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7화 (214/264)
  • #237

    다시 사는 인생 - 237

    앤은 오늘도 이른 시간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아직 직원들이 출근하려면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연구로 생긴 불면증은 그녀를 쉽게 잠들지 못하게 했다. 푸른 눈과 금발의 소유자인 앤은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의 미모였지만, 그녀는 연애나 결혼엔 더는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SHJ테크놀러지가 설립된 지도, 이미 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그녀를 만족하게 할만한 연구결과물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SHJ유니버스가 유니버스 1호와 2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할 때부터 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어? 정우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메이어 사장님, 일찍 출근하셨네요. 양자 텔레포테이션 실험에 필요한 이론을 다시 검토하고 있었어요.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양자컴퓨터 개발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될 거예요. 그리고 광통신에도 적용할 수 있고요. 적어도 일본 도쿄대학보단 빨라야 하지 않겠어요?”

    정우의 합류도 양자컴퓨터 개발은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연구원 모두 정우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도 천체물리학 전공이 정우가 양자물리학까지 섭렵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우의 합류는 양자컴퓨터 개발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텔레포테이션 실현에 SHJ가 일본보다 한발 앞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미완전한 형태의 텔레포테이션 기술은 그동안 많이 발표됐지만, 완전한 형태의 양자 텔레포테이션은 처음이었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컴퓨터 처리능력과 통신용량을 비약적으로 향상할 수 있어, 앤도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앤이라고 불러 주렴.”

    “그럴게요, 앤. 피곤해 보이는데, 커피 한잔 마시세요.”

    정우가 따라주는 커피를 받아든 앤은 정우의 자리가 어지럽혀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우는 일찍 출근한 게 아니라, 연구소를 떠난 적이 없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앤, 조급해한다고 없는 기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그동안의 연구를 되짚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정우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남들은 다들 성과를 보이고 있는데 우리만 뒤떨어지는 거 같아 내가 너무 초조했나 봐.”

    정우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경환을 닮아 185CM가 넘는 키에 수정을 닮아 선이 굵은 외모인 정우는 30대 중반인 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였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앤은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정우에게 하소연했는지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뒤떨어지다뇨? 이미 SHJ테크놀러지의 딥러닝 기술은 다른 곳에 비해 적어도 3년은 앞섰고, 재작년부터 엘리시움에 장착한 ‘소냐’도 우리의 딥러닝 기술이 적용된 건데요. 소냐 덕에 엘리시움의 매출과 점유율이 급성장하고 로열티도 제법 많이 들어오잖아요.”

    앤은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개발 목표를 두고 인공신경망을 이용한 인공지능이 성공하기 위해선 실효성 있는 학습방법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1980년대 연구가 시작된 딥러닝 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딥러닝은 데이터처리에 용이한 심화신경망 알고리즘이 활용되지만, 높은 정확도에 비해 느린 속도가 걸림돌이 되어 실무에 적용하기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이 내린 기술이었다. 앤은 경환의 지원에 기업을 인수하고 대학 연구진들을 고용하며 새로운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알고리즘을 뒷받침해 줄 하드웨어를 SHJ구글과 공동으로 개발했다. 이렇게 탄생한 강력한 GPU(그래픽 칩셋)는 몇 주 걸리던 작업을 며칠로 줄이는 효과를 보였다. 더욱이 SHJ구글과 SHJ퀄컴과 합작으로 개발한 슈퍼컴퓨터는 인공지능 생태계를 조성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용화시키기 위해선 아직은 갈길이 멀기만 하다는 게 앤의 고민이었다.

    “SHJ테크놀러지의 목표는 소냐 같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거든.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한데, 우리를 추격하는 기업들은 많고, 내가 고민이 좀 많아.”

    “한국 속담에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말이 있어요. 소냐 같은 기술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목표도 이뤄지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 건강부터 먼저 챙기세요. 회장님은 인공지능이나 양자컴퓨터보다는 앤의 건강을 먼저 챙기시는 거 같으니까요.”

    “그래, 고마워.”

    앤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우의 말이 고맙긴 했지만, 자신의 성격상 건강보단 연구를 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경환에게 건강에 신경 쓰라는 질책 아닌 질책을 자주 받긴 했지만, 앤은 트레이너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연구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번 양자 텔레포테이션 실험이 성공하면 양자컴퓨터 시제품을 일 년 안으로 선보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슈퍼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고, 인공지능 개발도 속도가 붙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도 이번 실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꼭 성공하게 될 테니까.”

    정우의 자신감에 찬 목소리에 앤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우가 나이가 좀 많았으면 좋았었겠다는 생각에 앤의 얼굴이 붉어지며 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우와 제니퍼와의 관계는 SHJ타운을 넘어 미국 전체에 알려졌고 자신은 둘 사이를 넘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앤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앤, 일찍 출근했네. 정우 너도 오랜만이다.”

    “래리, 어쩐 일이에요? 새벽부터 여길 다 오고.”

    “잠깐 앤과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급작스런 래리의 출현에 앤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손을 들어 래리와 인사를 나눈 정우는 다시 실험자료에 고개를 파묻었고, 앤은 서둘러 래리와 함께 사무실로 향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연구도 좋지만, 쉬는 것도 일의 연장이야.”

    “괜히 마음만 바쁘네요. 생각했던 거만큼 속도가 나질 않아, 스트레스가 쌓였나 봐요.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생전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사람이.”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 개발에 속도가 붙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앤도 엄살이 많이 늘었네. 실험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앤은 래리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자신을 SHJ로 이끈 사람이 래리였고, SHJ테크놀러지 사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래리의 지원이 없고서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우가 합류한 후로 개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어요. 정우가 그동안 연구한 양자물리학과 양자컴퓨터 자료를 확인했을 때, 정말 심장이 다 뛰더라고요. 회장님도 대단하지만, 정우도 그에 못지않을 거 같아요.”

    “정우가 대단하긴 하지. 참, 그 자료 나도 좀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네.”

    묘한 분위기가 사무실을 감싸기 시작했다. 앤은 래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너그러운 인상의 래리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는 어색함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었다. 아무리 래리라 해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SHJ테크놀러지에서 연구하는 모든 자료는 보안서류로 묶여 있어요. 사장인 저도 개인적으로 볼 수 없는 자료들이기도 하고요. 며칠 전엔 세르게이가 와서 묻더니, 무슨 일 있는 건가요?”

    “세, 세르게이가 왔었다고?”

    “그래요. 래리와 같은 요청을 하더군요. 물론 같은 이유를 들어 거절하긴 했지만요.”

    “잘 알았어. 수고하고, 언제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나 먼저 일어날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래리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앤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 래리와 세르게이 사이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뒤돌아선 래리를 잡을 수는 없었다. 차가운 한기가 잠시 앤의 사무실을 감싸더니 래리를 따라 사라져갔다.

    다음날, 홍석형과 진행된 협상은 원론에서 머물며 나아가지 못했다. 그건 홍석형 자체가 결정권을 갖고 있지 못한 인물인 탓도 있었지만, 경환도 협상에 특별한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과의 면담은 아무런 이유 없이 지연되고 있었고, 경환은 일정대로 출국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려 더는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회장님, 북한 정부에서 준비한 만찬에 참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불러 놓고, 만나주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 싸움을 벌이겠다는 수작에 넘어가 줄 생각 없습니다. 저는 만찬에 불참할 테니 잭과 코이치만 참석하세요. 관광하러 온 사람도 아니고, 저는 숙소에서 쉬겠습니다.”

    아직 존 매케인의 친서도 전달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경환은 친서를 먼저 달라는 홍석형의 요청을 일언지하로 거절해 버렸다. 아쉬운 건 북한정부지 SHJ나 자신이 아쉬운 건 결코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잭과 코이치가 만찬을 위해 떠나고 숙소에 돌아온 경환은 방북 이후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SHJ의 상황을 풀기 위해 고심을 하고 있었다.

    “북한 보위부와 경호원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마도 도청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는 불만을 보이는 거 같습니다.”

    “놔두십시오.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 없습니다. 최고 통수권자의 신변안전각서를 받은 만큼 저들로 함부로 날뛰지는 못할 테니까요.”

    긴장한 알에 비해 경환은 태연했다. 경환의 경호팀 능력이야 백악관 경호팀 이상이라고 자평하고 있었지만, 여긴 북한의 중심인 평양이었다. 북한이 마음먹고 경환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방법이 없다는 이유가 오히려 경환을 태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준 만큼 공은 북한 정부에 넘겼다. 이 정도에도 북한 정부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경환은 미련 없이 평양을 떠날 생각이었다.

    ‘똑. 똑.’

    느긋하게 실시간으로 방영하는 한국방송을 보고 있던 경환은 노크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알이 방문을 열자, 군복 차림의 사내가 경환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며 다가왔다.

    “이경환 회장 선생을 모시러 왔습니다. 옷을 입어 주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예정되지 않은 일정인데 설명을 부탁하겠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알의 대신해 김혜원이 급히 사내에게 설명을 부탁했지만,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는 이경환 회장 선생을 모시라는 명령만 받았습니다. 그 이상은 모릅니다. 채비를 갖추십시오.”

    “무례 하군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신다면, 회장님은 움직일 수 없으십니다.”

    사내의 강압적인 태도에도 김혜원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되받아쳤다. 사내의 날카로운 시선이 김혜원의 눈을 향했지만, 김혜원은 사내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런 김혜원의 자세에 사내의 당혹감이 얼굴에 서렸다.

    “김혜원 실장, 그만합시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옷을 갈아입을 동안 준비를 해 주세요.”

    “회장님, 잭과 코이치도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찬은 만찬대로 진행하라고 하십시오. 우리만 조용히 갔다 옵시다.”

    경환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 사이에도 김혜원과 사내의 기 싸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간단히 옷을 갈아입은 경환은 미리 준비된 선물과 친서를 챙긴 후에 백화원 초대소에 준비된 리무진에 탑승했다. 이전보다 많아진 호위총국 병사들의 경호와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평양에서 경환은 결코 갑이 아닌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는 평양 시내는 한가하기만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경환을 실은 차량 행렬이 지나는 곳은 행인들조차 볼 수 없었다. 차량은 능라도 경기장을 지나 만수대의사당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아 평양 중심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거 같았다.

    ‘회장님, 아마도 국방위원장 집무실로 향하는 거 같습니다.’

    긴장했던지 귓속말을 던지는 김혜원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고 있었다. 경환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김혜원의 어깨를 토닥여 김혜원의 긴장감을 풀어주려 했다. 김혜원의 예상이 맞았는지 삼엄한 군인들의 경계를 지나 마침내 엄청난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도착해 있었다.

    “이 선생. 어서 오십시오. 장군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위원장님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국방위원장님을 못 뵈고 떠날 줄 알았는데, 다행이군요.”

    “하하하, 장군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만남을 연기하려 했지만, 장군님의 특별한 배려로 오늘 만남이 성사된 겁니다. 너무 아쉬워 마십시오.”

    계단 위에서 경환을 맞이하는 장성택의 모습에 경환은 뼈있는 농담을 던져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지만, 장성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경환을 맞이해 주었다. 김정일과의 면담에 경호원을 대동하거나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사전 협의에 따라 경환은 알과 김혜원만 대동한 채, 장성택을 따라 집무실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