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다시 사는 인생 - 239
래리는 한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을 손에서 놓은 지도 며칠이 되었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후회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이미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상태란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SHJ시큐리티가 이렇게 손 놓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잡을 기회를 주는 것이든지 아니면 판을 키울 생각이든지.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 래리는 마지막 설득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래리,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야?”
예상하지 못한 세르게이의 출현에 래리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래리의 초점 잃은 눈이 세르게이를 향하자, 세르게이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거야? 부담되니까 너무 자세히 보진 말라고.”
“잘 왔어. 막 너한테 가려던 참이었거든.”
래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세르게이는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의자를 바짝 끌어 래리의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래리, 잘 생각했어. 우린 형제보다도 가까운 친구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버릴 생각이 없어.”
“세르게이, 그건 나도 똑같은 생각이야. 잘못된 것을 바꿀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해. 제임스를 같이 설득해 보자.”
어색한 침묵이 잠시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뭔가 다른 분위기에 서로의 눈만 바라볼 뿐,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세르게이에 의해 어색한 침묵이 깨졌다.
“래리, 잘 들어. 내가 관여하고 있던 신기술에 대한 연구자료가 유출되고 있다는 정황을 발견했어. 그 자료를 너에게 보여준 사람도 나였고. 솔직히 물어보자. 그 자료를 유출한 사람이 너니?”
“무, 무슨 소리야? 난 네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고. 나도 뭐하나 물어보자. 무슨 이유로 앤에게 정우의 연구노트를 보여달라고 한 거야? 그리고 제임스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은 건 무슨 이유였냐고?”
“난 그저 SHJ테크놀러지의 기술도 유출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널 도와주기 위해서. 네가 유출에 관여했는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 난 제임스에 불만 없어.”
“허, 야 이 자식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당황스러워하는 세르게이를 세차게 끌어안은 래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하늘에 감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힌 숨을 풀기 위해 세르게이가 캑캑거리기 시작할 때, 두 사람의 방으로 카일이 급히 들어섰다. 부둥켜안고 있는 묘한 분위기에 카일은 연신 헛기침만 해대고 있었다.
“흠, 흠. 두 사람 모두 절 따라와야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겨우 주위를 살필 수 있었다. SHJ시큐리티의 보안요원들이 사방에 퍼져 있었고 일부는 무장까지 한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SHJ구글이 설립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불안감이 래리와 세르게이를 엄습해 오기 시작하며 카일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래리, 세르게이 오랜만이야. 둘이 포옹까지 하는 사이라며?”
“제임스, 아니 회장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카일을 따라 에릭의 집무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에릭의 자리에 경환이 앉아 있는 모습이 의아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경환이 건네는 농담을 전처럼 농담으로 응대할 수 없었다. 에릭의 책상은 보안요원들의 손에 깨끗이 비워진 상태였고 자리를 지켜야 할 에릭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SHJ테크놀러지가 분사하기 전, SHJ구글이 인수한 샤프트와 메카 로보틱스의 휴머노이드 로봇과 관련된 기술 일부와 SHJ구글의 재무제표, 3D 프린팅 기술과 SHJ유니버스의 유니버스 1호의 설계도 일부가 유출되었다는 것을 자네들은 알고 있었다지? 이게 아주 섭섭한데?”
“제임스, 그, 그건.”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구었다. 친구의 허물을 감싸고 설득하기 위해 시일을 너무 소비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이미 유출 사실을 자신들보다 먼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믿었던 자네들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회장님, 그럼 에릭이?”
급한 성격의 세르게이는 에릭의 이름을 거론했지만, 설마 SHJ구글의 최고 경영자인 에릭이 그랬을 리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놀라기는 래리도 마찬가지였다. SHJ구글은 에릭의 경영철학이 녹아든 곳이라는 덴, 누구도 사족을 달 수 없을 정도로 에릭이 쏟아부은 애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에릭이 이번 유출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변호사도 요청하지 않고 SHJ시큐리티의 심문을 받아들인 걸 보면 에릭도 자의에 의해 그런 일을 벌인 건 아닐 거로 생각할 뿐이야. 에릭이라면 고급정보도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았겠어?”
“그, 그럼 에릭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선 조사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결론 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러나 자의가 아니고 유출된 기술이 핵심 기술이 아니라 해도, SHJ구글에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
래리는 경환의 허탈함 속에 묻어나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에릭의 배후 역시 경환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자신들에게 말하지 않을 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당분간 SHJ구글은 래리 자네가 준비되기 전까진, 린다가 잠시 맡게 될 거야. 그렇게 알고 준비해. 두 사람 모두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더는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소문을 막을 수는 없다 해도,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게 신경 쓰고.”
에릭의 책상을 손으로 쓸어내리던 경환이 사무실을 떠났지만, 래리와 세르게이는 멍한 눈으로 서로 바라볼 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세요. 취조가 아닌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SHJ시큐리티 보안팀에 마련된 취조실엔 초췌한 표정의 에릭이 고개를 젖힌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1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하며 어려움을 서로 극복하고 기쁨을 함께 나눴던 에릭을 바라보는 경환의 심정은 그 누구보다도 착잡했다. 일 년 전 에릭의 돌출행동을 보고받았을 때만 해도, 경환은 내부의 권력다툼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수와 린다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에릭이 가장 유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환의 우려는 배신의 아픔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너무 건방졌습니다.”
경환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던 에릭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자신을 끝까지 믿어줬던 경환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에릭은 경환이 건넨 물잔을 잡았던 손을 가늘게 떨었다.
“이유를 묻진 않겠습니다. 단지, 저를 찾지 않았다는 게 섭섭할 뿐입니다.”
“집요한 자들이었습니다.”
“압니다. SHJ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요. 하지만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전 그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에릭이 외부 모임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경환은 막지 않았다. 아니 외부모임을 통해 SHJ의 영향력을 키울 생각에 에릭을 잡지 않았던 이유가 강했다. 그러나 모임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에릭의 자만심은 커져만 갔고, 급기야 환각제에 취한 에릭을 여자 문제로 엮어버렸다. 처음 단순한 부탁에서 시작한 협박은 도를 넘어 SHJ의 주력사업에 대한 기술로 커져만 갔고, 에릭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핵심기술은 최대한 가리면서 자신의 행동이 SHJ시큐리티에 포착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SHJ시큐리티는 첫 행동부터 에릭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환의 지시만 없었다면 이 자리는 일 년 전에 만들어졌어야만 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 욕심의 끝을 보고야 말았네요.”
“에릭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범죄를 용서할 수는 없을 거 같군요. 에릭도 제 심정을 이해하리라 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모든 책임은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단지, 가족들을 부탁합니다.”
“SHJ시큐리티에 최대한 협조해 주세요. 에릭이 가족이란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비한 술수로 자신의 가족을 쓰러트린 대상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SHJ의 힘은 경환의 분노를 수용하기엔 아직 미약할 뿐이었다. 아무리 SHJ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 하더라도 SHJ를 통제권에 넣으려는 자들에 비해선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경환의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라 하더라도, 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기틀은 만들어 놓겠다는 결심이 경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내가 모든 걸 다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었다. 우공이산.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후대가 산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뉴욕의 겨울은 매서웠다. 2월의 끝자락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때마침 쏟아진 폭설에 뉴욕의 교통은 생지옥을 방불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뉴욕의 한복판에 위치한 GE 빌딩의 6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동양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내는 사전에 예약된 자리를 확인하고는 만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맨해튼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 자리를 예약하기 위해 보스의 이름까지 팔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은 그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안 주머니에서 꺼낸 반지를 확인하고는 초조하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프랑스 용병생활에서 습득한 감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허리를 의자에 깊숙이 파묻고 천천히 숫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우측 전방 둘, 후방 하나, 정문 둘. 젠장,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군.’
전해지는 살기는 일반적인 청부업자라고 보기엔 평범하지 않았다. 장소가 노출된 만큼 퇴로도 차단당했다고 봐야만 했다. 자신의 생명보단 곧 10분 후에 도착할 연인의 안위가 염려될 뿐이었다. 자신이 죽는다더라도 5분 안에 해결해야만 했다. 생각을 정리한 사내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순간 굵은 목소리가 뒷목에서 전해졌다.
“어이, 김상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네의 피앙세를 보고 싶다면 말이지.”
“손끝 하나라도 그녀를 건드리면,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이거, 무서워서 오줌까지 지리겠는걸? 천천히 손을 빼서 탁자 위에 올려놔. 그럼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프로는 프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총을 빼 들기도 전에 머리통에 총알이 박힐 거란 걸 김상현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그녀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천천히 손을 빼 탁자 위에 올려놓자, 김상현의 옆에 앉은 사내가 허리춤에 채워진 권총을 회수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내 목숨 하나로 만족해야 할 거야.”
“착각하지 마. 김상현, 아니 데이비드 킴. 네 목숨엔 별로 관심 없거든.”
“후후, 내 한국이름을 아는 걸 보니, SHJ시큐리티가 예전 일을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우리가 그리 쪼잔하다고 생각해?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인데, 네놈을 죽일 마음만 있었다면 이미 5년 전에 넌 죽은 목숨이었어.”
김상현의 인상이 잠시 구겨지더니 이내 평온함을 되찾았다. SHJ시큐리티라면 살아날 구멍은 있어 보였다. 김상현은 장소가 노출된 이유를 머릿속에서 찾고 있었지만, 장소가 노출된 것이 아니라 애당초 SHJ시큐리티의 감시하에 자신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상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SHJ시큐리티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건가 보네.”
“그렇지. 그러니 맘 편히 가지라고. 네가 존 해밀턴 아니 니키 헤이거를 암살했을 때만 해도, 단순하게 입막음을 하기 위한 거로 생각했었거든. 나중에 사실을 알고 나도 많이 놀랐어.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네가 움직였다는 걸 알고 말이야.”
김상현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니키 헤이거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한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키가 딕 체니와 네오콘에 매수되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웠지만, 조직의 명령을 거부할 힘은 자신에겐 없었다. 잠시 옛 기억을 되살리던 김상현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후후, 지금까지 살려준 걸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하나? 날 죽이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내가 들어야 할 얘기가 더 있는 건가?”
“그 자신감 대단히 좋아 보이는군. 우리도 너 같은 피라미를 죽여 손을 더럽히고 싶은 생각은 없어. 네 보스에게 말만 전해주면 돼. 그걸로 예전에 진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라고.”
상처를 입은 자존심에 김상현의 미간이 급히 좁아지며 탁자 위에 놓인 손을 슬쩍 빼려 했지만, 자신의 허리로 느껴지는 굵직한 권총의 무게감에 김상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인데, 난 보스의 얼굴도 볼 수 없는 위치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우리 보스가 네 보스를 만나고 싶다는 말만 전해. 아마 네 보스도 싫다고 하진 않을 테니까. 왜 너를 우리가 선택했는지 궁금해? 우리도 상징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는 게 답이야. 그리고 누가 알아? 이 일로 네가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될지. 아! 오늘 프러포즈할 모양인데, 성공하길 바랄게.”
자리를 벗어나면서도 감시를 늦추지 않는 모습에, 한 수 아래로 생각했던 SHJ시큐리티에 대한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김상현은 깨닫고 있었다. SHJ시큐리티 요원들이 시야에서 벗어나자, 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자신의 피앙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