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8화 (215/264)

#238

다시 사는 인생 - 238

“하하하, 이 선생을 활약상은 익히 들었습니다. 평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뇌출혈의 영향인지 김정일은 한쪽 다리를 미세하게 절고 있었다. 검버섯이 확연한 얼굴은 언제 쓰러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병색이 확연해 보였다. 북한의 최고 실력자인 김정일도 흐르는 세월은 잡을 수 없는 듯 보였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방위원장님.”

“자, 앉읍시다. 이 선생과 할 말이 많습니다.”

호탕하게 웃는 김정일과 반대로 경환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이 자리가 경환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전인 경환을 배려하려는지 푸짐한 요리가 식탁 위에 가득했다. 그러나 경환은 김정일이 건네는 술잔을 제외하고는 요리에 손을 가져가 대지 않았다.

“우리 장성택 부위원장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는 경환에게 김정일의 선공이 들어왔다. 미사여구를 동원해 이 자리를 모면할 것인지를 경환은 결정해야만 했다.

“저는 존 매케인 대통령을 대신해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SHJ그룹 일을 논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방위원장님.”

“하하하, 그렇지요. 그러나 이 선생이 방북했다 해서 막힌 조미관계가 풀리지 않는다는 건, 이 선생 본인이 잘 아시겠지요. 자, 우리 한잔 마십시다.”

김정일의 잔에 가득 채워진 것이 술인지 알 수 없었지만, 김정일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잔을 입으로 가져댄 경환은 술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에도 김정일의 여유로움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경환도 자신의 방북으로 막힌 북한의 정세를 풀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경환은 찝찝함을 풀기 위해 김정일의 말을 곱씹어 봤지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찝찝함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성장한 이경환 선생에 대해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합니다. 18년이란 짧은 시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지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딱히 말해 줄 내용도 없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북한의 식량 사정은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이었고, 배급이 끊긴 북한 주민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자신의 성공기를 알려준다 해도, 3대 세습을 준비 중인 북한 체제는 조금도 변하지 않으리란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SHJ의 성장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SHJ그룹의 대북투자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경환에겐 지루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다.

“국방위원장님,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국제사회에 북측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측의 주장을 안에서만 떠드는 거보단, 밖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 존 매케인 대통령의 친서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환은 봉인된 친서를 꺼내 김정일에 건네주었다. 김정일과의 면담을 끝내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했지만, 친서를 받아든 김정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흐르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SHJ시큐리티의 능력은 이미 우리도 알고 있으니 이 선생도 이 친서의 내용은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내 말이 맞나요?”

“봉인된 서류라 저는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호탕한 김정일의 웃음 뒤에 날카로운 흐르는 김정일의 눈빛을 경환은 놓치지 않았다. 김정일의 말대로 이미 친서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북한이 핵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중단된 6자 회담이 재개된다면, 미국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철회와 식량 지원에 최대한 성의를 보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김정일의 태연함과 여유로움이 단지 독재자가 자신의 안방에서 보이는 허세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설명이 부족해 보였다. 경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이 선생, 이번 평양 방문이 우리의 초청으로 이뤄진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엔 복잡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곳곳에서 발생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위원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경환의 불안한 예감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정일은 존 매케인의 친서는 거들떠보지 않고 서류철을 경환에게 건네주었다. 서류철을 넘기는 경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반동 새끼들의 책략은 이미 분쇄한 상태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서류를 믿고 안 믿고는 이 선생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경환은 말을 아꼈다. 어디까지 김정일을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었지만, 북한에서 조작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사실적이었다. 경환은 묘한 미소와 함께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류의 사실 여부는 꼭 가려내겠습니다. 만약 이 서류가 사실이라면 제가 위원장님께 큰 빚을 지게 된 셈이군요. 계산은 나중에 치르겠습니다.”

“하하하, 뭐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선생이 굳이 성의를 보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자, 술이나 한잔 더 합시다.”

김정일 앞에서 분노를 보일 수 없었던 경환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김정일과의 술자리를 이어갔다. 새벽이 훨씬 지나서 끝난 면담은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났지만, 집무실을 떠나는 경환은 조금도 취해있지 않았다.

“장군님, 이경환에게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두 집안이 싸우면 결국 이익을 보는 건 우리 아닌가? 그나저나 그 아새끼들 책략이 성공했다면, 우리 조선은 불바다가 될 수도 있었어. 이경환이가 평양을 떠나면 잔당들을 일거에 쓸어버려야겠어.”

김정일은 술 대용으로 마신 우롱차를 바닥에 버리고는 양주를 따라 입에 부었다. 3대 세습에 걸림돌이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특히 공공연히 3대 세습에 불만을 표한 이제강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제거한 후, 군 지휘권을 분산하기 위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도 좌천시켰다. 그러나 군부의 반발이 예상외로 심각해지면서 외세와 결탁해 이번 일을 계획할 줄은 김정일도 알지 못했었다. 장성택과 이영호 총참모장이 사전 모의를 발각하지 못했다면 3대 세습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리도 지탱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김정일은 마시던 술잔을 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경환은 청와대와 백악관에 방북결과를 설명하고 서둘러 휴스턴에 돌아와 있었다. 경환의 방북 후, 북한은 미국과의 단독회담을 희망한다는 성명과 함께 6자회담에 성의를 보이겠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 경환의 방북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돌아온 경환은 외부행사를 모두 취소한 채, SHJ타운 밖을 나서지 않고 있었다.

“회장님, 북한에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김일철과 관련된 군부 인사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산발적인 교전도 있었던 거로 파악됩니다.”

경환은 카일의 보고를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경환은 평양에서 돌아온 후 SHJ시큐리티의 일부 자원을 북한으로 돌려 북한의 내부정보 수집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김정일 전달한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부회장님, SHJ테크놀러지도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결과물은 언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양자 텔레포테이션 실험이 성공하면서, 양자컴퓨터 개발에 속도가 붙었습니다. 내년 중엔 시제품을 확인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실험의 성공에 따른 인공지능 개발 부분도 상당한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시제품이 나오면 상용화를 빠르게 추진해 보세요. 그리고 핵융합실험로 건설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나요?”

“우선 상용화를 위한 시판용과 내부용으로 분리해 연구와 검토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호주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만큼, 프랑스에 건설 중인 ITER보다는 빠르게 완공할 수 있을 겁니다.”

황태수의 답변에도 경환의 굳은 얼굴을 풀리지 않았다. 방북 후 달라진 경환의 모습은 카일뿐만 아니라, 황태수와 린다까지도 긴장시켰다. 김정일과의 면담의 내용은 오로지 집무실에 모인 세 사람 외엔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호주에 건설 중인 핵융합실험로 사업에 중국의 공동 참여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기븐스 사장에게 호주정부를 설득하라고 지시하십시오.”

“회장님, 그래도 갑자기 중국과 손을 잡는 건 너무 위험성이 큽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경환의 결정에 황태수의 반발은 예상된 행동이었다. 그러나 린다의 생각은 달랐다. 황태수가 당혹한 표정을 짓는 거에 비해 린다의 표정은 차분했다.

“중국시장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프리카에서조차 우리에게 당했다고 생각한 중국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미는 거라고 봅니다. 막힌 우리의 상황을 풀기 위해서 회장님은 큰 결단을 내렸다고 봅니다.”

“쿡 사장!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중국이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고는 하지만, 그 미소 뒤엔 보이지 않는 칼이 숨겨있다는 걸 잊은 겁니까?”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경환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언쟁을 중단시켰다. 경환도 중국이 내민 손을 잡는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경환은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북한에서 제공한 내용이 사실로 판명된 만큼, 우리의 판단이 늦어질수록 SHJ를 분해해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자들의 공세는 막기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생각을 모르진 않지만, 핵심을 가린다면 중국도 쉽게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경환은 카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수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지만, 경환은 황태수를 설득하기보다 현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다.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북한은 3대 세습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김인철을 좌천시키면서 군부의 반발을 가져왔다는 게 이번 사건의 시초입니다. 김인철을 위시한 군부 반 세력들은 어려운 쿠데타보단, 미국 특사인 회장님의 암살을 통해 미국과 서방세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 내부가 스스로 붕괴해 3대 세습을 막는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정보를 친중파인 장성택에 제공해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다 아는 얘기 아닙니까? 그걸 미끼로 중국이 우리와의 기술제휴와 핵융합에너지 개발에 공동참여를 원한다는 건, 너무 많은 것을 주는 겁니다.”

경환은 씁쓸한 표정으로 황태수를 바라보았다. 경환의 생명보다도 SHJ가 지켜야 할 게 크다는 표현에 황태수는 아차 싶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실수를 통감해 고개를 숙인 황태수를 뒤로하고 카일은 말을 이어갔다.

“우린 북한의 집요한 초청이 북한정부의 뜻이라고 판단했지만, 사실은 회장님의 방북을 제안한 게 CIA 일본지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 내각정보조사실이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회장님의 방북을 통해 지원과 막힌 북미 상황을 풀라는 조언을 하고, 물밑에선 막대한 현금과 정권보장을 내세워 김인철에 암살을 제시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MI6가 접근해 북한에 변고가 생기면 정권을 바꾸는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북한에 대한 기득권을 일부 인정하겠다는 제시를 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결국 두 마리의 토끼를 함께 잡겠다는 얘기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SHJ의 지배구조가 회장님께 몰려있는 만큼, 회장님의 변고로 SHJ를 무장해제 시킨다는 생각과 이를 기회로 무력 침공, 혹은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의 명분을 얻겠다는 계획으로 판단합니다. 결국, 대체에너지와 우주개발, 거기에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의 상용화가 되기 전에 SHJ를 통제권에 두려는 계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카일의 보고가 끝이 났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과의 거래에 반발하던 황태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담담하게 카일의 보고를 듣던 경환이 몸을 세웠다.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던 게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중국이 우리와 손을 잡는다 해도 가랑비는 피할 수 있겠지만, 퍼붓는 소나기를 피할 정도는 되지 못할 겁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처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합시다. 이번 중국과의 합작을 시작으로 SHJ시큐리티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방어시스템을 가동하세요. 그 전에 우리 내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SHJ구글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현재 SHJ테크놀러지의 기술을 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환은 착잡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배신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안타까움에 많은 기회를 주려 노력했지만, 이젠 곪은 상처를 도려내야 할 시기였다.

“우리가 공권력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만큼, 적의 적을 아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당분간 부회장님과 린다는 SHJ 경영을 맡아 SHJ구글의 IPO를 추진해 시선을 분산해 주시고, 저는 SHJ시큐리티와 함께 위기 상황을 풀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SHJ구글의 곪은 고름부터 짜냅시다.”

경환의 비장함에 황태수도 자신의 의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SHJ였지만, 그 성장을 시기하고 통제하려는 세력은 SHJ의 목을 조르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경환의 지시를 받아 급히 사라진 카일을 경환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