은 상황을 바꿀 필요를 느꼈다.

    “제이와 삼촌인 데이비드와의 불협화음에 SHJ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번 에릭 슈미트의 문제를 포함해서요. 저를 파트너로 보고 있지 않으시다면, 제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전 제이가 두는 체스판의 말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제이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솟았다. 그러나 상원 의원이란 타이틀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제이는 너무도 빨리 평정심을 되찾고 역으로 경환을 몰아세우는 전략으로 급히 방향을 전환했다.

    “내 입장에선 괘씸한 질문이기도 하군. 그럼 좋네. 나와 삼촌의 불협화음은 어떻게 정리될 거 같은가? 자네의 대답을 듣고 나도 결정을 내리겠네.”

    제이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부터 경환은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이의 질문에 사탕발림할 수도 있었지만, 경환은 정공을 선택해야만 했다. 평범한 대답으로는 제이와의 파트너 관계는 이뤄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술로 입을 축인 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건 정부로 시작해 부시까진 분명 데이비드의 권위에 제이는 뒷방 신세였을 겁니다. 그러나 골드만삭스의 운영권이 제이에게 떨어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죠. 영국의 J아론사를 인수해 금속 거래에 뛰어들고, ICE(인터콘티넨털 익스체인지)를 설립해 석유거래를 통해 골드만삭스는 데이비드가 운영하는 시티그룹을 뒤로 밀어버리면서 제이의 독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데이비드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지요. 분명 상황은 제이에게 유리합니다. 그러나 가문의 일은 가문에서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데이비드도 제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겁니다. 반목의 시대는 지났고 두 사람의 타협이 진행되겠죠. 결국, 데이비드나 제이가 원하는 길은 같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데이비드의 반격이 자네에게 막혔다는 것이 빠졌군.”

    경환은 슬쩍 미소를 보이는 것으로 답을 회피했다. 제이의 파상적인 공세에 데이비드가 준비한 반격은 조지 부시의 대권 승리였다. 조지 부시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기획해 역전을 노리던 데이비드는 SHJ란 복병을 맞아 허무하게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단지 딕 체니의 압력에서 벗어날 생각뿐이었던 경환은 이런 복잡한 내막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싫든 좋든 경환의 행동은 제이를 도와준 꼴이었다.

    “재밌는 대답이었네. 제임스. 그럼 SHJ를 통제권에 넣으려는 시도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군.”

    “겨우 파악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당한 만큼 갚아줄 생각이지만, 혼자 힘으론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더군요. 마침 제이와도 분란이 있으니, 한 손 거들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제이의 울타리가 필요했지만, 경환은 비굴함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등한 자격을 원한다는 경환의 우회적인 표현에 제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난 말보단 행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세. 자네가 내 파트너가 되기 위해선 뭔가 보여줘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나도 공짜로 뭘 바랄 생각은 없네.”

    겨우 밥이 익기 시작했다. 자신의 대에선 경환이 바라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울분을 참고서라도 이 상황을 감수해야만 후일을 노릴 수 있었다. 경환의 머릿속엔 우공이산과 와신상담이란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자신의 수모는 후대가 갚아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골드만삭스를 통해 SHJ구글의 지분 5%를 300억 불에 투자받고 5%는 엑손모빌과 지분교환 할 계획입니다.”

    “거기에 더해 SHJ에너지의 지분 5% 250억 불과 SHJ테크놀러지의 지분 10% 100억 불, 총 650억 불을 투자하고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럼 저도 조건을 추가하겠습니다. 보잉과의 전투기 합작사업에 파리가 끼지 않게 해 주시고, SHJ시큐리티가 활동을 개시할 때, 공권력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해 주십시오.”

    “NSA는 내 입김이 작용하지만, CIA나 FRB는 상대적으로 우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다는 건 자네도 알 거야. 그러나 CFR(외교문제협의회)과 NSA를 통해 근거리 지원은 가능할 걸세. 그리고 한가지 더해 한국의 대선에 개입하려는 자네를 모른 척하겠네. 이 정도면 자네도 만족할 만한 거래라고 보는데.”

    제이의 의중이 SHJ에너지와 SHJ테크놀러지에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제이의 조건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투자자금 역시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서로가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만큼 나쁜 거래는 아니었지만, 경환은 절치부심의 울분을 속으로 삭이며 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오늘따라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제임스, 파트너 입장에서 충고하자면, 자네도 최종적으론 타협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가지를 쳐낼 수는 있어도 깊은 뿌리는 파낼 수 없다는 말을 명심해서 준비하게.”

    “충고 감사합니다. 제이도 데이비드와의 타협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거래를 끝낸 경환은 맥이 풀렸다. 제이가 건네는 술을 받아든 경환은 제이와 술잔을 부딪칠 생각도 잊은 채, 급히 입에 들이 부어버렸다. 이번 거래가 어떤 결과로 다가오게 될지는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이와의 사적인 대화를 나눈 경환은 어둠이 완전히 깔린 후, 메트로폴리탄 클럽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제이는 2년의 대기시간이 필요한 회원등록 심사도 무시한 채, 경환의 이름으로 된 회원카드를 건네주었지만, 경환은 두 번 다시 클럽을 찾을 생각이 없었다.

    “회장님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아닙니다. 냄새나는 워싱턴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네요. 미안하지만, 전용기가 준비되는 대로 휴스턴으로 돌아가고 싶군요.”

    경환의 부탁을 받은 알과 김혜원은 급히 전용기를 준비시키며 공항으로 방향을 바꿔 차량을 이동시켰다.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경환의 몸은 서서히 무너져갔지만, 쉽게 잠들 수는 없었다.

    “회장님, 두 시간 내로 전용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미안하지만, 담배 한 대 피워야겠습니다.”

    평소 김혜원과 동행하는 자리에선 차량에서 담배를 삼가던 경환도 오늘만큼은 니코틴의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김혜원이 건넨 담배에 불을 붙인 경환은 차창 밖으로 빠져나가는 담배 연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강하다고만 생각했던 경환의 쓸쓸한 표정에 김혜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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