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5화 (212/264)
  • #235

    다시 사는 인생 - 235

    2011년 새해를 맞이한 SHJ는 경환의 방한과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SHJ시큐리티는 휴스턴과 서산의 모든 자원을 이용하여 대북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이 활동엔 제2의 정보조직이라 할 수 있는 호주의 SHJ시큐리티도 처음 실무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런 긴장감은 경환의 저택도 다르지 않았다. 정우는 연구소에 남아달라는 마커스 브라운과 라이스 대학의 요청을 거절하고, SHJ테크놀러지에서 박사과정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정우의 출현으로 막혀있던 연구에 속도가 붙기 시작해 SHJ테크놀러지를 맡은 앤의 큰 환영을 받고 있었다. 희수는 경환을 설득, 조기졸업을 위해 고등학교 과정을 속성으로 밟아가고 있었다.

    “부회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박화수 이사에겐 정말 미안하군요.”

    오랜 고민 끝에 박화수는 경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SHJ홀딩스는 재빠르게 박화수의 지분 2%를 20억 불에 매입하고, 세금을 비롯한 제반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 원화 2조 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은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로펌을 통해 합법적인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대신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자신이 대권에 도전해 성공하게 된다면, 자신의 부탁 하나를 조건 없이 받아달라고 했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내용에 대해선 말하지 않더군요.”

    매번 짐만 지운 박화수였기에, 오히려 박화수가 내민 조건으로 미안함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때 제가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해도, 박화수 이사와 한 약속은 부회장님이 책임지고 이행하세요. 제 유언장을 수정해야 하겠군요. 하하하.”

    “회, 회장님.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 일이란 게, 한 시간 후도 예상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고 농담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당황하는 황태수를 향해 경환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태수가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회귀 전 자신의 마지막은 2015년이었고, 겨우 4년만 남겨둔 상태였다. 정해진 수명이 92살이라고는 하지만, 경환은 앞으로 4년이 그냥 지나가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뜩문뜩 뒷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이 알던 미래가 달라지고 있었고, 서두르는 희수의 행동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설령, 자신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해도, 벽에 똥칠할 때까지 SHJ의 주인행세를 할 생각이 없었다. 경환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급히 화제를 바꿨다.

    “중국과 일본이 잭의 제안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일이지만, 일본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게 의외긴 합니다. 온전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SHJ타운의 상주인원 70%를 해외에서 수급한다는 조건이 중국을 자극한 거 같습니다.”

    “그렇겠죠. 서구열강에 침략당했던 기억을 떠올렸을 테니까요.”

    잭은 중국정부의 제안을 역으로 받아쳐 중국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은 중국정부가 받아들인다 해도, 상주인원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수급한다는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해외인력으로 SHJ타운이 채워진다면 통제권을 획득하겠다는 중국정부의 생각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에 경환은 묘한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노다 요시히코가 급했나 보군요. 제안을 받아들였다니 어쩔 수 없네요. 오사카 이남으로 부지 선정작업을 진행해 보세요.”

    “수도인 도쿄를 놔두고 오사카로요?”

    황태수는 경환의 지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관공서가 밀집한 도쿄를 배제하고 오사카를 선택했을 때의 이해득실을 따져봐야만 했다. 경환은 경환 나름대로 마지막 운을 일본에 걸어보고 싶었다. 이것마저 오류로 나타난다면 SHJ의 미래를 위해 심각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지역은 어떻습니까?”

    “중동은 근무환경을 취합했을 때, 사우디와 터키가 가장 유력합니다. 사우디는 아람코와 SHJ엔지니어링의 합작을 들어 강력하게 유치를 희망하고 있지만, 실무진의 의견은 터키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케냐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케냐로 선정된다면, 중국이 또 한 번 쓰러지겠군요.”

    “자원외교를 펼치고 있는 중국이 자금을 무한대로 풀고 있습니다. 특히, 50억 불의 무상지원을 약속한 케냐가 떨어져 나간다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겠죠.”

    석유와 가스, 희토류의 매장이 확인된 케냐는 놓칠 수는 없었다. SHJ는 노르웨이의 STATOIL과 합작으로 케냐의 석유와 가스를 시추하는 조건으로 단일 최대규모의 지열발전소 건설, 항구인 몸바사와 서부 국경도시 말라바를 잇는 800KM의 철도건설 투자를 약속했다. 아울러 SHJ아프리카본사 임무를 수행할 SHJ타운이라는 큰 떡밥도 같이 제안받은 케냐정부는 중국과 SHJ라는 양손의 떡을 쥐고 고민했지만, 고용창출과 기술력 증대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SHJ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중국정부는 불편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SHJ와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서서히 그 틈을 더욱 벌어지게 하고 있었다.

    “터키와 케냐, 일본과 싱가포르가 엮어진다면 1차 계획은 완성되는 거겠군요.”

    “그렇습니다. 2차 계획은 아무래도 제가 담당하진 못할 거 같습니다.”

    경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작년부터 퇴임의사를 내비치기 시작한 황태수의 의견을 경환은 극구 외면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회장님은 제 뒤를 받쳐 주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좋은 모습으로 저와 부회장님이 같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싶군요. 그때까진 다른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동안 소홀했던 마누라와 여행도 하면서, 손주들 재롱떠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경환은 애써 황태수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해 버렸다. 아직은 황태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황태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황태수를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황태수를 붙들고 있을 수만도 없다는 게 경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 휴스턴을 잘 부탁합니다. 목적이 없는 방북이니 그리 오래 지체하진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태수는 보채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세월에 장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1차 계획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남을 정력을 쏟아부어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방북을 위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전용기를 향해 출발했다.

    “래리, 뭐하고 있냐?”

    SHJ구글의 이사이면서도 연구부문 총괄사장을 맡은 래리의 사무실에 세르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SHJ구글은 13년이란 짧은 기간에 전 세계의 IT업계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SHJ구글에서 SHJ유니버스와 SHJ테크놀러지가 분사되면서 SHJ구글의 기술력은 이미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연구서류를 들추던 래리는 평소와 다르게 눈동자가 흔들리는 세르게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일이야? 너 지금 한창 바쁠 때 아니야?”

    “그냥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너라도 보면 좀 풀리지 않을까 해서 왔어.”

    세르게이는 말릴 틈도 없이 래리의 책상 서랍을 열고는 양주병을 꺼내 급히 입에 들이부었다. 심상치 않은 세르게이의 행동에 래리는 뭔가 일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세르게이가 건네는 양주병을 받아 들었다.

    “래리, 넌 우리 생활에 만족하냐? 우리가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라는 생각 안 해봤어?”

    “말을 좀 풀어서 얘기해봐. 누구보다도 이 생활에 만족한 건 너야 세르게이.”

    “젠장, 모르겠어. 우리도 이미 40대 중반이야. 난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통 모르겠어. 그나저나 제임스는 왜 SHJ구글의 상장을 반대하는 거냐고. 기업가치만 보더라도 SHJ퀄컴은 능가하잖아.”

    래리의 미간이 급히 좁혀졌다. 겨우 돈 때문에 그러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5천만 불이란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었지만, 매년 1억 불을 넘게 받는 배당금에 비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었다. 세르게이의 말을 이해 못 한 건 아니었다. SHJ의 기업가치를 5천억 불만 잡아도 SHJ구글의 지분 10%를 가지고 있는 자신과 세르게이는 5백억 불의 재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계 부자 순위를 바꿀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경환은 SHJ구글의 IPO에 극구 반대하고 있었다.

    “SHJ구글을 시작할 때부터 제임스는 상장은 없을 거란 말을 분명히 했잖아. 그건 너와 나를 포함해서 에릭도 동의한 부분이고.”

    “15년이 흘렀으면 바뀔 때도 됐잖아. 제임스가 언제까지 우리 뒤를 봐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우리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래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흔들리던 세르게이의 눈동자는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기 시작했다. 래리는 무엇인가 세르게이를 자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너희 둘 뭐가 그리 심각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감정이 격해서 실수한 거니, 래리 너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김혜리의 등쌀에 하소연을 하러 래리를 찾은 승연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싸늘한 분위기에 어정쩡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사무실을 급히 빠져나가는 세르게이의 뒷모습을 래리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SHJ그룹 사옥을 건설할 때부터 경환의 지하공간에 심혈을 기울였다. SHJ시큐리티 지휘부와 보안팀이 위치한 지하공간은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지만, 이 구역은 SHJ의 핵심 경영진 이외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공간이었다. 보안 책임자인 케빈 미트닉은 며칠 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익사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5백 명이 넘는 정보수집 인원과 분석 요원들이 위성과 네트워크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SHJ테크놀러지에서 개발하는 인공지능 정보수집 체계를 케빈은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케빈, 잠깐 얘기 좀 하지.”

    샤워를 언제 했는지, 지하를 벗어나 태양 빛을 쏘인 지가 기억이 가물거리는 케빈을 카일이 불러 세웠다.

    “마침 잘 됐군요. 저도 좀 쉴 생각이었습니다.”

    카일과 함께 자리를 뜬 사이에도 대형 모니터로 수없는 화면이 실시간 전송되고 있었고,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케빈의 귓가에 자장가처럼 들렸다. 위스키를 가득 채운 카일이 잔을 케빈에게 건네자, 케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 삼켰다.

    “캬, 좋군요. 살 거 같습니다.”

    “바쁜 사람 오래 잡아 둘 수도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CIA 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첩보가 있는데, 우리와 연관된 게 아닌지 걱정이 돼서 말이야. 뭐, 걸리는 거라도 없나?”

    “NSA가 잠잠하니, 이젠 CIA가 머리 아프게 만드네요.”

    서서히 레임덕을 보이는 존 매케인의 통제력은 급히 꺾이고 있었다. 자신의 수하인 제이 존슨이 수장으로 있는 NSA는 정권 초기부터 SHJ시큐리티와의 소모전을 중단하고 협력체제로 전환한 상태였다. 카일은 공화당 매파인 마이클 헤이든 CIA 국장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동안 존 매케인의 위세에 눌려 복지부동하고 있었지만, 카일은 네오콘 계열인 그가 물밑에서 발톱을 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MI6(영국 해외정보부)와 BND(독일 해외정보부)와의 회동이 잦아졌다는 거 외엔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저도 이 문제가 신경 쓰여 모든 자원을 집중했는데, 결론은 중동지역에서 자생하는 테러조직을 분쇄하기 위한 사전 모임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 CIA 정도면 우리의 감청시스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좀 더 깊숙이 파 보게.”

    “그렇게 해 보죠.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보가 요새 들어 두 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정보를 분석하느라 인원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걸 보십시오.”

    케빈은 분석이 완료된 특급 보안문서를 책상에 펼쳤다. 여러 장의 사진 속에는 스위스 생모리츠의 수브레따 하우스를 나서는 인물의 사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워낙 보안이 잘 되어 있어 감청엔 실패했습니다만, 여기에 참석한 인물 중, 한 사람은 확인되었습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실체를 확인하니 허탈하군.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계속 분석을 진행하고 빌 게이츠는 집중 마크하고 있겠지?“

    “빌 게이츠는 우리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계속 살피고는 있습니다.”

    카일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점으로 남아있던 7년 전 암살 사건의 배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시큐리티의 정보력으로도 쉽게 밝힐 수 없었던 배후의 꼬리는 심증을 토대로 밀착 감시를 하던 중, 결정적으로 빌 게이츠의 제안을 경환이 거절하면서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당했던 수모를 되갚을 생각에 카일은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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