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다시 사는 인생 - 236
경환의 전용기가 내려앉은 평양의 순안공항은 한마디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백악관의 대북 특사자격이란 타이틀이 경환에겐 큰 의미는 없었지만, 경환을 바라보는 동북아시아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의례 일본을 먼저 찾아 이번 방북의 의미를 설명하는 게 관례였지만, 경환은 직접 평양을 향해 일본과 한국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한국정부의 당혹함이 훨씬 컸는데, 경환은 평양방문 후, 한국에 그 결과를 설명하겠다는 말로 한국정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이경환 회장 선생의 평양 방문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석형 경제담당 비서님.”
전용기에서 내린 경환을 환영하던 홍석형이 움찔거렸다. 북한의 실세들에 대한 정보는 SHJ시큐리티와 NSA를 통해 전달받았고, 그 자료엔 홍석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차례 경환의 방북을 요청한 북한정부는 다소 격이 떨어지는 홍석형을 영접인원으로 파견해 경환의 간을 볼 생각이었지만, 경환은 북한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만큼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북한정부를 당혹감에 빠트렸다.
“하하하, 이 선생께서는 참으로 담이 크신 분이시군요.”
홍석형의 뒤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이 경환의 곁에 붙으려 하자, 경환이 손을 들어 알을 제지했다. 훤칠한 키에 안경 뒤에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고 있는 사내가 악수를 청하며 경환의 앞에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북측의 공기는 미국이나 남측과 비교해 훨씬 좋군요. 장성택 국방 부위원장님.”
장성택의 손을 맞잡은 경환은 묘한 웃음을 그에게 지어 보였다. 국방위원장인 김정일의 뒤를 이어 북한의 실세로 등장한 장성택의 거만함에 경환은 동문서답으로 화답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인생이듯이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거만한 장성택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경환은 궁금했다. 화동들이 건네주는 꽃다발을 받아든 경환이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동원된 북한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며 북한에서 준비한 리무진에 탑승했다. 특이하게도 장성택이 경환의 리무진에 올라타 경호팀을 긴장시켰지만, 경환은 대수롭지 않게 그의 동승을 받아들였다.
“평양을 방문한 소감이 어떠십니까?”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고난의 행군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들었는데, 평양은 그래도 좀 나은 거 같아 다행입니다.”
계속되는 빈정거림에 배알이 꼴린 경환이 우회적인 표현으로 장성택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장성택의 표정은 전혀 변하질 않았다. 북한이라는 특수한 곳에서 정치권력을 틀어쥘 정도의 지략가인 장성택은 경환의 도발을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호위총국이 인도로 차량은 평양 시내가 아닌 북동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가 묵을 곳이 고려호텔이 아닌가 보군요.”
“하하하, 장군님께서는 이 선생 일행을 국빈으로 대우하라 지시하셨습니다. 곧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할 겁니다.”
차량이 울창한 숲을 통과하자, 대형 인공호수를 끼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백화원 초대소가 경환의 시야에 들어왔다. 북한의 영빈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경환의 방북을 국빈급에 맞춰 대우하겠다는 생색을 통해 경환의 감동을 유발하려 했다.
“이곳은 총 3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1각은 국가원수가 묵는 곳이지요. 이 선생은 1각에서 묵으시게 될 겁니다. 수행원들은 2각에 묵으시게 될 거고요.”
“국방위원장님께 감사함을 전해 주십시오.”
“여독을 풀고 계십시오. 저녁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초대소 직원들의 안내에 경환은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유럽식 풍의 스위트룸은 규모나 시설이 흠잡을 곳 없이 화려했다. 경환을 안내하는 초대소 직원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환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알이 시선을 경호팀에게 돌리자, 경호팀들이 도청 방지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회장님, 조치를 마쳤습니다.”
“잭과 코이치를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곳은 눈들이 많으니, 대화에 신중을 기하시고요.”
경환은 무겁게 조이는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SHJ시큐리티의 힘이 발휘될 수 없는 곳이다 보니 경환도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일의 건강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고 후계자인 김정은은 이빨을 감추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는 돈도 없이 사지로 자신을 몰아넣은 존 매케인을 원망해 봤자, 이미 자신은 평양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똑, 똑.’
홍석형이 주최한 만찬에서 돌아온 경환은 침대에 몸을 눕힐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와인으로 끝날 줄 알았던 만찬은 위스키가 올려지면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홍석형을 비롯한 북한의 인사들은 작정한 듯 경환에게 술을 권했고, 가랑비에 옷 젖는 거처럼 경환도 한계치에 도달했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홍석형이 주도한 회의는 별 성과 없이 원론 수준의 대화만 오갈 뿐이었다. 장성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언제 김정일과의 만남이 성사될지는 누구도 확인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회장님, 몸을 추스를 수 있으시겠습니까? 장성택이 찾아왔습니다.”
“쉬지도 못하게 하니, 웃기는 군상이군요. 그렇다고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는 없죠. 들여 보내세요.”
얼굴을 찬물에 담근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와이셔츠 바람으로 응접실 문을 연 경환은 오전과는 다른 장성택의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디서 술을 마시고 왔는지 장성택의 모습도 경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십니까?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내일 오전에 만나도 괜찮을 텐데요.”
“SHJ시큐리티의 능력이 평양에서도 발휘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보위부 애들이 이 방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해 난리가 났더군요.”
경환은 아무런 대꾸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도청시스템을 무력화했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게 아니란 건 뻔했다.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아시겠지만, 이 방에서 나누는 얘기가 밖으로 흘러나가진 못합니다.”
“이 선생께서 고난의 행군을 거론하셨지요? 80년대 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게 큰 타격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95년 대홍수는 그나마 남아있던 조선의 경제를 송두리째 붕괴시켰고요. 중국과 남측의 지원으로 간간이 버티고 있었는데, 남측의 정권이 바뀌면서 그런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술에 취해서인지 장성택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당장 반동분자로 몰려도 변명할 수조차 없는 말이 장성택의 입에서 나오자, 경환은 그 의도가 궁금했다. 그러나 암살과 숙청을 통해 북한의 실세로 떠오른 장성택의 발언을 백 프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영원한 우방인 중국이 있지 않습니까? 부위원장님 주도로 북측의 자원과 소중한 땅이 헐값에 중국에 팔리고 있는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이 선생은 날 매국노로 보시나 봅니다.”
장성택의 헛웃음에도 경환의 싸늘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은 장성택과의 밀월 관계를 통해 북한의 지하자원을 싹쓸이하고 있었고, 개발을 미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황금평과 위화도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손에 넣었다. 친중국 노선을 걷는 장성택을 경환은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자. 되놈은 되 나오고, 일본놈은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 나도 이 말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조선의 상황에서 중국마저 등을 돌린다면 우린 절벽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조만식 선생을 죽인 것도 북측 아닙니까? 부위원장님의 철학에 대해선 잘 들었습니다. 이젠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미국의 특사 자격이었지만, 경환은 화려한 외교수사로 장성택의 기분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존 매케인의 친서를 전달하고 지긋지긋한 북한땅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 선생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측과의 국지전을 통해 인민들을 단결시키자는 군부 강경파의 계획을 막은 사람이 접니다. 내가 비록 친중국파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남측과 SHJ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경환은 장성택을 노려보았다. 장성택의 말이 진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북한의 정치 특성상 이인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장성택이라 하더라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은 존재했고, 북한에서의 이인자는 토사구팽,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어떤 지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SHJ는 대현그룹처럼 쉬운 기업이 아니란 걸 아셔야 할 겁니다.”
“비료나 식량을 지원해 달란 소리는 안 하겠습니다. 이 선생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남측 서산과 같은 규모의 SHJ타운을 우리 조선에도 건설해 달라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겁니다.”
경환은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식량이나 비료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면, 단절된 6자회담 재개를 조건으로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SHJ타운을 건설해 달라는 장성택의 제안은 생각해볼 가치가 전혀 없었다. 통제를 이유로 중국도 생각하지 않는 경환에게 SHJ타운을 건설해 북한에 헌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저는 미국과 북측의 막힌 대화창구를 열기 위해 온 것이지, SHJ타운을 건설할 목적으로 온 게 아니란 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다른 국가에서 SHJ에 제공하는 자치권을 똑같이 보장하겠습니다.”
“자치권은 쌍방 신뢰가 쌓인 후에나 가능한 겁니다. SHJ와 북측과는 아직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신 제안은 국방위원장의 뜻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장군님께서도 SHJ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유치해, 조선의 경제를 부흥시키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경환은 자신이 둔 자충수를 진심으로 후회했다. 아무리 SHJ시큐리티의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폐쇄국가인 북한에서의 활동은 그만큼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고, 혹시라도 SHJ타운이 북한에 건설되더라도 북한군의 공세를 막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도둑놈 심보라는 생각에 경환은 어이가 없는지 장성택을 의식하지 않고 연신 헛웃음을 던졌다.
“내일로 예정된 국방위원장님과의 회담을 이상 없이 진행해 주십시오. 저희는 일정 변경 없이 모레 아침 출국하게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쉬겠습니다.”
대북사업은 양날의 검이었다. 양질의 노동력을 싼 임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손익상의 계산과 한민족이라는 동포애의 발호로 수많은 개인과 기업이 북한진출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경환의 생각은 달랐다. 정치적 논리에 따라 북한 정부에 이용되는 대북사업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특히, 2년 후면 목이 떨어지는 장성택과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간나새끼, 다른 남조선 놈들하곤 질이 다르구만.’
경환이 머무는 숙소의 불빛이 꺼지는 걸 바라보던 장성택은 좀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김정일과의 면담을 하루 연장해 애간장을 태우려는 계획은 경환의 선수에 막혀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SHJ를 이용해 비자금을 만들려던 계획도 처음부터 수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아무런 소득 없이 백화원 초대소를 벗어나는 장성택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부회장님. 일 년 전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뒤를 밟고 있었습니다.”
황태수는 카일의 보고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토록 강했던 SHJ의 내부에 틈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넘길 수 있는 흠집이 결국은 댐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태수는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보 유출은 심각한 상황입니까?”
“SHJ구글과 SHJ유니버스의 신기술 일부가 유출된 거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SHJ테크놀러지의 기술을 입수하려는 정황이 포착된 상태지만, 보안팀을 뚫지는 못할 겁니다.”
“일 년이나 되었다면서, 이 지경까지 놔둔 이유가 뭡니까? 회장님도 알고 계십니까?”
“상황을 지켜만 보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유출된 정보도 심각한 수준의 것은 아니고요. 그러나 제가 부회장님께 보고드리는 이유는 더는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카일은 황태수를 찾기 전, 평양을 향하는 경환에게 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황태수의 의견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은 카일은 황태수를 설득해 SHJ 내부에 기생하는 고름을 짜내고 싶었다. 황태수는 여전히 이런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증거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부회장님, 요새 들어 우리에 대한 정보가 평소의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또한, CIA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요. 제 생각이지만, 이번 일은 결코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더 늦기 전에 발본색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얘긴 보고를 받아 알고 있습니다. 저도 회장님의 의견과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역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을 거 같군요.”
“저, 그러나.”
“적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손에 의해 상황을 만들어 갈 계획을 수립해 보세요. 우리 통제하에 있어야 합니다.”
카일이 집무실을 벗어난 후에도 황태수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배신에 상처받았을 경환을 생각하자, 황태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