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다시 사는 인생 - 240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린 SHJ에 대한 특종은 월가뿐만 아니라,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투자가들을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업공개에 보수적이던 SHJ가 SHJ구글의 IPO를 검토 중이란 소식은 시가총액 7천억 불을 넘어선 SHJ퀄컴에 이어 두 번째 잭팟이 될 거란 분석과 함께 기사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언론사와 투자회사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그러나 SHJ는 IPO에 대한 어떠한 논평도 발표하지 않고 있어 세간의 궁금증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병을 이유로 사임한 에릭 슈미트의 후임으로 래리 페이지가 유력하다는 보도와 호주 핵융합실험로 사업에 중국의 참여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은 IPO 기사에 묻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죠.”
‘잘 처신하기 바랍니다. 웃는 얼굴로 제임스와 술 한잔 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워런 버핏과의 통화를 마친 경환은 수화기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경환의 집무실에 모인 황태수와 린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내부에 기생하던 고름을 도려냈다고는 하지만, 가족처럼 여기던 에릭의 일은 모두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누구도 에릭의 일에 대해 입에 담기를 거부할 정도였다.
“회장님이 무리해서라도 워런 버핏과 주식을 교환하려던 이유가 이것이었군요.”
워런과의 통화를 지켜보던 린다의 표정은 풀리지 않던 수학문제를 푼 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일방적인 주식교환에 자금계획이 틀어져 몇 달을 고생했던 린다는 그제야 워런의 술수에 경환이 당한 것이 아니라, 주식교환은 경환의 치밀한 계획하에 주도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언질을 주지 않아 서운한 감정이 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경환의 심정이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경환은 어색한 미소를 띠며 큰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존 해밀턴, 아니 니키 헤이거와 앨 고어의 배후가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니키 헤이거의 배신에 상황이 꼬이긴 했지만,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워런 버핏과의 주식교환은 우리도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방편이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판단하기엔 부족할 거 같습니다.”
“기득권 세력들 사이의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간 정도밖엔 되지 않습니다. SHJ의 사활이 걸린 줄타기를 막 시작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SHJ를 이끌 시간에 끝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후대에선 반드시 그들을 넘어야 합니다.”
경환의 비장함이 두 사람에게도 전달되고 있었다. 경환이 최소 6년 전에 SHJ의 위기를 직감하고 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황태수와 린다는 말문이 막혔다. 황태수는 워런 버핏의 배후에 대해서도 파악을 마친 경환이 무게감이 떨어지는 김상현을 통해 만남을 제의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이 들었다.
“직접 워런 버핏을 통하지 않고 김상현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제 자존심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어찌 되었건 김상현을 이용해 서산을 쑥대밭으로 만든 만큼, 김상현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쪽은 워런 버핏을 통해 답을 전달해 주네요.”
생각했던 이상으로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시작부터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에 경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환은 초조해하진 않았다. 자신의 뒤를 이을 정우와 희수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한가지 자신을 신경 쓰이게 하는 일을 매듭짓고 싶었다.
“에릭은 어떻습니까?”
금기시되어오던 에릭의 얘기가 경환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살핀 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독촉하는 경환의 눈빛을 확인한 황태수가 어렵게 말문을 꺼냈다.
“호주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에릭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너무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에릭은 평생을 죄인처럼 살게 될 겁니다. 자신의 지분 5%도 행사할 수 없고, 호주에 건설한 실버타운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으니까요. 대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두 분이 신경 써 주세요.”
에릭은 SHJ시큐리티의 심문에 협조하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경환은 핵심 경영진을 제외하곤 에릭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으로 에릭의 처벌 수위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황태수와 린다는 강력한 형사처벌을 주장하며 경환을 설득했지만, 경환은 SHJ구글의 성장을 이끈 에릭의 공을 들어 SHJ구글의 지분 5%를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가족과 함께 호주로 보내버리는 결정을 내렸다. 마침 퇴직 사원을 위한 대규모의 실버타운이 호주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표면상으로 에릭의 호주행은 주위의 의구심을 떨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린다가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경환을 거들고 나섰다.
“에릭의 형사처벌은 상대편에서 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에릭의 일이 퍼진다면 우리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테니까요. 적절한 판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합시다. IPO에 대한 반응이 뜨겁던데 준비는 차질없이 되고 있겠죠?”
“내부 준비는 끝냈습니다. SHJ구글의 지분 구조는 래리와 세르게이가 10%씩 가지고 있고 우리사주 5%로 20%까진 시장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예상되는 주가는 2,500불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공개할지 말지는, 제가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상황에 따라 대처를 합시다. 그리고 그룹 경영에 대해선 당분간 두 분께서 지금처럼 이끌어 주십시오.”
SHJ구글의 주식 수를 SHJ퀄컴과 같은 2억 주로 20%만 해도 천억 불에 해당하는 막대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내실을 다져온 SHJ그룹의 자금운용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금액은 되지 못했다. SHJ구글이 공개되면 경영권과는 별개로 자금의 이동에 제약이 걸리는 만큼,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한다면 소문으로 퍼진 IPO를 거둘 생각이었다.
“그동안 숨겨온 SHJ시큐리티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생각이시군요.”
“SHJ시큐리티도 상대편을 제압할 수준은 안됩니다. 단지, 상대편의 피해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가 희생되더라도 후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환의 짤막한 대답에 황태수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2만 명에 육박하는 SHJ시큐리티 인원은 경환의 막대한 지원 속에 정보수집 능력과 전투수행 능력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경환은 상대를 제압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저는 바로 워싱턴으로 출발하겠습니다. SHJ시큐리티는 당분간 비상대기하며 보안수위가 올라갈 것입니다. 존 매케인이 백악관에 앉아 있는 지금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여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밑져야 본전이란 회장님의 신조를 믿고 있겠습니다.”
경환은 슬픈 미소를 남기며, 알과 함께 집무실을 벗어났다. 경환의 집무실에 남겨진 황태수와 린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사지인 줄 알면서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SHJ의 미래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떠나는 경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린다는 울컥하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경환이 자리를 비운 SHJ타운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SHJ구글을 사임한 에릭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호주로 떠났다는 소문에도 큰 동요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온한 SHJ타운과는 달리 SHJ시큐리티는 비상체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정보수집을 분석하는 보안팀은 계속되는 2교대 근무에도 쏟아지는 정보를 분석하느라 직원들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 봐! 빨리 위성사진 가지고 오란 말이야!”
“이라크 사업장에 대한 테러 조짐에 대한 분석은 완료한 거야?!”
분석 요원들의 고함도 쉴새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에 묻히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고된 밤샘 작업이 기다리고 있어서인지 케빈의 충혈된 눈은 가라앉지 않았다.
“케빈, 좀만 참게. SHJ테크놀러지에서 양자컴퓨터 시제품이 나오면 최우선적으로 보안팀에 지급될 걸세.”
“당연히 저희부터 받아야겠죠. 그런데 시제품이 나오려면 일 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제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케빈의 농담에 마땅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카일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미국 정보의 한 축을 담당하는 CIA가 경환에 대한 암살을 부추겼다는 증거를 입수한 이후, SHJ시큐리티는 CIA를 대상으로 피 튀기는 정보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CIA와의 싸움은 SHJ시큐리티로서도 우위를 점한다고 볼 수 없어 카일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MI6와 BND의 움직임은 파악되는 게 없나?”
“유럽은 우리가 아직 열세입니다. 그리고 북한에서의 일이 실패한 후부턴 더욱 철저해진 거 같습니다. SHJ시큐리티 유럽지사의 인원을 증강하고, 모든 자원을 제공하고 있으니 뭔가 걸리긴 걸릴 겁니다. 호주가 백업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되었을 겁니다.”
카일은 어거스트를 영입해 제2의 정보조직을 신설한 경환의 결정이 빛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정보가 분산될 것이 두려워 반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미 호주 SHJ타운은 휴스턴의 백업을 담당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이번 일이 계획대로 마무리된다면 휴스턴에 있는 훈련장을 호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과 호주야 공동사업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회장님을 국빈에 준하는 자격으로 초청했다는 게 꺼림칙해서요. 그것도 두 나라가 상의한 것처럼 일정까지 맞아 떨어지고요.”
“사실 나도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네. 결정은 회장님이 하시는 거지만, 숨어있는 계략을 찾는 건 우리 몫이야. 회장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두 나라의 서버를 다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막을 파헤쳐 보게. 실은, 나도 이 문제 때문에 자네를 찾아온 거야.”
SHJ타운이 완공된 후에도 경환은 유럽을 찾지 않았다. 단지, 핵융합실험로의 합작 사업을 위해 호주를 방문했던 게 전부였다. 독일과 노르웨이는 SHJ와의 신기술에 대한 합작을 추진하겠다는 명분으로 경환의 방문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그건 하루나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다면 당장에라도 불러들일 거 같은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런 경환의 결정을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수 있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죠. 오늘도 집에 들어가긴 글렀네요. 연봉이나 좀 올려주세요.”
“자네가 받는 천만 불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연봉 타령인가? 그 대신 SHJ구글의 1차 방호벽을 뚫은 친구들을 붙여줄 테니까 기다려 봐.”
케빈의 눈이 반짝거렸다. 외부의 사주를 받고 SHJ구글을 해킹하려 했던 해커들을 적발해 반강제적으로 SHJ시큐리티에 입사시켜, 호주에서 일 년 넘게 재교육을 받고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다. 그 친구들이 합류한다면 자기 일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케빈은 카일을 향해 윙크까지 날리며 급히 사라져갔다.
“제임스 리를 태운 전용기가 워싱턴에 도착했다는 보고입니다.”
90세를 언제 넘겼는지도 모를 정도로 노쇠한 노인치고는 정정해 보이는 인물이 비서의 보고에 읽던 책과 함께 돋보기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역시 제이가 움직였다고 봐야겠지?”
“존 매케인의 요청에 의한 방문이라고는 하지만, 회장님의 판단이 맞을 거라고 봅니다.”
세간의 집중된 시선에서 떨어지기 위해 거대한 저택에 은둔하며 두문불출하고 하고 있었지만, 한번 잡은 권력은 쉽게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몸뚱어리를 보며 자신의 생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쉽게 생각했던 SHJ가 경환이라는 인물에 의해 요동칠 줄은 자신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장님, 제임스가 저쪽에 붙는 것을 막아야 할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제이가 제임스를 눈여겨본 건 오래되었어.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다는 증거로 봐야겠지, 그건 제임스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나도 늙었나 보군. SHJ가 이렇게 성장할 줄 전혀 예상을 못 했으니까 말이야.”
“SHJ시큐리티의 정보수집 능력이 상당하긴 하지만, 애들 수준을 겨우 넘은 정도입니다.”
“자네도 감이 둔해졌군. 애들은 빠르게 크는 법이란 걸 잊은 건가?”
노인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SHJ가 제이와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겨우 봉합되었던 세력 판세가 본격적으로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 게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자신의 힘이 어디에 쏠리느냐에 따라 중심추는 크게 움직일 게 뻔했다. 노인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바보 같은 짓을 한 딕 체니와 앨 고어를 용서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딱히 나설 처지가 아니었다.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자고. 제이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도 방향을 잡아야 할 테니까. 제이와 제임스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해 주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유럽 애들의 움직임도 함께 주시하겠습니다.”
노인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사라지는 비서의 뒷모습을 확인한 노인은 돋보기를 끼고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